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카츠히코 패미통 그룹 대표와 함께 무대 위에 오른 호리이 유지는 20년 만에 부산을 찾았다며 한국에서의 첫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이 순간이 떨리기도 하지만, 귀중한 기회라며 드래곤 퀘스트의 개발 과정과 자신의 철학을 공유했다.

1 드래곤 퀘스트, 인정받은 게임의 가치
유지 디자이너는 최근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게임 개발자로는 최초였다. 오랜 기간 게임 업계에 몸담은 그는 게임을 안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가 많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표창을 받은 것이 개인적으로도 감개무량 했지만, 게임이 산업으로 제대로 인정받은 것이라는 데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고 전했다.

훈장까지 받을 정도로 업계에 이름을 남긴 그의 뒤에는 드래곤 퀘스트라는 게임이 있다. 1986년 첫 작품이 출시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는 PC에나 있던 RPG를 패미콤으로 거의 처음 옮겨낸 작품이다. 이러한 시도는 당대 가장 좋은 성과를 내고 있던 패미콤 시장, 그리고 액션이나 스포츠 게임이 주도하던 시기 RPG를 내면 큰 히트를 칠 것이라는 판단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남들이 시도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오늘날 스마트폰 사진 한 장의 몇백 분의 일 정도인 고작 64KB밖에 되지 않는 용량 안에 게임의 다양한 요소를 담아내야 했다. 어드벤처, 문장, 서사, 스토리, 시나리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패미컴으로 만들어내는 건 분명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호리이 유지가 시나리오에 집중했던 건 만화가를 지망했던 그의 어린 시절 꿈이 반영된 내용일지도 모른다. 만화 원작 스토리를 작업하기도 했던 그는 어느새 컴퓨터의 상호 작용에 매료됐다. 만화는 일방통행이지만, 게임은 인터랙티브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걸 활용해 만화를 그리면 어떨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만화에서 출발한 그는 대사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실제 드래곤 퀘스트도 지문은 거의 없고, 대사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사실 RPG는 마니악한 장르로 PC에서만 즐길 수 있고, 어른들만 하는 게임이었다. 자유도는 높았지만, 그만큼 게임을 익히고 즐기는 것도 어려웠다. 물론 그게 PC RPG의 장점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반대로 드래곤 퀘스트는 더 쉽게 만들어나갔다. RPG의 핵심 재미인 싸우면서 강해지는 것, 여기에 집중했다.
그 재미를 온전히 전하기 위해 게임 자체는 선형적으로 알기 쉽게 설정했다. 첫 마을에서도 마왕성이 보이게 만들어, '저기에 최종 적이 있구나'하고 알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마왕성에 도달할지 생각하면서 흥미를 붙이는 식이다.

RPG, 드래곤 퀘스트가 주는 또 다른 재미는 주인공의 이름 입력에 있었다. 드래곤 퀘스트는 게임을 시작할 때 이름을 입력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주인공의 이름이 된다. TV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이게 감동을 주는 포인트였고, 게임만이 가진 인터랙티브한 특징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주인공에 이입하고, 강해지게 된다. 또 게임에서의 체험을 통해 점점 재미있어지는 장치로서도 쓰였다.
호리이 유지는 사람들에게 있어 최고의 재미는 인생을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임은 또 다른 나를 경험하게 만들고, 그걸 즐길 수 있는 최적의 매체인 셈이다.
2 왕도 속 이벤트, 그리고 캐릭터의 서사
1986년 드래곤 퀘스트가 처음 출시된 이후 많은 일본 개발사의 RPG, 일명 JRPG가 드래곤 퀘스트의 뒤를 따라 만들어졌다. 호리이 유지는 이러한 상황을 굉장히 즐겁다고 떠올렸다. 실제로도 그런 작품을 많이 즐기고, 스스로 다른 이들이 만든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는 것, 유저 입장으로 게임을 즐기는 새로운 재미의 순간이라고 떠올렸다.
특히 인상적인 게임으로 젤다의 전설을 꼽았다. 액션적인 요소를 체험할 수 있었기도 했지만, '이게 오픈월드지'라고 생각할 정도의 만족도를 보여줬다. 호리이 유지는 이런 게임을 플레이할 때면 게임 개발자로서 분석하거나, 연구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즐거운 느낌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히 내러티브가 있는 게임을 다수 만들었다. 액션이나 다른 장르에 대한 생각도 있었지만, 언제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원체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TV 드라마를 특히 즐겼다. 그건 한국 드라마라고 다르지 않았는데 '눈물의 여왕'이나 '내 남편과 결혼해줘' 같은 한국드라마를 최근 즐겨봤다고 전했다.

