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오 하자드9: 레퀴엠'
영문명으로 '레지던트 이블 레퀴엠'이 '서머 게임 페스트 2025'의 말미에 등장했을 때, 현장은 뜨거웠다. 전작인 '빌리지' 이후 4년 만의 신작은 충분히 한 해의 주인공이 될 만한 무게감을 보여주었고, 팬들은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었다. 개인적으로 공포 게임에 무척 약한 슈퍼 겁쟁이인지라 다소 남 일 같이 느껴지긴 했지만, 나 또한 그 장면을 보면서 괜히 코 밑을 쓱 훔치며 흐뭇해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상하게 서늘한 느낌이 든 시점은, 발표가 모두 끝난 후 취재 일정을 확인하면서였다. 6월 7일 일정에 떡 하니 들어가 있는 '캡콤 미공개 타이틀 시연'. 출국 전 까지 무슨 타이틀일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발표를 보고 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음 날, 캡콤 데스크 직원에게 시연 세션 예약이 있음을 말하며 슬쩍 물었다.
"그런데, 시연 타이틀이 혹시 RE9임?"
"Yes. Don't speak to anyone."
그렇게, 10년 넘게 이어진 게임 기자 커리어에서 손꼽히게 심각한 위기를 뜻하지 않은 시점에 마주해 버렸다.
바이오 하자드 액션 게임 아니었나
왜 이렇게 무서운 건데
내 상태를 먼저 점검해보자. 전체적으로 공포 게임 대부분에 약하긴 하지만, 내가 저항할 수단이 없는, '아웃라스트'와 같은 장르는 아주 쥐약이 따로 없다. 내 게임 인생 최대 위기는 10년 전,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을 일 때문에 했어야 했던 때인데, 밤새 플레이한 후 집에 가자마자 소주 한 병을 해치우고 그대로 뻗었다. 같이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회사 건물에서 기절한 채 발견되었을 거다.

당시엔 그래도 같이 할 사람이라도 있었다. 이번 시연은 잘 꾸며 둔 암실에서 날 감시하는 캡콤 직원과 단 둘이 갇혀서 진행했는데,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이거 취재하자고 LA까지 왔는데 중도 포기하면, 직업도 같이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이번 작품은 기본적으로 3인칭 시점을 지원한다는 것을 앞선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알고 있었다는 것. 조금은 낫겠지 싶어 자리에 앉자 마자 3인칭 모드를 찾아 옵션을 열었는데, 함께 들어온 캡콤 직원이 매정하게 패드를 가로챘다. 그렇게, 피할 수 없는 1인칭 플레이를 시작했다.
게임의 시작 시점은 '트레일러'의 종료 직후. 주인공 그레이스는 웬 낡은 병동에서 거꾸로 메달린 채 눈을 뜨게 되는데, 이 병동에서 탈출하는 과정이 시연의 분량이다. 게임의 극초반인지, 그냥 편집된 시연 구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난 30분 전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서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고 있었는데, 이제 불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수상한 감금병동에서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임적 특징은 굉장히 '클래식'한 공포 게임의 구조를 띄고 있다는 것. 기존 바이오 하자드 시리즈는 최초 호러 + 액션 게임의 융합 장르로 시작해 어느 순간 액션 게임이 되어 6편까지 이어지고, 7편에 이르러서야 전체적인 리부트를 거치며 다시 호러 게임으로 원점 회귀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리부트 이후의 작품답게 액션보다는 호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어쩌면 시연 외 파트는 액션이 강할 지도 모르지만, 일단 시연 부분은 그렇다.
시연 빌드의 흐름은 이렇다. 병동을 수색해 라이터와 열쇠, 공구 등을 찾고, 이를 통해 퓨즈를 확보한 후 출입문의 전원을 공급하면 끝. 이 모든 과정은 짧은 플레이버 텍스트로 구성된 단서들을 조립해 길을 찾아내는, 고전적인 퍼즐형 탈출 공포 게임의 형태에 가까우며, 단편적으로는 과거 많은 게이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사일런트 힐의 초기 티저 버전인 'P.T'와도 유사하다.

