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4'의 어깨에 놓인 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세상 어느 게임도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어지진 않았겠지만, 유독 디아블로4에는 걸린 것이 많다. 오랜 세월 쌓인 팬들의 기대부터, 이미 물어뜯을 준비를 끝낸 게이머들의 시선, 그리고 수년에 걸친 악재를 딛고 일어서려는 블리자드와 이를 경계의 시선으로 주시하는 업계까지, 정식 출시가 1주일이 채 남지 않은 지금, 디아블로4는 게임 산업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디아블로4를, 약 10일 간 먼저 플레이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으나, 동시에 부담이었다. 리뷰어로서 수많은 게임을 분석해오면서, 칭찬과 비평의 적정선을 찾는 건 간단하지는 않지만 또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디아블로4는 조금 달랐다. 60~70시간을 플레이하기까지, 난 이 게임을 어떤 선에 맞춰 평가해야 할지를 정확히 정하지 못했다.
그만큼, 디아블로4는 복잡하며,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완성된 패키지 게임으로서 출시되지만 라이브 서비스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한 편의 서사를 끝냈지만 앞으로 이어질 서사가 궁금해진다. 많은 게임들의 시스템을 모티브로 삼았기에 '아는 맛'같지만 여기에 자신만의 양념을 추가해 '새로운 맛'을 내었고, 당장의 아쉬움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가 예측되기에 단점이라 단정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길게 설명하긴 했지만, 결국 내가 이 게임에 대한 단정적 평가를 어려워한 이유는 하나다. 디아블로4는 계속해서 변할 수 있는 게임이고, 지금 시점과 변한 이후의 평가는 또 달라질 테니까. 그래서, 일단 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했다. 출시 시점의 디아블로4가 과연, 시작 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에 대해서 말이다.
※ 본 리뷰는 NDA에 의해 디아블로4의 서사 및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언급이 금지된 상태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때문에 메인 퀘스트와 관련 서사에 대한 내용은 기재되지 않았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게임명: 디아블로 IV
장르명: 액션 RPG
출시일: 2023. 6. 6
리뷰판: 얼리 리뷰 빌드개발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PC, PS, Xbox
플레이: PC
달라진 지향점과 새로운 재미
먼저 살펴볼 것은 '디아블로4'라는 게임의 지향점이다.
기존, 디아블로 시리즈는 RPG의 하위 장르인 '핵앤슬래시'의 대명사와 같았으며, 나아가서는 의미가 도치되어 디아블로와 비슷한 모습을 지닌 게임들이 곧 핵앤슬래시로 불리기도 했다. RPG를 구성하는 수많은 재미 요소들 중 오직 자르고 베는 것에만 집중하는 게임을 의미하던 장르명대로, 디아블로 시리즈는 수많은 악마를 때려잡고, 전리품을 수거하는 과정의 반복을 핵심으로 삼았던 게임이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결국 이를 좀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장치들일 뿐, 디아블로 시리즈의 핵심은 결국 악마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무기와 갑옷을 뜯어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4편에 이르면서, 다소 노선이 바뀌었다. 변화의 가장 큰 축은, '월드 맵'의 도입이다. 이전의 디아블로 시리즈는 '성역'이라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했지만, 실제 게임 내에서 이 성역의 모습은 다소 모호했다. 무작위로 구성되는 필드는 비주얼 컨셉만 보여줄 뿐, 악마를 때려잡기 위한 무대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핵앤슬래시'를 지향하는 게임인 이상, 그 이상의 무언가는 딱히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아블로4는 보다 구체적인 월드 맵과 '성역'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서, 기존의 시리즈 방향성을 크게 틀어 버렸다. 이전까지 디아블로 시리즈의 재미는 사냥과 득템이라는, 두 단계로만 이뤄져 있었다. 힘들게 몬스터를 잡고, 이들이 흘린 전리품으로 조금 덜 힘들게 몬스터를 잡는 과정의 반복은 핵앤슬래시라는 장르의 핵심이다.
그러나, 디아블로4는 여기에 보다 구체화된 세계를 제시함으로서 '탐험'이라는 새로운 재미를 더했다. 이전과 달리, 디아블로4에는 게이머가 직접 찾아내야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생겼다. 새로운 지역과 지형을 찾아내고, 그곳의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겪고,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던전과 악의 소굴들을 소탕하며 세계를 알아가게 된다. 지금까지의 디아블로 시리즈에선 볼 수 없었던 '미지로의 탐험'이란 재미가 더해졌다는 뜻이다.
