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3편을 내지 않는 게임 개발사, 하프라이프와 카운터스트라이크, 그리고 포탈 시리즈를 만든 개발사, 세계 최고의 게임 플랫폼 '스팀'의 주인. 오늘날 밸브(VALVE)는 게임 산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진 기업이다. 하지만 밸브 또한 밑바닥부터 시작한 시절이 있었고, 지난 2023년 '하프라이프'의 25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공개하기도 했다.
GDC 2025에서 만난 모니카 해링턴(Monica Harrington)은 밸브의 공동 창업자로 알려진 마이크 해링턴의 아내이자, 밸브(Valve)의 창립 최고마케팅책임자(CMO)이기도 했다. 강연에서 그녀는 무시당했던 작은 스타트업이 세계 최고의 비상장 게임 회사로 성장한 과정을 자전적으로 풀어냈다.
그러나, 밸브가 공개한 '하프라이프' 2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선 그녀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 개발자(들), 밸브를 설립하다
모니카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90년대 중반 마이크로소프트 시절로 시작된다. 당시에도 그녀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한 지 9년차가 되어갔고, 오피스(Office)의 마케팅을 주도하며 경쟁 제품인 로터스와 워드퍼펙트를 완벽하게 제치는 데 크게 일조했다.
게임 산업과 인연이 닿게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오피스를 성공적으로 마케팅한 후 소비자 부서로 옮긴 그는 게임을 포함한 CD-ROM의 마케팅을 맡았지만, 당시 게임 업계는 너무나도 낯선 환경이었다. 당시 MS에서 시니어 개발자를 영입해 제작한 게임을 대대적으로 마케팅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으나, 사실 그 결과물이 DOS 게임을 윈도우로 포팅하기만 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내부에서 아무도 몰랐다. 프레스 투어 행사 도중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상사가 다급히 전화를 해 왔을 때. 모니카는 그것이 바로 자신과 게임업계의 첫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1996년 봄, 당시 MS는 새로운 유급 휴가 정책을 발표했다. 격무로 지쳐 있던 모니카는 남편 마이크 해링턴과 함께 휴가를 떠나기로 계획했다. 게임에 열정적이었던 남편 마이크 해링턴은 '마이크로소프트 밥(BOB)2'라는 프로젝트가 좌초되며 게임 부서로 옮길지 고민했지만, 후에 그래픽 프로그래밍 분야의 '신'처럼 추앙받게 되는 마이클 애브라시(Michael Abrash)를 돕느라 근태가 엉망이었다. 그는 친구 게이브 뉴웰과 함께 게임 회사를 새로 설립할 것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모니카가 미디엄(Medium)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남편 마이크 해링턴과 게이브 뉴웰은 마이크가 MS에서 프린터 드라이버 엔지니어를 하던 시절부터 친분을 쌓았다. 때때로, 이들은 게이브 뉴웰의 당시 여자친구와 함께 넷이서 워싱턴 주 동부에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게임회사를 설립하겠다는 두 개발자의 논의는 말만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겨졌다. 모니카는 당시 남편 마이크가 마이크 애브라시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id 소프트에게서 퀘이크 엔진 라이선스를 따 오는 과정을 지켜봤다. 얼마 되지 않아서는 "게이브와 함께 5년 짜리 사무실 임대 계약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평온한 휴가를 즐기려던 모니카의 꿈은 그렇게 무너졌다.