문제는, 이 길지 않은 과정에 몰입감을 더해주는 장치들을 엄청나게 넣어 두었다는 것이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사운드'인데, 환경음이나 오브젝트 사운드 외에도 주인공 '그레이스'의 소리가 함께 들어온다. 작중에서 '그레이스'는 얼마나 오랜지 모를 시간을 병동 침상에 거꾸로 묶여 있던 상태였고, 때문에 건강 상태가 상당히 좋지 못한 상황인데, 이런 컨디션으로 공포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며 보이게 되는 현실적인 반응이 사운드에 묻어난다. 쉽게 말하면, 그레이스의 떨리는 호흡과 끌리는 발걸음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는 것인데, 이 점이 게임의 사실성과 몰입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거기에, 병동 안엔 단순히 그레이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쩌다 생겨난 건지 상상도 안 되는 거대하면서도 흉악하게 생긴 할머니(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 된다)가 돌아다니며 시체의 머리를 뜯어 먹는데, 이 할머니에게 한 번 걸리면 어깨에 잇자국이 나고, 두 번 걸리면 그레이스의 머리도 도시락이 된다. 그리고, 이 할머니의 이동 경로는 대부분의 공포 게임 속 괴물들이 그렇듯, 단순히 Z축과 X축만을 오가지 않는다. 천장의 구멍으로 슬그머니 내려오는가 하면, 가끔은 깜빡이는 조명 밑에 석상처럼 멀뚱히 서 있다가 그레이스를 향해 다가온다. 보는 겁쟁이 입장에선 이러다 심장이 괜찮을까 싶다.

또 한 가지, 이 할머니의 존재 덕분에 깨달을 수 있는 게임의 숨겨진 장치가 바로 '광원'이다. 백열등 수명이 간당간당한지 병동의 얼마 안 되는 조명은 계속해서 불규칙적으로 점등하는데, 이 조명이 점등하는 찰나에 할머니의 그림자가 유리에 비치곤 한다. 마치 '여고괴담'의 귀신이 두두두둥 하면서 순간이동으로 접근해오듯, 조명이 깜빡일 때마다 점점 접근하는 할머니의 그림자가 사람을 정말 미치게 만든다. 스크립트 연출이라기엔 여러 변수에 대응하며 변화하기 때문에 도리어 사실감이 더 커진다.
이런 장치들에 1인칭 시점까지 더해지니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도 겁쟁이 치고는 공포 게임을 (강제로)여럿 플레이 해 보았기에 나름의 극복 방법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부러 죽는 거다. 일부러 몇 번 죽다 보면 별 것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상대적으로 공포감이 줄어드는 식인데, 이번 작품은 그게 안 통한다. 일부러 도시락이 되어 봐도, 다시 플레이하면 또 무섭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니, 내 목적은 '클리어'가 아닌, 시연 시간 30분 버티기가 되어 버렸다. 어쨌거나 끝에 가서 클리어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번 작품, 진짜의 느낌이 난다.
어서 도망쳐라 겁쟁이 동무들
감상을 요약하면, 진짜 더럽게 무섭다. 물론 내가 겁쟁이인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정말 강렬한 경험이다. 실질적인 게임의 흐름이나 골조는 바이오하자드 7이나 빌리지, P.T등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지만, 세월이 지나며 발달한 기술들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진 복합적인 사실감이 공포 게임이라는 장르에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만들어주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시연이 끝난 후, 동석했던 캡콤 직원이 게임 어땠냐고 묻는데 제대로 대답조차 못 했다. 그러게 3인칭 한다니까...
물론, 이 시연만으로 게임의 진면모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임 내 요소들을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될 수도 있다. '바이오 하자드7'도 게임 후반부에 이르러선 액션 요소가 꽤 강해졌으며, 가장 최근작인 '바이오 하자드: 빌리지'도 굉장히 액션성이 강한 게임이었다. 주인공 '에단 윈터스'만 해도 설정만 일반인이지, 저격소총부터 유탄발사기까지 온갖 무기를 활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시연 구간은, 어떠한 공격도 없이 괴물로부터 도망치며, 퍼즐을 풀고 탈출해야 하는 굉장히 고전적이면서도 근본에 가까운 공포 게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연 빌드가 게임 전체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전체적인 게임의 톤과 바이브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이번 작품은 시리즈에서도 손에 꼽히는 '공포' 중심의 타이틀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주인공인 '그레이스'또한 FBI 출신인 것 외에는 일반인에 가까운 스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첫 인상. 그것도 개발사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부분만을 편집한 빌드이기에 이 기사만으로 게임을 모두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호러 게임'으로서의 면모만 보자면 '바이오 하자드9 레퀴엠'은 합격점을 넘어 굉장한 게임이 될 가능성이 있다. 혹시나 나만 무서운가 싶어 다른 나라에서 온 기자한테도 게임 어땠냐고 물어봤다. 911부를뻔 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내심 안도했다. 나만 무서운게 아니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