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 네스트'가 출시되었다.

네 개의 기계 다리가 달린 거대한 포탑을 조종하는 게임. 딱 이 정도만 알고 있었던 시절에는, 이 게임의 모습을 다소 내 마음대로 상상했다. 다리가 달린 포탑을 타고 다니면서 적들을 때려 부수는 액션 게임인 줄 알았다.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아 개발사에 문의해 리뷰 코드를 요청했으나, "저희가 2명 뿐이라 빌드 깎아야 해서 리뷰 코드가 따로 없습니다"라는 답변이 왔다. 단 둘이 만드는 인디 게임인 것도 이때 알았다. 겸허한 마음으로 출시를 기다렸다가 내돈내산으로 게임을 사 플레이를 시작했다.

음.

뭐야 내 군생활이 왜 여기에 있지?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포병'을 알려주겠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INVEN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2008년 6월. 한 까까머리 청년이 의정부 보충대로 향했다. 적당히 한 달 정도 구르고 나서 자대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쿨쿨 취침. 일어나라는 일갈에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을 보자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길다란 포신과 쩍 벌어진 포다리. 뭔지 몰라도 여러 기계적 장치가 하나로 섞여 있는 거대한 강철 덩어리. 병과 번호 1312. 내가 155mm 견인포병이 된 날이었다.

확실히 하고 가자, 이 게임은 '시뮬레이터'다. 다리 달린 탱크를 타고 다니면서 직사로 적들을 두들겨 부수는 액션 게임이 아니다. 클릭 딸깍으로 포탄을 갈기는 월드오브탱크와는 다르다. 그보다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게 뭐냐고? 포병의 모든 것, 아니 정확히는 40% 정도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포탑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생각보다 거대하다 ©INVEN

포병 출신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포병은 그 안에서도 총 5개의 특기로 나뉜다. 포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기준을 잡는 '측지', 어디를 쏴야 하는지 보는 '관측', 이 정보들을 가지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겨 제원을 내는 'FDC(사격지휘, 보통 부대에서는 불타는 댄싱 클럽이라 했다)' 모든 병종의 소통 수단을 연결하는 '통신', 마지막으로 직접 몸으로 포를 다루고, 대포병 날아오면 같이 쓸려나가는 영웅적 특기인 '전포'가 있다. 물론 나는 전포였다.

보다 쉽게 말하면, 반고리관과 눈, 두뇌, 신경망, 주먹의 역할이 나뉘어 있다. 그리고, 한 발을 쏠 때도 이 모든 구성인원들이 제 역할을 해 줘야 한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포격 지원!"을 외친다고 바로 딸깍 눌러서 포탄이 날아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언 네스트'는 이 중에서도 '전포'와 'FDC'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포대의 위치나 관측반의 관측 정보는 포탑 안에 있는 팩스를 통해 계속해서 전달된다. 플레이어는 이 전달된 정보를 바탕으로 치밀한 계산을 거쳐 적의 위치를 특정하고 사격 제원을 따야 하며(여기까지가 FDC의 임무다), 포탄과 장약을 장전하고, 사각(포탑의 상하 각도)와 방위각(편각, 포탑의 방향)을 잡은 후 방아끈을 당겨 직접 격발(여기까지가 전포의 임무다)까지 해야 한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관측이랑 통신, 측지가 할 일은 다 대신 해 준다. 이렇게 편할 수가 ©INVEN

5대 특기 중 2개만 하면 된다. 그러니 40%다.

문제는, 이 과정이 재미있냐는 것인데, 내가 약 2년 정도 직접 해본 입장에서 말하면 사실 그리 재미있지 않다. 많은 이들이 포병은 대포를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포병의 주무기는 곡괭이와 삽, 그리고 오함마다. 포병 중에서도 황족인 자주포병들의 생활은 내가 알 수 없지만, 견인포병들의 일과는 막노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재미있을리가 있나.

하지만, '아이언 네스트'는 꽤 많이 다르다. 포병이 가장 힘을 많이 쓸 때는 포를 방열(대략적인 사격 방향을 잡고 포를 사격 준비 상태로 만드는 것)할 때인데, 얘는 방열이 이미 다 되어 있다. 곡괭이도, 삽도 오함마도 필요 없다. 심지어 장전도 자동이다. 탄약수들이 땀 뻘뻘 흘리며 포탄을 나를 필요도 없고, 부사수가 울트라맨처럼 장약을 보고할 필요도 없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이 게임은 포병이 해야 하는 모든 것 중, 재미있는 부분들만 뽑아 전혀 힘들지 않게 추려 놓은 궁극의 '포병 시뮬레이터 희망편'이다. 내 군생활이 아이언 네스트 같았으면 나는 장교 재입대를 했거나 부사관 테크를 탔을 거다. 물론, 실제로는 전역 후 부대 쪽은 쳐다도 안 봤지만 말이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핫하 명중이다©INVEN


게임만 하는데 성장하는 포병으로서의 나


너무 포병 얘기만 한 것 같으니 게임적 관점에서 설명해보자. 아이언 네스트의 각 임무는 상급 부대로부터 사격 임무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간단하게는 적 부대나 탄약고가 있으니 이를 파괴하라는 임무부터, 깜깜해서 앞이 안 보이니 조명탄 좀 쏴달라는 요청, 아군 부대가 돌진해야 하니 연막탄을 전개해달라는 요청도 간혹 이뤄진다.

