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15가 아닌 '8 리메이크'로 돌아온 삼국지
정재훈 기자 (Laffa@inven.co.kr)
삼국지(三國志)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양권에서 가장 강력한 문화적 결정이자, 가장 성공한 미디어이며, 단순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의 영역을 떠나 사회 전반과 역사, 대중의 인식과 사고 방식에도 영향을 준 소설이 삼국지이니까.
당연히 '게임'으로도 삼국지는 꾸준히 다뤄졌다. 수년 전, 한창 유명 IP를 가져다 게임을 만드는 것이 유행했던 시기엔 '정 안되면 삼국지라도 쓰면 된다'는 농담도 하곤 했다. 누구나 다 알지만 저작권이 없는 IP가 어디 흔한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삼국지 게임'들의 중심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가 있다.
첫 작품이 1985년. 물경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지는 시간 동안,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변화가 가해지며 만큼 각 작품마다 평가도 갈렸고, 부침이 이어지는 과정이 무려 14편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15편이 등장해야 할 시기에 15편이 아닌 8편의 리메이크가 등장했다. 꾸준히 앞으로만 향하다 잠시 뒤를 돌아본 신작. 괜찮을까?
게임명: 삼국지8 리메이크
장르명:대전략, 시뮬레이션
출시일: 2024. 10. 24.
리뷰판: 선행 리뷰 빌드개발사: 코에이 테크모
서비스: 코에이 테크모
플랫폼: PC, PlayStation 5
플레이: PC
돌아온 '전무장 플레이'
수장이 아닌,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삼국지
'삼국지8 리메이크'를 바라봄에 있어 기존 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8편의 근간인 '전무장 플레이', 즉 '장수제' 플레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일 것이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는 대부분의 작품이 세력의 수장 입장에서 플레이하는 '군주제'로 이뤄져 있지만, 몇몇 작품은 세력이 아닌 인물에 집중하는 '장수제'를 채택하고 있다.
최초 도입은 7편. 이후 8편에서 더 진보했고, 10편에서 정점을 찍었으며, 13편에서도 한 번 더 장수제가 적용되었던 바 있다. 두 시스템 간 차이는 카메라의 깊이. 즉 '삼국지'라는 세계를 어디서 바라보냐에 있다.
'삼국지'라는 미디어가 그토록 오랜 시간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의 소설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일 거다. 수많은 인물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위촉오 세 세력이 정족지세를 이루고, 결국 진나라의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천명이 넘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군주제'는 이 중 세력 간의 대립과 경쟁, 그리고 천하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반면, '장수제'는 각 인물의 관계부터 초점을 맞춘다. 장엄한 대전략 시뮬레이션으로서의 집중도는 군주제가 더 높겠지만, '삼국지'라는 미디어를 바닥부터 들여다보며 빠져드는 몰입의 농도는 장수제가 훨씬 짙을 수 밖에 없다.
'삼국지8 리메이크'는 이를 원작보다 조금 더 깊고 넓게 다듬었다. 600명 정도에 그쳤던 등장 무장이 1,000명이 넘게 불어나고, 더 많은 시나리오가 더해졌으며, 기반 시스템의 많은 부분이 최신작의 시스템에서 영향을 받았다.
떄문에, 게임 내적으로도 8편에 가깝지만, 8편을 다시 플레이하는 느낌은 아닐 정도로 크게 바뀌었다. 일종의 마일스톤 역할을 해 주는 '연의전'이 더해지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인물 간의 관계도 숙적과 상극 등의 적대적 관계, 배우자와 의형제와 같은 상생 관계인 '숙명'시스템이 더해져 보다 편한 몰입이 가능해졌다.
많은 이들이 걱정할 '낡은 냄새'는 생각보다 나지 않는다. 리메이크라 해도 원본인 '삼국지8'은 무려 23년 전 작품. 처음 리메이크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리 잘 다듬는다 해도 고전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전체적인 게임 만듦새가 현대 기준에 맞춰지면서 크게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시리즈가 안정적으로 개발되던 당시의 작품을 기반한 만큼, 안정도 면에서는 최신 시리즈보다 더 나은 느낌도 받았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장점은 게임이 전체적으로 쉽다는 것. 깊이가 얕다는 뜻이 아니라, 본 궤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크게 어렵지 않고 부드럽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는 '삼국지'라는 원본 미디어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최소화하고 정통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골수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멀미가 날 정도로 많은 텍스트와 숫자, 느릿한 템포로 인해 새로운 유입 게이머를 끌어올 매력은 비교적 적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기존 시리즈에 비하면 확실히 접근이 편하다. 기존 시리즈들을 그래도 찍먹은 해 온 입장에서 느끼기엔 본격적인 플레이로 향하는 과정이 가장 깔끔하면서 부드럽게 느껴졌다 해야 할까.
