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에 주름이 슬슬 잡히는, 혹은 정수리가 점점 가벼워지는 게이머들에게는 다들 하나쯤 있다.

"아 그때 그 게임 진짜 재밌게 했는데"

안다. 없을 리가 없지. 클래식은 영원하듯, 추억도 영원한 법이다. 기술은 물론이요, 재미로 쳐도 당연히 지금 게임이 훨씬 뛰어나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 시절만의 재미가 있었다. 부족한 기술과 열악한 환경이 짬뽕되어 만들어지는, 올드 게임의 바이브 말이다.

그리고, 그 '옛날 게임'들이 다 모여 있는 장소. 날이면 날 마다 오지 않는 바로 그 곳. 킨텍스에서 진행 중인 PlayX4 전시장의 구석탱이에 넓게 자리잡은 '레트로 마켓'이다. 진짜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5월 25일이면 끝. 내일을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 어린 친구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게임이면 완전 구릴 거 아냐?"

너무 섣부른 생각이다. 그 시대의 게임들은 그 시대만의 멋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한 번 둘러보자. "아빠는 옛날에 뭐 하고 놀았어?" 라고 물었을 때, 아빠들이 말하는 "어 그런 거 있어"에서 '그런 거'들이 바로 이런 거다. 지금부터, '레트로 게임'을 보여주마.


▲ 지구상에서 가장 독한 게임사인 닌텐도 전설의 시작인 패밀리 컴퓨터, '패미콤' 되시겠다

먼저 보이는 패미콤부터 보자.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서는 당시에도 굉장히 보기 드문 기체였는데, 현대전자에서 동일한 사양의 기체를 라이선싱해 '현대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기 때문이다. 패미콤의 첫 출시가 83년이었고, 현대 컴보이는 89년부터 생산되었기에, 패미콤을 가지고 있는 집은 83년부터 89년 사이 수입판을 직구했거나 사서 들어온, 엄청나게 희귀한 케이스였다. 반면, 이 후속 기체는 굉장히 많은 수가 가정에 보급되었는데, 그 이름하야...

▲ 사진 하단부에 늘어선 '슈퍼 패미컴' 되시겠다.
옆으로 세가의 5세대 콘솔인 '드림캐스트'와 슈퍼패미컴 주니어, 반쯤 가린 PS1이 보인다.

이 슈퍼 패미컴 역시 현대전자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해 '슈퍼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92년부터 판매했는데,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다. 지금 세대 게이머들이 '첫 번째 콘솔'로 가장 많이 기억할 만한 기체 중 하나. 나 또한 굉장히 오랫동안 슈퍼 패미컴을 갖고 놀았다. 아버지가 박살내기 전 까지.

▲ 슈퍼 패미컴용 게임팩의 모습

팩은 이런 형태로 비디오 테이프(비디오 테이프도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곽 같은 곳에 담겨 나왔는데, 대부분은 저렇게 케이스까지 갖고 있지 않고 그냥 안에 들어 있는 팩만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팩(최상단 사진에 나열되어 있는 게 알팩들이다)'이라 하는데, DVD나 CD에 비해 팩 자체가 견고했기 때문에 중고 게임샵에서는 케이스 없이 교환하거나 거래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패미컴을 오래 즐긴 게이머 중에서도 게임 팩 케이스를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게임샵에서 중고 게임팩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 휴대용 기기였던 '게임보이'용 팩. 사진의 모탈컴뱃은 기자가 태어나 처음으로 한 게임이기도 하다.
(기자는 고어에 대한 거부감이 제로다)

▲ '게임보이 컬러'의 팩 들도 보인다. 정말 드물게 한 번씩 봤던 것 같다.

▲ 주변 기기도 다양했다. 건콘 갖는게 진짜 소원이었는데.

90년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때 쯤 짚고 넘어갈 게이머들의 역사. 폭풍의 90년대 말을 장식한 '게임 잡지'다.

▲ 게임피아와 PC PLAYER가 없어서 아쉬웠다.

바야흐로 90년대 후반, Y2K 바이러스가 세계를 암흑에 빠트릴 것이라든지,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멸망이 내일 모레니 하는 낭설이 정설마냥 돌아다니고, TV에서는 이정현씨가 모든걸 다 바꿀 기세로 격렬한 춤을 추던 시기, 자라나는 꿈나무 게이머들은 돈이 없었다.