그리고 이 요청은, '클릭해서 쏘세요'라는 간단한 요청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이언 네스트의 위치: H3 5:5
관측반#1 M8 2:8
관측반#2 O1 4:5
관측반#3 D3 7:2

표적#1
- 관측반 #1로부터 17.79km
- 관측반 #2로부터 방위각 275도

표적#2
- 관측반 #1로부터 방위각 176도
- 관측반 #3로부터 방위각 283도

이런 식으로 정보가 날아오면, 이제부터 포탑 중간에 놓인 플로팅 보드에 기물을 놓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사격 제원을 따야 한다. 각 좌표의 위치에 포대와 관측반 기물을 놓고, 컴퍼스와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가며 정확한 사격 제원을 딴 후, 이걸 기계에 입력하면 사각이 나온다.

그 이후부터는 전포의 임무다. 적당한 탄종을 골라 장전하고, 사거리에 따라 필요한 장약을 넣어준 후, 사각과 방위각을 입력하면 거대한 포탑이 우르릉대며 회전한다. 모든 과정이 끝나면 방아끈을 당겨 발사하면 끝. 이후 포탄이 날아가는 궤적이 플로팅 보드에 뜨고, 착탄 시 항공 정찰 지도가 더해지며 명중 여부를 알 수 있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일단 정보를 받고 ©INVEN

이렇게 써놓고 보면 이게 뭐가 재미있나 싶겠지만,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단순한 시뮬레이터는 아니다. 왜냐? '전황'이 꾸준히 변하기 때문이다.

아이언 네스트는 나름의 서사 라인이 있고, 플레이어의 활약에 따라 전황이 계속해서 변한다. 멋모르고 튀어나온 적 보병 부대에 고폭탄을 갈겼는데 갑자기 대포병 경보가 뜨면서 타임 어택이 걸리기도 하고, 후반에 이르면 표적이 이동한다거나, 숨어 있어서 관측이 안 된다거나 하는, 포병 입장에서는 욕만 나오는 상황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젤 약한거로 쐈는데 아군이 왜 터져 ©INVEN

재미있는 건, 이런 '의외의 상황'이 일어날 때, 꾸준히 임무를 수행해 온 게이머라면 어렵긴 하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사격 임무도 계속해서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부터 장약과 사거리, 사각과 탄도의 움직임에 눈을 뜨게 된다.

이 때부터는 사격제원 계산기도 딱히 필요 없어지고 감과 간단한 암산으로 머릿속에서 제원이 튀어나온다. 이동하는 표적을 사격하기 위해 사각을 낮추는 대신 장약을 과투입해 탄속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테크닉을 쓸 수 있게 되고, 적 인접 아군 부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원형 탄종을 임의로 교체하는 등, 숙련된 게이머가 아닌, 숙련된 포병이 되어가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게임의 디자인은 무척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항공 정찰 한 번이면 제원은 다 딸 수 있다. 보급 포인트가 비싸서 그렇지...©INVEN


멀티플레이가 되면 더 재미있을지도


다만, 이 게임도 아쉬운 점은 있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시각적 지루함'이다. 게임 시간의 절반은 포탑 내부를 쏘다니며 각종 기계 장치를 만지작거려야 하고, 나머지 절반은 플로팅 보드를 보면서 사격 제원을 따야 한다. 개발진이 단 두 명인만큼 어쩔 수 없는 한계라 생각되긴 하지만, 게임 시간이 길어지면 점점 눈이 심심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러프한 그래픽이라도 날아가는 포탄이나, 착탄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아마 더 보는 맛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뭔가 레버만 돌리는 게임 같기도 하다 ©INVEN

'멀티플레이'가 아예 지원되지 않는다는 것도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혼자서 모든 걸 해내는 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일단 이 포탑은 2개의 포신이 달린 다포신 포탑이다. 제원을 따는 동안은 포탑이 놀고 있는 만큼 함께 하는 이가 한 명만 있다면 더 농밀하고 진득한 포병 경험을 할 수 있을 텐데 싶은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아이언 네스트'는 잘 만든 게임이다. 게임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확실하며, 그 이상을 넣지는 않았지만, 넣어야 하는 구성 요소들은 모두 빠짐 없이 들어 있다. 사실, 비주얼적 지루함을 말하긴 했지만 이조차도 다소 억지이긴 하다. 아이언 네스트는 포병 시뮬레이션이고, 포병 시뮬레이션으로서 필요한 건 다 있기 때문이다. 실제 포병들도 적을 직접 보고 싸우는 경우는 없다. 최후의 수단으로 근접한 적에게 직사를 갈기는 사격술을 배우긴 하지만, 이걸 직접 쓰고 살아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아군을 두 부대나 터뜨렸을 때의 당혹스러움 ©INVEN

내 스스로 약간 혼동되는 부분이라면, 내가 포병 출신이기에 이 게임을 고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아이언 네스트는 분명히 내 노스텔지어를 자극했다. 장전봉으로 하이바를 맞으며 사편각 장입을 연습하던 순간, 허리가 부서져라 유압 자키를 띄우던 나날, 사격 후 천지를 울리는 진동과 타고 남은 장약의 매캐한 잔내까지, 게임을 하다 보면 내 잃어버린 2년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살짝 미화되어 아름다운 추억 같지만, 실상은 더럽고 고되던 기억 말이다.

시간이 오래 지나 다 까먹은 줄 알았건만, 포탄과 약실 폐쇄기를 보는 순간 기억이 다 돌아왔다. 이세계 전생했다 복귀한 고등학생처럼 말이다. 근데 기분이 썩 좋은지는 모르겠다. 게임은 재미있지만...

아이언 네스트: 헤비 터렛 시뮬레이터 IRON NEST: Heavy Turret Simulator
17년 만에 당긴 방아끈... 느낌 있었다 ©IN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