그래서, 입문용으로 딱 좋은 삼국지
기존 작 경험 없이도 '삼국지'만 알면 전혀 어렵지 않다
'코에이 삼국지'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만큼 게임도 꾸준히 플레이해온 이른바 골수 팬들이 있을 거고, 삼국지는 알고 있지만 코에이의 시리즈는 깊이 플레이해보지 않은 이들, 안 해봤거나 살짝 간만 본 이들이 두 번째다. 마지막은 그냥 삼국지 자체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는 항상 첫 번째 계층을 위한 게임으로 존재해왔다. 위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단점은 명확하다. 시스템의 발전에 비해 비주얼의 발전이 너무 더뎌 신규 게이머층의 입맛엔 다소 심심하며, 가득 차다 못해 넘실거리는 텍스트와 정적인 플레이, 그리고 이 모든 단점을 넘어서는 너무 비싼 가격까지 새로운 게이머의 손길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삼국지8 리메이크'의 장점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지금까지 계속 코에이 삼국지를 파먹어온 사람들에게는 그냥 익숙하고 편한 맛이지만, 시리즈가 보여주었던 악명(?)에 섣불리 손을 뻗지 못했던, 궁금증은 갖고 있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게이머들이 비교적 편하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안정적이고 쉬운 맛을 낸다.
인물에 초점을 두는 장수제이면서 시리즈 역사 상 가장 많은 시나리오를 지니고 있고, 뇌절을 넘어선 잔혹사가 펼쳐진 12편 이후 시기 이전의 작품이 근본이 되었기에 클래식하면서도 안정적이다. 동시에 현대적 마감과 수평적 콘텐츠 확충이 더해졌으니 어렵거나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작품이 된 것이다.
게임 과정도 '인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장수제이기에, 일단 삼국지를 좋아하는 게이머라면 얼마든지 컨셉 플레이가 가능하다. 어느 세력에 사관하지 않은 채 명성과 인맥을 키우며 헤드헌팅을 기다릴 수도 있고, 시골 군주의 말단 관리로 들어가 안에서 갉아먹고 수장이 될 수도 있으며, 떠돌이 생활 중 만난 인연들과 방랑군을 결성해 무주지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다. 갈래는 여러가지지만, 결국 천하 통일을 노리는게 모든 삼국지 시리즈의 기본이니 말이다.
말로 풀어내면 그냥 '기존 작품들보다 안정적이고 쉬운 장수제 삼국지'로 정리되지만, 의미는 문장보다 크다. 거듭 시리즈를 내놓으면서도 꾸준히 이어진 똥볼 행진을 일단락하고, 넘치는 악명 때문에 '어우 그런거 안해요'라며 지레 겁먹고 손사래치던 잠재 게이머들. 즉 '삼국지는 좋아하지만 코에이 게임을 접해본 적은 없는 게이머층'이 한 번쯤 손을 대볼 만한 작품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근 몇 년 간 삼국지 관련 게임 중 '토탈워: 삼국'을 가장 많이 플레이했고 눈높이가 이에 맞춰져 있었음에도 이번 작품은 비교적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었다. '토탈워: 삼국'에는 없었던 휴먼 드라마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코에이'다
좋아진 건 맞지만, 여전한 시리즈 고유의 한계점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12편 이후 꾸준히 지적받아온 비주얼. 원작 8편에 없었던 설전이 추가되고, 일기토 시스템이 이에 맞춰 개편되면서 일기토와 설전 시 두 장수가 나와 제 딴에는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눈이 다친다. 아무리 봐도 2010년대 초 수준에 그친다.
