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임들은 장르 자체를 정의하거나 재정의한, 게임자체로서도 시장에 큰 영향력을 뿌린 게임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 게임이 밸브가 어떤 게임 회사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하프라이프의 모드로서 이를 상업화에 성공한 상징적 사례로 꼽히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그리고 모드 팀을 인수해 자체 IP화 시킨 팀 포트리스에 포탈은 학생 프로젝트 팀을 통째로 영입해 만든 게임이다. 도타2 역시 워크래프트3 모드였던 걸 법적 분쟁까지 끌고가 서비스화하기에 이르렀다.
밸브의 게임 성공에는 검증된 것을 가져와 플랫폼 위에 얹는다는 전략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플랫폼으로도 이어졌다. 밸브는 수많은 게임을 자신들의 플랫폼 안에 올려두고, 판매해 수익을 냈다. 스팀은 밸브를 단순히 게임사가 아니라, 소니나 닌텐도, MS와 같은 플랫포머로서 만든 셈이다. 밸브의 다음 전략은 명확했다. 윈도우8 시절 닫힌 앱스토어 방향을 보여준 MS와 윈도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콘솔 폼팩터로서 PC를 넘어 거실로 게이밍 시장을 옮겨내는 것.

2015년 이 확장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의 밸브는 같은 이름의 스팀 머신과 스팀 컨트롤러로, 그 시도를 다시 성공으로 만드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만든 건, 다름 아닌 스팀덱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10년 전으로 먼저 돌아가야 한다.
스팀을 지키기 위한 탈출구
PC 게이밍을 거실로 옮기려 했던 밸브
팬데믹 시기 이후 기록적인 성장을 거두긴 하지만, 2010년 초반에도 스팀은 이미 성장을 마친, 성숙한 플랫폼으로서 지위를 공고히했다. 동시 접속자 수는 500만 명을 넘어섰고, 게임 판매량도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 PC 게임 유통에서는 비교할 곳이 없는, 지배적 플랫폼이었다. 그렇기에 MS의 윈도우8 앱스토어 전략은 밸브를 위협하기 충분했다.
MS는 2012년 윈도우8에 메트로 UI 인터페이스를 도입하면서 윈도우 스토어를 통해서만 앱을 배포하는 방향을 그렸다. 지금에야 이 전략이 금세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2011년 애플은 맥 앱스토어를 출시하며 이미 스토어 방향성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바일의 앱스토어 모델이 데스크톱으로 올라오는 것. 스팀같은 자체 클라이언트 직접 배포가 막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밸브 입장에서는 스팀이 윈도우에서 막힌다면 그 타격은 계산조차 쉬이 불가능했다.

밸브의 게이브 뉴웰 대표는 PC 생태계에 대한 위기감을 표명했지만, 윈도우가 폐쇄적 플랫폼으로 변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보험을 준비했다. 그게 리눅스였다. 리눅스 자체는 오픈소스였기에 윈도우 의존성 없이 선보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다. 여기에 스팀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한 스팀 OS를 뉴웰 스스로도 헤징 전략(손실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반대 방향 투자를 동시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밸브는 거실로의 진입 역시 그렸다. 스팀이 만든 열린 생태계는 누구나 게임을 올리고, 모드를 만들고, 가격을 자유롭게 정하는 열린 시장이다. 소니, 닌텐도, MS가 완전히 주도하는 콘솔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계산이었다. 지금에야 콘솔 플랫포머들도 인디 게임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스토어 등록도 전보다는 자유롭게 유지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철저히 닫힌 시장이었다.
그렇기에 리눅스를 활용한 스팀 OS로 윈도우 의존성을 떨쳐낸 밸브의 거실 전략은 스팀 머신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됐다. 여기에 마우스와 키보드 없이도 게임 패드로 즐길 수 있게 만든 스팀 컨트롤러 역시 거실에서의 PC 게이밍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제작됐다.
콘솔도 PC도 아니었다
설 자리가 없었던 2015년의 스팀 머신
이러한 리눅스의 전환, 그리고 그걸 필두로 콘솔 시장 점유율 경쟁을 노리던 밸브의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리고 돌아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선택들이 이어졌다.
2015년 출시된 스팀 머신은 스팀 OS로 구동된다. 게임 역시 리눅스 빌드가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게임사가 보기에 리눅스 시장에 대한 수익성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당시 리눅스 자체로 구동할 수 있는 네이티브 빌드 게임은 전체 게임의 2~3%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마저도 AAA 게임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게임도 리눅스 빌드의 경우 최적화나 게임 성능이 윈도우 버전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즐길 게임이 있어야 스팀 머신의 판매가 보장될 수 있었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스팀 머신이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니 게임사 역시 리눅스 버전 제작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게임이 먼저냐 시장이 먼저냐의 논란을 떠나, 아예 순환 구조 자체를 만들지 못했다. 이게 스팀 머신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이었다. 윈도우를 떼어내야 한다는 목적도 제대로 달성해내지 못한 셈이다.
하드웨어 역시 분산되어 있었다. 스팀 머신은 밸브가 직접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OEM 방식이 아니었다. 제조사에 스팀OS와 제작 가이드라인만 제공하고, 실제 제작은 제조사가 결정했다. 이에 같은 스팀 머신임에도 설계와 스펙이 달랐다. 가격도 500달러에서 5,000달러까지 제각각이었다. 같은 세대 동일 콘솔이 똑같은 성능을 내는 것에 비해 스팀 머신은 어떤 모델을 사느냐에 따라 구동할 수 있는 게임 자체가 달랐다.
콘솔의 단일 사양은 단순히 사양이 하나로 통일됐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기기를 사면, 적어도 그 기기 대상으로 출시된 모든 게임을 구동할 수 있다는 보증서가 나오는 셈이다. 하지만 스팀 머신은 그렇지 않았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수많은 모델 중 뭘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셈이다.

