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디아4 신규 직업, '혼령사' 보러 지구 반 바퀴
정재훈 기자 (Laffa@inven.co.kr)
해외 출장은 힘들다. 먼 옛날, 내가 아직 20대의 창창한 기자이던 선캄브리아기 시대에만 해도, 해외 출장은 이 직업을 가짐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혜이자, 기회였으며, 동시에 가슴 떨리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 버린 지금, 체력이 모자라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해외를 자주 나가는 직장인 대부분이 공감하겠지만, 해외 출장이란 대부분 일하는 장소만 바뀔 뿐 결국 일터와 호텔만 반복하는 낭만 제로의 일정이다. 게다가 거리가 멀면 시차라는 악몽까지 함께한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아침, 멀쩡한 컨디션으로 일어나는 사람은 20대의 나 외에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나름 발걸음이 가벼웠다. 디아블로4의 첫 확장팩 소식, 그리고 지금까지 없었던 직업 '혼령사'의 최초 플레이까지. 이 정도 건이면 당연히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2시간의 출발 지연, 급작스럽게 몰아친 인원으로 SNS맛집보다 더 긴 줄이 되어버린 입국심사와 한 번 탑승에 디아블로4 한정판 가격을 웃도는 우버까지 온갖 난관이 날 막았지만, 20년이 넘게 악마를 두들기며 살아온 온라인 둠가이를 멈출 수는 없다. 그렇게 여차저차 집에서 나선 지 21시간 만에 캘리포니아 어바인 호텔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어차피 '혼령사'에 대한 정보는 추가 기사를 통해 더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며, 보다 디테일한 정보도 공개할 예정이다. 다만, 이 행사 자체는 국내에서도 몇 명 가지 못한 행사인 만큼, 전지적 기자 시점에서 행사를 함께 가 본 기분이라도 내십사 하는 마음에서 행사가 끝날 때까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적어 보았다.
블리자드 왔으면 누님께 인사부터
다음 날, 아침 9시 30분이 되자 로비에 각국 기자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서로가 서로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상황. 해외 취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색한 풍경이다. 우리도 그렇지만, 국가를 막론하고 '게임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높은 확률로 남들과의 교류를 즐기지 않는다. 스몰토크에 진심인 서구권 기자들도 불현듯 갈기는 '굿모닝!'조차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쑥스럽게 말꼬리를 늘이곤 한다.
블리자드 담당자가 억지 텐션을 끌어올려 어색함을 정면에서 분쇄하고 나서야 기자들은 수학여행에 마지못해 끌려온 중학생들마냥 수줍게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15분 후, 우리에게 익숙한 '블리자드 캠퍼스'가 눈 앞에 나타났다.
블리자드 본사 방문은 게임 기자한테도 꽤 희귀한 경험이긴 하다. 작년을 끝으로 당분간 사라진 '블리즈컨'에 오는 기자가 많기에 본사 방문도 쉬울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블리즈컨이 진행되는 애너하임 컨벤션 센터는 블리자드 캠퍼스와는 꽤 떨어져 있다. 이번 행사와 같이 뭔가 명분이 있어야 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블리자드 측에서도 이번 기회에 뭔가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는지, 본 행사로 들어가기 앞서 캠퍼스 투어를 진행했다. 블리자드 캠퍼스는 '캠퍼스'라는 단어에 어울리게 구성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게임사처럼 고층 빌딩 하나의 몇 개 층을 사용하는 형태가 아닌, 아담한 2층 건물 여러 동이 뭉쳐 있는 형태인데, 말 그대로 대학 캠퍼스랑 무척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중앙부에, 그 유명한 오크 라이더 동상이 위치한다.
동상을 지나 잔디밭을 밟고 지나다 보면, 익숙한 '그 누나'가 보인다. 디아블로4 내에서 찾을 수 있는 '릴리트의 제단'과 똑같이 생긴 바로 그 석상. 하드코어 100레벨 달성자들의 이름을 음각해둔 릴리트 상이다.
'디아블로'때문에 온 기자들인만큼, 이 석상 앞에서만큼은 다들 함박 웃음을 지었다. 아침 식사로 나눠준 빵이 너무 빨리 떨어지는 바람에 과일만 먹어야 했던 기자도 웃었고, 밀어닥친 시차로 다크써클이 최대점을 찍은 기자도 웃었고, 시즌4에 드루이드 만렙만 3개 찍은 기자도 웃었다. 마지막 사람은 대체 왜 웃었을까. 여튼 릴리스 누님한테 인사도 박았으니, 본격적으로 블리자드 캠퍼스 투어를 할 차례다.
볼거리 가득한 도서관 가는 길
생각보다 막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다. 블리자드 캠퍼스는 어디까지나 개발 인력들이 상주하는 개발사일 뿐, 박물관이 아니니까. 전시회에 가면 이것 저것 소개해줄 게 많지만, 집에 데려가면 사실 딱히 보여줄 게 없다. "여긴 거실이고... 여긴 화장실이고... 어 여긴 안 돼" 이러고 말지 않나. 그럼에도, 재미있는 공간들은 분명 있었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역시 거대한 스태츄들. 전 세계 게임쇼에서 종종 전시하는 대형 스태츄들은 전시가 끝난 이후 대부분 본사로 다시 이송되어 전시된다. 블리자드 내 게임 프랜차이즈의 다양한 인물들을 직접 볼 수 있는 셈. 양이 꽤 많다 보니 사진도 많다.
