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LilliLandia Games

'리리의세계'라는 게임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나와 잘 맞는 게임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개인 취향 이슈다. 이유인즉, 그간 수많은 기사에서 직, 간접적으로 밝혀 왔듯, 내 취향이라는 녀석은 뭔가 뚝딱대고 만드는 게임보다는 쿵쾅대고 다 찢고 부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더 큰 칼! 더 큰 총알! 집에서 하기는 무리니 게임 속 세계라도 순대국밥처럼 만들어 놔야 직성이 풀리는 10점 만점에 12점짜리 취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게임스컴 2026'에는 수많은 홀들이 존재하고, 각 홀마다 대형 게임사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런 대형 게임쇼에서 게임사의 자부심이란 곧 옆 부스보다 더 볼만하고 멋져야 한다는 것. 형이상학적으로 꾸며진 화려한 부스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찢고 부수는 게임들이다.

그런데, 그 사이로 몽글몽글 귀여운 무언가가 보였다.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웃들 속에서, 혼자 빵실빵실 웃고 있는 소녀. 무대 위 하나만 켜진 스팟 라이트처럼 눈에 안 띌 수가 없다.

그 게임이 바로 이번 게임스컴에서 만난 리리의 세계, 영문명 'Animula Nook'이다. 신기해서 부스 사진을 몇 장 찍다 보니 관계자도 만나고, 게임 해 보겠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 흠흠 취향에는 안 맞지만 뭐 못 해볼 것도 없다. 솔직히 그냥 봐도 좀 귀여웠으니 말이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킬링 게임 사이에 둥지를 튼 힐링 게임 ©LilliLandia Games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귀여운게 좋아진다던데


'리리의 세계'의 근본은 소인국을 테마로 한 생활 시뮬레이션이다. 식인종이 나오고 적대 세력이 즐비한 '크래프팅 생존'이 아닌, 나만의 공간을 꾸미고 주민들과 교류하는 그런 게임 말이다. 더 쉽게 말하면 힐링 게임. 일반적인 우리 게이머들이 좋아하는 킬링 게임과는 정반대에 있다.

리리의 세계이니 주인공이 리리인가 싶겠지만, 그건 아니올시다. 어느 날 갑자기 작아져 버린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익숙한 책상에서 눈을 뜨고, 그곳에서 다양한 주민인 '리리'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후후 이제 이 책상은 제 겁니다 ©LilliLandia Games

작아진 주인공에게 익숙했던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병뚜껑은 호수처럼 보이고,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지우개는 언덕처럼 솟아 있다. 새로운 이세계로 떠나는 게 아니라, 늘 곁에 있었던 일상을 전혀 다른 크기와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셈이다.

이게 생각보다 꽤 중요한 차이다. '리리의 세계'에서 소인국이라는 설정은 캐릭터를 귀엽게 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현실에서 손가락 하나로 밀어 버릴 만한 물건이 여기서는 장애물이 되고, 평범한 생활용품 하나가 훌륭한 가구가 된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치웠더니 그 뒤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고, 아무렇게나 흩어진 책을 정리하면 그 자체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된다. 현실에서 사물을 사용하는 직관이 게임 안에서 그대로 탐험의 방법으로 바뀐다.

덕분에 탐험도 '저기 느낌표가 있으니 가야 한다'는 식과는 조금 다르다. 높은 곳에 뭔가 보이면 올라가 보고 싶고, 커다란 물건 뒤에 공간이 보이면 괜히 한 번 비집고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개발진이 지향하는 것도 바로 이런 호기심 중심의 탐험이다. 퀘스트가 시키니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기엔 뭐가 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세상에서는 온갖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일상에서는 별것 아니었던 단추가 의자가 되고, 햇빛과 이슬, 꽃가루와 향기마저 수집할 자원이 된다. 이렇게 모은 것들을 활용해 가구를 만들고 집을 꾸미는 것은 물론, 농사를 짓고 요리하며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버튼을 딸깍, 집이 딱. 히히 ©LilliLandia Games

여기까지는 사실 많이 들어 본 전개일 거다. '뭐야 흔한 생활 시뮬레이션이잖아?' 하면 그렇지 않다. 똑같은 스릴러 영화 중에도 명작은 손에 꼽히고, 수없이 많은 요리 중에도 남다른 맛을 자랑하는 주인공이 있으니 우린 그것을 군계일학이라 부른다. 이렇듯, 다른 게임들과는 다른 '리리의 세계'가 지닌 큰 장점이 있으니 바로 '비주얼'이 끝내준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비주얼 쇼크다. 생활 시뮬레이션 게임들의 딱히 대단하진 않은 공통점 중 하나가 비주얼적으로는 크게 뛰어난 작품이 드물다는 건데, '리리의 세계'는 눈알에 필터를 세 장은 꼽은 듯한 유려함을 보여준다.

