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정식 발매된 '스팀 덱'이 동아시아권 예약 판매를 시작했다. 사양에 따라 다르고 환율에 의해 차이가 나지만 성능 대비 싼 가격 덕분에 예약 판매는 수월하게 이뤄졌고, 아마 올해 안에는 한국 내에서도 정식 유통된 '스팀 덱' 유저들이 드물지 않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리뷰 사이트에 의해 이뤄진 평가에 의하면 성능은 반반. 스팀 OS를 비롯한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다소의 결함이 보이지만,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꽤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는 평이다. 이전의 '스팀 컨트롤러'처럼 혹평 일색이었다면야 모를까,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건 후속 기종의 출시 확률이 높아졌다는 뜻이며, 나아가 '스팀 덱'또한 나름의 전통을 쌓아갈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뜻일 거다.

표면만 보면, 내내 죽을 쑤던 게이밍 UMPC(Ultra Mobile PC)분야에서 이제서야 그럭저럭 쓸 만한 물건이 나온 모양새다. 내 손안의 PC를 표방한 UMPC는 2천년대 이후 PC의 소형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많은 기업들이 눈여겨본 분야인데, 좋게 말하면 도전의 역사이지만 실상은 여러 중소기업의 줄파산과 단종으로 얼룩진 잔혹사에 가깝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산업에서 절반이나마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만으로도 '스팀 덱'의 가치는 입증되었다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너머를 살펴보면, '스팀 덱'의 출시에는 꽤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이 숨어 있다. 단순히 게임 플레이가 가능한 휴대용 PC를 넘어, 게임 산업 전반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 만한 트리거들이 말이다.



콘솔이 아니기에 견제도 없다

일단 생각해야할 건, 스팀 덱의 포지셔닝이다. '근본은 컴퓨터이지만, 게임에 적합하게 설계되었고, 지상 최대의 PC ESD가 기반이 되는 기계', 이 정도면 그냥 콘솔이라고 해도 됨직하지만, 밸브 측은 휴대용 게임기보다는 UMPC에 더 가까운 기계라고 명확히 설명하며, PC가 가지는 확장성과 개방성을 지닌 기기임을 내세우고 있다.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콘솔과는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어하듯 말이다.

하지만, 스팀 덱은 누가 봐도 그냥 게임기다. 모딩이 가능하고, 그래픽 옵션 타협을 해야 하며, PC처럼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UMPC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생김새부터 특화 기능까지 부정할 수 없는 게임기다. 유튜브 접속이나 간단한 웹 서핑, 넷플릭스 시청 등은 현 콘솔들도 지원하는 기능이며, 스팀 덱보다 더 저렴한 염가 태블릿 PC들이 널려 있는데, 이걸 게임이 아닌 PC 본연의 목적을 위해 구매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밸브는 스팀 덱을 콘솔이 아닌 UMPC로 꾸준히 홍보해 왔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거치형 콘솔의 양대 주자인 PS와 XBOX측이 밸브에 보내는 시선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견제할 필요 까지는 없는 괜찮은 사업 파트너. 이를 보여주듯, 스팀 덱에는 양대 진영의 독점 타이틀인 '갓오브워'와 '씨오브시브스'를 모두 지원하며, XBOX의 경우 한술 더 떠 게임 패스 지원까지 허용했다. 애초에 소통이 드문 닌텐도는 제외하더라도, 전통의 콘솔 기업들 사이에 경계심 없이 자리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 양대 콘솔사의 타이틀을 모두 수용하게 된 스팀 덱, PC이기에 견제도 없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밸브는 'PC 게임을 전문적으로 서비스하는 플랫폼'에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우회로를 개척했다. 게이브 뉴웰은 '닌텐도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간 연계성이 부럽다'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했던 바 있으며, 밸브는 스팀 컨트롤러부터 스팀 머신, 스팀 VR과 링크, 그리고 스팀 덱까지 밸브는 항상 게이밍 하드웨어에 대한 도전을 추구해왔다. 여전히 ESD 운영사를 넘어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밸브의 말처럼 기능적으로 PC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스팀 덱이지만, 스팀 덱이 널리 팔려 꽤나 보편적인 게이밍 기기가 된 이후엔 어떨까? 기기가 충분히 보급되고, 밸브는 스팀 덱 사양에 맞춰 개발 사양의 조절을 요구할 수 있고, 이렇게 고정된 사양에 맞추기 위한 SDK가 만들어지면 차세대 기종부턴 새로운 콘솔이 되는 거다. 그리고, 환율 때문에 잘 느껴지지 않지만 현재 스팀 덱의 판매 가격은 기기 수익을 포기할 정도로 염가에 책정되어 있다. 이득은 필요 없으니 일단 많이 팔리길 바라듯 말이다.



