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블랙앵커 스튜디오는 그 시간을 온전히 비포 더 던을 다듬고 완성하는 데 투자했다. 수차례 테스트를 진행했으며, 최근까지 얼리 액세스를 운영하며 게이머들의 날것 그대로의 피드백을 수집해 게임의 부족한 부분과 더 살려야 할 부분을 꾸준히 파악해 왔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변화도 있었다. 2023년에는 타이틀을 비포 더 던에서 르모어로 한 차례 바꾸면서, 게임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시스템, 게임성을 다듬어 전략(Strategy)과 생존(Survival)이 공존하는 SRPG로서의 면모를 더욱 갈고닦았다.
그렇게 얼리 액세스를 시작한 지 햇수로 3년이 지나, 르모어가 정식 출시로 돌아왔다. '메모리스: 포세이큰 바이 라이트(이하 메모리스)'라는 두 번째 이름과 함께, 한층 달라진 모습으로.
예전에는 너무 매웠지? 그래서 덜 맵게 했어
정식 출시된 '메모리스'는 비포 더 던, 르모어로 불리던 시절과 비교해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겪었다. 이전 버전들은 생존에 초점을 맞춘 면이 강했다. 희망이라곤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분위기에, 스토리 역시 세상을 구하는 여정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랬던 세계관과 스토리가 한층 직관적으로 바뀌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게임의 타이틀이기도 한 메모리스다.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역병과 함께 찾아온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플레이어는 원정대를 꾸려 빛을 잃은 메모리스를 수복하는 여정에 나서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플레이어에게 명확한 행동 동기와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닌 세계를 구하기 위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한없이 어둡고 절망적이던 세계관과 비교하면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직관적으로 접근하기 쉬워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플레이 루프 역시 대대적으로 개편됐다. 이전 버전의 플레이 루프는 다소 단순한 편이었다. 스토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전투와 캠프(휴식)가 반복되는 구조였다. 피해를 최소화하며 전투를 치르고, 그 과정에서 확보한 음식 등 각종 자원을 캠프에서 소비해 캐릭터들의 상태를 관리한 뒤 다음 전투를 대비하는 방식이었다. 전투에서 잃은 체력이 자동으로 회복되지 않았기에, 자원을 어떻게 쓰는 것이 효율적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이는 게임이 추구하는 재미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진입장벽이 되기도 했다. 체력부터 음식 등의 자원 관리, 그리고 출격 자원인 포만감까지 신경 써야 할 요소가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메모리스'는 이 플레이 루프를 손봄으로써 진입장벽을 낮추고 관리 요소를 한결 간결하게 정리했다. 사실상 기존의 자원 관리 요소가 대거 사라진 것으로, 덕분에 이전 버전에서는 특정 캐릭터 조합을 계속 운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웠지만, '메모리스'에서는 원하는 구성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무기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전투에 나서기 전 내구도가 얼마나 닳았는지, 이번 전투를 치르기에 충분한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체력과 마찬가지로 본거지인 카타콤으로 복귀하면 자동으로 회복된다. 원정 중에는 어느 정도 신경 쓰되, 필요 이상으로 관리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전투와 캠프를 오가던 플레이 루프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원정 중에는 체력과 무기 내구도가 자동으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지역을 클리어한 후 바로 카타콤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도 있지만, 이것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카타콤으로 복귀할 수 있는 지역 자체가 몇 곳으로 제한되어 있는 데다 복귀 후 다시 원정을 떠날 경우 수복했던 지역들이 확률적으로 다시 어둠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최대한 오래 원정을 이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제약이 따른다. 바로 '의지'다. 전투 중 턴을 넘길 때마다 의지가 감소하며, 0이 되면 정신이 붕괴해 무방비 상태에 빠진다. 한 명이라도 쓰러지면 그대로 게임 오버인 만큼, 체력과 함께 의지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전투와 캠프를 오가는 플레이 루프가 형성되도록 만든 셈이다.


묘수풀이 느낌은 살리고, 스트레스는 줄이고
플레이 루프와 세계관, 스토리가 사실상 이전 버전과 별개라 해도 좋을 만큼 대대적으로 바뀐 반면, 전투 시스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자칫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던 요소들이 제거되거나 완화됐다는 정도다.

