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인디 게임, '서바이벌 호러'에 진심을 담다



지난 4월 말, 브라질의 한 인디 게임 개발사가 만든 게임 '라투즈(RATUZ)'가 국내 유명 게임 스트리머들의 입소문을 타고 반짝 인지도를 올렸던 일이 있습니다. 고전 게임 페르시아 왕자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듯한 2D 횡스크롤 어드벤쳐였는데, 특유의 악랄한 조작감과 다양한 데스 신으로 레트로한 호러 어드벤처의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출시된 '포비아 - 성 딘프나 호텔(이하 포비아)'는 브라질 인디 게임 시장에 대한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했습니다. 언리얼 엔진으로 구현한 수준 높은 그래픽, 무너진 호텔을 배경으로 전달하는 공포스런 분위기 등, 트레일러부터 진심이 느껴졌달까요. 게다가 날씨마저 갑자기 후덥지근해져 공포 게임을 플레이하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즐겨 본 '포비아'는 여러 군데 손볼 필요가 있긴 하지만, 기대 이상으로 탄탄한 만듦새를 가진 한 편의 '서바이벌 호러'였습니다.

게임명: 포비아 - 성 딘프나 호텔(Fobia: St.Dinfna Hotel)
장르명: 서바이벌 호러
출시일: 2022.06.29
리뷰판: 출시 빌드
개발사: Pulsatrix Studios
서비스: Maximum Games
플랫폼: PC, PS, Xbox
플레이: PC

관련 링크: 메타크리틱 페이지 / 오픈크리틱 페이지


St.Dinfna Hotel은 어떻게 읽어요?

포비아의 부제목이자, 게임의 배경이기도 한 성 딘프나 호텔(스팀 상점페이지 번역을 인용)은 상당히 생소한 단어입니다. 해외에서도 어떻게 발음해야 할 것이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스팀 상점 페이지에서는 딘프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게임 내 문서에서는 성 딘나 호텔이라고 하는 등 정확한 발음을 알기 힘든 단어입니다. 그 덕분인지, 단어만 검색해도 이 게임에 대한 내용만 나오는 걸 봐선 제목 차별화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측면에서 게임의 참신함은 제목만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기자인 주인공(주로 취재를 위해 무모한 행동을 함), 외딴 곳에 위치한 호텔(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남), 전화 통화로만 주인공에게 길을 알려주는 여성(주로 배신함), 공격은 안 하지만 주인공 주변에 나타나 놀래키는 꼬마 귀신(주로 착함) 등, 실제 스토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 온 클리셰들의 집합이기 때문입니다.

▲ 고풍스러운 성 딘프나 호텔의 로비

▲ 리셉션에서 이런 말을 들는다면, 다른 호텔을 찾아봅시다

'포비아'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의문의 실종 사건과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제보를 받은 아마추어 기자 호베르투 로페스가 특종의 꿈을 안고 성 딘프나 호텔에 투숙하게 되며 시작합니다. 기대와 달리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던 로페스는 화장실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공간의 균열(같은 것)과 함께 정신을 잃고, 그가 있던 곳과 달리 절반쯤 파괴된 성 딘나 호텔의 객실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겪게 되면 기를 쓰고 집으로 도망가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겠지만, 위에서 말했듯 클리셰 덩어리로 구성된 게임의 스토리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전화 통화 건너편 여인의 목소리만 듣고 호텔의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뒤로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 기괴한 괴물들을 피해 호텔에 숨겨진 어두운 비밀을 파헤치는 여정이 이어지게 되죠.


클리셰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에게 친숙함을 느끼게 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상 가능하도록 하는 측면에서는 많은 클리셰를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브라질을 포함한 대부분의 글로벌 인디 게임 시장은 자국 내의 수요로는 많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보다 넓은 유저 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좀 더 친숙한 소재를 선택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친숙한 소재를 사용했다고 해도 그 전개를 조금 비틀거나 했다면 조금 더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서바이벌 호러의 왕도를 따르는 레벨 디자인

게임을 이끌어나가는 내러티브나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별다른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게임 초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맵의 구조와 동선, 갈수록 복잡해지는 퍼즐 매커니즘 측면에서는 상당히 탄탄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바이오하자드' 시리즈가 다져놓은 서바이벌 호러의 왕도를 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플레이어가 게임 속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 성 딘프나 호텔의 공간 디자인을 보면서, 개발사가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상당한 팬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게임플레이를 통해 얻는 단서와 열쇠들로 접근 가능한 공간을 서서히 확장하는 형태로, 호텔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마지막까지 짜임새 있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개발사의 규모를 고려했을 때, 게임의 바탕이 되는 공간을 무작정 넓게 만드는 데는 분명 여러 가지 제약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포비아'는 좁은 공간을 짜임새 있게 분리하는 방법으로 실제 공간보다 더욱 넓게 느껴질 수 있도록 합니다.