동시에, 디아블로4는 이전 작품들이 지니고 있던 장르적 재미, 즉 수많은 악마를 쓸어버리고 전리품을 수거하는 재미 또한 지니고 있다. 성역의 마을과 도시는 비교적 안전하지만, 울타리 밖을 나서는 순간 게이머는 수많은 악마와 도적 떼, 괴물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과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 그냥 다 때려잡아야 하는 몬스터일 뿐이다. 울타리 안의 공간이 기존에 없었던 이성적인 성역을 보여준다면, 울타리 밖은 3편 이전의 야생을 그대로 가져다 놓았다.
이러한 변화를 보며 게이머들이라면 아마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디아블로4의 디자인은, '로스트아크'의 그것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차이라면 무게 중심이 어디에 쏠려 있냐는 정도인데, 로스트아크가 보다 일반적인 MMORPG에 가깝다면, 디아블로4는 여전히 핵앤슬래시를 지향하던 과거의 모습에 조금 더 기울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디아블로4는 기존의 어떤 작품보다도 더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디아블로4에서 구현된 성역은 설정 상의 성역 중 매우 일부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넓다. 70시간 가까이 게임을 플레이했음에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존재했고,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이 존재했으며, 겪어보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남아 있었다.
이는, 디아블로라는 작품이 지닌 서사 기반 덕분에 가능한 디자인이기도 하다. 상식적인 세계에서, 일상이 유지되지만 울타리 밖은 마경에 가깝다는 설정은 다소 핍진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디아블로 시리즈에서는 말이 된다. 말티엘 사태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 인간의 존폐가 간당간당한 시점이 디아블로4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마을은 쉘터에 가깝고, 그 외 지역은 위험지역이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세계 컨셉이 디아블로4의 디자인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덕분에, 디아블로4는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두 가지 게임의 재미를 모두 챙겼다. 기존 시리즈가 유지하던 고유의 재미, 즉 시원하게 몬스터를 쓸어담는 핵앤슬래시 게임으로서의 재미와 미지로의 탐험과 새로운 이야기라는 RPG류 게임들이 지닌 모험적 재미까지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여기서, 월드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고 사이드 퀘스트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등 자잘한 이야기는 굳이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이런 아기자기한 미지는 모르고 있을 때 보다 즐거우며, 디아블로4의 세계를 처음 탐험할 게이머들이 사전 지식 없이 보다 즐거운 모험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평가로서 말하자면, 디아블로4의 세계는 충분히 넓고, 한 번의 플레이로도 돈 값을 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 한 번의 정주행으로도 디아블로4는 게임의 가격 만큼의 볼륨을 충분히 보여준다. 타임어택을 하고자 한다면 훨씬 빠른 시간에 엔딩을 볼 수 있겠지만, 별로 의미는 없다. 사이드 퀘스트와 수집 요소의 비중이 매우 적던 과거와 달리 디아블로4는 메인 스토리만큼이나 큰 볼륨의 다양한 보조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비춰지는 성역의 모습은 디아블로 시리즈 팬들이 바라던 이상적 모습에 가깝다. 한 톨의 개그도 없이 비참하기 이를데 없는 이 고딕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는, 이전 작품들 이상으로 어둡고 절망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며, 기만적인 악과 갈 길을 잃은 빛의 환장할 콜라보로 어두침침하게 물들어 있다. 지나치게 발랄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1~50, 50~100 완전히 달라지는 게임 디자인
허나, 디아블로4의 세계는 새로운 재미가 될 지언정, 진정 게이머들이 원하는 것은 될 수 없다. '디아블로'라는 시리즈 팬들을 '미트 러버'에 비유하면, 앞서 길게 설명한 월드 맵의 도입은 어쨌거나 고기는 든든히 나오던 연탄구이집이 뷔페로 시스템을 바꾼 느낌에 가깝다. 분명 전보다 먹을 것도 많고,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겠지만, 어쨌거나 그 집의 단골들은 고기를 찾기 마련이다. 좋아하던 고깃집이 뷔페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비건 뷔페면 그만치 황당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정리하자면, 디아블로4는 계속해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어야 한다. 한 번 깨고 끝나는 게임이 아닌, 계속해서 도전하고 강해지는 것이 디아블로 시리즈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디아블로4를 리뷰하기 전부터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이며, 많은 게이머들이 가장 핵심적인 '디아블로적 재미'로 생각하는 부분일 것이다. 디아블로3는 이론 상 끝도 없이 플레이할 수 있다. 아이템을 최고 수준을 다 맞추어도 정복자 레벨이 존재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강해질 수 있다. 다만 그 성장 곡선이 완만해져 수평에 가깝게 될 때쯤, 게이머가 알아서 손을 놓게 되는 형태다.