그렇게 조형물들을 하나씩 보면서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이 '도서관'. 블리자드 내 작게 위치한 도서관은 공간 상 넓지는 않으나 꽤 짱짱한 장서를 자랑하는데, 당연히 실제 대여도 가능하다. 영화의 경우 7일, 게임은 14일, 서적은 21일 간 대여가 가능하며, 사서가 상주하는 공간이다.
도서관 구경이 끝난 후엔 '여러분도 아는 그 별 카페'와 합쳐져 있는 카페테리아를 방문했다. 역시 가는 길 곳곳에 온갖 오브젝트가 널려 있었지만, 모두 찍을 수는 없었다. 사실 더 많은 곳을 보려고 '시도'했지만, 블리자드도 캠퍼스 투어를 자주 한 것은 아니다 보니(그냥 개발자 중 한 명이 나와서 안내했다) 시간 배분이 잘못되어 종료, 그대로 우리는 다음 순서이자, 가장 중요한 코스인 '혼령사' 프레젠테이션으로 이동했다.
프레젠테이션은 기자들이 들어가면 딱 꽉 차는 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아쉽게도 프레젠테이션의 전 과정은 녹화 및 촬영 불가였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으나, 혼령사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플레이 체험기와 인터뷰, 그리고 후속 기사로 전달할 예정이다.
밥먹고 취재 더 남았다
이렇게 메인 행사였던 프레젠테이션은 끝. 하지만, 취재는 끝나지 않았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조를 나눠 한 조는 게임 체험을 하러 가고, 다른 한 조는 추가 취재를 하러 간다. 캠퍼스 내 건물들을 오가며 진행되는 인터뷰가 주된 취재거리. 메인 PD와 만나 게임에 대해 대화도 나누고, 온 김에 지나다니는 다른 게임 관계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앞서 말했듯 게임 기자들은 다소 낯을 가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직업 의식이 이를 이기고 억누르기 마련이다.
물론, 그 전에 밥부터 먹어야겠지. 이 날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는 모두 한 곳에서 진행되었는데, 앞서 소개한 카페테리아는 모든 인원을 수용하기 힘들고 점심 시간에는 직원들로 인해 자리가 터져나가기 때문에 블리자드는 카페테리아 앞 잔디밭에 텐트와 테이블을 펼쳐 미디어 전용 식당을 만들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사내에서 각종 이벤트나 행사를 할 때도 이 잔디밭을 활용한다 하더라.
식사 후엔 각자 정해진 취재 일정을 소화한다. 혼령사에 관해서는 따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인터뷰 내용은 별도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인터뷰 이후에는 2시간 동안 혼령사를 직접 플레이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여기서 짧게 다루기엔 아쉬우니 이 역시 별도의 체험기로 준비해 두었다. 짧게 요약하면, 빌드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이 굉장히 다양하게 나뉘는 올라운더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날 게임 플레이는 과정 모두를 녹화할 수 있었으며, 이 녹화한 영상은 블리자드가 별도로 준비한 512GB USB에 담아 갈 수 있었는데, 실로 엄청난 성능의 USB 디스크였다. 읽기 속도와 용량을 말하는게 아니다. 실수로 주머니에 넣은 채 빨았다가 건조기까지 돌렸는데도 아무 문제없이 기능했다. 물론 1주일이 지난 지금도 멀쩡하다. 대체 뭐로 만든 걸까.
해외취재의 끝은 루프탑이다
여차저차 취재 일과가 끝나면, 이제 호텔로 돌아가서 푹 쉬고 귀국을 준비... 할 것 같지만 아니다. 일반적으로 해외 취재를 오면 취재가 끝나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붙잡고 기사를 쓰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두 가지 경우엔 마무리 일정을 소화하게 된다. 하나는 행사 전체에 엠바고가 걸려 있어 특정 시점 이전에는 보도가 불가능한 경우. 다른 하나는 미래의 나에게 책임을 미룬 채 일단 좀 놀고 보자는 생각이 대뇌를 오염시킬 때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 행사로 주로 많이 진행되는게 바로 '네트워크 파티'다. 한국 내에서도 '지스타'를 가면 밤마다 해운대 밤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해외 게임쇼에서도 하루가 머다하고 수십 곳에서 이런 네트워크 파티가 이뤄지는데, 보통 행사 참석자들끼리 모여 행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로 교분을 나누는 장이다. 당연히, 게임 기자들끼리 모아두면 쭈뼛거리기만 하지 대화의 물꼬가 트이지 않기에 이런 자리엔 대부분 알콜이 함께한다.
그렇게 한 잔씩 들어가면, 수줍게 세워진 게임 기자들의 울타리도 조금은 낮아진다. 하지만 언제나 빈틈을 보이지 않는 이도 있는 법. 내 옆에 앉은 기자는 저녁 식사가 일생일대의 과제인 것 처럼 묵묵히 음식을 씹어 넘겼는데, 10cm 거리에 앉아 있었음에도 자리를 뜰 때 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기계처럼 접시를 비워댔다. 무척 어색한 경험이었다.
다행이라면, 보도 유예가 별도 설정되어 있었기에 급하게 기사 작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 쌓여있는 일거리를 귀국 후의 나에게 맡기기로 하고 파티를 충분히 즐긴 후 돌아왔다. 그렇게. 네트워크 파티를 끝으로 일정이 어찌저찌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긴 비행이 다시 예정되어 있지만 그거야 뭐 다음날의 내가 신경 쓸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