가격도 문제였다. 2013년 출시된 PS4의 가격은 400달러였다. 스팀 머신은 구동할 수 있는 게임도 적은데, 가장 낮은 모델을 사도 50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콘솔 플랫포머는 기기 자체를 낮은 가격에 팔아도, 소프트웨어 판매와 서드파티 수수료로 수익을 낼 수 있다. 반대로 스팀 머신을 제작하는 서드파티 개발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원가에 마진까지 더해 기기를 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팀 머신은 콘솔 게이머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이, PC 게이머에게는 PC라는 더 싸고 질 좋은 대안이 있었다. 스팀 머신의 실패는 사실상 출시 단계부터 예정되어 있던 셈이다.
휴대용의 성공을 넘어선 방향성의 전환
스팀 덱이 진짜 해결한 것들
2022년 출시된 스팀 덱의 성공에 대해 아마 가장 많이 접한 글은 핸드헬드(휴대용) PC 게이밍의 부상, 닌텐도 스위치의 대항마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의 2015년 스팀 머신의 실패를 바라보면 스팀 덱의 성공이 다르게 읽힐 것이다.
스팀 덱의 성공 핵심은 윈도우 의존에 탈피하면서도, 그 방향을 기존과 완전히 다르게 잡았다는 데 있다. 시작은 2016년 Vulkan의 등장과 이를 활용한 2018년 DXVK의 등장이다. Vulkan은 다이렉트X와 같은 그래픽 API지만, 윈도우에서만 돌아가는 다이렉트X와 달리 윈도우, 리눅스, 맥 등을 모두 지원한다. 특히 개발자가 관리해야 할 부분은 많아 복잡하지만, CPU의 불필요한 추가 작업량이 낮아 저사양 기기에서 활용하기도 좋다. DXVK는 DirectX to Vulkan, 이름 그대로 다이렉트X 명령을 가로채 Vulkan에서 실시간으로 변환하는 기술이다.

즉, 리눅스에서도 다이렉트X 게임, 윈도우 전용 게임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와인이 윈도우 전체를 리눅스에서 돌아가게 만들긴 했지만, 이전에는 현세대 GPU를 제대로 쓸 수 없고, 성능도 무거운 OpenGL을 쓸 수밖에 없었다. 와인 기반인 DXVK가 붙으면서 게임 성능을 높이고, 스팀 리눅스 런타임을 통해 컨테이너 환경에서 충돌을 줄였다. 그렇게 완성된 프로톤(Proton)이 지금의 스팀 덱, 스팀 OS의 게임 구동에 핵심이 됐다. 단순히 에뮬레이터가 아니라, 윈도우 소프트웨어를 리눅스에서 구동할 수 있는 명령어로 실시간 번역하는 셈이다.
기술적인 부분의 이야기를 덜어내면, 2018년 등장한 DXVK, 그리고 이걸 활용한 프로톤 덕에 윈도우 게임을 리눅스 이식 없이도 플레이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 성능은 윈도우의 초창기 70~80% 수준에 그쳤던 것이 지금은 일부 게임에 따라 윈도우 이상의 성능을 내기도 한다. 여전히 커널 드라이버까지의 번역은 불가능해 안티 치트 등의 기능이 포함된 게임 실행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리눅스가 더 이상 게임 실행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 상황이 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하드웨어 설계도 밸브가 직접 담당했다. 용량 정도의 차이를 빼면, 스팀 덱은 모든 기기가 같은 성능을 가진다. 이는 곧 동일 기기-동일 경험이라는 콘솔 게임의 강점을 구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소프트웨어 관리의 용이함으로 이어졌다. 'Steam Deck Verified' 프로그램을 통해 게임이 스팀에서 얼마나 잘 구동되는지, 스팀이 직접 보장하는 시스템이 마련된 셈이다.

