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과 거리가 멀었던 선수

이번 월드 챔피언십을 우승하기 전까지, 저는 항상 하위권을 맴돌던, 우승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어요. 그래서 우승했을 때 ‘기쁘다’라는 감정이 굉장히 낯설었어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판을 이기면 우승이다’라는 생각보다 ‘여기까지 온 것도 잘했어, 최선을 다했으니 지더라도 괜찮아’라는 생각이었죠. 마지막 넥서스를 깨는 순간까지도 그랬던 거 같아요.

막 우승했을 때는 얼떨떨한 감정이 더 컸어요. 높은 자리에 서 본 적이 처음이라서 기쁘다는 걸 어떻게 느껴야 할지 잘 몰랐던 거 같아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승했다는 걸 차츰 느꼈어요. 많은 사람이 저를 알아봐 주고, 저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어요. ‘피지컬 갤러리’ 채널에서 촬영했던 것도 우승하지 못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우승했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결승전 파이널 MVP ‘킹겐’ 황성훈

결승전에서 잘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어요.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었고, 상대가 나보다 더 많이 준비해오고 더 잘할 수도 있는 거였죠.

그래도 결승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걸고 부딪힐 자신은 있었어요. 후회 없는 경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랄까? 월드 챔피언십을 치르면서 팀원들과 이야기하고 서로 맞춰가는 과정에서 그런 걸 느꼈던 거 같아요. 결과보다는 과정을 재미있게 즐길 자신은 있었어요.

결승전에서 제 폼이 ‘날이 서 있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상대방의 수를 읽는 느낌도 받았고, 계속 느낌이 좋았어요. 그래서 2경기가 끝나고 감독님이랑 코치님한테 오늘 느낌이 좋다, 내 폼이 좋다고 이야기했던 걸로 기억해요.

경기가 끝나고 다 같이 기뻐할 때도 결승전 MVP라는 걸 상상하지 못했어요. 저희가 우승할 거라는 생각은 정말 진지하게 한 적이 없었거든요. 결승전 MVP를 선정한다는 말을 듣고 난 뒤에서야 생각했던 거 같아요. 경기를 되돌아보면서 ‘아, 내가 받겠구나’라고.

프로 커리어에서 월드컵 결승 파이널 MVP보다 더 높은 커리어는 없잖아요. 가장 높은 곳에서 그런 커리어를 달성했다는 건 앞으로 저의 프로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우승할 가능성도 더 높여주는 그런 엄청 중요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점성 좋은 흙으로 꾸둑꾸둑하게

‘내가 잘할 때는 항상 나 자신을 믿는 때였다’라는 말을 인터뷰에서 자주 했거든요.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프로게이머는 매일 스크림을 하고, 대회를 하고, 결과를 받으면서, 주위의 평가도 매번 듣잖아요.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그날의 나에 대해 평가를 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자신감이 오르고 내리고 하잖아요. 그래서 자신을 계속 믿는다는 건 정말 어렵죠.

이번 월드 챔피언십을 치르면서 자신을 믿는 힘이 점성이 좋은 흙으로 꾸둑꾸둑하게 잘 다져진, 그래서 잘 무너지지 않는 그런 힘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게 DRX 팀원들과 소통하면서 얻은 것 중에 가장 큰 배움이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정말 아름다운 말이지만, 프로게이머 100명이 있으면 100명 모두 노력하잖아요. 그 100명 중에서 잘된 한 명이 (김)혁규 형이라서 되게 아름답게 된 것 같아요.

사실 다 같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노력해도, 모두 다 좋은 결과를 받는 건 아니잖아요. 꺾이지 않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꺾이더라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안 돼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는다면, 다시 올라가는 건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마음이 부족했었지만, 이번 일을 경험하면서 믿음을 가지게 됐어요.


우승, 또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선수 열의 아홉은 목표가 우승이지만, 저의 원래 목표는 우승이 아니었어요. 우승은 선택받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상황이 갖춰지지 않고, 사람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게 우승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원래는 프로게이머 ‘킹겐’을 생각했을 때, ‘게임도 괜찮게 했고, 인성도 괜찮았던 선수’ 정도로 남고 싶었어요.

이제는 목표가 바뀌었어요. 또 한 번 우승을 해보고 싶어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대장도 해본 놈이 한다고. 1등을 해보니까 또 1등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아직 월드 챔피언십을 2회 연속 우승한 탑 라이너는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만약 그걸 달성하게 되면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위대한 선수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한화생명e스포츠에서 함께 하는 선수들은 이미 자신을 증명했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엄청 파멸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되게 순탄하게 잘 흘러갈 거라고 믿고 있어요.

2023년 한화생명e스포츠는 저돌적인 플레이 스타일이 첨가된 팀이 될 것 같아요. LPL 경험을 가진 선수들이 많고, 유일하게 LPL 경험이 없는 ‘라이프’도 스크림이든 솔랭이든 일관되게 엄청 공격적으로 해요. 팀 합을 맞추고, 서로의 플레이 스타일을 파악하면 정말 강한 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단단하게 플레이하는 것도 중요해서 LCK와 LPL의 맛을 둘 다 곁들인 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