20년도 더 된 영화가 분명 생각나지만...



90년대 말이었을 겁니다. ADSL 개통이 이제 시작하던 그 시절 영화를 보는 방법은 세 가지였는데 영화관에 가거나, TV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거나,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다 보는 거였습니다. 아마 지금 서른에서 마흔 사이에 계신 분들은 그 시절에 연체료때문에 비디오 가게 아저씨랑 얼굴 붉힌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반납하는걸 맨날 까먹고 있다가 가게 문이 닫은 날 밖에 있는 반납 수거함에 몰래 비디오를 넣어두곤 했었는데, 한 번은 하필 비디오를 빌리자 마자 수두에 걸려 2주간 꼼짝도 못 하고 집에서 똑같은 비디오만 봤습니다. 아마 20번은 족히 봤을 겁니다 폴 버호벤 감독의 '스타쉽 트루퍼스'를 말이죠.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경험입니다. 사람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두동강은 우스운 영화를 동네 초딩인 저한테 빌려준 주인 아저씨도 그렇지만, 어떻게 사람이 2주동안 쉬지 않고 똑같은 영화만 봅니까?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개봉 흥행에 참패하고 비디오로 겨우 손익분기점을 맞춘 그저 그런 영화이지만, 저에겐 인류애와 전우애, 융단폭격을 가르쳐준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며, 몇 번의 B급 후속작과 관련 게임들을 내놓던 '스타쉽 트루퍼스' IP에도 신작이라 할 미디어가 생겼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 테란 커맨드(이하 테란 커맨드)'. 무려 제가 수십번을 본 1편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전략 시뮬레이션입니다. 유명 개발사가 만든 AAA급 게임은 아니지만, 1편 영화의 빅 팬을 자처하는 저로서 이건 못 참습니다.



게임명: 스타쉽 트루퍼스: 테란 커맨드
장르명: RTS
출시일: 2022. 06. 17.
리뷰판: 1.0.0
개발사: The Artistocrats
서비스: Slitherine Ltd.
플랫폼: PC
플레이: PC

관련 링크: 메타크리틱 페이지 / 오픈크리틱 페이지


영화의 서사로 시작해 게임의 서사로 끝내다.

97년도의 영화에서, 인류의 첫 전투는 '클렌다투'에서 벌어집니다. 대우주의 시기에 벌레(아라크니드, 보통 '벌레(Bug)'라고 부릅니다)들과 갈등을 빚은 인류가 벌레의 공격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통채로 잃고, 복수심에 불태우며 대대적인 강습 작전을 벌이며 영화는 도입부를 지나 본격적인 전쟁 장면으로 돌입하죠.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인류는 3시간 만에 30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면서 말 그대로 완전히 박살납니다.

▲ 영화만큼 처절하진 않지만, 보랏빛 행성의 모습은 그대로

'테란 커맨드'는 이 영화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게임의 튜토리얼이 되는 첫 시나리오가 바로 '클렌다투' 행성에서의 전투를 다루고 있죠. 영화처럼 오합지졸로 썰리는 장면까지 나오진 않지만, 게임 내에서도 클렌다투 전투는 시종일과 밀리다 후퇴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리곤, 광산 행성인 'Kwalasha'로 향하며 본격적인 캠페인이 시작되죠.

여기서 재미있는 건, 다른 모든 미션의 경우 미션 완료 시 '미션 완료'라는 문구가 뜨지만, 이 클렌다투 전투는 '방송 종료'가 뜬다는 겁니다. 이는, 게임이 전체적으로 영화의 서사를 그대로 따라간다는 걸 게이머들에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영화 상에서 클렌다투 전투의 시점은 가상의 시점이 아닌, 뉴스를 통한 극중극 형태로 연출되었고, 열심히 전투 상황을 중계하던 종군기자가 두동강이 나면서 끝납니다. 영화의 이러한 연출법을 게임에서도 이어 적용한 겁니다.

▲ 클렌다투 전투 방송 종료

이후의 서사 라인 또한 영화와 비슷하게 템포를 맞춥니다. 영화에서는 클렌다투 전투의 대패 이후 전략 노선을 바꿔 근처 행성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는데, 이때 무분별하게 보병을 투입하지 않고 융단폭격으로 벌레떼를 쓸어버린 후 보병을 투입하는 전략을 수립합니다. 이는 게임에서도 완벽히 연출된 장면이죠. 다만 영화에서는 짧게 지나가는 이 장면을 게임은 보다 디테일하고 길게 보여줄 뿐입니다.