특히 소인국이라는 설정과 비주얼이 상당히 잘 맞물린다. 그냥 예쁜 풀밭을 걷는 것과 내 몸보다 몇 배는 큰 꽃과 작물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은 느낌부터 다르다. 작은 캐릭터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상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그 크기의 차이가 별것 아니었던 물건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붙잡아 둔다.

그렇기에, 더럽게 귀엽다. 짧지만 솔직하게 말한 거다. 자원을 모을 때, 돌아다닐 때, 점프 뛸 때, 그냥 털썩 엎어질 때도 귀엽다. 꼬맹이가 잉차잉차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입가가 죽 올라가고 아빠 미소가 자동으로 나온다 이거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거 쫌 귀엽네... ㅎㅎ ©LilliLandia Games


혼자는 조금 서러우니 친구들을 데려 와야 겠다


자, 게임의 기본은 '나의 세계'를 꾸미는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집만 짓고 사는 게임은 아니다. 작은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각양각색의 주민인 '리리'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과 대화하거나 함께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리리들은 특정 장소에 우두커니 서서 플레이어가 말을 걸기만 기다리는 NPC와는 조금 다르다. 각자 나름의 행동과 표정, 일상을 가지고 있으며 플레이어와 함께 여러 활동을 하기도 한다. 개발진은 이전 만남을 기억하는 등 보다 생동감 있는 상호작용까지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세상 무해한 주민 '리리'들 ©LilliLandia Games

그렇게 마음에 드는 리리와 친구가 됐다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생활할 수도 있다. 결국 열심히 만든 집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보다야 귀여운 친구 하나라도 함께 있는 게 낫다. 정성 들여 꾸민 공간이 단순한 전시장에서 실제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장소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함께 산다'는 부분은 리리의 세계에서 생각보다 중요하다. 리리마다 성격이 다르고, 행동이나 반응 역시 제각각이다. 내가 만든 공간에 리리를 데려다 놓았다고 해서 그냥 움직이는 장식품 하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 하나가 생기는 느낌을 주려는 셈이다. 결국 하우징의 목적도 '예쁜 집을 만들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까지 이어진다.

여기에 다른 플레이어와의 소셜 요소도 더해진다. 자신의 집에 친구를 초대하거나 함께 공용 공간을 돌아다닐 수 있고, 퍼즐이나 사진 촬영 같은 콘텐츠를 함께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이런 소셜 플레이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놀고 싶다면 혼자 놀아도 되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식이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내가 불렀으니, 살 곳은 마련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 ©LilliLandia Games

그렇다고 집을 꾸미는 일이 게임의 전부인 것도 아니다. '리리의 세계'에는 농사와 요리, 건축과 하우징 외에도 사진 촬영이나 연주, 춤처럼 상당히 다양한 생활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다. 게임이 정해진 일정을 들이밀며 이것저것 시키기보다, 플레이어가 원하는 일을 원하는 속도로 즐기는 방향에 가깝다.

각 콘텐츠도 완전히 따로 노는 것은 아니다. 화분에 작물을 심어 키운 뒤 수확한 재료를 요리에 활용할 수 있고, 수확한 작물이 새로운 가구나 공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커다란 호박을 키우면 그냥 창고에 처박아 두는 아이템이 아니라, 직접 안으로 들어가 꾸밀 수 있는 '호박집'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작은 몸으로 거대한 식물을 기르고, 그 위를 뛰어다니며 노는 것 자체가 이 게임에서만 가능한 놀이다.

꾸미기의 범위도 집에서 끝나지 않는다. 캐릭터의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업, 액세서리 등을 조합해 원하는 모습으로 꾸밀 수 있고, 사진을 찍을 때는 포즈까지 정할 수 있다. 결국 집을 꾸미든, 캐릭터를 꾸미든, 작물을 기르든 게임이 계속해서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건 '정답을 찾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만드는 것'에 가깝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햇볕이 마음에 드는구나 후후 ©LilliLandia Games


언제까지 때려부수며 사실 겁니까? 이제는 평화의 시대입니다


게임은 즐거웠다. 전체적인 완성도 역시 높은 편이다. 생활 시뮬레이션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부터 굉장히 잘 만들었고, 탐험과 수집, 농사와 요리, 건축과 하우징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도 갖추고 있으니까. 취향에 따른 호불호는 모든 게임에서 피할 수 없는 기준이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취향에도 불구하고 일단 한 번은 해보게 만드는 매력이 겉으로도 도드라졌다.

