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쌔신 크리드라는 브랜드 안에서, '블랙 플래그'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메타크리틱 점수가 88점. 시리즈 내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2편과 브라더후드의 뒤를 잇는 3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원작 출시 당시만 해도, 이 정도 규모의 해역을 표현한 오픈월드 게임은 없었다. 그냥 비어 있는 바다가 아닌, 콘텐츠로 가득한 바다라는 점에서 말이다.
나아가, '블랙 플래그'는 시리즈의 발전 방향에도 큰 영향을 준 작품이다. 전혀 다른 개념인 '해적'을 어떻게든 암살자의 연대기에 심어넣는데 성공한 유비소프트는 이후 진행된 시리즈부터 '암살단'을 진짜 암살자들의 조직을 넘어 어떤 하나의 신념을 공유하는 범세계적 사상집단으로 풀어내기 시작했으며, 게임 내 표현의 자유도 커졌다. 심지어 암살단이 존재하지도 않던 고대 그리스의 용병이나, 별 상관도 없는 노르웨이의 바이킹 전사까지 포용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도 참 남다르게 다가오는 작품인데, 13년 전, 원작의 리뷰도 내가 진행했던 바 있다. 이미 리뷰했던 게임이 십수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리뷰 소재로 잡히는 경험은 나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일단 곱다. 비주얼이 정말 고우시다.
'블랙 플래그'가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로 나아가면서 가장 크게 겪은 변화는 역시 '비주얼'의 변화다. 원작도 당시 기준으로 하면 어디서 빠지는 비주얼은 아니었으나, 시대가 변한 만큼 지금 보기엔 다소 투박할 수 밖에 없는데, '리싱크드'는 현 시점 기준으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려한 비주얼을 보여준다. 더 멋진 점은, 원작과 동일하게 본작의 무대 또한 화사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리비안 해역이라는 것이다.
덕분에,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는 게임 내내 화사하면서도 한편으로 뜨거운 캐리비안을 마음껏 보게 된다. 13년 전에는 기기의 한계로 다소 거칠고 칙칙하게 보였던 캐리비안의 모든 곳들이 한 단계 더 화사하고, 예쁘게 다듬어졌다.

물론, 이에 대비되듯 '어두운 순간'은 더욱 어두워지긴 했다. 오밤중의 하바나나 비오는 나소,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역은 전보다 더 어둡게 느껴질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단순히 '그래픽이 좋아졌다'보다 높아진 해상도와 유려한 광원의 활용에서 온다. 햇볕이 어떻게 내리쬐냐에 따라 비주얼이 달라지고, 불투명한 표면에도 난반사하는 반사광이 더해져 입체감과 현실성이 늘어났으며, 바다 속에서도 투과되는 미묘한 빛을 잘 표현해냈다.

여기에 비주얼적으로 하나 더 더해진게 있으니, 싱가포르 스튜디오의 인물 조형이다. 회상 신에서 나오는 에드워드의 처 '캐롤라인'의 모습부터 그냥 게임 내 렌더링 컷신으로만 봐도 나쁘지 않은 앤 보니, 게임 도중 함대 간부로 편입되는 루시 볼드윈의 조형은 싱가포르가 유럽이 아닌 아시아 국가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다.

덜지도, 더해지지도 않은 양장본, 결국 에드워드의 이야기
비주얼적 측면을 제외하고, 게임의 전반적인 구조나 서사는 사실 원작과 큰 차이가 없다.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차이라면 현대 파트가 축소되면서 '에드워드' 개인의 서사가 더 깊고 내밀하게 표현되며, 짧게 추가되는 오리지널 퀘스트인 함대 간부들과 관련한 이야기가 더해졌을 뿐이다.
물론, 에드워드 켄웨이의 일대기는 그 자체로도 굉장히 훌륭한 서사다. 욕망과 미숙, 모험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한 여정이 성숙의 과정을 거치며 후회와 회한으로 무르익어가는 이야기 자체는 무척 맛있으며,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전체를 두고 보아도 손에 꼽힐 정도로 훌륭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는 원작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었던 부분이며, 여기서 뭔가 더해진 것은 별로 없다. 설령 있다 해도 이 서사 자체에 별 영향을 주진 않는다.