▲ 진행 경로와 숏컷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엘리베이터

반파된 호텔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는 게임의 콤팩트한 공간 활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존재로, 각 층에 가기 위해서는 없어진 층 단추를 찾아야 한다는 다소 어설픈 설정으로 초반 탐색 공간을 제약합니다. 사라진 단추는 곧 플레이어가 찾아야 할 목표가 되며, 이를 완수할 때마다 물리적인 공간이 점점 넓어지는 형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는 호텔 여기저기를 수색해야 하는 다소 반복적인 게임플레이를 덜 지루하도록 거드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바이오하자드1의 저택이 그랬듯, 이 게임도 마찬가지로 게임 후반에 얻게 되는 키 아이템을 통해 초반에는 잠겨 있던 공간을 수색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엘리베이터에 단추를 찾아 넣은 뒤에는 언제든 이를 통해 여러 층을 오갈 수 있는 숏컷이 되며, 이를 통해 반복적인 길찾기에서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정된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게임의 노력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포비아'에서는 게임 시작부터 우연히 얻게되는 신비한 카메라가 등장하는데, 카메라는 현실과 다른 시간대의 공간 사이의 통로 역할을 한다는 설정으로 호텔의 공간을 한 번 더 넓힙니다. 호텔을 탐험하다 보면 실제로는 막다른 길이지만, 뷰파인더를 통해 보면 길이 보이는 곳들이 존재하며, 몇몇 아이템과 단서는 뷰파인더 속 다른 시간대에서 획득해야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포비아가 가진 간결하면서도, 탄탄한 느낌은 맵디자인 뿐 아니라 퍼즐에서도 나타납니다. 여느 서바이벌 호러와 마찬가지로 게임 대부분에 걸쳐 다양한 종류의 퍼즐을 배치해 두었는데, 위에서도 언급했듯 퍼즐을 해결함에 따라 더 많은 공간을, 스토리에 대한 정보를 알아가며 엔딩까지 향하게 됩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4개의 모듈을 활용해 자물쇠를 여는 조립형 열쇠입니다. 보통 하나의 문을 열고 버리게 되는 열쇠들과 달리, 이 조립형 열쇠는 본체에 조합하는 모듈을 재료로 게임 초반부터 중후반 사이의 퍼즐을 푸는 데 중점적으로 사용됩니다. 게임 초반부에는 두 개의 모듈만 있어도 풀 수 있는 자물쇠가 등장하지만, 이후 게임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모듈을 찾고, 그에 맞는 문들을 열어나가는 구성이죠. 엘리베이터의 잃어버린 단추와 비슷한 형식으로, 이러한 아이템 구조 하나하나에도 꽤나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무서운데 웃음이 나는 이유는


서바이벌 호러 명작들의 왕도를 따르는, 그리고 고민한 흔적이 많이 느껴지는 게임 디자인은 상당히 인상깊은 게임이었지만, 게임에서 등장하는 괴물들을 상대하는 전투 측면에서는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게임에 등장하는 괴물과 보스들의 겉모습은 상당히 기괴하지만, 종류도 단조럽고 동작도 매우 부자연스럽습니다. 다 무너져 내린 호텔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점프스케어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괴물을 맞닥뜨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죠.

▲ 너무 놀라 육성으로 욕을 해버린 장면

게다가 게임 전체를 통틀어 등장하는 괴물들의 종류도 너무 적습니다. 주인공이 권총을 습득하는 순간부터 등장하는 인간형 괴물들, 호텔 곳곳을 기어다니며 주인공을 물 날만을 기다리는 거대 벌레가 대부분 전투 씬을 담당하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보스들은 조금 생김새가 다르지만, 그렇다고 강한 특징을 가진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게임에는 바이오하자드 RE:2를 통해 유명해진 타이런트처럼 만나면 도망쳐야 하는 죽일 수 없는 적이 등장하는데, 이 보스의 모습조차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살짝 부족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기능적으로, 그리고 디자인적으로 서바이벌 호러의 문법을 착실히 밟아도, 특유의 '느낌'을 살리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렇게 튀르키예 아이스크림 아저씨처럼 움직이면 무섭기 힘듭니다

물론, 개발사 또한 더욱 정제된 모션을 가진, 더 많은 수의 괴물이 등장하는 게임을 개발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지는 않을것 터입니다. 주요 게임 개발 선진국과 비교해 부족한 브라질의 게임 개발 환경, 인디 게임 개발사로서 개발력의 한계 등을 고려한다면 이정도로 선보인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투 부분을 제외하고, 호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맵 구조, 개개인에 따라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심어 놓은 각종 퍼즐 등은 클리셰가 넘쳐나는 스토리 전개 속에서도 몰입감을 잃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구성을 보여줬습니다. 한정된 공간이나 아이템의 구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각도로 고민한 흔적들은 '포비아'의 개발사 뿐 아니라 브라질 인디 게임 산업 전반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할 정도로 꽤나 인상적인 경험이었고요.

이 게임을 어떤 유형의 게이머에게 추천해야 한다면, 개인적으로 서바이벌 호러 장르의 팬 중에서도 전투보다는 퍼즐 해결에 더 높은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대략적인 목표 외에는 아무것도 힌트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 난이도를 높일 수는 있지만, 퍼즐을 즐기는 게이머에게는 도전적인 경험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