'리리의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아졌다'는 설정을 단순히 비주얼을 위한 장치로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물건들이 탐험의 대상이 되고, 잡동사니를 치우면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며, 흩어진 책을 정리해 계단처럼 활용할 수도 있다. '저곳에 퀘스트가 있으니 간다'기보다는 '저 위에는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익숙했던 공간을 작아진 시선으로 다시 발견한다는 게임의 콘셉트가 플레이에도 녹아 있는 셈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플레이어에게 특정한 생활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사만 열심히 지어도 되고, 건축에 꽂혀 하루 종일 집을 만져도 된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원을 수집하는 데 시간을 써도 되고, 리리와 어울리거나 사진을 찍고 춤추며 시간을 보내도 된다. 흔히 이런 장르에서 생기기 쉬운 '오늘 이것까지 해야 한다'는 숙제의 감각을 줄이고, 무엇을 할지 플레이어 스스로 결정하게 만드는 방향이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열심히 만들어 봐야 빈 집이면 무슨 소용이랴. 사는 이가 있어야지 ©LilliLandia Games

짧은 시연에서도, 이 과정이 주는 재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커 보이기만 하던 주변 사물이 어느 순간 길이 되고 자원이 되고, 열심히 가꾼 작물이 영글어 있는 모습이나 마음속 디자인 반장님을 출동시켜 최대한 예쁘게 마감한 집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뿌듯하다. 부수고 지우는 것에도 재미와 쾌감이 따르지만, 쌓아 올리고 만드는 과정에도 재미는 깃든다.

비주얼도 지금이 끝은 아니다. 개발진은 지난 CBT 이후 플레이어 피드백을 바탕으로 이동감이나 충돌 판정 같은 기본 조작부터 캐릭터와 건축물의 모델링, 재질, 빛과 그림자까지 전반적인 개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간에 따른 빛의 변화부터 머리카락과 피부, 눈 같은 캐릭터 표현, 각종 오브젝트의 디테일까지 손보는 중이다.

이미 첫인상부터 비주얼이 강점으로 느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기대되는 부분이다. 이런 게임에서 그래픽은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끝나는 요소가 아니다. 집을 짓고 캐릭터를 꾸미는 게임에서는 결국 내가 만든 결과물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화면 자체가 예쁠수록 똑같은 집 한 채를 지어도 한 번 더 사진을 찍게 되고, 한 번 더 꾸미게 되는 법이다.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햇빛은 이렇게 모으는 거야' ©LilliLandia Games

무엇보다, '리리의 세계'는 플레이 방식 자체에 큰 부담이 없는 게임이다. 한창 찢고 부수는 걸 좋아하던 중학교 2학년 시절, 부모님이 문이라도 열었다 하면 급하게 알트 탭을 갈길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충분한 인지를 지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해도, 사실 뭔가를 부수고 없애는 게 다른 이들의 눈에 그리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리의 세계'라면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미취학 사촌 동생이나 조카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도 화면을 급하게 가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작은 캐릭터가 거대한 일상용품 사이를 돌아다니고, 식물을 키우고 집을 꾸미는 모습을 함께 구경하는 쪽에 가깝다. 무료 서비스 예정인 게임인 만큼 진입 장벽도 낮고, 혼자서든 다른 사람과 함께든 각자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 역시 장점이다.

언제까지고 때려 부수면서 살 수는 없다. 폭풍같은 냉혹함과 불꽃같은 전투 본능을 지녔다 해도 다 한 때다. 지금 여러분이 스크린샷을 보고 살짝 끌리는 것도 거짓 감상이 아니다. 험상궂은 삶을 사는 이들도 귀여운 걸 보면 자연스럽게 입술을 씰룩거리게 되는 게 본능이다. 그러니, 편견 없이 시도해보자. 이제 때리고 부수는 자극적인 재미 대신, 쌓아 올리고 이룩하며 만들어지는 몽글몽글한 재미도 느낄 때가 됐으니까.

리리의 세계 Animula Nook
무엇보다 귀여우니까~ ©LilliLandia Ga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