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현장 청소 로봇 시뮬레이터


게임에서 그려지는 잠입 액션을 보면 잠입을 위한 선택지 중 하나로 '살인'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완벽한 잠입을 위해 목격자의 존재까지 함께 지워버리는,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피해의 근본을 제거하는 전투 특화형 치료사가 성립하듯 어엿한 잠입 방법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나, 이게 심해지면 잠입의 긴장감을 즐기라고 만든 게임에서 잠입의 재미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학살하는 살육 게임이 되어버리고 만다.

여기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잠입의 근본에 다가가는 독특한 잠입 액션 게임이 있다. 앞서 마피아가 휩쓸고 간 현장을 청소하는 전문 청소부의 이야기를 다룬 게임인 '연쇄청소부들(Serial Cleaners)'의 이야기다. 분명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없이 경찰들을 피해 사건 현장 청소를 완수해내는 잠입 요소가 메인이 되는 게임이지만, 이상하게도 게임을 하면 할수록 마치 나 자신이 사건 현장을 배회하는 로봇 청소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게임명: 연쇄청소부들 (Serial Cleaners)
장르명: 탑다운 잠입 액션
출시일: 2022. 9. 23.
리뷰판: 출시 빌드
개발사: Draw Distance
서비스: 505 Games
플랫폼: PC, 닌텐도 스위치, PS, XBOX
플레이: PC



살인 사건 현장 청소 시뮬레이션, 여기에 잠입 액션을 곁들인


사실 전투와 폭력 없이 '청소'에 초점을 맞춘 게임은 기존에도 많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피와 살, 흩어진 시체의 팔다리를 모아서 청소하는 '비세라 클린업 디테일' 시리즈가 있고, 하우스 플리퍼나 파워워시 시뮬레이터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어지럽혀진 공간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플레이어에게 편안함과 힐링을 선사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연쇄청소부들은 사건 현장 청소라는 주된 컨셉을 두고, 여기에 '실제 경찰과 탐정들이 실시간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디테일을 부여하여 기존의 청소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게임성을 만들어냈다. 현장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과정 속에 느낄 수 있는 자기만족 외에도, 그 모든 과정을 은밀하게 수행하도록 하여 '잠입 액션'의 재미까지 더한 셈이다. 실제로 플레이어는 현장을 청소하는 모든 플레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불필요한 소음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게 게임을 진행해야만 한다. 이렇다 보니 연쇄청소부들의 플레이 경험은 여타 청소 게임들보다 '코만도스' 시리즈와 더 닮아 있는 편이다.

▲ 경찰들의 감시망을 피해 흩뿌려진 피를 닦고 시체를 옮기는 것이 연쇄청소부들의 핵심 플레이

재미있는 잠입 액션 게임에는 무릇 매력적인 '맵'이 존재한다. 항상 똑같은 숲이나 건물을 배경으로, 계속 쓰레기통이나 락커에 숨으며 진행하는 게임은 좋은 잠입 액션이라고 할 수 없다. 개발자는 이 장소를 과연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지, 완벽한 잠입을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지 플레이어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민하게 해야만 한다.

연쇄청소부들에는 약 20종가량의 각기 다른 사건 현장이 등장한다. 90년대 미국의 모습을 컬트적인 비주얼로 그려낸 사건 현장들은 저마다 다른 컨셉을 가지고 있고, 청소와 잠입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물도 각 맵의 특성에 맞게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게임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이 보유한 각자의 특기는 이러한 맵의 다양성과 더해져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재미를 선사한다. 다음에는 어떤 끔찍한 비주얼의 사건 현장이 등장할 것인지, 그 맵에서 각 주인공들의 능력은 어떤 방식으로 활용될 것인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약 8시간에 달하는 전체 볼륨은 줄곧 기대감으로 채워진다.

▲ 게임 속 서로 다른 살인 사건 현장을 내려다보는 재미도 각별하다

▲ 해킹, 파쿠르, 사지절단, 핏자국 슬라이딩 등 다양한 캐릭터 기술이 맵을 더 풍성하게 꾸며준다

캐릭터 AI는 매력적인 맵과 함께 잠입 액션 게임을 빛나게 하는 또 하나의 주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AI가 플레이어의 각 행동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잠입 액션 게임의 몰입감과 긴장감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연쇄청소부들의 적 캐릭터 AI는 기대 이상으로 정교하면서, 동시에 놀라우리만큼 허술한 모습을 보여준다.