물론, 큰 틀에서 영화를 따를 뿐, 어느정도의 변조는 있습니다. 가령 광산 행성을 수복하는 단계에서 연방군은 광부들의 안전을 신경쓰지 않은 채 광산의 수복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이에 반발한 광부조합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연방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반란 수괴를 붙잡아 처형해버리려 하고, 당연히 연방군인 플레이어는 이 반란군을 때려잡고 수괴를 붙잡는 미션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 와중 달려드는 벌레들을 쓸어버리면서 말이죠.

▲ 개인의 생존권은 무시당하는 시대

영화에는 없는 오리지널 스토리지만, 폴 버호벤 감독이 그렸던 영화의 정서와는 꽤 맞아떨어지는 부분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침략을 겪었던 폴 버호벤 감독은 영화 내내 자신의 안티파시즘을 블랙 코미디로 녹여두었는데, 게임 또한 '승리'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소모하는 군국주의적인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죠. 아무리 죽어나가도 원버튼으로 죄다 보충되는 보병들과 게임 내내 보여지는 프로파간다는 연방의 파시즘적인 면을 보여주면서 인류의 수호자 이면의 어둠을 드러냅니다.

덕분에, 1편 영화를 재미있게 본 이들이라면 금방 이 게임에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물밀듯 밀려오는 벌레떼를 갈아버리고 우세한 화력으로 벌레 굴을 청소하는 기동보병과 이에 맞춘 군국주의적 프로파간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떨어져내리는 보충병들의 모습은 영화가 미처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은연중에 표현했던 이 세계의 세계관을 완벽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게임의 서사 흐름은 영화에서 시작해 자신만의 방향으로 향합니다. 후반부에 가면 영화에는 등장한 적이 없던(후속 영화에 등장했던) 파워 슈트와 머로더(대형 보행 병기)가 등장하고,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IP 전체에서 등장하는 이런 저런 장치들이 조금씩 모습을 보입니다.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음은 분명 느껴지지만, 게임 전체에서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미디어를 전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보이는 점에서 IP 팬들이 만족감을 느끼기 충분하죠.




전략 시뮬레이션이라기엔 뭔가 어정쩡한

서사 구조와 연출은 이 정도로 하고, 게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봅시다. '테란 커맨드'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탑 뷰 형태로 전장을 조망하고, 각 유닛을 조작해 목표를 달성해야 하죠. 하지만, 사실 완성형 전략 시뮬레이션이라기엔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보다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일단 '자원'이랄게 없습니다. '테란 커맨드'에서 자원이라 할 것은 '보급품'과 '무공 포인트'인데, 보급품은 라디오 타워나 보급품 무더기를 발견시 확보되며 통제 가능한 총 병력의 수를 결정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보급품이 떨어져서 새 보급품을 구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없습니다. 일정 목표를 달성해 얻는 무공 포인트는 건물을 짓는데 사용되는데, 각 건물은 새로운 유닛을 해금하는데 사용됩니다. 한 미션에서 구할 수 있는 무공 포인트는 제한적이며, 건물이 회수되거나 파괴되면 포인트도 반환되기 때문에 역시 관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 일반적인 전략 시뮬레이션에서 당연히 여겨지는 소모성 자원은 전혀 없습니다. 병력은 아무리 많이 잃어도 주기적으로 충전되는 수송선 여유만 있다면 공짜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일꾼도, 자원을 수급하는 건물도 없으며, 자원 수급 거점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매 판마다 정해진 한도 내에서 유닛 구성을 꾸려 미션을 달성하는게 결국 이 게임의 시작이자 끝이죠.

▲ 융단폭격으로 벌레를 쓸어버리고 진입하는 장면은 참 좋은데

관리해야 할 것이 따로 없기에 게임에서 신경써야 할 부분은 딱 두 가지입니다.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벌레떼를 막아낼 방어 병력과 목표 달성을 위한 타격팀을 배분하는 것이 하나고, 이 한정된 유닛을 최대한의 효율로 싸우게 만드는 컨트롤이죠.

결과적으로 '테란 커맨드'는 전략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가 수용해야 할 전략적 다양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다른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은 최소한의 자원 확보로 빠르게 정예 병력을 구성해 상대의 핵심을 타격하거나, 반대로 천천히 세를 넓혀가며 여유있게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등의 전략을 구성할 수 있지만, 이 게임은 아닙니다.