인물 일러스트 전반이 라이브2D로 바뀐 것은 분명히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크게 유명하지 않은 잡장들은 그냥 숨만 쉬는 정도지만, 유명 무장들은 갑자기 인상을 쓰거나 팔을 휘젓는 등 상당히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일러스트 보는 맛'에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러스트 하나는 괜찮게 뽑았던 시리즈인 만큼 이 점은 훌륭하게 다가오지만, 여전히 일러스트 원툴인 것이 문제다.
물론, 이전에도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가 그래픽을 보고 하는 게임은 아니었다곤 하지만, 언제까지 그 말로 합리화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2024년 아닌가?
또 하나 아쉽게 다가오는 점은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느껴지는 시스템의 한계다.
최근 게임에는 드물지 않게 적용되는 AI기반 알고리즘 없이 평면적인 스크립트 기반 플레이가 주가 되기에 게임이 본 궤도에 이르는 초반을 넘어 중반에 접어들면 게임 플레이가 굉장히 심심해진다. 숙제처럼 인물들과 호감작을 하고, 내정과 전투를 반복하는 시점에 이르면, 정말 천하통일이라는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야 하는 극심한 동기 상실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장수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다른 인물들과 관계를 쌓아가며 세계관에 몰입할 수 있다는 건데, 모든 인간 관계가 상당히 단순하다. '토탈워: 삼국'같은 경우 각 인물들의 기질과 성향이 존재하고, 이에 따라 기본 인간 관계가 정립된 후 대립이나 협력 등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변해간다.
반면, 본작은 상극에 놓이는 인물들을 제외하면 그냥 대화만 계속 하다 보면 어느새 친해진다. 모든 인간 관계가 시간과 반복 플레이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어느 순간 모든 이들이 경애하는 슈퍼 스타가 되어 있는 내 캐릭터를 보면 뿌듯하면서도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 드는 시기에 이른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고질적 문제가 게임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시점부터 변수가 적어 극심한 매너리즘이 찾아온다는 것인데, 이번 작품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코에이 프라이스'라 불리는 높은 가격 또한 여전하다. '삼국지8 리메이크'의 가격은 기존 넘버링 작품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고가인데, 일반적으로 리메이크 버전은 정규 시리즈 대비 낮은 가격을 책정한다는 걸 감안할 때 굳이 이렇게 높아야 할까 싶다.
'삼국지8 리메이크'가 기존 작품들에 비해 입문용으로 상당히 괜찮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건 맞지만, 그렇게 흥미를 느끼고 다가오는 신규 유저들이 가격 때문에 다 도망가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현 가격은 일명 스팀 정가인 60달러로 책정되어 있는데, 40달러 선이 현 퀄리티에는 가장 적절한 가격대가 아닐까 싶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삼국지 붐은 다시 올까?
충분히 좋은 타이틀이지만, 아직 몇 걸음 남았다.
정리하면, '삼국지8 리메이크'는 현 시점에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게 가장 필요했던 요소들을 두루 갖춘 타이틀이다. 보다 쉽고 직관적이면서도, 다른 삼국지 기반 게임들이 보여줄 수 없는 코에이 삼국지만의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게임을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도 어렵지 않게 게임에 적응할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이 워낙에 많기에 여전히 매출은 잘 나오지만, 새로운 유저층 확보가 어려워 예상 판매량 이상의 화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시리즈의 한계를 풀어낼 말랑말랑하면서도 매력적인 게임성을 보여주는 타이틀이 '삼국지8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다.
훌륭한 고전이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미덕인 안정감과 깔끔함을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세련됨과 양적 우수함을 고루 갖춘 작품. 동시에 장수제 삼국지로서 세력 간 갈등과 천하통일을 향한 경쟁만을 담아내지 않고 미시적 관점에서의 인간 관계부터 삼국지라는 미디어가 보여주어야 할 대의까지 고루 담아낸 점 또한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다만, 시리즈 특유의 한계를 아직 완벽히 극복하지는 못한 아쉬움도 있다. 유려한 2D 일러스트를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시대 게이머들의 눈높이에 완전히 맞출 수 없었으며, 기반 시스템 또한 이미 수많은 게임을 경험한 게이머들에게는 너무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드는 모양새였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가 한 차례 떠오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반갑다. 이제 시작이었기에 완전히 떠오르진 못하겠지만, 이런 부상의 과정이 몇 번 더 반복되면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도 다시 전성기를 되찾을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게임'으로도 삼국지는 꾸준히 다뤄졌다. 수년 전, 한창 유명 IP를 가져다 게임을 만드는 것이 유행했던 시기엔 '정 안되면 삼국지라도 쓰면 된다'는 농담도 하곤 했다. 누구나 다 알지만 저작권이 없는 IP가 어디 흔한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삼국지 게임'들의 중심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가 있다.