연쇄청소부들에서 경찰 AI는 시체나 증거품, 출입문의 상태 등 모든 조건이 원래 있던 모습에서 조금만 달라져도 바로 눈치를 채고, 이에 대한 수사를 개시한다. 바뀐 시체나 증거품의 위치에 하얀 스프레이를 뿌려 수사 현장을 정리하는 것도 감탄을 자아내는 포인트다. 이외에도 플레이어 캐릭터가 뛸 때 발생하는 소리와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돌린 청소기 소리에도 항시 반응하며, 소음의 근원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레이어를 감탄하게 만드는 AI의 모습은 여기서 딱 끝난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찾아온 AI는 플레이어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냥 돌아가버리며, 이때 플레이어를 발견하고 쫓아오더라도 눈 앞에 보이지 않게 되면 금방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돌아가버린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현장에서 수상한 사람이 돌아다니며 증거를 훼손하는 모습을 수 차례 발견하더라도, 잠깐만 시야에서 벗어나면 별다른 문제로 삼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은 게임의 몰입감을 크게 떨어트린다.

▲ 소총까지 들고 쫓아온 특수부대원이라도, 시야에서 사라지면 금방 포기하고 돌아간다

▲ 이런 플레이가 몇 번 쌓이면, 금방 '현타'가 찾아온다

차라리 수사가 진행되기 전에 현장을 찾아온 청소부가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제한된 시간 동안 청소하고, 만약 수사가 시작되기까지 청소를 끝내지 못했다면 그 후에는 '한 번만 걸려도 게임 오버' 혹은 경계 단계가 계속 이어지는 식으로 어렵게 전개되는 것이 더 납득되는 플레이 구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찰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현장을 청소하고, 발각되어도 금방 숨으면 피할 수 있는 것이 '전작부터 이어진 시리즈의 전통'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정작 꼭 필요한 부분에서는 전작을 계승하지 않아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스토리는 더하고, 긴장감은 덜어내고

▲ 연쇄청소부들 개발사 Draw Distance의 전작, '시리얼 클리너'

지난 2017년에 출시된 청소부 시리즈의 첫 작품인 '시리얼 클리너(Serial Cleaner)'는 살인 현장 청소라는 컨셉에 충실한 작품이었다. 경찰의 시야 범위가 직관적으로 표시됐고, 경찰의 시야에 한 번도 잡히지 않고 청소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기믹이 맵 곳곳에 배치되어 마치 퍼즐 게임 같은 재미도 있었다. 별다른 스토리 없이 피를 지우고 증거품과 시체를 회수하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한 게임이었고, 출시 후에는 게이머들의 호평을 받으며 '살인 현장 청소 액션'이라는 독특한 매력을 구축한 게임이 됐다.

후속작 '연쇄청소부들'은 전작이 보여준 유니크한 설정과 탄탄한 게임 플레이에, 네 명의 주인공과 깊이 있는 스토리를 더해 발전을 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D로 만들어져 더 깊이감을 갖게 된 사건 현장과 각기 다른 특수 능력을 지닌 주인공들의 액션은 지난 5년간 한층 성장한 개발사의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살인 현장 청소라는 주요 콘텐츠가 주는 긴장감은 오히려 희미해진 것처럼 보인다.

