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11월 16일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열리는 IGDC(인도 게임 개발자 컨퍼러스)에 강연자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올해 미국 GDC 발표 이후 여러 나라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는데, 약간 숨돌릴 틈이 있던 10월까지만 받고 그 이후는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준비가 만만찮을 뿐 아니라 갔다 오면 몸도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인도라…?'
인도는 항상 관심이 있던 곳이지만, 사실 선뜻 갈 엄두를 못 내던 곳이다. 비행 8시간이 넘는 꽤 먼 거리, 다녀온 분들의 경고(주로 '아무 물이나 마시면 안 돼!'였다), 또 종교나 문화에 대한 부족한 지식 등이 이유였다. 또 한편으로는 커리애호가로서 음식에 대한 기대와 특유의 묘한 신비감 때문에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했다.
인도 시장에서 크래프톤의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이 매우 잘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부끄럽게도 그 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되려 이번 기회로 인도에 가서 좀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에 우선 Zoom 미팅을 통해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초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대부분 모바일 게임이 잘된다고 들었어요. 저희 같은 PC게임 얘기에도 관심이 있을까요?"
"인도는 인프라가 약해서 모바일 쪽이 훨씬 강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발자분들은 PC게임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 많은 PC/콘솔 게임들이 나올 것입니다. 저희 개발자분들에게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열정적으로 인도 시장의 현황과 미래에 관해서 설명하는 주최 측 담당자의 말을 듣고 이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뭐 어쨌든 초대받아서
1. 인도로
그 후 순식간에 몇 달이 지나고 어느덧 11월이 다가왔다.
여행 갈 때 미리 준비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1주일 전에서야 가이드를 보고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3일이면 나온다고 해서 어찌 되겠지 해서 신청을 했는데... 3일 후에 날아온 메일...
'Your visa is rejected.(비자가 거절됐습니다)'
사진이 너무 흐리다는 이유로 비자가 거절당한 것이다.
다시 신청하고 받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강연 취소까지 고민했는데, 다행히 한국을 포함해 일부 국가 대상으로 '도착 비자'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선 비행기를 타고 인도로 향했다.
하이데라바드는 인도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며, IT를 전략적으로 키우는 곳(우리나라 판교가 떠올랐다)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등이 이곳에 지사를 갖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CEO 사티아 나델라가 이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다만 한국에서의 직항편이 존재하지 않아 방콕에서 환승을 해 약 10시간이 걸려서 겨우 도착했다.
다행히 '도착 비자'가 가능하긴 했는데... 추천은 못 하겠다. 우선 현금으로 내야 하는데 한국에서 루피를 환전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인천공항에서도 불가능했다)
공항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환전하고 드디어 현지 새벽 3시에 인도 입성에 성공했다.
2. IGDC
이번 IGDC에는 비단 인도 현지 개발자뿐 아니라 나처럼 해외에서 초대받은 분들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쉐도우런'과 '메카워리어'를 만든 조던 와이즈먼, '발로란트'의 테크 아트 디렉터 라이언 트러브릿지 등이 있다.
이 중 인도 이민 가정의 애환을 담은 요리 게임인 '벤바(Venba)'의 디렉터 이름도 올라와 있었는데, 작년 각종 해외 시상식에서 몇 차례 패배했던 만큼 꼭 만나고 싶었다.(현피 아님)
이번 IGDC는 크래프톤과 에픽게임즈가 메인스폰서로 참여하여 언리얼 엔진의 세션이 많은 편이었다. 듣고 싶은 세션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한국과 업무 시간이 겹치다 보니,(시차가 3시간 30분이다. 30분!) 아쉽게 많이 참석을 못 했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진행한 인도 콘솔 개발자 세션이었다.
아무래도 취향이 많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일반적으로 재밌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래 'Unsung Empires2'인데, 무대에 올라올 때 큰 환호성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 스타 개발자이신 것 같다. 오프닝에서 보여주는 인도 전통문화 연출도 너무 좋았고, 게임 자체도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이밖에 전시 부스에서 몇 가지 현지 게임들을 볼 수 있었는데, 플랫포머나 액션, MMORPG 등 굉장히 다양한 장르의 게임이 있었고 주최 측으로부터 들었던 것처럼 모바일 게임보다 PC게임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다른 날 열렸던 IGDC 시상식에서는 아직 대부분의 수상작이 모바일 게임인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최근에 트랜드가 많이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 게임 자체의 퀄리티가 높다고 하긴 어려웠지만, 인도 문화를 많이 반영하고 있어서 색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문화 요소만으로도 차별성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부러운 일이었고 한국 역시 ‘문화 알리기’라는 공공의 목적을 떠나 ‘게임적 차별성’을 위해서도 고민해 볼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 인도 개발자의 열정
나의 세션은 2일 차인 목요일이였는데, 두 번째로 큰 홀에서 진행됐다.