당연히, 디아블로4 또한 그 정도로 계속 할 수 있어야 한다. 월드 맵이 도입되었다고 맵의 모든 콘텐츠를 다 깰 때 게임이 끝나버린다면, 이는 디아블로 게이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가깝다. 디아블로4에 있어 '지속 가능성'은 있으면 좋은 개념이 아닌, 무조건 가져야 하는 필수 소양인 셈이다. 디아블로의 팬들은 끊임없이 더 강한 악마를 잡길 원하며, 더 강한 전리품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디아블로4 또한 산악인의 등반과 가까운 이 끊임없는 성장의 과정을 분명 지니고 있다.
디아블로4의 등반 시스템은 두 단계로 나뉜다. 레벨을 기준으로 1~50까지, 그리고 50~100까지인데, 사실상 1~50까지는 튜토리얼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게이머는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사이드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명망을 쌓고, 월드 이벤트와 속삭임의 나무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캐릭터의 다양한 빌드를 시험해볼 수 있다.
경험 상 50레벨에 이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40 시간 정도이며, 이 과정에서 게이머는 다양한 전설 아이템들을 얻고, 이를 기반으로 빌드를 시험하게 된다. 난 리뷰용 캐릭터로 드루이드를 선택했는데, 1~50에 이르기까지 스무 번 넘게 스킬 트리를 리셋하며 다양한 빌드를 체험해 보았다. 사실상 이 시기는 게이머가 캐릭터에 익숙해지기 위해 필요한 시기다.
50레벨을 달성하고, 최초의 승급 던전을 클리어하면 3단계 난이도인 '악몽'이 해금되면서 본격적인 등반 단계에 들어선다. 이때부터는 악몽 던전이 가동되고, 정복자 보드가 열리면서 빌드 최적화를 고민하게 되는 시기이며, 사냥 난이도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더 이상 '적당히 해서는 더 올라갈 수 없겠다'라는 위기감을 준다.
이 때부터의 메인 콘텐츠는 사이드 퀘스트나 탐험, 보루 탈환이 아닌 악몽 던전과 속삭임의 나무를 통한 무한 파밍, 그리고 정복자 보드와 전설 아이템들을 고려한 빌드 최적화, 지옥 물결, PVP 콘텐츠 등을 플레이하며 꾸준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70레벨을 달성하고 4단계 고행 난이도를 해금한 이후 블리자드가 말한 '최종 보스'에 해당하는 콘텐츠에 접근할 때까지, 게임의 방향은 이전의 디아블로 시리즈와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띄게 된다.
정리하면, 디아블로4는 1~50, 50~100이라는 다소 명확한 구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1~50은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디아블로4만의 새로운 매력을, 50~100까지는 다소 익숙한 기존 디아블로 시리즈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 또한 50 이후의 디아블로를 플레이하고 나서, 블리자드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 그리고 게이머들의 다소 아쉽다는 모순적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타 시점에서 게이머들이 플레이할 수 있었던 1~25 구간은 디아블로4에 새롭게 도입된 월드 맵과 RPG적 요소들을 체험할 수 있는 맛보기에 가까울 뿐, 실질적으로 '디아블로다운' 구간이 시작되는 시점은 50레벨부터이기 때문이다. 디아블로3를 예로 들면, 1~50구간은 새 캐릭터로 70레벨을 달성하는 레벨업 구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시즌이 거듭되며 그저 지루한 시기가 되어버린 그와는 달리, 계정 공유 명망 시스템 등의 도입으로 대충 넘길 수는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물론, 게이머가 해야 할 일이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1~100까지 게이머는 항상 던전을 깨고, 몬스터를 잡고, 획득한 전리품 중 쓸만한 것들을 걸러내 빌드를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행위를 함에도 지향하는 재미가 달라진다.
1~50까지 게이머는 블리자드의 의도대로 미지를 탐험하게 된다. 비교적 레벨업이 빠른 이 구간에, 게이머는 새로운 스킬을 시험하고, 전설 옵션들과 합을 맞춰 보며, 이전에 없었던 콘텐츠를 즐기며 세계를 탐험하게 된다. 그리고, 디아블로4의 세계를 충분히 탐험한 50레벨 이후의 게이머들은 정복자 보드를 분석하며 가장 효율적으로 강해지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고, 힘의 전서와 그간 얻은 아이템들을 늘어놓은 채 무엇이 더 효과적으로 적을 쓸어담을 수 있는지를 고찰하게 된다.
