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턴제 RPG '천기행(Tianji: Shadow of the Ancients)'은 첫 화면부터 고전적인 분위기가 짙다.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손그림 2D 배경 위를 돌아다니다 적과 마주치면 별도의 전투 화면으로 넘어가고 파티원의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공격이나 기술을 선택한다. 최근 턴제 RPG를 해봤다면 낯설지 않다.
하지만 직접 플레이하고 나니 인상이 달라졌다. 약점을 노려 적의 가드를 무너뜨리는 한편 두 가지 스킬을 한 턴에 사용할 수 있다. 공격과 방어 때마다 버튼을 직접 눌러야 하는 실시간 요소의 비중도 상당하다.
당 태종이 만든 비밀 조직? '천기위(Tianji Guard)' 이야기

'천기행'의 배경은 당나라다. 실제 역사를 그대로 옮기기보다 당대의 제도와 분위기에 판타지 설정을 보탰다고 보는 것이 좋다.
게임 속 설명에 따르면 당나라 초기, 태종 이세민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이들의 도움을 받아 왕조를 수호하는 비밀 조직 '천기위'를 창설했다. 주인공 '상관삭(上官朔)' 역시 천기위의 일원이었다.
상관삭이 기억을 잃은 사건에는 수상한 조직 '현심교(玄心教)'가 얽혀 있다. 기괴한 가면을 쓴 이들은 특정한 의식으로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 의식을 받은 사람은 자아를 잃고 현심교의 일원이 되며, 주인공 또한 이 의식에 휘말린다.
의식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같은 천기위 소속인 리링(Li Ling)이 상관삭을 구한다. 정신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로 과거의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 자신이 천기위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상관삭이 자기 이름을 알아낸 단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고기 모양의 패였다. 천기위 구성원들은 정교하게 조각된 물고기 패를 신분 표식처럼 지닌다. 리링도 이를 보고 상관삭이 같은 조직의 인물임을 알아챈다. 과거 당나라에서 관원의 신분이나 소속을 나타내는 데 쓰였던 '어부(魚符)'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다.
이후 상관삭은 리링과 함께 현심교를 추적하며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다. 공식 설정에 따르면 조사가 깊어질수록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상관삭 자신과 현심교 사이에 생각보다 깊은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머릿속의 정체불명 목소리까지 점점 선명해진다. 그의 정체가 이야기의 중심 미스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투의 핵심, 약점 공격과 연쇄 스킬

천기행의 전투는 필드를 돌아다니는 적과 접촉하거나 먼저 공격받으면 별도의 전투 화면으로 넘어가는 인카운터 방식이다. 적이 알아차리기 전에 공격하면 선제권을 가져올 수 있고, 레벨이 플레이어보다 크게 낮은 적은 필드에서 곧바로 처치하는 기능도 지원한다.
전투 화면 상단 UI에는 각 캐릭터와 적의 행동 순서가 나타난다. 아이콘이 왼쪽 끝에 닿으면 해당 캐릭터의 차례가 온다. 능력치나 장비로 행동 주기를 앞당기고 특정 기술로 적의 턴을 뒤로 미루는 식의 전략적인 운용도 가능했다.
캐릭터의 차례가 오면 일반 공격이나 스킬을 고를 수 있고, 기술에는 자원이 필요해 강력한 공격만 계속 반복할 수는 없다. 해당 자원이 부족해지면 일반 공격을 섞거나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자원을 돌려받는 기술을 써서 보충할 수 있다.

'천기행' 전투의 핵심이기도 한 '연쇄 스킬'은 자원이 2 이상 남아 있으면 한 번의 턴에 두 가지 기술을 연달아 쓰는 시스템이다. 한 명의 적에게 화력을 집중하거나 서로 다른 대상을 공격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다.
적은 체력 외에 가드 포인트도 가지고 있다. 약점 속성으로 공격할 때마다 가드 포인트가 하나씩 줄어들고, 이를 전부 없애면 '허약' 상태에 빠져 잠시 행동하지 못한다. 위력이 가장 높은 기술만 고르기보다는 적의 약점에 맞는 속성을 준비하고 공격 순서를 짜도록 하는 구조다.
기술의 부가 효과도 이와 맞물려 설계되어 있다. 어떤 기술은 허약 상태의 적에게 쓰면 효과가 크게 증가하고, 화상처럼 특정 상태 이상에 걸린 적을 공격해 부가 효과를 얻는 기술도 있다. 먼저 특정한 상태를 만들고 다음 공격에서 활용하는 연계가 전투 효율에 꽤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어떤 스킬을 골라 연쇄적으로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턴제에 더해진 실시간 조작, '가드'와 '추격'

연쇄 스킬도 흥미로웠지만, 더 눈에 띈 것은 턴 사이마다 끼어드는 실시간 조작이었다. '천기행'의 턴제 전투에서는 패드 기준 RT를 눌러 '가드'와 '추격'을 사용할 수 있다.
'가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이 공격하기 직전 붉은색 표시가 뜨는 순간에 버튼을 눌러야 한다. 받는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대신 확률로 발동하던 회피가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회피 스탯이 낮거나 위급한 경우 사용하는 식으로 상황 판단의 여지를 주는 장치로 사용된다.
공격 때도 타이밍에 맞춰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추격' 시스템으로, 사전에 설정해 놓은 추격 기술을 이용해 턴 이득을 볼 수 있다. 추격 기회는 공격 한 번마다 주어진다. 만약 연쇄 스킬로 두 개의 기술을 사용하고 각각의 추격까지 성공시키면 한 턴에 네 차례 공격을 이어갈 수도 있는 셈이다.
이번 시연은 영어 버전으로 진행된 탓에 초반에는 추격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 탓에 전투는 예상보다 빡빡했다. 중간 보스에 해당하는 적을 쓰러뜨리려고 가진 회복약과 부활약을 모두 써야 했을 정도.