다양한 이야기를 즐기는 호리이 유지는 드래곤 퀘스트의 이야기 구조에서 왕도를 목표로 하면서도 생기는 여러 이벤트의 재미에 집중했다. 드래곤 퀘스트는 마왕을 쓰러트린다는 왕도를 목표로 한다. 여기에 이야기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재밌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스토리의 집필 방향은 작품마다 달랐다. 어쩔 때는 갖은 이벤트를 먼저 채우고 거기서 진지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반대로 6편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두개의 맵 구성을 떠올리고, 꿈과 현실로 그걸 확장해나가는 식으로 만들기도 했다.
호리이 유지는 이런 이벤트를 떠올리는 시간을 즐겁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걸 유형의 게임으로 만드는 과정, 방대한 대사를 쓰거나 몬스터 데이터를 만드는 과정 등의 어려움이 뒤따른다고 밝혔다. 하지만 마치 산을 오르는 것처럼, 잘 만들었을 때의 달성감 역시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3 추억을 재현하는 리메이크의 여정
호리이 유지가 드래곤 퀘스트의 변곡점으로 꼽은 작품은 드래곤 퀘스트4다. 이건 드래곤 퀘스트3의 큰 성공 이후의 고민도 뒤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드래곤 퀘스트3는 학생과 직장인이 출근이나 등교까지 미루고 게임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등 큰 사회현상을 일으켰다. 엄청난 기대치가 있었고, 그 기대에 어울리는 작품이 나왔다. 이런 관심은 기쁜 일이지만, 후속작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일종의 부담감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도 컸는데, 그때 해결책으로 떠올린 게 캐릭터의 완성이었다.
4편부터 주인공의 보조임에도 각각의 이야기를 담은, 캐릭터의 서사나 이벤트에 더욱 집중했다. 살아있는 캐릭터가 작품의 생명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스토리 이후에도 MMORPG, 온라인 서비스에 대한 도전도 있었다. 실제로 10편의 제작 당시 온라인 게임에 넘버링을 붙여 출시할지, 아니면 드래곤 퀘스트 온라인이라는 식의 이름으로 출시할지 고민했다. 다만, 확실히 넘버링으로 출시했을 때 더 많은 플레이어가 플레이할 것이 분명했다. 호리이 역시 문턱이 높은 온라인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이 플레이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드래곤 퀘스트10이 되었기에 더 많은 시리즈 팬이 온라인 게임의 즐거움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시대는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드래곤 퀘스트3가 HD-2D 기술을 통해 리메이크됐고, 최근에는 드래곤 퀘스트 1과 2가 리메이크 합본으로 출시됐다.