▲ 결국 제한된 병력으로 펼치는 디펜스 게임

무려 19개의 캠페인 미션이 존재하지만, 결국 플레이는 원 툴이죠. 벌레들 또한 어딘가에 생산 기지나 자원 스팟이 존재하는게 아닌, 그냥 산발적으로 널려 있는 벌레굴에서 무한히 스폰됩니다. 주변을 쓸어버리고 보병을 투입해 청소하면 벌레굴이 사라지는 정도죠.

물론 후반으로 갈수록 활용 가능한 병종이 많아지고, 각 병종의 특수능력들이 제각각이기에 게임이 조금 복잡해지긴 하지만, 구성만 달라질 뿐, 해야 하는건 모두 똑같기 때문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싱글 캠페인과 비슷하단 느낌이지만, 게임의 기반이 훨씬 단순하기 때문에 완성형 전략시뮬레이션보다는 전략시뮬레이션의 방식을 차용한, 어떤 애매한 지점에 놓인 게임으로 보입니다. 원작의 서사에서 시작되는 구성과 세계관 묘사는 좋으나, 원작 팬 이상의 게이머들을 이끌 만한 매력은 솔직히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거죠.

▲ 이런 장면도 몇 번 보다 보면 별 감상이 없어진다.



풍부한 싱글 캠페인(만으)로 승부하는 게임

그리고, 이 게임에는 앞서 말한 전략시뮬레이션치곤 단순한 게임 디자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게임의 주 콘텐츠인 싱글 캠페인은 분명 풍부하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10개 내외로 끝내버리는 다른 전략 시뮬레이션의 싱글 캠페인과 달리 무려 20개에 가까운 캠페인 미션이 존재하며, 후반으로 갈수록 다룰 수 있는 병종과 미션의 스케일이 점진적으로 늘어난다는 건 분명 장점입니다만, 이게 전부입니다.

정말 이게 끝입니다. 싱글 캠페인과 몇 개 되지 않는 임의 시나리오, 도전 시나리오를 제외하면, 다른 게임 콘텐츠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멀티 플레이도, AI 대전도 없고, 싱글 플레이가 연방군 기동보병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만큼 연방군 외 다른 세력을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게임 내 모든 콘텐츠는 오로지 연방군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벌레들은 유닛들 외에 다른 어떤 것들도 구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 머로더와 파워 슈트의 등장은 분명 흥미로운 부분이지만

'스타크래프트'로 치환해 생각하면, 오로지 테란으로만 진행할 수 있고, 건물도 생산 체계도 없는 저그들만 상대해야 하는데, 그 미션조차 스무개 남짓뿐인 격입니다. '스타쉽 트루퍼스'라는 IP와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가 보여준 장면들을 게임에서 볼 수 있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게임은 그저 조작 가능한 영화 상에서 그쳐서는 안 되는데 말이죠.

물론, 이를 의식해서인지 게임의 가격은 일반적인 AAA급 게임의 절반 정도인 3만원 초반대의 가격으로 출시되긴 했습니다만, 전략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확장성과 반복 플레이 가치가 전혀 없는 게임의 구성은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게다가, 게임의 전체적인 만듦새도 솔직히 좋지 못합니다. 전투 AI가 위협적인 적이 아닌, 가까운 적을 우선 타격하기 때문에 원거리 공격을 하는 벌레 처리가 시급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앞선 녀석들만 때리고, 병력들의 세부 애니메이션도 많이 부족한 편이라 명령을 내리면 제자리에 굳어버리는가 하면, 병력들이 오로지 횡대로만 이동하려고 해 좁은 지역에서는 앞열의 아군이 갈려나가는데도 사각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멀뚱멀뚱 놀고 있는 병력이 생기기도 합니다.

▲ 인공지능이 별로여서 컨트롤하다 보면 진이 빠진다

결론을 말하자면, '테란 커맨드'는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해볼 만한 게임이긴 하지만, 원작 팬이 아닌 이상 굳이 꼭 하고 넘어갈 정도의 게임이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이기에 다른 분들과 감상이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원작 영화의 골수 팬 입장에서도 딱히 훌륭한 게임이라 느끼진 못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I'm doing my part'입니다. '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다'죠. 이 대사는 그대로 게임에도 들어가 있으며, 팬들에게는 일종의 밈 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테란 커맨드'가 제 할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발 당시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사실 다 했다고 보기엔 아무래도 부족해 보이거든요.

▲ Do your p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