이 두 과정은 모두 무척 즐거웠으며,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익숙한 재미를 주는 게임 경험이었다. 50레벨 이후부터는 리뷰에 허락된 시간에 비해 필요한 경험치가 대폭 늘어나 레벨업이 매우 느려졌기에 70레벨 이후의 극후반 콘텐츠나 최종 단계에 도달하기는 어려웠으나, 이것만으로도 대균열, 일반 균열, 현상금 사냥의 3트랙으로 돌리던 3편의 엔드 콘텐츠 순환보다는 확실히 나은 경험이었다.
베타 버전을 플레이한 이후 디아블로4에 대해 가장 걱정한 부분이 '이 게임을 오래 할 수 있을까?'였는데, 이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은 셈이다.
예상되고 보이지만, 해결 가능한 아쉬움들
그럼에도, 완벽한 게임은 존재할 수 없듯, 디아블로4는 몇몇 아쉬운 점과 의문점을 갖고 있다.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각 클래스 간의 재미 차이가 극심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건, '성능'이 아닌 '재미'의 차이다.
서버 슬램 테스트까지 세 번의 베타 테스트를 진행하면서, 각 커뮤니티에는 직업 별 밸런스에 대한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야만용사와 드루이드는 비교적 약하고, 나머지 세 캐릭터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아마 대세였을 거다. 내가 리뷰를 진행하면서 드루이드를 리뷰용 캐릭터로 정한 이유도 이와 같은 커뮤니티 의견 때문이다. 가장 약하다는 캐릭터로 게임을 경험해 봐야 이 게임의 밑바닥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클래스 간의 우열은 존재한다. 성능보다는 '재미'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베타 기간엔 드루이드를 키워보지 않아 느끼지 못했지만, 실제로 드루이드는 1~50의 육성 과정에서 타 직업에 비해 다소 재미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디아블로와 같은 핵앤슬래시 게임에서의 재미는 꽤 단순하다. 시각, 청각적인 임팩트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귀찮지 않으면서 몬스터를 잘 잡을 수 있으면 끝이다. 드루이드는 꽤 안정적인 플레이가 가능했지만, 반면에 느리고 단순했다. 결국 잡긴 하지만, 박진감이 떨어지고 호쾌함이 모자랐다고 해야 할까.
물론, 비교적인 이야기이다. 드루이드를 플레이하면서, 1~50 구간 동안 딱히 '못 잡겠다'싶은 적은 없었다. 성능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비슷한 레벨의 다른 캐릭터에 비해 너무 오래 걸렸고, 시각적 임팩트가 적다 보니 지루했다. 혹시나 싶어 키워 본 야만용사도 큰 차이는 없었다. 다른 세 직업에 비하면 확실히 눈에 띄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50~100에 이르는 성장과 엔드 단계에 이르면 분명 달라지긴 할 거다. 블리자드는 극후반에 이를 때 야만용사가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일 거라 공언했으며, 이는 게임 상에서도 확인이 가능했다. 한손 무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스탯을 지닌 양손 무기를 두 자루나 차고, 거기에 한손 무기도 두 자루를 더 장착해 전설 옵션을 넉넉히 받는 야만 용사는 분명 후반에 무척 강한 모습을 보여줄 거다.
하지만, 이 지루함을 생짜로 견뎌야 하는 1~50 구간이 딱히 짧지는 않다. 미래의 강함을 위해 초반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건 일견 합리적인 고난 같지만, 게임인 이상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재밌는게 훨씬 좋은 경험이다. 출시되고 몇 개월이 지나 힘의 전서가 충분히 분석되면, 초반부터 필수 전설 옵션을 챙기고 지금보단 효율적이고 재밌는 육성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1~50 구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건 구조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을 들게 하는 부분이다. 첫 번째 파트에서 말했다시피, 디아블로4의 세계는 결코 작지 않으며, 수많은 던전과 사이드 퀘스트가 존재한다. 던전이야 반복 플레이가 가능하겠지만, 사이드 퀘스트는 사실 몇 번 플레이하고 나면 더 할 이유가 없는 콘텐츠다. 하지만, 3개월에 한 번씩 반복되는 시즌은 하드 리셋이기에 릴리트 제단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리셋된다. 사이드 퀘스트와 탐험도 3개월마다 반복하게 된다는 뜻이다.