세뱃돈 싯가가 만 원, 좀 서먹한 어르신은 5천원으로 대충 입막음하던 시절. 게임 잡지는 한 부에 보통 7000~8000원 선에 살 수 있었는데, 무려 정품 게임을 번들로 줬다. 당시 게임 정가가 대략 3만 원에서 4만 원 사이였는데, 그 5분의 1 가격에 게임을 주는 거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당시는 '내가 원하는 게임'을 하는 건 게임 잡지 번들에 내가 원하는 게임이 들어 있을 때나 성립되는 경우였고, 애초에 정보가 제한적이던 시절이라 그냥 게임이면 다 재미있는 줄 알았다. 오늘의 올드 게이머 중 굉장히 다양한 게임을 플레이해보고 남다른 인사이트를 가진 이들은 아마 이 시절에 게임 잡지를 꽤 모았을 가능성이 높다.

▲ 기자도 보유하고 있던 PC 파워진 99년 4월 호. 매번 살 수는 없었지만 30부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그냥 적당한 옛날 게임을 갖다 준 것도 아니었다. 어떨 때는 출시와 동시에 번들로 뿌릴 때도 있었고, 게임을 5개씩 넣어 물량으로 승부하기도 했다. 기자가 받은 마지막 번들은 '퀘이크3: 아레나' 였는데, 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받았던 거로 기억한다. 여튼, 저 출혈 경쟁의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게임 잡지들은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줄줄이 사라졌고, '게이머즈' 정도만 겨우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갔다. 굵고 짧게 활약하면서 오늘날의 골수 게이머층을 키워준 게임 시장의 영웅들이 아닐 수 없다.

이후, 몇 년이 흐르면서 6세대 콘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PS2와 XBOX, 엄청난 명작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 그야말로 콘솔의 황금기. 이 시절 게이머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방구석에서 콘솔을 파다 아버지의 빳다를 경험하는 부류가 하나, 그리고 치킨게임을 시작하면서 시간당 100원 까지 떨어진 PC방에 출퇴근 도장을 찍는 부류가 두 번째였다. 물론 나는 둘 다 했다.

▲ PS2 시절 게임은 지금 봐도 명작이 많다. 다시 보니 두어 개 빼고 다 했네

물론, 게임이 대다수를 이루긴 하지만 '레트로 마켓'이 본질인 만큼, 게임이 아닌 다른 형태의 그 시절 놀잇감들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들 말이다.

▲ 판매자분의 내공에 놀랐다. 도대체 세일러문을 얼마나 애정하시는거야.

▲ 주변에 꼭 한 명씩 프라모델 모으는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다

▲ 레트로라기엔 아직 현역인 친구들도 많지만 요런 것도 팔고

▲ 투머치 레트로도 판다... 매킨토시 플러스면 1986년판이니 40년 전 컴퓨터

▲ 시대순은 좀 뒤죽박죽이지만 미개봉만 모아 파는 곳도 있고

▲ 뭐야 이 신생아들은... 여튼 꼭 레트로가 아니더라도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다.

요기서 한 가지 팁을 주자면, 레트로 마켓은 발품을 파는 만큼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건질 수 있다는 것. 컨셉부터가 벼룩시장에 가깝다 보니 같은 물건을 여러 곳에서 파는 경우가 많고, 가격대도 다르다. 또한, 중고 물건이 많은 만큼 같은 기종에서도 가격 차이가 꽤 나는 편인데, 잘못하면 고장난 물건을 사거나, 시세에 비해 너무 비싸게 사는 경우도 있으니 구경도 할 겸 여러 매장을 돌아보는게 좋다. 레트로 콘솔을 살 계획이면 판매자의 허락을 받고 한 번만 흔들어 보자. 가끔 안에서 덜그럭 거리면서 부품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릴 수 있다.

▲ 화장실 앞에 붙어 있던 안내문. 잘만 고르면 저렴하게 좋은 물건들을 건져올 수 있다.

자. 이제 하루 남았다. 누군가에겐 '그때 그 물건'. 또 누군가에겐 '아빠가 가지고 놀던 물건'을 볼 수 있고, 직접 살 수도 있는 기회. PlayX4 '레트로 마켓'은 5월 25일 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