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숫자를 세어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북미 서버에서 처음 시작했으니 햇수로 18년이 됐다. 18. 숫자로 이렇게 직접 말하니까 묘하게 기분 이상하게 오래했구나 싶다. 그런데 그 오랜 기억 속에 지금처럼 순수 게임이 재미있어서 대전 찾기 버튼을 광클한 게 얼마만인가, 딱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 내 기억이 너무 오래된 탓일까, 아니면 말파이트를 하는데 '궁극기 대변혁'이 나와 나를 거나하게 취하게 만든 도파민 때문일까. 그렇게 난 멀리서 평타 한번 칠까말까 고민하는 적 원딜을 박고, 또 박았다.


그렇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무작위 총력전: 아수라장'은 이제는 기억에 남지 않은, 롤만이 줄 수 있는 도파민을 제대로 채워준다. 사실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는 없는데도 말이다.

'증바람'이라는 이명 그대로 게임은 이미 아레나, 전략적 팀 전투 등을 통해 선보인 증강체를 칼바람 나락에 적용한 방식이다. 게임 시작 전 선택하는 룬 대신 1, 7, 11, 15레벨마다 증강을 선택하고 그에 맞는 효과를 골라 조합하며 게임을 굴려나가는 식이다.

그런데 이 랜덤으로 등장해 선택하는 증강이 사람을 증강, 아니 '증말' 미치게 만든다. 주문력 30%만큼 스킬 가속을 올려주거나 궁극기 사용 시 무적이나 CC 면역을 만들기도 한다. 궁극기 피해를 입은 챔피언을 2초 동안 변이시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상 증강만 캐릭터에 맞춰 잘 조합하면 어떤 캐릭터든 OP가 될 수 있다. 무한으로 주문력을 올리는 베이가가 쉴새 없이 스킬을 난사하고, 카사딘은 궁을 쓰며 점멸할 때마다 적을 작은 동물로 만들어 버린다.

제대로 성장했을 때 주는 몸떨리는 이 희열은 라이엇의 여러 시도들이 조합된 결과다. 여러 시도라는 게 말은 그럴듯한데, 사실 이미 있던 요소들을 섞어냈다는 의미다. 증강은 몇몇 아레나 전용 증강을 빼면 이미 봐 왔던 요소. 칼바람 역시 롤의 오랜 역사 속 등장했던 여러 모드 중 사실상 유일하게 협곡 이후 남아있는 모드다. 그런데 이 둘의 조합이 너무나도 좋다.


몇 번은 재밌지만, 너무 빠른 스킬 난사와 티어 정리로 금방 질려버리는 우르프. 증강 도입으로 초반에는 큰 인기를 보여줬지만, 라운드 구조와 솔로 플레이 진입 장벽 문제를 보인 아레나. 전략적 다양성이 적을 수밖에 없던 단일 챔피언 등. 여러 게임 모드들은 나름의 한계가 있었다.

반면 증바람은 기존 칼바람의 룰을 기반으로 협곡보다는 가볍지만, 다른 게임모드보다 극단적인 속도를 추구하지 않는다. 증강과 룬을 제외하면 일반 게임과 같은 시스템으로 챔피언 자체의 변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는 곧 새로운 모드가 가진 거부감을 지웠다. 칼바람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인 챔피언 랜덤에 따른 실패도 고려한다. 랜덤 챔피언의 조합이 망하면, 게임 내내 고통받지만, 증강만 잘 뜨면 '망조합'이 'OP조합'으로 바뀌는 모습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랜덤한 성장이 랜덤한 챔피언 선택이 주는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

기존 협곡, 칼바람 플레이어가 배워야 할 부분은 증강의 역할과 캐릭터에 맞는 좋은 증강을 4~5개 잘 채워 넣는 방식에 대한 이해 뿐이다. 배울 건 적은데, 증강 조합과 챔피언과의 시너지를 고려하면 수많은 빌드를 10~20분 남짓한 게임 안에서 체험할 수 있다.

성장과 전략, 그리고 승리로 이어지는 패턴은 MOBA의 핵심이었다. 실시간 전략의 한 장르로 분류되며 출발한 만큼, MOBA는 전략과 RPG, 팀 대전의 요소를 고루 갖추며 인기 장르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게 앞서 언급했듯 20년 가까이 됐다. 게임이 주는 핵심 재미를 느끼기 위해 길게는 40~50분이나 하는 게임을 플레이해야 한다. 단순히 슈터만 봐도 이 기간 밀리터리 슈터, 택티컬 슈터, 히어로 슈터, 배틀로얄, 익스트랙션 등 수많은 장르 변주와 유행의 흐름이 있었다.

증바람도 사실 기존에 만든 것들을 섞어낸 셀프 잡탕솥밥일 텐데, 랜덤성의 활용과 칼바람이라는 조리법을 만나니 없던 감칠맛을 더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신규 모드의 등장에 라이엇도 부담이 적다. 새로운 모드가 큰 호평과 함께 기존 칼바람 나락 게임 수는 크게 줄었지만, 정작 일반 게임의 수 자체는 기존 수를 유지하고 있다. 협곡에 이은 두 번째 게임 모드로서의 인기. 그리고 기존에 잊고 있던 흥분을 더 압축된 시간 안에 전달할 수 있다는 트렌디함. 그게 수많은 롤 커뮤니티나 스트리머, 게임 크리에이터들의 관심으로 드러나고 있다.

유일한 문제는 이게 결국은 기간 한정 모드라는 점이다. 시즌 업데이트에 맞춰 6일을 끝으로 종료될 예정이다. 물론 이전 여러 게임 모드가 그랬듯 언제든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지금의 관심을 보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과도한 성능을 내는 증강과 챔피언 조합의 밸런스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상시 모드인 협곡이나 칼바람 역시 별도의 게임 모드 종료 없이 밸런스 조정을 진행한다. 여기에 성능 조정을 이유로 조합을 제한한다면, 과거 몇몇 게임 모드가 그랬던 것처럼 증바람이 주는 과장된 재미 역시 깎여나갈 가능성도 있다.

결국 '이렇게 재밌는데, 잘 나가는데 종료냐'로 이렇게 마무리하려는 글이었다. 그런데 라이엇은 조용히 증바람의 연장을 알렸다. 물론 4일 후 종료가 다시 예정된 연장이긴 하지만, 내 도파민 생성기의 수명도 4일 연장했다.

연장이고 뭐고 어쨌든 라이엇은 좋은 말로 할 때 눈치 챙기고 증바람의 정식 모드화를 발표하라. 발표해줘.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