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난 1년이 지난 2022년에 이르러 정식 출시가 이뤄지고서야 게임을 시작했다. 이유인즉, 별로 재미가 없어 보였다. 시대착오적인 도트 그래픽,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배경. 아무리 봐도 직관적으로 재미있어 보이질 않았다. 게임을 시작한 이유도 별 것 없었다. 해외출장에서 빈 시간에 도무지 할 게 없어서, 노트북에서도 돌아갈 만한 가벼운 게임을 찾다 가격도 가벼워서 사본 게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밤 새다가 하마터면 해외출장을 다 망칠뻔했다. 그래픽이고 나발이고, 이 게임의 로직은 그냥 미쳐 있었다. 수백 개의 도전 과제와 스테이지를 깰 수록 늘어가는 무기와 조합. 그리고 뭘 해도 전판보다는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는 기묘하게 정밀한 성장 곡선까지. 이후 수없이 쏟아져 나온 속칭 '뱀서류'도 웬만한 건 다 찍어 먹어볼 정도로 난 이 게임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뱀파이어 서바이버'의 어셋과 로직을 그대로 따다 장르만 바꿔 버린 '뱀파이어 크롤러'가 모습을 보였다. 던전 크롤러가 다 그게 그거지 하면서 반신반의로 시작한 게임.
인정한다. 또 밤 새게 생겼다.
장르는 바뀌었지만, '중독성의 로직'은 그대로
원전 뱀파이어 서바이버의 재미는 뭘까? 과거에도 무엇이 이 게임을 계속 하게 만드는지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구했었는데, 당시 결론은 "탄탄한 모티베이션"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뱀파이어 서바이버는 게임을 계속 플레이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여러 경로로 만들었다. 첫 판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죽지만, 그렇게 몇 번 죽으며 강화를 하고, 새 무기를 얻고, 새 맵이 열리고, 거기서 비밀을 찾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플레이 타임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난다.
그리고, '뱀파이어 크롤러'는 장르만 다를 뿐, 뱀파이어 서바이버와 완전히 똑같은 디자인을 지니고 있다.

처음 가는 던전에는 숨겨진 관짝이나 새 카드, 유물이 등장한다. 전작에서는 '서바이버'지만 이제는 '크롤러'가 된 익숙한 인물들을 하나씩 해금할 수 있으며, 유물과 아르카나를 통해 조금씩이나마 더 강해진다.
'강화' 시스템 또한 똑같다. 던전을 돌 때마다 얻는 재화로 공격력부터 마나의 양, 공격 횟수(투사체)등을 소폭 성장시킬 수 있고, 올릴 때마다 업그레이드 가격이 더 비싸진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볼륨의 도전과제와 이를 통한 콘텐츠 해금 또한 여전하다. 한 판을 깰 때마다 많게는 십수개의 새로운 요소가 해금될 정도로 많다. 전작인 '뱀파이어 서바이버'에서도 이 '클리어 할 때마다 확장되는 게임 시스템'은 너무나 강력한 동기 부여였다. 장르는 달라졌지만, '뱀파이어 크롤러' 또한 여기서 재미를 만들어 낸다는 점은 똑같다.

하지만, 던전 크롤러에 맞춰서 변하다
기본은 덱 빌딩 로그라이크 던전 크롤러다. 4장 남짓한 카드만 가지고 던전에 뛰어들어, 적들과 싸우며 레벨업을 할 때마다 새 카드를 얻거나 카드를 변조하고, 스테이지의 끝까지 깨면 늘 보던 그 붉은 사신이 나타나 게임을 끝내 버린다.
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카드들은 전부 '뱀파이어 서바이버'에 등장했던 그 녀석들이다. 투사체 속도를 올려주던 '팔 보호대'는 손패(핸드)의 수를 늘려 주는 카드로, 경험치 획득 구간을 늘리던 '매혹구'는 새 카드를 드로우하는 등 조금씩 변조는 이뤄졌지만, 기본적으로 뱀서를 플레이했다면 보는 순간 용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하다.

무기의 진화 또한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광역 피해를 주는 1코스트의 '성경'과 크롤러 버프 지속시간을 늘려주는 주문속박기를 합치면 훨씬 강력한 광역기인 '불경한 기도문'이 되고, 지정 대상에 피해를 주는 '마법 지팡이', 그리고 임시 마나량을 늘려주는 빈 책을 더하면 훨씬 강력한 '신성한 지팡이'가 된다.
여기에, 활력을 더하는게 '콤보'와 '보석', '열' 시스템이다. 낮은 코스트부터 높은 코스트로 순서대로 카드를 꺼낼 때마다 카드 위력은 급격하게 올라가고, 호쾌하게 적들을 쓸어담을 수 있다. 보석 시스템은 카드에 변조를 준다. 단순히 피해를 2배로 늘리거나, 공격 범위를 늘릴 수도 있고, 진화 또한 보석 슬롯을 쓴다.

'열' 시스템은 뱀파이어 크롤러의 '적'이 지닌 게임 로직이다. 적들은 최대 5명까지 '열'을 지어 공격해오며, 플레이어의 앞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공격을 하지 않는다. 공격 카드에 달린 '넉백'이나 '무장 해제'는 적의 공격을 봉쇄할 수 있기에 잘만 하면 적이 수십이 나와도 피해 없이 전투를 치러낼 수 있다. 말 그대로 '잘만 하면'.
결과적으로, 뱀파이어 서바이버나 뱀파이어 크롤러나 적들을 몽땅 박살낸다는 건 똑같다. 적을 피해 이동하는 대신 머리를 굴린다는 점만 다르다. 상대적으로 몸은 편하지만, 생각을 더 해야 하는 '뱀파이어 서바이버'라 해야 할까?

낮은 가격, 높은 재미의 저점
이런 점들이 합쳐지면서, '뱀파이어 크롤러'는 만 원 남짓한 가격 대비 엄청나게 긴 플레이 시간을 보장한다. 재미의 고점은 당연히 한계가 있다. 이 게임은 초호화 그래픽도 아니며, 엄청난 서사를 지닌 몰입감 높은 AAA급 게임도 아니니까. 하지만, 저점은 무척 높다. 다짜고짜 시작해도 재미있고, 덱 빌딩에 딱히 흥미가 없었더라도 너무나 쉽게 게임에 적응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시간 삭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도파민이 미친듯이 터지는 고점을 지닌 게임은 아니지만, 스근하게 시작해 어느 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게 되는 게임. 감정의 곡선은 없어도,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재미 곡선을 지닌 국밥 같은 게임이다.
Poncle. 영국의 이 인디 스튜디오는 또 해내버렸다. 딱히 할 게임이 없다고 느낄 때, 뭔가 다 잊고 집중하고 싶을 때. '뱀파이어 크롤러'는 이제 너무 오래 되어버린 뱀파이어 서바이버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