낮에는 MS, 밤에는 밸브
휴식은 커녕 밸브를 설립하느라 바빴던 휴가 이후, 모니카는 다시 MS로 복귀했다. 하지만, 게임 사업 마케팅을 맡고있던 터라 MS와 밸브에서 모두 일을 하는 것은 '겸업'에 해당할 소지가 다분했다. 그녀는 당시 상사였던 에드 프리즈(Ed Fries, 최초의 Xbox를 개발한 팀을 이끌었다)에게 솔직하게 털어놨지만, 당시 게임 스타트업은 하루에도 수십 개가 생겨났다가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업을 접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니카는 상사의 용인 하에 낮에는 MS에서, 그리고 밤과 주말에는 밸브 창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마이크 해링턴의 첫 번째 구상은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을 마이크로소프트를 통해 런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MS는 "스토리 중심 게임? 만들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얼마 뒤 워싱턴 주에 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린 날, 모니카는 남편으로부터 "시에라의 켄 윌리엄스 대표를 만나 게임 배급 계약을 체결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녀는 당시에도 MS에서도 풀 타임으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계약 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시에라로부터 지원받은 100만 달러를 얻은 이들은 본격적으로 '하프라이프' 라 불릴 게임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이제 멤버를 구해야 할 시간. 당시 밸브의 고용 기조는 "당신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가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고용하고 말겠다" 였다. 그렇게 피자 배달원, 영국에 있던 게임 디자이너, 특허 변호사, 남편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켈리 베일리, 하프라이프의 모든 음악을 담당한 작곡가)등 여러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게임 업계는 1990년대 중반에도 아주 치열한 시장이었다. 연찬 5천개 이상의 신작이 출시됐지만,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위 10개밖에 되지 않았다. 모니카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밸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 작품이 무조건 그 10위 안에 들어야 했다. 이맘때 즈음 그녀의 남편과 게이브 뉴웰은 'B 게임'을 개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히트작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회사를 먹여살릴 수는 있는 게임'을 목표로 한 것이다. 모니카에 따르면 이 이야기를 듣는 즉이 두 사람을 설득했고, 첫 게임의 목표는 '올해의 게임(GOTY)'을 최소 세 개는 받는 것으로 재설정됐다.
모니카는 밸브가 그리고 '하프라이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게임 이상의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임플레이는 물론이고, 모두가 놀라워야 할 기술적인 혁신또한 필요했다. 무엇보다, 개발자 사이에서 존중받는 게임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남편과 게이브의 몫이었고, 바깥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그녀가 할 일이었다.

'하프라이프'는 하루 아침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이야 모든 게임 업계인들이 '하프라이프'를 보고 산업의 흐름을 바꾼 명작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지만, 과거에는 그저 또 하나의 무모한 개발자들이 만드는 또 하나의 게임이었다. 게다가, 그 개발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1997년 11월 진행한 플레이 테스트, 결과는 '무난하다'와 '재미없다' 사이의 무언가였다. 절대 최고의 게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것은 마이크와 게이브였다. "지연은 일시적이나, 망작은 영원하다" 비슷한 말을 게이브 뉴웰이 남긴 것도 이 즈음. 그렇게 밸브는 지금껏 만든 '하프라이프'의 코드를 모두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로 했다.
시에라는 이미 백만 달러를 투자한 상황에서 더이상 추가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고, 이후 18개월 여간의 개발비는 게이브 뉴웰이 이곳저곳 발로 뛰며 충당해야 했다. 새롭게 목표로 한 출시일은 1998년 크리스마스 기간이었고, 이 과정은 팀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1998년 봄 어느 날, 게이브 뉴웰이 모니카에게 밸브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할 것을 제안했다. 남편 마이크 해링턴이 하프라이프 개발에 몰두할 동안 밸브에겐 변변한 수입 수단이 없었고, 모니카마저 MS를 퇴사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밸브가 날 필요로 한다면, 내가 있을 곳을 밸브 뿐이다"라고 말하며 당시 퇴사를 만류하던 MS와 이별을 고했다. 승승장구하던 MS에서의 커리어, 스톡옵션을 모두 포기한 채.

게임의 출시가 가까워질수록 '하프라이프'를 최정상급 자리에 올려두기 위한 마케팅 준비도 필요했다. 모니카가 처음 생각한 것은, OEM과 협력해 하프라이프가 노출될 기회를 늘리는 것이었다. 당시 인텔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Andrew Grove)에게 당차게 찾아가 "하프라이프 커스텀 버전을 만들어 줄테니, 인텔의 신규 칩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보여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보기도 했다. 물론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인텔과 손을 잡기엔 밸브는, 하프라이프는 너무 명성이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OEM 논의를 했던 것이 독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출시하기도 전부터 'OEM용 게임'이라는 인식으로 잡리잡힐 뻔 한 것. 거기에 배급을 담당했던 시에라가 '하프라이프'의 첫 번째 챕터를 유출하면서 또 어려움을 안겨줬는데, 결과적으로는 바이럴을 타는데 성공하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을 수 있었다.
