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FTA 등 어워드 수상 경력을 가진 작가이자 내러티브 디자이너인 아담 돌린(Adam Dolin)은 '갓 오브 워(2018)'와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 등의 개발에 참여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GDC 내러티브 서밋 첫날 강연을 장식한 그는 스토리텔링과 게임 시스템 디자인의 교차점을 탐구하며,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시스템으로 서사를 강화하는 방법을 공유했다.
1. 게임 시스템을 활용한 감정(emotion) 전달
아담 돌린은 내러티브 전개와 플레이어 경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신 모델(Mental Model)'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사람의 잠재적인 경향을 의미하기도 하는 정신 모델이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을 예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불을 켜는 버튼을 눌렀을 때 불이 켜지고, 뜨거운 물 쪽으로 레버를 돌리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 같은. 우리는 행동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결과를 예상하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다르게 나올 때. 예를 들어 뜨거운 물 대신 아주 찬 물이 나올 때, 우리의 뇌는 강력한 감정적인 반응을 동반한다. 위같은 상황이라면 주로 언짢음, 분노 같은 감정이 들 것이다. 이러한 '정신 모델' 활용은 게임에서도 플레이어의 감정을 유발하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한다.

아담 돌린은 던전 크롤러 장르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미믹'을 사례로 들었다. "상자를 열면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정신 모델을 깨부수는 몬스터인 셈이다. 미믹을 마주한 뒤에 어떤 감정을 느낀 플레이어라면, 이후 만나는 상자마다 특정 수준의 기대감을 갖게 된다.
이런 '감정 모델'을 부수는 것은 주로 점프스케어로 대변되는 호러 게임에서 자주 활용되는 편이다. 아담 돌린은 '사일런트 힐' 시리즈를 좋은 사례로 설명한다. 사일런트 힐2에서 몬스터가 플레이어 근처에 다가가면 지직거리는 라디오 잡음이 들리고는 한다. 이러한 시스템에 적응한 플레이어는 라디오 잡음에 따라 긴장감, 그리고 안도감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 근처에 있어도 라디오 잡음이 안 들리는 몬스터(마네킹)를 만나게 된다면? 플레이어를 놀래킬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시스템이 되어주는 것이다.

2. 플레이어의 감정, 게임플레이로 증폭시키기
기쁨, 슬픔, 즐거움... 플레이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다양하다. 그만큼 내러티브 디자이너가 활용할 수 있는 '정신 모델' 또한 무궁무진하다. 아담 돌린은 게임플레이를 통해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트리거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내러티브와 게임 시스템의 교묘하고도 효과적인 협업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그가 든 예시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에서 미니 게임 형태로 등장하는 '기타 치기'다. 비교적 게임 초반부에 선보이는 엘리의 기타 연주 장면은 전반적인 스토리와 캐릭터 사이의 서사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많은 플레이어들이 여러 연주를 유튜브에 공유할 정도로 연주 시스템 자체로도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플레이어는 엔딩까지 수 차례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 대부분 상황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하지만 엔딩에 다가와서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주인공 엘리의 복수가 가져 온 '상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게임의 마지막, 자신의 연인과 왼손 두 손가락, 기타 등등을 상실한 주인공 엘리는 홀로 남아 조엘의 기타를 쳐본다. 시스템상으로는 초반부와 같은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지만, 두 손가락을 잃어버린 엘리는 제대로 그 곡을 연주할 수 없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연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 돌린은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복수의 대가로 엘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피부로 다가왔다며, 게임 시스템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훌륭한 사례였다고 전했다.
물론 게임 시스템은 슬픔 말고 다른 감정도 촉발하고, 강화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가 든 사례는 '셀레스테'의 전반적인 게임플레이다. 그에 따르면 주인공 매들린이 산을 오르며 내면의 어두움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플레이어와 거의 완벽하게 동일시되도록 설계됐다. 특히, 악당으로 등장하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 '배들린'과의 전투 끝에 새로운 대시 능력을 얻는 순간은 단순한 게임 메커니즘을 넘어 정서적 성장을 이루었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3. 어떻게 하면 게임 시스템 설계로 내러티브를 강화할까?
마지막으로 아담 돌린은 자신이 '갓 오브 워(2018)' 개발 과정에서 맡았던 '전투 중 대사'를 사례로 들면서, 시스템 설계를 통해 효과적으로 내러티브를 강화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가 이번 강연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은, 게임 시스템이 단순히 기능적인 요소를 넘어 캐릭터의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갓 오브 워(2018)' 개발 당시 그는 전투 대화 시스템을 통해, 상황에 따라 캐릭터가 반응하는 대사를 추가해 플레이어의 몰입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그가 활용한 방법은 '조건부 로직(Conditional Logic)'을 활용한 것이다. "산타모니카 스튜디오와의 NDA 계약에 따라 아주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그는, '가상의 궁수(애니메이션 '아처'로 대체되었다)'의 대사를 작성했던 사례를 통해 이를 설명했다.
조건부 논리란, 특정 게임플레이 상황에 따라 게임 내 캐릭터가 다른 대사를 주고받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가령 전투 시간, 받은 피해량 등 확인 가능한 숫자를 통해 전혀 다른 대사를 표시하고, 스토리와 캐릭터 관계를 자연스럽게 발전시키는 방법이다.
좀 더 자세한 예를 들자면, 게임 시스템은 '가상의 궁수'가 전투 인카운터 도중 몇 발의 화살을 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한 발도 쏘지 못한 채 전투 인카운터가 끝났다면, "다음 번에는 제가 좀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와 같은 대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비슷한 방법으로 전투가 끝나는 시간과, 플레이어가 입은 피해량을 바탕으로 쉬운 전투와 힘들었던 전투 이후 각각 다른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방법에는 '쿨다운'을 설정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특정 대사가 한 번 나간 뒤에는 일정 기간동안 같은 종류의 대사가 표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너무 여러 번 같은 대사가 표시될 경우 플레이어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대사를 표시하지 않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플레이어의 감정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갓 오브 워(2018)' 사례로 살펴보면, 아담 돌린은 게임플레이가 후반에 들어설수록 크레토스와 아트레우스 사이의 대화 빈도를 줄였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아무 말 없이도 완벽한 전투 호흡을 맞추는 부자를 보며 관계의 성장과 신뢰를 느낄 수 있다.
강연을 마무리하며, 아담 돌린은 게임만이 가능한 독특한 이야기 전달을 위해서는 팀 단위의 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게임은 작가 혼자서 쓴 텍스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체적인 경험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또, '조건부 로직'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게임 내 상황마다 기록되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프로그래머와 친분을 쌓아 이런 데이터셋을 많이 확보할수록 더 많은 조건부 대사를 통해 내러티브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