탐험 콘텐츠는 분명 재미있는 요소들이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이 미지로 가려져 있을 때 가장 재미있다. 두 번, 세 번까지의 반복이야 웃으며 할 수 있겠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면 게이머들에게 시즌 초의 명망 쌓기 작업은 그저 지루한 숙제로 남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핵심 기술과 기본 기술, 궁극기 등을 구분지어둔 것도 약간은 의아한 점이다. 디아블로3 때도 기술의 역할군은 구분이 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큰 의미는 없었는데, 이번 작품은 스킬 트리에서 일정 포인트를 소모해야 다음 기술군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약간의 강제력이 생겼다.
이 때문에, 미리 설계하지 않는 이상 기본기와 핵심기, 방어기, 궁극기 등을 결국 하나씩 선택하는 형태로 초반 빌드를 짜게 되는데, 이 또한 스킬트리에 존재하는 '키워드' 때문에 생각처럼 자유롭진 못하다. 각 빌드마다 몇몇 기술이 '키워드'로 묶여 있어 시너지를 활용하려면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빌드를 설계하는게 훨씬 간편하기 때문이다.
가령, 곰 드루이드는 '보강'을, 늑대 드루이드는 '독'을, 번개 드루이드는 '취약'이 빌드 구성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야만용사도 '출혈'을 중심으로 삼는 키워드가 있고, 원소술사도 번개 기술에만 붙는 '짜릿한 에너지'나 냉기 기술에 붙는 오한, 빙결 등 같은 속성의 기술을 활용해야 좋은 키워드 시너지들이 존재하기에 특별히 좋은 몇몇 기술을 제외하면 거의 같은 계통의 스킬들을 채용하게 된다. 후반에 이르러 정복자 보드에 이르러도 이렇게 기술 시너지가 묶이는 건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디아블로4는 다양한 빌드가 가능하지만, 상상을 깰 정도로 빌드 구성이 자유로운 정도는 아니다. 앞서 개발진이 디아블로4에서 다양한 게이머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빌드들을 준비했다고 말한 대로 다양한 판타지를 실현하기엔 부족함이 없지만, 예외성에는 다소 한계가 정해져 있는 형태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단점'으로 몰아 '디아블로4가 망겜인 이유'에 항목으로 적어두기는 어렵다. 이런 부분들이 진짜 단점이 되기 위해서는 '블리자드가 이를 오랜 기간 방치한다'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명망과 사이드 퀘스트, 보루 탈환 등이 반복 콘텐츠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은 업데이트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 지금만 해도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이후 만드는 캐릭터는 메인 퀘스트를 스킵할 수 있다. 디아블로4에 관해서는 확연한 유저 편의 친화적 모습을 보여주는 블리자드가 이에 대한 피드백을 접수했을 때 이를 묵인할 리가 없다.
직업 별 재미 차이나 밸런스 문제 또한, 사실 이런 종류의 게임에서 없을 수가 없는, 필연적인 유전병같은 존재다. 이 또한 추후 업데이트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으며, 기술이 다소 획일화되어 있다는 문제도 신규 기술 추가나 전설 아이템 추가를 통해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보석 가방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이 또한 피드백을 접수한 상황이니 어떻게든 방법이 나올 거다.
그 외에 신규 게임들이 자주 단점으로 지적당하는 최적화 문제나 그래픽 이슈, 버그 문제 등은 디아블로4에서 찾아볼 수 없다. 새 지역 이동 시 오브젝트 로딩에 의한 스터터링이 걸리긴 하나, 이는 심리스 세계 구현에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이며, 스터터링이 걸린 이후에는 복잡한 전투 상황에서도 프레임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픽은 게임 속 서사 연출 대부분이 프리렌더된 시네마틱이 아닌, 게임 내에서 그대로 카메라만 돌려 처리한 인게임 렌더링임에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며, BGM은 황홀할 정도로 좋다.
정리하면, 디아블로4의 '단점'들은 현 시점에서 분명 존재하나, 무척 한시적이며, 블리자드가 이를 어떻게 고민하느냐에 따라 더 오래가거나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혹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리뷰는 체험 버전이 명확하기에 일단 '단점'이라 말하겠지만, 나중에도 이 문제가 게임의 발목을 잡으리라 생각치는 않는다.