그러나 추격 시스템을 활용하기 시작하자 게임의 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공격마다 추가타가 터지니 턴 당 피해량이 늘어나고, 적의 가드 포인트도 더 빨리 줄일 수 있어 빈틈을 만들기가 수월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플레이어가 어떤 추격 기술을 쓸지도 캐릭터마다 직접 정할 수 있다. 메뉴 창에서 자원 소비량 1 이하의 기술을 추격 공격으로 등록할 수 있고. 이를 이용해 캐릭터 혼자서 사용하는 속성 조합도 짤 수 있다.
예를 들어, 리링의 불 속성 화살 이후 상관삭이 물 속성 공격을 사용하면 상대의 가드 포인트를 추가로 무너뜨리는 속성 연계 부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추격 시스템을 잘 사용하면, 본 공격으로 마지막 가드 포인트를 없애 혼자서 허약 상태를 만들 수도 있다. 이어지는 추격 공격에는 허약한 적에게 효과가 커지는 기술을 배치하는 식으로 턴 전략을 최적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낮과 밤, 모험으로 가득한 HD-2D 필드

'천기행'의 모험 파트는 고전적인 2D RPG의 구조에 몇 가지 변화를 더했다. 마을에는 낮과 밤이 있으며 시간대에 따라 만날 수 있는 NPC와 이용 가능한 기능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상인은 낮에만 장사를 하는 식이고, 낮에 받은 사이드 퀘스트를 진행하려고 밤까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연에서는 여관에서 잠을 자는 방식으로 낮과 밤을 바꿀 수 있었다.
최근 여러 HD-2D 계열 RPG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탐험과 마찬가지로, 필드에서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물상자를 열고 아이템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천기행'은 이동과 상호작용 요소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넣은 정도다.
상관삭은 그래플링 훅을 써서 평범한 이동으로는 닿기 어려운 지형을 오르내린다. 때로는 직접 물에 들어가 헤엄칠 수도 있다. 막힌 통로를 열거나 주변 구조물을 활용해야 하는 간단한 퍼즐도 등장한다. 개발진 역시 등반과 수영, 각종 '기관'을 이용한 퍼즐 등 일부 액션 요소를 더해 2D 맵을 돌아다니는 과정부터 재미있게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맵에는 숨겨진 보스나 사이드 퀘스트도 볼 수 있었다. 메인 스토리의 목적지 외에 숨겨진 길을 찾으면 내실에 도움이 되는 장신구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던 것도 과거 클래식한 RPG의 맛을 살린다.
체험 구간에서는 마을에 보물상자가 있는 숨겨진 길이 있었는데, 그 앞을 지키던 주민이 히든 보스(?)였다. 쇠스랑만 든 모습에 우쭐해서 곧바로 덤볐지만 게임 오버 화면을 보는 데 몇 초 걸리지 않았다.
개발진에 따르면, 정식 버전에서는 동료도 전투 파티원에 그치지 않고 탐험과 성장에 관여할 예정이다. 각 동료에게는 별도의 개인 스토리와 전문 능력이 있다. 새로운 동료를 영입하면 무기 강화나 음식 조리 등으로 캐릭터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다.

실시간 요소로 몰입감을 더한 클래식 RPG

빌리빌리 퍼스트룩에서 체험한 '천기행'은 기본이 탄탄한 클래식 턴제 RPG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이야기와 산수화풍의 비주얼은 중국 역사나 무협 분위기를 좋아하는 이용자라면 눈길이 갈 만하다.
역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투다. 연쇄 스킬과 약점 공략, 허약 상태만으로도 전략을 고민할 여지가 충분했다. 그 사이마다 가드와 추격을 직접 입력하게 해 턴제 특유의 정적인 시간도 상당 부분 줄였다.
다만 추격을 활용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전력 차이는 상당히 컸기 때문에, 이 부분은 호불호가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실시간 타이밍 입력을 좋아하는 이용자에게는 전투의 손맛을 살리는 장점이 되겠지만, 턴제 RPG에서 자신의 속도로 선택하는 것을 선호한다면 사실상 반드시 익혀야 하는 추가 조작처럼 받아들일 여지도 있다.

한국 이용자라면 언어 장벽도 감수해야 한다. 현재 발표된 지원 언어에는 한국어가 포함돼 있지 않고 이번 시연 역시 영어 버전으로 진행돼 초반에는 인물명과 스킬 효과, 추격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비중이 높은 RPG인 만큼, 스토리까지 온전히 즐기려면 언어 지원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천기행'은 2027년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그만큼 지원 언어를 비롯한 여러 요소는 향후 달라질 수 있다. 당나라와 판타지를 결합한 세계, 손으로 그린 2D 그래픽, 버튼을 직접 누르는 손맛을 더한 턴제 전투까지 작품이 향하는 방향은 이미 뚜렷했다. 클래식 RPG의 분위기를 좋아하면서 전투에서는 조금 더 바쁜 손맛을 원한다면 기억해둘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