스팀 덱 유저라면 누구나 게임이 실행될지 아닐지 알 수 있게 된 셈
여기에 15W TDP 안에서 사실상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성능을 낼 수 있는 AMD APU의 발전 역시 스팀 덱의 성공을 도왔다. 현실적으로 1시간 이상의 게임 플레이를 보장하게 된 것이다. 특히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를 통해 수수료를 챙길 수 있는 밸브의 플랫포머로서의 위치는 스팀 덱을 400달러라는 공격적인 가격에 출시할 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아이디어는 맞았다, 조건이 없었을 뿐
스팀 덱이 완성한 증명
스팀 덱의 성공은 시장의 변화를 가져왔다. ROG, 레노버, MSI 등 사실상 없던 핸드헬드 PC 게이밍 시장이 스팀 덱 이후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PC 게이밍 시장만이 아니라, 닌텐도 스위치의 성공이 닌텐도 IP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는 것도 함께 보여줬다. 소니 PS6 출시 루머에 휴대용 버전 동시 출시설이 꾸준히 나오는 것도 이 시장 가능성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팀 컨트롤러 역시 스팀 덱의 성공에서 출발했다. 2015년 첫 스팀 컨트롤러는 첫 번째 목적, PC 게이밍의 거실 진출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그 결과 트랙패드 두 개로 마우스를 대체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기존 패드의 여러 버튼을 제거하고, 그 부분을 트랙패드로 대체하는 선택은 기존 콘솔 유저에게도, PC 게이머에게도 낯선 방식이었다. 이는 곧 불필요하게 높은 학습 곡선을 만들었는데,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게임을 즐기는 거실 게임에 어울리지 않았다.

2026년 버전은 스팀 덱의 디자인 아래 다시 만들어졌다
스팀 덱 역시 마우스 조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방식이 달랐다. 익숙한 기존의 게임 패드 레이아웃을 유지하면서도, 유저가 마우스 조작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에 2026년 출시되는 스팀 컨트롤러는 제작 시작부터 스팀 덱을 반으로 쪼개, 액정 부분을 날리고 합치는 방식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사전 공개된 시연과 체험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 실제로 조작해본 스팀 컨트롤러는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만듦새를 보여주기도 했고 말이다.
개발 문화의 변화도 있었다. 치열해지는 4K 하이엔드 그래픽 경쟁 속에서 스팀 덱의 성공은 게임을 만드는 시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게임사들은 단순히 고해상도 에셋과 고수준 광원 효과에 집착하는 대신, 스팀 덱의 해상도 800p(1280x800)에 맞는 그래픽 연출과 자원 배치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다. 고사양 게임의 개발비 상승 속에서도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래픽 경쟁이 스팀 덱의 등장으로 뒤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 시장과 개발 문화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바로 증명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 리눅스 중심의 생태계가 실제 게이머 영역에서 굴러갈 수 있다는 것. 스팀 덱은 그걸 해냈다.

스팀덱은 저사양 기기에 대한 최적화와 보증까지 중요한 시대를 만들었다
2026년, 왜 스팀 덱의 성공을 바라보나
10년 만에 다시 거실 앞에 선 밸브
PC 게임 유통 시장을 장악한 스팀의 힘이, 이번엔 제대로 된 전략과 함께 다시 하드웨어로 향한다. 약 10년 전 출시된 그것과 완전히 같은 이름으로 다시 출시되는 '스팀 머신'과 '스팀 컨트롤러'. 이는 밸브에게는 새로운 출발일 수도, 과거의 실패를 덮으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지금의 시도가 1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윈도우 폐쇄 앱스토어 전략은 폐기됐고, MS의 핸드헬드 PC에서도 스팀을 지원할 정도로 스팀의 영향력은 커졌다. 하지만 그 위협에서 출발한 리눅스, 그리고 프로톤으로 윈도우 게임 대부분을 돌릴 수 있게 됐고, 단일 하드웨어 통제로 콘솔과 유사한 게임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데스크탑 모드로 탈옥 없이도 모드나 패치를 설치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은 PC 게이밍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까지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두가 지금 스팀 머신과 스팀 OS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됐다. 2012년 손실을 막기 위한 보험에 가까웠던 리눅스에 대한 투자는 한 번의 실패 위에 스팀 덱이라는 성공을 낳았고,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다.
2026년 버전 스팀 컨트롤러의 출시는 곧 이루어지지만, 스팀 머신의 출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다. 글로벌 반도체 가격 급등이 변수로 남아 있다. 그런데 2015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때의 밸브는 빈 캔버스 앞에 서 있었다. 지금의 밸브는 그렇지 않다. 프로톤이 생태계를 만들었고, 스팀 덱이 가능성을 증명했으며, 스팀 OS만이 줄 수 있는 열린 경험이 준비돼 있다. 10년 넘게 그려온 밸브의 그림이, 이번엔 제대로 된 붓을 들고 거실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