이와 같은 의도는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의 '전투' 시스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전투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복잡해지고, 보다 치열해졌는데, '신화 3부작'의 시작과 함께 RPG 요소가 대거 편입되면서 매우 큰 변화폭을 보였다. 이전까지는 패링과 회피, 공격이 전투의 핵심이자 끝이었다면 신화 3부작 이후로는 다양한 무기와 스킬 시스템, 독이나 화염 같은 속성 시스템이 더해지면서 이전과 다른 게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크게 변했다.
이유인즉, 신화 3부작 이전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주인공 암살자'의 이야기가 주된 소재였으며, 전투는 이 과정에서 필요한 수단('신디케이트'는 이례적으로 처형 모션에 공을 들였지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도 맥락 상 이 '구작'의 방향을 따른다. 간소화된 스킬 시스템을 도입해 전투에 어느 정도의 변수는 두었지만, 큰 의미는 없으며 그냥 옛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처럼 회피와 패링, 반격으로 게임을 풀어가게 된다.

물론, '해전'은 다소 다르긴 하다. '블랙 플래그'가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이유이며, RPG 요소도 살짝 가미된 해전은 여전히 즐거우며, 비주얼이 나아진 만큼 이전보다 더 박진감 넘치게 펼쳐진다. 다만, 전체적인 게임의 맥락을 보면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는 과거의 작품에 더 가깝다.
해전을 제외한 모든 전투는 간결하게 진행되고, 주인공의 게임 상 스펙이 부족해 못 이기거나, 적이 너무 강한 경우도 없다. 반격 후 테이크다운이면 모든 적들이 한 큐에 해결되며, 굳이 무기가 성능이 좋을 필요도 없이 그냥 기본 무장만으로도 가능하다. 심지어 그럴싸하게 만들어지는 보스전도 반격 후 테이크다운이면 끝난다.

조금 일찍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는 '양장본'과 같은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명작들이 시간이 지나 읽기 여러울 정도로 투박해지면 다시 현대화해 양장본으로 만들어지듯, 이 게임도 그런 게임이다.

그래도 여전히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
하지만, 이런 간결한 진행 방식이 이 게임의 가치를 저해하는 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는 애시당초 그 자체로 완전(완벽과는 다른)한 게임이었으며, 이 게임은 그 정수를 아주 온전하게, 그리고 예쁘게 담고 있다.
에드워드의 일대기는 여전히 즐겁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바다로 나선 청년이 우연찮게 '던컨 월폴'을 만나 암살단과 엮이게 되고, 탐욕을 따르는 길을 걷다 되려 상실과 후회를 겪으며 하나의 인격체로서 성장해가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만나는 여러 해적들과 그들이 지면서 마무리되는 대해적시대의 끝에 이르기까지,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 리싱크드'는 여전히 이 장대한 서사시를 훌륭한 상상력으로 풀어냈던 원작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를 양장본처럼 전달한다.

이 말은 곧, 원작을 플레이하지 못한 이들에게 본작은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무척 훌륭한 게임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원작을 플레이했던, 이들을 기준으로 하면 과거의 그 경험을 되살리고자 한다면 좋은 선택이, 그보다 더 발전한 무언가를 바랐다면 다소 아쉬울 수 있겠다. '리싱크드'는 블랙 플래그의 양장본일 뿐, 후일담이나 확장판까지는 못 되니 말이다.
단 하나, 부정할 수 없이 아쉬운 점이라면 번역 퀄리티가 생각보다 좋지 못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다. 제대로 이뤄진 번역에서도 검수가 부족했는지 오타가 발생하는가 하면, 몇몇 부분은 기계를 돌린건지, 혹은 맥락 없는 스크립트만으로 번역이 이뤄진 건지 아예 의미가 달라지는 오역이 보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오역이 스토리의 진행을 가로막는 중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다소 몰입감이 깨지는 순간이 된다.

그래도,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다. 많은 게 더해지진 않았지만, 오역도 있지만, 바뀐 건 몇몇 퀘스트 라인과 예뻐진 그래픽 비주얼 뿐이지만, 그럼에도 이 게임은 '어쌔신 크리드: 블랙 플래그'다.
그리고, 그 자체로 이 게임은 플레이할 가치가 있다. 원래 좋은 게임이었으니까. 때를 놓쳐 플레이하지 못했음에도, 시간이 지나며 투박해진 모습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게이머들에게 이 게임은 좋은 게임일 수 밖에 없다. 이미 그 점은, 검증된 사실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