첫 작품이 1985년. 물경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어지는 시간 동안,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변화가 가해지며 만큼 각 작품마다 평가도 갈렸고, 부침이 이어지는 과정이 무려 14편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15편이 등장해야 할 시기에 15편이 아닌 8편의 리메이크가 등장했다. 꾸준히 앞으로만 향하다 잠시 뒤를 돌아본 신작. 괜찮을까?
게임명: 삼국지8 리메이크
장르명:대전략, 시뮬레이션
출시일: 2024. 10. 24.
리뷰판: 선행 리뷰 빌드개발사: 코에이 테크모
서비스: 코에이 테크모
플랫폼: PC, PlayStation 5
플레이: PC
돌아온 '전무장 플레이'
수장이 아닌,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삼국지
'삼국지8 리메이크'를 바라봄에 있어 기존 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8편의 근간인 '전무장 플레이', 즉 '장수제' 플레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일 것이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는 대부분의 작품이 세력의 수장 입장에서 플레이하는 '군주제'로 이뤄져 있지만, 몇몇 작품은 세력이 아닌 인물에 집중하는 '장수제'를 채택하고 있다.
최초 도입은 7편. 이후 8편에서 더 진보했고, 10편에서 정점을 찍었으며, 13편에서도 한 번 더 장수제가 적용되었던 바 있다. 두 시스템 간 차이는 카메라의 깊이. 즉 '삼국지'라는 세계를 어디서 바라보냐에 있다.
'삼국지'라는 미디어가 그토록 오랜 시간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의 소설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일 거다. 수많은 인물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위촉오 세 세력이 정족지세를 이루고, 결국 진나라의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천명이 넘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군주제'는 이 중 세력 간의 대립과 경쟁, 그리고 천하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반면, '장수제'는 각 인물의 관계부터 초점을 맞춘다. 장엄한 대전략 시뮬레이션으로서의 집중도는 군주제가 더 높겠지만, '삼국지'라는 미디어를 바닥부터 들여다보며 빠져드는 몰입의 농도는 장수제가 훨씬 짙을 수 밖에 없다.
'삼국지8 리메이크'는 이를 원작보다 조금 더 깊고 넓게 다듬었다. 600명 정도에 그쳤던 등장 무장이 1,000명이 넘게 불어나고, 더 많은 시나리오가 더해졌으며, 기반 시스템의 많은 부분이 최신작의 시스템에서 영향을 받았다.
떄문에, 게임 내적으로도 8편에 가깝지만, 8편을 다시 플레이하는 느낌은 아닐 정도로 크게 바뀌었다. 일종의 마일스톤 역할을 해 주는 '연의전'이 더해지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인물 간의 관계도 숙적과 상극 등의 적대적 관계, 배우자와 의형제와 같은 상생 관계인 '숙명'시스템이 더해져 보다 편한 몰입이 가능해졌다.
많은 이들이 걱정할 '낡은 냄새'는 생각보다 나지 않는다. 리메이크라 해도 원본인 '삼국지8'은 무려 23년 전 작품. 처음 리메이크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리 잘 다듬는다 해도 고전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전체적인 게임 만듦새가 현대 기준에 맞춰지면서 크게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시리즈가 안정적으로 개발되던 당시의 작품을 기반한 만큼, 안정도 면에서는 최신 시리즈보다 더 나은 느낌도 받았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장점은 게임이 전체적으로 쉽다는 것. 깊이가 얕다는 뜻이 아니라, 본 궤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크게 어렵지 않고 부드럽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는 '삼국지'라는 원본 미디어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최소화하고 정통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골수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멀미가 날 정도로 많은 텍스트와 숫자, 느릿한 템포로 인해 새로운 유입 게이머를 끌어올 매력은 비교적 적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기존 시리즈에 비하면 확실히 접근이 편하다. 기존 시리즈들을 그래도 찍먹은 해 온 입장에서 느끼기엔 본격적인 플레이로 향하는 과정이 가장 깔끔하면서 부드럽게 느껴졌다 해야 할까.