이전 버전 전투에서 가장 큰 진입장벽 중 하나는 '붙잡힘' 상태였다. 적이 바라보는 방향에 인접해 있으면 붙잡힘 상태가 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상태 이상이다. 최소 2배에서 많게는 10배, 20배나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붙잡은 적을 처치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이동조차 할 수 없었으니, 플레이어가 쓸 수 있는 전략의 폭은 여러모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턴제 게임에서 인접 시 이동을 제한함으로써 전략성을 높이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선택지를 좁혀 전략의 폭을 스스로 줄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제아무리 다양한 전략을 짜려고 한들, 선택지 자체가 몇 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반면, '메모리스'는 행동을 제약하던 이러한 요소가 사라짐에 따라 전투가 한결 쾌적하게 바뀌었다. 적에게 발각되면 비명을 지르며 몰려오는 다대다 상황 자체는 여전하지만, 행동이 자유로운 만큼 전략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물론 선택지가 다양해졌을 뿐, 상대해야 하는 적이 많고 강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을 처치하려면 전략적인 행동이 필수다.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는 만큼, 동전을 던져 시야를 돌린 뒤 암살하거나 적들의 특성을 이용해 서로 싸우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수적으로는 불리하지만, 플레이어 측이 유리한 부분도 있다. 첫 번째는 행동력이다. 적들이 기본적으로 이동과 공격을 각각 한 번씩만 하는 데 반해, 플레이어는 공격에 쓰이는 무기 행동력(WP)과 이동, 스킬에 쓰이는 전술 행동력(TP), 두 가지 행동력을 보유해 한 턴에 여러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강력한 공격 한 방에 무기 행동력 2포인트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1포인트짜리 공격을 두 번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일 때도 있다.
전술 행동력은 전략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기본적으로는 이동에 쓰이지만, 전투 중 이동할 필요가 없을 때는 스킬을 사용해 캐릭터를 강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탱커 캐릭터의 방어력을 높여 전방에 배치하고 적의 공격을 유도해 반격으로 처치하거나, 은신 후 기습으로 적을 단번에 제거하는 것도 가능하다. 횃불 등의 도구를 던지는 것도 할 수 있어, 잘만 활용하면 연속 행동으로 여러 적을 연달아 처치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이를 최대한 활용해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발각되기 전 기습으로 적 수를 줄인 뒤, 한 번에 최대한 많은 적을 처치할 수 있도록 판을 짜는 것이 기본적인 흐름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이 각 캐릭터가 지닌 특질이다. 캐릭터들은 저마다 긍정적인 특질과 부정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고려해 진형을 잘 구성하면 한 번에 다수의 적을 처치하는 것도 가능하다.
베켓이 대표적이다. 철벽 태세 시 방어력이 크게 오르기 때문에 전방에 두면 반격기만으로 근접하는 적들을 알아서 처리할 정도다. 에드윈의 지원 공격은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있는 적을 다른 캐릭터가 공격할 때마다 매 턴 1회 추가타를 날릴 수 있으며, 디어뮈드는 적을 처치하면 전술 행동력을 회복한다. 디어뮈드는 전술 행동력을 소모해 무기 행동력을 회복하는 스킬도 갖추고 있는 데다, 기본 무장인 양손 도끼가 대각선을 포함해 전방 3칸을 공격할 수 있어 한 턴에 다수의 적을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특질이 전부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부정적인 특질을 하나둘 지닌 경우도 있는데, 암살자 미엔느는 아군이 인접하면 50% 확률로 다른 위치로 이동해 버리고, 에드윈 역시 적과 근접하면 확률적으로 자리를 옮기기 때문에 공들여 짜놓은 판이 순식간에 틀어지기도 한다.
얼핏 짜증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다행히 그 빈도가 과하지는 않다. 긍정적인 특질이 훨씬 많은 덕에 이러한 요소들은 전장의 안개처럼 전투에 적절한 변수로만 작용하는 셈이다. 플레이어가 받는 스트레스는 최소화하면서도 예기치 못한 변수를 적절한 수준에서 남겨둔, 균형 잡힌 설계라고 볼 수 있다.

극한의 전략에서, 누구나 즐거워할 전략으로

정식 출시된 '메모리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전 버전에서 스트레스를 주던 요소들을 대폭 개선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캠프에서 부족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지 일일이 계산해야 했던 부담이 사라졌고, 체력과 배고픔 등의 관리도 사실상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전투도 마찬가지다. 턴제 게임으로서는 다소 치명적인 수준으로 난이도를 끌어올리던 붙잡힘 상태가 제거되면서, 원하는 전략을 훨씬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 버전에서 진입장벽에 막혀 스트레스를 받았던 플레이어들에게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반대로, 그 극한의 매운맛을 즐겼던 플레이어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다. 매니악한 매운맛에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매운맛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매니악한 요소와 대중성은 양립하기 어려운 만큼, 이 지점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걷어내고 보면, 비포 더 던 시절부터 추구해 온 게임의 본질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생존 요소는 줄었지만 전략의 깊이만큼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전 버전이 너무 어려워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면, '메모리스'는 분명 만족스러운 변화를 보여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