1편은 사실 패미컴으로 출시된 첫 작품인 만큼, 이벤트도 적고, 대사도 적고, 몬스터 수도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3편 리메이크 이후 1편 리메이크를 출시하면 분명 허전한 느낌이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당시, 아름답게 남아있는 추억을 역으로 재현하려고 했다.
2편의 경우에는 이번 리메이크 3부작 중 마지막 순서이기에 힘을 주고자 했다. 특히 2편의 엔딩 내용은 오랜만에 호리이 유지가 직접 썼는데 직접 하고싶은 마음이 들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드래곤 퀘스트7까지는 스스로 직접 작성하고 노력했는데, 그 감정을 다시금 느낀 셈이다.
앞서 언급한 드래곤 퀘스트7은 리이매진이라는 타이틀로 리메이크되어 출시될 예정이다. 호리이 유지는 7편 제작 당시를 떠올리며 확장된 용량과 다양한 시도의 과정이라고 회상했다. 게임 매체가 카트리지에서 CD로 바뀌면서 훤씬 큰 용량, 3D 맵을 구현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맵을 회전시키고, 다양한 석판을 활용한 맵을 구상했다. 당시에는 도전적이었지만, 길을 찾기 어렵다는 의견도 많았다.
리이매진은 어떤 의미로는 덜어내고, 한편으로는 더 집중하게 쉽게 만들고 있다. 디오라마 같은 연출에, 2월 출시를 앞두고 호리이 유지가 직접 개발 역시 잘 마무리되고 있다고 밝혔다.
4 플레이어의 반응, 그리고 채우기
1980년대부터 계속 게임 디자이너로서 여러 게임을 만들었지만, 호리이 유지의 개발 의욕은 여전하다. 게임을 플레이하고, 즐기는 게 여전히 즐겁다는 그는 '이런 놀이를 플레이어에게 제공하면 어떨까?'라는 끊임없는 아이디어에 여전히 게임 개발을 놓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계속 할 수밖에 없다고 웃으면서 말하기도 했다.
개발 과정도 즐겁지만, 그만큼 즐거운 순간은 게임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순간이다.
호리이 유지는 평소 X 등의 SNS를 즐겨 본다고 말하며 게임 플레이에 대한 소감 뿐만 아니라, 게임을 플레이하는 실황 영상과 그에 대한 반응 역시 즐겁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나아가 플레이하는 장면을 보는 것 역시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라고 봤다.
그리고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거나, 실황을 보거나, 어느 한 쪽을 더 우선한다기 보다는, 게임 플레이를 본 사람들이 게임이 재밌다고 생각해 플레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물론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실황 영상에 어느 정도 제한을 두고 있지만, 실제로도 게임 실황을 많이 보고, X 등의 SNS 반응 역시 체크하며 향후 제작에 대한 힌트를 보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유머와 진지함에 대한 균형 역시 호리이 유지가 신경 쓰는 부분이다. 자신을 장난꾸러기라고 밝힌 그는 장면 곳곳에 유머러스한 장면을섞는다. 이런 여유가 없으면 게임을 충분히 즐겁게 즐길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기에 반저 역시 즐긴다.
그전까지 용왕 같은 최강의 적은 무찌를 대상이고, 플레이어와 적대한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용왕이 세상의 반을 줄테니 동료가 되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한 반응도 즉각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네-아니오의 선택이 이루어진다.
물론 게임의 스토리 진행을 위해, 작품의 흐름을 위해 진지한 내용 역시 다룬다. 하지만 계속 무겁거나, 가벼운 장면만으로 이야기를 채우지는 않는다. 밝은 장면이 있기 때문에 무거운 장면이 더 돋보이는, 그런 갭이 플레이어를 작품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호리이 유지는 이런 이야기 구성에 있어 '인풋'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게임은 물론 다른 엔터테인먼트를 포함해 많은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계속 창출만 한다면, 결국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개인 시간이 다른 것에 관심을 두기도 하고, 다른 즐거움을 찾기도 한다. 그게 TV 드라마 감상이기도 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전환하는 즐거움도 함께 언급했다.
5 40년을 이어온 추억의 힘
호리이 유지는 게임을 계속 개발할 것이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에 대해서도 눈을 멀리하지 않았다. 특히 AI의 가능성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평소에도 상담이나 간단한 대화 상대로 AI 챗봇을 사용한다는 그는 형사물 같은 게임에 이런 기능을 접목할 수 있다고 봤다. 용의자와 이야기하고 범인을 찾는 과정을, 음성으로 AI와 대화로 주고받으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식의 이야기다.
그는 VR 역시 가능성이 높은 기술이라며 지금보다 더 착용하기 쉽고, 더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게임이 이런 안경 형태의 기기를 쓰고 즐기는 형태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AR 등 현실의 확장, 온라인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 등이 친구를 만들거나 결혼 상대를 만나는 것처럼,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도 봤다.

이렇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며 개발된 드래곤 퀘스트는 어느덧 내년이면 탄생 40주년을 맞는다. 호리이 유지는 게임을 만들 때는 정말 시간이 가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며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많은 추억이 드래곤 퀘스트에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이야기했다. 레벨업을 했을 때,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 친구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오빠나 형에게 부탁해 보스를 쓰러트리고, 게임 속 비밀을 찾고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것들. 그런 추억이 게임에 담겨있다고 말이다.
나아가 몇번이고 쓰러지면서도 맞서는 기억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이런 경험과 게임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그의 명언이 있다. 바로 '인생은 RPG다'라는 말이다.
호리이 유지는 인생을 살아가며 언젠가 분명 힘든 일을 겪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인생의 고난을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힘든 일도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왔다. 지금은 분명 힘들지만, 경험치를 얻고, 레벨업을 하면 극복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행복 역시 마음가짐에 있다고 말했다.
6 머릿속 걸작을 현실로 만드는 용기
호리이 유지는 게임을 만드는 이들에게 도전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누구든 게임을 넘어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호리이 유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있을 때는 분명 모두 걸작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걸 유형의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것은 다르다. 이 부분이 어려운 부분이다. 때로는 게임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있고, 실패를 하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분명 공부가 된다.
실제로 드래곤 퀘스트 이전에 호리이 유지의 대표작이자, 걸작으로 꼽히는 '포토피아 연쇄 살인사건'은 그가 직접 순서도도 짜고 프로그램밍을 해나가 완성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 게임을 만들 때 할 수 있었던 건 베이직 명령어 4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하나씩 만들어가고, 하고 싶은게 생겼을 때마다 그걸 찾아보면서 조금씩 배워나갔다. 처음부터 100 중 100을 전부 외울 순 없다. 하지만 필요한 걸 하나씩 익히면 100 중 1이라도 배울 수 있다. 시도하지 않으면 그 1조차 배우지 못하고 말이다. 호리이 유지는 처음부터 모두 배울 필요는 없고, 작은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머릿속에 있는 걸 꺼내보고 만들어보는 것. 그렇게 실패하고 배우다보면 언젠가 머릿속에서만 걸작이던 아이디어는 걸작 게임으로 완성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