그래서, 입문용으로 딱 좋은 삼국지
기존 작 경험 없이도 '삼국지'만 알면 전혀 어렵지 않다
'코에이 삼국지'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만큼 게임도 꾸준히 플레이해온 이른바 골수 팬들이 있을 거고, 삼국지는 알고 있지만 코에이의 시리즈는 깊이 플레이해보지 않은 이들, 안 해봤거나 살짝 간만 본 이들이 두 번째다. 마지막은 그냥 삼국지 자체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는 항상 첫 번째 계층을 위한 게임으로 존재해왔다. 위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단점은 명확하다. 시스템의 발전에 비해 비주얼의 발전이 너무 더뎌 신규 게이머층의 입맛엔 다소 심심하며, 가득 차다 못해 넘실거리는 텍스트와 정적인 플레이, 그리고 이 모든 단점을 넘어서는 너무 비싼 가격까지 새로운 게이머의 손길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삼국지8 리메이크'의 장점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지금까지 계속 코에이 삼국지를 파먹어온 사람들에게는 그냥 익숙하고 편한 맛이지만, 시리즈가 보여주었던 악명(?)에 섣불리 손을 뻗지 못했던, 궁금증은 갖고 있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게이머들이 비교적 편하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안정적이고 쉬운 맛을 낸다.
인물에 초점을 두는 장수제이면서 시리즈 역사 상 가장 많은 시나리오를 지니고 있고, 뇌절을 넘어선 잔혹사가 펼쳐진 12편 이후 시기 이전의 작품이 근본이 되었기에 클래식하면서도 안정적이다. 동시에 현대적 마감과 수평적 콘텐츠 확충이 더해졌으니 어렵거나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작품이 된 것이다.
게임 과정도 '인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장수제이기에, 일단 삼국지를 좋아하는 게이머라면 얼마든지 컨셉 플레이가 가능하다. 어느 세력에 사관하지 않은 채 명성과 인맥을 키우며 헤드헌팅을 기다릴 수도 있고, 시골 군주의 말단 관리로 들어가 안에서 갉아먹고 수장이 될 수도 있으며, 떠돌이 생활 중 만난 인연들과 방랑군을 결성해 무주지의 지배자가 될 수도 있다. 갈래는 여러가지지만, 결국 천하 통일을 노리는게 모든 삼국지 시리즈의 기본이니 말이다.
말로 풀어내면 그냥 '기존 작품들보다 안정적이고 쉬운 장수제 삼국지'로 정리되지만, 의미는 문장보다 크다. 거듭 시리즈를 내놓으면서도 꾸준히 이어진 똥볼 행진을 일단락하고, 넘치는 악명 때문에 '어우 그런거 안해요'라며 지레 겁먹고 손사래치던 잠재 게이머들. 즉 '삼국지는 좋아하지만 코에이 게임을 접해본 적은 없는 게이머층'이 한 번쯤 손을 대볼 만한 작품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근 몇 년 간 삼국지 관련 게임 중 '토탈워: 삼국'을 가장 많이 플레이했고 눈높이가 이에 맞춰져 있었음에도 이번 작품은 비교적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었다. '토탈워: 삼국'에는 없었던 휴먼 드라마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코에이'다
좋아진 건 맞지만, 여전한 시리즈 고유의 한계점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12편 이후 꾸준히 지적받아온 비주얼. 원작 8편에 없었던 설전이 추가되고, 일기토 시스템이 이에 맞춰 개편되면서 일기토와 설전 시 두 장수가 나와 제 딴에는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눈이 다친다. 아무리 봐도 2010년대 초 수준에 그친다.
인물 일러스트 전반이 라이브2D로 바뀐 것은 분명히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크게 유명하지 않은 잡장들은 그냥 숨만 쉬는 정도지만, 유명 무장들은 갑자기 인상을 쓰거나 팔을 휘젓는 등 상당히 다양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일러스트 보는 맛'에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러스트 하나는 괜찮게 뽑았던 시리즈인 만큼 이 점은 훌륭하게 다가오지만, 여전히 일러스트 원툴인 것이 문제다.
물론, 이전에도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가 그래픽을 보고 하는 게임은 아니었다곤 하지만, 언제까지 그 말로 합리화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2024년 아닌가?
