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생각이 충돌했다. 내가 즐기지 않는 게임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MOBA 게임이자, 1억 명 이상의 일일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단순히 중국 게이머들의 압도적인 인구 수 덕분일까? 만리장성 안쪽 시장의 소식은 리포트로만 접할 뿐이어서 쉽사리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런 고민이 있을 때쯤, 텐센트로부터 초청장 한 통을 받았다. '왕자영요' 서비스 10주년, 그리고 e스포츠 리그인 KPL(King Pro League) 출범 9주년을 기념해 지금의 성과와 앞으로의 글로벌 전략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왕자영요' e스포츠 리그 결승전을 직접 보기 위해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KPL 결승전은 지난 11월 8일, 중국인들의 자부심이 깃든 베이징 국가 체육장, '버드 네스트(냐오차오)'에서 열렸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e스포츠 결승전이 열린다는 것 자체의 상징성과 함께, 현장의 규모는 기대 이상이었다.
6만여 석의 좌석이 단 12초 만에 전석 매진됐고, 최종 62,196명의 관중이 운집해 'e스포츠 경기 최대 관중(Largest Attendance for an Esports Match)' 기네스 세계 기록 등재를 신청했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결승전과 가장 큰 차이점은 '지역연고제'가 확고히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아나운서들은 '지역을 대표한다'는 멘트를 쉴 새 없이 외쳤고, 팬들은 무대 중앙의 거대한 스크린을 기준으로 나뉘어 앉아 "청두!!" 혹은 '충칭!!" 등 자신들의 지역 이름이나 팀 이름을 외치며 응원했다.
이날 트로피를 들어 올린 청두 올 게이머즈(Chengdu All Gamers, AG)의 연고지는 이름 그대로 '청두'다. 8일 베이징에서의 결승전에 이어, 9일에는 우승팀의 연고지인 청두에서 또 한 번의 성대한 축하 행사가 열린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압도적인 무대 연출은 결승전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렸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7,000㎡ 규모의 파노라마 LED 스크린과 128m 길이의 메인 무대는 그 자체로 거대한 예술 작품 같았다. 이 스크린은 무대 상황에 따라 하나, 혹은 다섯 개로 나뉘며 최적의 시각 효과를 선사했다.



관중의 70% 이상이 여성 팬이라는 점도 인상 깊었다. 현장에서 나눠주는 응원 굿즈는 아이돌 콘서트에서 보던 것과 유사했다. 선수들을 단순한 게이머가 아닌 '아이돌'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 보였다. 문화적으로 익숙지 않은 '중국향'에 내심 공감하기는 어려웠으나, 확실히 현장에서 선수들을 바라보는 팬들의 눈빛에는 짙은 동경심이 읽혔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이 팬들의 85%가 베이징이 아닌 외부 지역에서 왔다는 사실이었다. 신장이나 하이난 같은 중국 내 먼 지역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호주 등지에서 야간 기차를 타거나 몇 번씩 비행기를 갈아타고 기꺼이 현장을 찾은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누군가 '최고의 e스포츠 선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우리 선수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e스포츠 리그'를 꼽으라면, 이제 KPL을 후보에 올리게 됐다. 단순히 '중국 내수용', '로컬 e스포츠'라고 한정 지을 수 없는 무언가를 확인했다. 텐센트가 이번 결승전에 전 세계 e스포츠 관계자와 기자들을 초청한 자신감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KPL의 성공 요인은 명확했다. 먼저 모바일 e스포츠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다. 우리와 달리 PC 보급률이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중국은 PC 전국화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스마트폰 시대로 진입했다. 중국인에게 스마트폰은 한국보다 더 밀접한 '제1의 플랫폼'이다.
IP 홀더의 적극적인 지원과 인구 효과가 맞물렸다. 중국에서, 중국 게임사의 IP가, 중국 최고 텐센트라는 IP 홀더의 전폭적인 지원과 막대한 인구 효과가 더해져 거대한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을 받쳐주는 '시스템'이 있었다. 단순히 잘하는 선수가 각광받는 구조가 아니라, 아마추어, 대학 리그, 여성 리그 등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탄탄한 에코 시스템이 10년 가까이 리그를 지탱한 원동력이었다. 8일 버드 네스트에서 만개한 6만 관중의 함성은 바로 이 1년의 레이스가 정점에서 만개하는 순간이었다.



텐센트와 KPL의 자신감은 이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이 시스템을 '생태계 이식'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심고 있다. 1,500만 달러를 투자해 글로벌 생태계를 구축하고, KPL 코치들을 해외로 파견해 '경쟁 상대'를 직접 육성하고 있다.
베이징에서 목격한 것은 단순한 결승전이 아니었다. KPL이 9년간 쌓아 올린 '시스템'—고정 참가팀 제도(프랜차이즈), 샐러리 캡, 그리고 6만 관중을 운집시킨 지역연고제—는 이제 중국을 넘어 사우디 EWC가 벤치마킹하는 '이정표(North Star)'가 되었다. 텐센트의 IP 운영 능력과 EWC의 막대한 자본력이 결합한 '톱다운(Top-down)' 방식의 e스포츠 질서가 새로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스타크래프트' 시절부터 이어진 상향식 생태계의 성공 신화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글로벌 무대에서 통용될 자체 IP 확보에 소홀했고, 특정 종목에 대한 과도한 쏠림 현상을 안고 있다. 그 사이 중국은 대학 리그, 여성 리그 등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탄탄한 생태계를 완성했다.
KPL의 성공은 막대한 자본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철저히 설계된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 풀뿌리 생태계의 힘이다. 슈퍼스타 개인의 역량에 기댄 현재의 구조를 넘어 우리만의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위대한 e스포츠 선수가 있다. 하지만 어느새 위대한 선수'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위대한 선수의 등장은 시스템의 성과라기보다 '운'에 가깝다. 보다 근본적인 장기 성장을 위해, 더 나은 시스템에 대해 더욱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