내가 선정한 주제는 '데이브 더 다이버 포스트모템 : 커뮤니티와 함께 게임 만들기'로 데이브를 개발하면서 신경을 많이 썼던 부분, 그리고 그것을 데모와 얼리 액세스를 통해 어떻게 커뮤니티와 함께 검증하고 발전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분히 PC 스팀 게임에 해당하는 얘기라 관심도가 낮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행사장에는 현지 개발자분들이 빼곡히 들어와 주셨다.
45분의 세션에서 30분 정도를 발표로 쓰고 15분의 Q&A를 진행했는데, 정말 많은 분이 질문을 해주셨다. 시간이 모자라서 주최 측에서 행사장 밖에서 추가로 질문을 받으라고 말씀 주셨는데, 무려 1시간이 넘게 나를 둘러싸고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팀은 어떻게 구성하는 게 좋나요?"
"넥슨 같은 큰 회사에 이런 특이한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무엇이 어려웠나요?"
"저는 테크니컬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데 채용할 때 어떤 것을 많이 보시나요?"
"처음에 모든 것을 기획하셨나요? 아니면 만드시면서 추가했나요?"
등등 수많은 개발 관련 질문들이 이어졌다. 심지어 '데이브'를 안 해본 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게임의 인기로 인한 것이 아닌 정말 게임 개발에 진심이고 열정적인 분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4. 개발자 네트워킹
이러한 개발자 행사에 가면 강연자들을 모아서 네트워킹을 위한 행사를 한다. 발표는 경험과 지식을 전파하는 목적이지만, 이 네트워킹 행사는 어느 정도 경력을 갖춘 분들끼리 친분을 쌓을 수 있고 조금 더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아싸' 성향인 나도 용기를 내서 항상 참석하려 한다.
앞서 Q&A 때도 느꼈지만 인도인들은 대화에 거리낌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본인이 궁금하거나 할 얘기가 있으면 거리낌 없이 다가와 말을 건다. 그런 E(외향적인) 성향인 분들에게 네트워킹 행사는 최적의 장소 아닌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것을 보며 부담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한편 저렇게 열정적으로 대화하고 배우니까 빠르게 성장하는구나! -라는 부러움도 생겼다.
비단 이런 네트워킹 행사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하이데라바드의 마힌드라 대학 컴공과 학생들인데,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하여 현지에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인도에서 게임 업계의 위상은 한국의 15년 전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교수님들이 게임 행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자비로 행사에 왔고 부모님들도 게임 개발자보다는 IT 업계로 가기를 원한다고 한다.
이들은 게임잼을 직접 주관하고 다른 대학생들과 개발에 대해 토론하고 작품을 평가하고 있었다. 아직 게임 개발 회사가 많지 않고 커리큘럼도 부족하기 때문에 꿈을 가진 젊은 개발자들이 이렇게 서로 지식을 주고받는 것이 무척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기분 좋게 저녁을 사주고 싶었는데... 음... 학생들이 내버렸ㄷ...
그뿐 아니라 다음날 인도 전통 간식 선물과 함께 게임잼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벤바'의 디렉터 아비(Abhi)를 소개해 줘서 저녁을 함께할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첫 디렉팅 작품이 크게 성공하였음에도 여전히 창작에 대해 겸손하고 섬세하게 접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성공 후 차기작 방향성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팀의 비전은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비슷한 상황에서 많은 고민을 나눌 수 있던 정말 좋은 자리였다.
5. 앞으로의 인도
최근 외신 벤처비트(VentureBeat)의 기사에 따르면, 인도 게임 시장은 2024년 5조 원 정도에서 2029년 12조 원 정도로 140%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중국의 게임 인구에 근접해 가는 인도 5억 명 게임 인구는 그동안 가벼운 캐쥬얼 게임을 즐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기기 스팩과 인프라의 발전으로 '배틀그라운드 모바일'뿐 아니라 PC 게임인 '발로란트'까지 즐기는 미드코어 유저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분명 여기에는 사업적인 기회도 있겠지만, 나는 인도 개발자들의 뜨거운 열정이 어디로 향할지가 더 궁금하다.
우리가 중국 게임을 '짝퉁'이라고 비웃던 10~20년 동안 재야에서 무공을 수련한 중국 개발자들이 지금 엄청난 작품들을 들고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5년 또 10년 뒤에 인도의 엄청난 문화 역사적 자산을 기반으로 세상을 놀래킬 게임이 나오지 않을까?
나도 어쩌면 인도에 대해 편견이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출국부터 도착과 귀국까지 세심하게 챙겨준 주최 측과 어디서든 나를 붙잡고 질문을 던지던 열정 넘치는 개발자들을 보면서 다소 무지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앞으로 또 이런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알게 된 수많은 인도 개발자들과 계속 교류하며 세상에 더 멋진 게임들이 나올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싶은 마음이다.
PS: 음식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