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C 2023의 첫 날, 게릴라 게임즈의 '에스펜 손(Espen Sogn)'이 연단에 올랐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흥행작중 하나인 '호라이즌' 시리즈 개발에 참여한 그는, 일반적인 개발팀과는 사뭇 다르지만, 호라이즌 시리즈가 좋은 게임이 되는데 분명한 도움을 준 조금은 독특한 본인의 업무에 대해 소개했다.

그의 직책은 살아있는 세계 팀장(Living World Designer Lead). 엔지니어와 기획자, 애니메이터로 구성된 이 팀의 역할은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게임인 호라이즌 시리즈의 세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멋진 비주얼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에스펜 손은 호라이즌 시리즈의 기둥이 되는 세 가지 요소를 말했다.

▲ 게릴라 게임즈 살아있는 세계 팀장 '에스펜 손(Espen Sogn)'

하나는 다양한 환경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자연. 하지만 에스펜 손과 그의 팀이 맡은 역할은 아니다. 구 번째는 무지막지하게 크고, 남성의 판타지를 자랑하는 로봇 공룡. 이 또한 이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부분은 아니다.

이들이 주된 업무를 하는 분야는 세 번째 요소. 다양한 문화를 지닌 여러 부족과, 게임 내에서 거점으로 쓰이는 '정착지'를 보다 그럴싸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를 개발하기 전, 그들이 생각하는 '살아있는 세계'와 그 살아있는 세계에서 살아가야 할 부족민들에 대한 정의를 먼저 내렸다.

에스펜 손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각 부족이 독립적인 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이를 통해 게임의 주 서사와 플레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세계들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적 맥락은 어떠한 독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부족이 보여주는 문화적 특수성와, 이 특수성이 생김으로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타 부족과의 차이성을 말한다. 이를, 플레이어에게 설명하는건 어렵지 않지만, 플레이어가 진심으로 이를 느끼게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 각 부족의 문화적 맥락이 게임 내 콘텐츠나 서사와 어우러지며 드러나야 한다.

에스펜 손은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에 등장하는 세 부족을 예로 들었다.

'테낙스'부족은 고대 홀로그램이 남아 있는 오래된 전쟁 박물관을 영토로 삼고 있는 부족이다. 설정 상으로 그들은 무를 숭상하는 공격적인 부족이며, 마을 전체에서 이와 같은 테낙스 부족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테낙스 부족의 어린아이는 마을 곳곳에 놓여 있는 무기를 꺼내 휘두르기도 하고, 때로는 무게를 못 이겨 놓치기도 한다.

이들이 '테낙스'로 불리게 된 이유부터가 꽤 재미있는데, 이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10명의 신은 사실 구시대, 마지막 특수부대 중 하나였던 'JTF-10의 독전용 홀로그램이다. 원래대로면 Joint Task force - Ten Activated)이라고 말하는 것이 세월의 흐름에 갇혀 열화되다 보니 끝의 'Ten Activated')가 발음이 뭉개져 '테낙스'가 되었다.

▲ 일상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는 테낙스 부족

반대로 평화적인 '우타루' 부족은 기계가 직접 농경을 진행하던 지역에 머무르게 되었고, 이로 인해 기계들을 땅의 신으로 여기며 농경 문화를 일으켰다. 테낙스 부족의 마을에는 낑낑거리며 무기를 휘두르는 어린이들과, 그런 그들을 지도하는 어른들을 쉽게 볼 수 있잖나. 우타루 부족의 정착지에서는 평화롭게 밭을 일구는 이들이 있을지언정,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은 볼 수 없다.

'오세람' 부족의 경우도 다른 부족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수준 높은 양조 기술과 다양한 도구 제작 능력을 지닌 이들은 거대한 술집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정착지 내에서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놀고 떠드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단순히 테낙스 - 호전적인 전투민족, 우타루 - 평화로운 농경 민족이 아닌, 그들이 사는 터전의 모습과 행동, 구성원들의 행동을 통해 각 부족의 문화적 맥락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게이머가 게임을 즐기는 동안 보다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농경 생활을 통해 평화로운 나날을 살아가는 우타루 부족

물론, 이와 같은 생동감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이를 무작위로 재생시켜 NPC가 움직이게끔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만 해도 게임 내 캐릭터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괜히 허리춤을 긁적인다던가, 눈을 꿈뻑거린다.

문제는, 이것들이 어떤 특정한 조건, 예를 들어 오염이 심한 지역일수록 더 긁적인다던가, 대기질이 나쁜 지역에서 눈을 보다 자주 깜빡거리는 등이 아니라, 그냥 무작위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이 애니메이션은 하나하나가 매우 길다. 가령 오세람 부족의 양조장에서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의 애니메이션은 발판을 가져오고, 끓고있는 증류 대야의 문을 연 후 국자를 가져와 만들어지고 있는 술을 맛보고, 다시 문을 닫은 후 밑으로 내려와 화력을 점검한 후 화석 연료를 더 던져넣는다. 여기에 밤이 깊으면 일하던 이가 자리를 비운다거나, 행동 양식이 달라지는 등, 게임 내 여러 팩터의 상황에 따라 조건을 다르게 가져감으로서 더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낸다. 이 또한 살아있는 세계를 위한 기획 중 하나다.

▲ 긴 애니메이션은 단순 생동감의 증대 외에도 게이머가 한 장소에 오래 있을 경우 느끼는 위화감을 줄인다.

다만, 이와 같은 '리얼리즘'에 너무 취해서는 안 된다. 에스펜 손을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게임'으로서 가지고 있는 리얼리스틱과, '영화'가 보여주는 리얼리스틱은 분명히 다르므로, 게임으로서의 정체성과 가치를 잃지 않는 한에서 리얼리스틱을 추구하는게 방법이라 말이다.

때문에, 기획자는 게임 내에서 언제나 지켜져야 할 ''룰'을 항상 염두에 두고, 너무 과한 리얼리즘의 추구가 오히려 게임의 리얼리즘을 해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호라이즌 시리즈의 주인공인 '에일로이'는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게임의 도입부부터 에일로이는 자신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주며, 선한 이로서 게임의 서사를 이어나간다.

때문에, 에일로이가 길 가던 사람을 이유없이 폭행한다거나, 물건을 훔친다거나, 남들의 저녘 밥상을 엎어버리는 등의 행위를 하는 건 전혀 비현실적인 일이다. 현실에서 이럴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게임의 룰을 파괴하는 기능을 넣는 건 게임의 본질적 가치를 해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 '게임에 맞는 리얼리즘'의 선을 잘 지켜야 한다

그 외에도, 에스펜 손은 보다 깊이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짧은 팁을 몇 개 남겼다. 먼저 그는, 텍스처와 제스처는 다다익선, 즉 많을 수록 좋다고 말했다. 텍스처가 많아질 수록 더욱 다채로운 세계를 표현할 수 있으며, NPC의 제스처는 많아질수록 더욱 현실같은 세계가 만들어진다. 소스 관리가 어려워지고, 게임의 전체적인 용량도 늘어나겠지만, 게임 자체의 완성도를 더 중시하는 기조라면 텍스처와 제스처는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게임에 집어넣을수록 게임의 세계가 더 살아나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의 NPC라 하더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설명하듯, 다양한 설정과 배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어떤 NPC가 자신도 모르는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다던가, 사실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채식주의자라던가 하는 자잘한 설정과 측면들은 게임 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서사의 일각에서, 혹은 다른 NPC와의 연계된 무언가에서 게임에 깊이를 더해주는 감초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에스펜 손은 강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