또 하나 아쉽게 다가오는 점은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느껴지는 시스템의 한계다.
최근 게임에는 드물지 않게 적용되는 AI기반 알고리즘 없이 평면적인 스크립트 기반 플레이가 주가 되기에 게임이 본 궤도에 이르는 초반을 넘어 중반에 접어들면 게임 플레이가 굉장히 심심해진다. 숙제처럼 인물들과 호감작을 하고, 내정과 전투를 반복하는 시점에 이르면, 정말 천하통일이라는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야 하는 극심한 동기 상실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장수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다른 인물들과 관계를 쌓아가며 세계관에 몰입할 수 있다는 건데, 모든 인간 관계가 상당히 단순하다. '토탈워: 삼국'같은 경우 각 인물들의 기질과 성향이 존재하고, 이에 따라 기본 인간 관계가 정립된 후 대립이나 협력 등의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변해간다.
반면, 본작은 상극에 놓이는 인물들을 제외하면 그냥 대화만 계속 하다 보면 어느새 친해진다. 모든 인간 관계가 시간과 반복 플레이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어느 순간 모든 이들이 경애하는 슈퍼 스타가 되어 있는 내 캐릭터를 보면 뿌듯하면서도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 드는 시기에 이른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고질적 문제가 게임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시점부터 변수가 적어 극심한 매너리즘이 찾아온다는 것인데, 이번 작품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코에이 프라이스'라 불리는 높은 가격 또한 여전하다. '삼국지8 리메이크'의 가격은 기존 넘버링 작품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고가인데, 일반적으로 리메이크 버전은 정규 시리즈 대비 낮은 가격을 책정한다는 걸 감안할 때 굳이 이렇게 높아야 할까 싶다.
'삼국지8 리메이크'가 기존 작품들에 비해 입문용으로 상당히 괜찮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건 맞지만, 그렇게 흥미를 느끼고 다가오는 신규 유저들이 가격 때문에 다 도망가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현 가격은 일명 스팀 정가인 60달러로 책정되어 있는데, 40달러 선이 현 퀄리티에는 가장 적절한 가격대가 아닐까 싶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삼국지 붐은 다시 올까?
충분히 좋은 타이틀이지만, 아직 몇 걸음 남았다.
정리하면, '삼국지8 리메이크'는 현 시점에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게 가장 필요했던 요소들을 두루 갖춘 타이틀이다. 보다 쉽고 직관적이면서도, 다른 삼국지 기반 게임들이 보여줄 수 없는 코에이 삼국지만의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게임을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도 어렵지 않게 게임에 적응할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이 워낙에 많기에 여전히 매출은 잘 나오지만, 새로운 유저층 확보가 어려워 예상 판매량 이상의 화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시리즈의 한계를 풀어낼 말랑말랑하면서도 매력적인 게임성을 보여주는 타이틀이 '삼국지8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다.
훌륭한 고전이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미덕인 안정감과 깔끔함을 지녔으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세련됨과 양적 우수함을 고루 갖춘 작품. 동시에 장수제 삼국지로서 세력 간 갈등과 천하통일을 향한 경쟁만을 담아내지 않고 미시적 관점에서의 인간 관계부터 삼국지라는 미디어가 보여주어야 할 대의까지 고루 담아낸 점 또한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다만, 시리즈 특유의 한계를 아직 완벽히 극복하지는 못한 아쉬움도 있다. 유려한 2D 일러스트를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시대 게이머들의 눈높이에 완전히 맞출 수 없었으며, 기반 시스템 또한 이미 수많은 게임을 경험한 게이머들에게는 너무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갈수록 수렁으로 빠져드는 모양새였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가 한 차례 떠오르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반갑다. 이제 시작이었기에 완전히 떠오르진 못하겠지만, 이런 부상의 과정이 몇 번 더 반복되면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도 다시 전성기를 되찾을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7.8
- 삼국지만 알아도 입문 가능한 난이도
- 라이브2D로 더 좋아진 일러스트
- 전무장 플레이의 몰입감
- 해결되지 않은 중후반 매너리즘
- 2024년 치곤 너무한 3D 비주얼
- 리메이크 치곤 높게 느껴지는 가격
리뷰 플랫폼: PC (리뷰 선행 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