또 모니카는 과거 MS 오피스를 성공적으로 마케팅한 경험을 토대로, '리뷰'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밸브, 그리고 하프라이프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매체의 기사가 절대로 필요했다. 당시 월 스트리트 저널(WSJ)의 기자였던 딘 타카하시(Dean Takahashi)에게 밸브 취재를 요청한 것도 그녀였다. 모니카는 당시 딘 타카하시와의 통화 내역을 이렇게 설명했다.
딘 타카하시: 예? 밸브요?
모니카 해링턴: 네, V A L V E 라는 곳인데요...
결전의 날, 1998년 크리스마스가 오기까지는 혹독한 시련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팀원들의 스트레스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스타트업의 불행한 상황은 이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피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출시 시점에 다다라 대부분 인원들의 작업이 마무리됐을 때까지도 남편 마이크는 마지막 코드를 위해 미친듯이 일하고 있었다.

"이모, CD가 복사가 된다니까요?"
그 이후 이야기를 하기 앞서, 모니카는 자신의 조카가 이모에게 받은 용돈을 들고 'CD 복제기'를 샀던 일화를 들려줬다. 조카는 그 복제기를 가지고 CD를 구워 반 친구들에게 돌리고는 했는데, 모니카에게는 이것이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조카 세대에게 이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나눔'이었고, 하프라이프는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한 인증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모니카는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하프라이프'가 처음 출시되는 시점은 마치 연옥(purgatory)에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가 실물 패키지 공장에 들어가 여러 상자에 담기고, 사람들에게 이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세상은 너무나 조용했다. 아무런 피드백도 들려오지 않았다.
판매 수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도 없는, 불확실한 순간이 지속되던 그 때. 모니카와 마이크는 온라인 상에서 '하프라이프의 인증 시스템이 끔찍하다'는 피드백을 우연히 보게 됐다. 모니카에 따르면 이를 본 마이크는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가 인증 과정에 대해 불평하면 마이크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구매 내역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웬걸, 증명 시스템에 대해 불만하던 이들 중 게임을 구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증 시스템이 너무 잘 작동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요는 한동안 계속됐지만, 서서히 게임 업계에서 '하프라이프에 대한 리뷰가 돌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모니카는 당시를 회상하며 PC 게이머(PC GAMER)가 '하프라이프'에 준 97점이라는 점수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고 밝혔다. 그 해에 '하프라이프'는 50개가 넘는 상을 싹쓸이했고, 모니카는 www.gameoftheyear.com 라는 도메인을 재빨리 구매해 하프라이프의 수상 내역을 공유했다.


시에라와의 갈등, 그리고 새로운 도전
1998년 크리스마스 직후인 99년 1월, 시에라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밸브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겨줬다. 미팅을 요청하는 전화했는데, 그 핵심은 간단했다. "게임은 대박이 났고, 우리는 다음 프로젝트로 간다"는 것. 당시 시에라의 마케팅 방식은 '출시하면 끝'이었고, 밸브는 '하프라이프'를 하나의 거대한 프랜차이즈로 만드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갈등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한 것이었다.
게이브와 모니카는 당시 충격을 받았다. 모니카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좋은 리뷰'는 곧 시작과 같았다. 50개가 넘는 상을 수상하고, 다른 게임과 차별화할 기회를 잡았으니, 이를 이용해 장기적으로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당연한 전략이었다.

모니카가 이야기하길, 그녀는 시에라와의 미팅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프라이프를 Game of the Year 에디션으로 재출시하고, 대규모 마케팅을 지원해 주세요.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약을 파기하고 밸브를 사랑해 준 업계 관계자들에게 시에라가 얼마나 엉망인지 폭로할 겁니다."
하프라이프 GOTY 에디션은 또 한번 큰 성공을 가져다 줬지만, 모니카는 패키지의 힘이 아닌 대대적인 마케팅 성과였다고 말했다. 얼마나 광고와 마케팅을 했으면, 당시 모니카의 어머니조차 마트에서 패키지를 발견하면 "우리 딸 게임인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밸브는 다음 작품으로 '팀 포트리스 클래식'을 출시했다. 개발자, 애드온, 모드 커뮤니티와 협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팀 포트리스'의 모더 출신이 이미 있었던 밸브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방향이었다. 팀 포트리스 클래식은 1999년 E3에서 최고의 액션 상과 최고의 온라인 게임 상을 받았고, 이 시점은 밸브가 '온라인'에 엄청난 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였다.