지금으로도 합격, 미래는 더 밝아 보인다
디아블로4를 기다린 몇 년의 시간 동안, 시스템 하나하나가 공개될 때마다 유저 커뮤니티는 늘 기대와 걱정을 함께 보여주곤 했다. 기자들과 업계 관계자들 또한 디아블로4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이 공개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실상 팬으로서 가장 걱정한 부분은 '정체성의 유지'였다.
디아블로4는 30년 가까이 쌓아온 디아블로 시리즈의 거대한 유산 위에 세워진 작품이지만, 보수적인 게임은 아니다. 그들의 기반이 된 유산을 보며 성장한 다른 게임들의 좋은 점들로부터 많이 배웠다는 걸 느낄 수 있으며, 이를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풀어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로스트아크가 생각나는 월드 디자인이나, POE에 유사한 시스템이 존재하는 정복자 보드와 악몽의 인장, 그리고 전작의 현상금 사냥과 닮아 있는 속삭임의 나무 등은 분명 뿌리가 같아 보이나 디아블로4라는 신작에 걸맞게 다듬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디아블로 시리즈가 유지해온 고유의 정체성이 흔들리지는 않았을까 걱정되었고, 몇 번의 베타 테스트를 거치면서도 이 우려는 계속 남아있었지만, 리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다. '디아블로4'는 시리즈 전작들과 너무도 다른, 진보한 게임이지만, 동시에 '디아블로다움'을 잘 가지고 있다.
몇 달 전, 디아블로4의 패키지 가격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되었던 바 있다. 최초 공개되었던 가격에서 할인되었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AAA급 게임에 비하면 비싼 가격이다. 나한테 그냥 게이머로서 이 돈 내고 게임을 살 만한 가치가 있냐고 물으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말하겠다. AAA급 게임의 일반적인 가격이 요즘엔 7만원 대고 보통 오래 플레이하면 40시간 가량이다.
디아블로4는 그보다 조금 더 비싸지만, 난 이미 70시간 이상을 꽤 즐겁게 플레이했고, 그럼에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게임 콘텐츠가 너무나 많이 남았다. 월드 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재미'는 완벽했으며, 기존의 '디아블로다움'은 빌드 획일화 가능성이 크다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럼에도 정복자 보드의 도입으로 흥미로운 고민거리를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개인적인 아쉬움은 서사 부분. 서사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급할 수 없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서사 또한 추후 확장팩 등을 통한 확장 가능성이 있으며, 디아블로4라는 게임 자체가 전체적으로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둔 듯 DLC를 붙이기 너무 좋게 디자인되어있긴 하지만, 본편 한정으로는 오히려 서사가 게임에서 가장 아쉽게 보이는 부분이었다. 이는, 추후 업데이트로도 근본적 해결은 되지 않는 부분이니만큼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디아블로 시리즈는 언제나 그러했듯 서사가 게임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임은 아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나 '갓 오브 워'처럼 스토리 드리븐 게임이라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겠으나, 애초에 디아블로의 팬들은 스토리 읽을 시간에 악마 하나라도 더 죽이고 전리품을 뜯어내는 걸 더 좋아하는 이들이며, 제발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기를(악마가 더 없을 테니) 바라는 전투광들에 가깝기 때문에 다소 불만족스러운 서사가 게임의 성패를 가를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리라 생각치는 않는다.
디아블로4에 대한 점수는 이런 점 들을 고려해서 정해졌다. 완벽에 가까운 만듦새와 새로우면서도 충분히 풍족한 경험. 그리고 여전히 디아블로스러운 재미를 잘 간직하고 있지만, 다소 아쉬운 직업 별 재미 밸런스와 빌드 획일화에 대한 우려가 약간의 감점을 더했고, 전체적으로는 아쉽지만 훌륭한 부분도 존재하는 서사에 절반 정도의 점수를 주었다. 앞으로 서비스가 이어지고, 시즌이 반복되면서 지금의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혹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지만, 출시 버전에 대해서만 판단한다 해도 디아블로4는 충분히 플레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이다.
디아블로4 리뷰
정재훈 기자
날짜: 2023-05-31 01:00
댓글: 93
9.0
- 자연스럽게 접목된 광대한 오픈월드
- 잃지 않고 유지한 '디아블로다움'
- 약속된 사후관리와 훌륭한 확장성
- 획일화되기 쉬워 보이는 스킬트리
- 불균형한 직업 간 재미 밸런스
-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편의기능
리뷰 플랫폼: PC (얼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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