▲ 분명 더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놓친 것도 많다

첫 번째 변화는 더 커진 볼륨과 중간 저장 기능의 도입이다. 경찰에게 잡히면 해당 스테이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던 전작과 달리, 연쇄청소부들은 언제든 진행 상황을 저장할 수 있고, 심지어 시체나 증거품을 수거하면 자동 저장까지 된다. 퍼즐 게임처럼 작은 스테이지를 하나하나 깨던 전작에 비해 스테이지의 규모와 볼륨이 커졌기 때문에 적용된 편의 기능이며, 실제로 엄청나게 편리한 기능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비대해진 한판 한판의 스테이지 볼륨과 늘어지는 템포, 여기에 더해진 중간 저장 기능은 게임의 긴장감 역시 크게 낮추고 있다. 가뜩이나 멍청한 AI가 플레이어를 제대로 쫓아오지도 않는데, 언제든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플레이할 수 있고 페널티조차 없으니 후반부에는 아무런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다. 캐릭터가 계속 바뀌어도, 맵이 점점 더 화려해져도 결국 똑같은 청소 작업을 20회 이상 반복하는 것이 주된 게임 플레이다보니, 이러한 아쉬움은 게임을 플레이할수록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변화는 네 명의 메인 캐릭터와 함께 더 깊어진 스토리 모드다. 연쇄청소부들은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네 명의 캐릭터가 어떻게 청소부로 활동하게 됐는지를 시작으로, 이윽고 베테랑 청소부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청소와 청소 사이에 각 캐릭터의 배경 설명과 함께 스토리 컷신이 출력되고, 모든 대사를 꼼꼼히 읽으며 스토리를 따라가야만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 엔딩 스토리를 만끽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스토리에는 플레이어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대화형 선택지와 캐릭터의 개성을 드러내는 여러 연출이 적용되어 나름의 보는 맛이 있다. 하지만 건너뛸 수 없는 다수의 컷신, 상황 묘사 없이 대사로만 진행되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자신의 철학, 신념을 1인극처럼 토로하는 대사들이 플레이어가 스토리 흐름을 좇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단순히 살인 현장 청소에 집중하여 가볍게 즐길 수 있었던 전작과 달리, 후속작인 '연쇄청소부들'에는 스토리에 관심이 없거나 중간에 흐름을 놓쳐버린 이들에게는 고통밖에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 신경질적인 캐릭터의 대사 화면에 노이즈가 생긴다거나,

▲ '해커' 캐릭터임을 보여주는 컷신 등 스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도 많이 있다

세 번째 변화이자,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은 '챌린지 모드'의 부재다. 전작 시리얼 클리너에는 스토리 모드 외에도 특정 기능 사용 불가나 시간 제한 등 다양한 페널티를 걸고 사고 현장을 청소하는 챌린지 모드가 존재했다. 더 빠르게,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인 현장 청소라는 메인 콘텐츠 자체를 깊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매력이었는데, 신작 연쇄청소부들에는 해당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연쇄청소부들의 출시 빌드에는 챌린지 모드는 물론, 마음에 들었던 현장을 다시 청소하거나, 다른 캐릭터로 도전해보는 등 청소 콘텐츠 자체를 더 깊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다. 1회차 클리어 이후에 중간 챕터를 선택해서 다시 플레이하거나 저장 슬롯을 불러오는 것도 지원하지 않으므로, 청소 콘텐츠를 다시 즐기고 싶다면 현재로선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몇몇 도전 과제가 플레이어의 2회차를 유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토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나 이미 결말을 확인한 이들이 2회차를 생각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 스토리 사이사이에 포함된 '스킵 불가' 구간까지 다시 플레이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연쇄청소부들'은 살인 현장 청소라는, 기존의 액션 게임들과는 조금 다른 노선에서 색다른 재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길거리 예술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표현한 감각적인 터치가 들어간 연출이 게임 전체에 가득 채워져 있어 비주얼을 즐기는 재미가 있고,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밝혀지는 반전은 90년대 미국의 어두운 이면과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를 즐기는 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각기 다른 특수 능력을 갖춘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이들을 다채롭게 활용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합치는 하이스트 장르를 기대하게 되는데, 게임 속에서 볼 수 있는 팀업은 최대 두 명에 그치며, 이러한 요소가 등장하는 미션도 하나에서 두개로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렇다고 개별 활동이 자유로운 것은 또 아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캐릭터를 선택하여 같은 맵을 서로 다른 공략법으로 해결하는 등, 기껏 공들여 만든 맵과 청소 시스템을 알차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일절 제공되지 않고 있다.

추후 DLC 등 추가 업데이트를 통해 청소 콘텐츠만 따로 즐길 수 있는 챌린지 모드, 혹은 네 명의 캐릭터가 힘을 합칠 수 있는 특별 스테이지 등이 추가된다면 '연쇄청소부들'은 지금보다 더 완성도를 갖춘, 그 타이틀에 걸맞는 좋은 후속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보라색 머리에 브릿지를 한 여성 해커'가 한국인 캐릭터인 것도 내심 반갑다

▲ 현지화도 큰 오류 없이 전체적으로 위트있게 잘 됐기에, 스토리를 보는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