그 발단은 조카의 CD 복제기(?)로부터 비롯된 인증 시스템이였다. 실물 패키지 시장이 주류였던 당시에는 마땅한 인증 수단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온라인을 활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소비자를 밸브의 시스템과 직접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메리트를 안겨줬고, '하프라이프'가 시에라의 게임처럼 느껴지거나, 밸브가 시에라의 산하 개발사로 보여지는 것이 싫었던 이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밸브와의 이별, 그 이후
하프라이프를 완성하기까지 격무에 시달렸던 남편, 마이크는 1999년 늦은 봄, 밸브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남편의 꿈을 위해 고소득 일자리와 스톡옵션을 포기했던 모니카는 당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참여하지 않았던 시에라와의 계약이 불공정했다는 사실(밸브가 개발하고, 시에라가 판권을 갖는)에 크게 분노했다.
마이크의 퇴사 이후에 모니카는 게이브와 함께 밸브에 남아 스타트업 파트너 관계를 이어갔다. 시에라와 갈등을 겪은 모니카는 밸브의 앞날을 위해 현재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id소프트를 찾아가 퀘이크 엔진의 로열티 상한을 정하는 협상을 진행했고, 시에라로부터 IP 반환을 받을 수 있는 협상 포지션을 잡는 것도 필요했다. 그리고 밸브의 앞날을 위해 새로운 방향을 지정하는 것도.
그녀가 눈여겨봤던 것은 당시 온라인으로 거처를 옮겨가던 여러 산업들이었다. 무엇이 온라인으로 이동중이고,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그리고 밸브가 가진 잠재력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게이브 뉴웰과 모니카는 온라인 게임 마켓 시장이 굉장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모니카는 9장 분량의 기획서를 만들어 아마존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미팅을 가지며 온라인 상으로 게임을 판매하는 플랫폼의 필요성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반면, 게이브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이후에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는, 오늘날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하지만, 모니카는 그 결과를 밸브 안에서 볼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스스로, 다음 챕터를 위해 밸브를 떠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모니카와 마이크 부부는 밸브의 지분을 매각하고, 새 삶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밸브를 떠난 이후, 모니카는 마이크와 산후안 섬, 휘슬러 B.C. 등에서 생활했으며, 때때로 밸브에 조언을 제공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워싱턴 주 범고래 보호 활동을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몇 년 뒤에는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후 마이크가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또 다른 CMO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마이크는 사진 편집 프로젝트인 피크닉(Picnik)을 2010년에 구글에 매각하기도 했다.
모니카는 자신이 밸브를 떠난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밸브 팀을 만나왔으며, 2012년 뉴욕 타임즈에서 밸브의 수평적 조직 문화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때도 협력했다고 전했다. 또 하프라이프의 지적 재산권이 다시 밸브에게 돌아오던 날, 밸브는 모니카에게 '잘 돌아왔어 고든'이라고 새겨진 작은 트로피를 보내주기도 했다.
2016년, 모니카와 마이크는 별거 후 이혼하기로 합의했다. 그 이후에도 모니카는 게이브 뉴웰의 요트를 타고 밸브 직원들과 일본 열도를 여행하는 크루즈에 동행했다.

25주년 다큐멘터리는 알려주지 않는 '모니카의 이야기'
'하프라이프'가 출시 10주년을 맞이했을 때, PC 게이머는 다시 한 번 이를 '역대 최고의 PC 게임'으로 선정했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하프라이프를 일컬어 '역대 최고의 마케팅 사례'라고 추켜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하프라이프' 출시 25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에서는 모니카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다.
다큐멘터리 속에는 하프라이프의 텍스터 아트를 담당한 카렌 로어(Karen Laur)의 인터뷰가 담겨 있는데, 거기서 그녀는 밸브에서 유일한 여성 동료라고는 사무실 관리자 한 명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영상을 본 모니카는 밸브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졌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모니카는 밸브의 창립부터 이별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나는 밸브가 마이크 없이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고, 게이브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팀원의 노력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전했다. 모니카가 미디엄(Medium)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고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이었고, 이번 GDC 강연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어 이뤄진 질문 시간에 그녀는 압박 속 잠 못 이루던 밤과, 개인적·직업적 관계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모든 걸 가질 순 있지만, 동시에는 안 된다"는 말로 스타트업의 치열함을 요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