트렌드에 올라탄 모델, '휴대형 게임기'

두 번째로 살펴봐야 할 건 스팀 덱이 거치형 모델이 아닌 '거치가 가능한 휴대용 모델'이라는 점이다. 현재 게이밍 하드웨어의 발전 방향은 '휴대'와 '거치'라는 개념에서 두 개의 지류가 하나의 큰 강으로 모이는 구도와 같다 볼 수 있다.

'모바일' 중심의 게임 시장에서는 고 퀄리티 게임에 대한 니즈가 커지고 있다. 여전히 시장의 주류는 간단하면서도 볼거리가 많은 게임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산업의 첨단에서는 제한된 하드웨어에서 어떻게든 퍼포먼스를 더 끌어올리려는 노력과, 이에 맞춰 모바일 기기 자체를 게임에 적합하게 만들고자 하는 도전이 이뤄지고 있다. 스마트폰 자체의 기능성보다 게이밍에 초점을 맞춘 '게이밍 스마트폰'은 이미 몇 차례 출시되었으며, 스마트폰에 적용하는 외부 게이밍 장비 시장도 점점 더 활성화되고 있다.

▲ 무려 12GB의 LPDDR5램을 장착한 아수스의 ROG Phone 6, 18GB 버전도 존재한다.

고 퀄리티의 게임은 가지고 있으나, 휴대성이 없는 기존의 게임 시장은 휴대성의 확보를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게임의 핵심 요소를 살리면서 사양을 극적으로 낮춰 아예 모바일 기기를 수용 범위 안에 넣어버림으로서 멀티 플랫폼 게임을 만든 에픽게임즈가 있는가 하면, 기존의 휴대 콘솔보다 훨씬 강력하고 크지만, 어쨌거나 휴대 가능한 콘솔을 만들어낸 닌텐도가 대표적이다. 게임 씬의 새로운 메타로 각광받았던 스트리밍 게임 서비스와 리모트 플레이 또한 휴대성이라는 니즈에 대응해 업계가 내놓은 답이다.

어쨌거나 게임 시장의 트렌드는 퀄리티와 휴대성이라는, 양립할 수 없었던 두 가치를 타협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참 공교롭게도 '스팀 덱'은 지금의 플랫폼 트렌드에 너무나 딱 맞는 모양새를 띄고 있다. 거치도 되지만, 휴대가 가능하며, 모바일 기기라기엔 강력한 성능을 보여주며 고 퀄리티의 게임들도 문제 없이 수용 가능하다.



2세대, 3세대 '스팀 덱'의 위치는 어떨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스팀 덱'은 얼마든지 콘솔로 발전할 가능성을 갖추고 있지만 스스로 콘솔이라 칭하지 않아 기존 콘솔사들의 경계를 사지 않았으며, 콘솔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개발 키트와 영향력, 그리고 이를 만들어줄 유저 풀이 부족하지만 성능 대비 수상할 정도로 싼 가격에 기기를 판매하고 있다. 동시에 하드웨어 트렌드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으며, 소프트웨어와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에서 다소 미비점을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인 하드웨어의 완성도 면에서는 합격점을 받은 상황이다.

이쯤 되니, 밸브의 속내까지는 무리더라도 큰 그림의 윤곽 정도는 얼추 들어온다. 지금으로서는 게이머들에게 또 하나의 선택지가 주어진 정도이지만, 적어도 내 시선에서, 밸브는 몇 년 후의 게임 체인저가 되기 위한 걸음을 밟아 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 몇 년 후의 모습은 이렇다. 미비점을 보완한 완성도 높은 차세대 스팀 덱, 그리고 입점 개발사들에게 개발 사양을 '권고'할 수 있을 정도의 기기 보급률과 세계 최대 규모의 PC 게임 유통망 및 양대 콘솔사의 독점 제품을 조금 늦게나마 수용할 수 있는 휴대용 게임기. 속단할 수는 없지만, 스팀 덱에서 출발한 '미래의 밸브'는 어쩌면 평행 우주가 아닌 현실에서 조금씩 맞춰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