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슈터) Starcraft
©Blizzard

어릴 때부터 블리자드 게임을 하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스타크래프트'를 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디아블로'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빠졌고, 기자 일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오버워치'가 나왔다. 내게 블리자드는 여러 게임사 가운데 하나로 꼽고 넘어갈 만큼 가벼운 이름은 아니었다.

블리자드 게임이 없는 PC방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배틀넷 하나면 하고 싶은 게임을 전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 게임사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빠져 있었나 싶지만, 당시 내게 블리자드는 그만큼 크고 대단했다.

기자 생활 십수년 만에 처음 블리즈컨에 가게 됐으니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스타크래프트2'가 처음 공개됐을 때, '디아블로3'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터져 나오던 함성을 기억한다. '오버워치'의 첫 영상이 공개됐을 때, 그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동안 영상으로 봤던 블리자드의 신작 발표 현장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나도 그런 환호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직접 찾아간 블리즈컨에서 먼저 놀란 것은 팬들이었다. 개막 전날인 금요일부터 입장 패스를 받으려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한 회사가 자기네 게임만으로 여는 축제에, 입장권을 미리 받겠다고 전날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다. 블리자드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실감했다.

스타크래프트(슈터) Starcraft
블리즈컨 전 날의 늦은 밤에도 행사 현장의 열기는 그대로더라 ©INVEN

기념품을 사려는 줄은 컨벤션센터 건물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패스를 받고 돌아가도 될 사람들이 물건을 사려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이면 조금 한산할까 싶어 다시 가봤는데, 오후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도 행사장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둘러본 곳에서는 별다른 행사도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있었다.

늦은 시간에도 컨벤션 센터를 채운 사람들을 보며 블리자드가 대단한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블리즈컨을 여러 차례 취재한 선임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그다지 붐비는 편도 아니란다. 예전에는 주차할 곳이 없어 애너하임에 차를 가지고 오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이게 줄어든 거라고? 처음 온 나로서는 쉽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눈앞의 인파에 놀라고 있는 동안, 선임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찾아왔던 블리즈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사를 둘러볼수록 나도 블리즈컨의 앞날을 마냥 낙관하기는 어려워졌다. 지금 찾아온 팬들의 애정은 충분히 느꼈다. 마음에 걸린 건 앞으로 이곳을 찾아올 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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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하임을 점령한 멀록단. 블리자드를 향한 팬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장면©Blizzard

내가 돌아다닌 행사장에서는 아이들을 찾기 어려웠다. 성인 관람객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어른들이 많았다. 나처럼 블리자드 게임을 하며 자란 사람들이 여전히 그 게임을 좋아해서 모인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코스프레를 한 아이들이 어른 손을 잡고 찾아온 모습을 많이 봤다면 생각이 달랐을 것이다. 부모가 좋아하던 게임을 아이도 좋아하고, 그 아이가 자라서 다시 블리즈컨에 오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 테니까. 나는 그런 장면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 지금의 팬들이 앞으로도 계속 찾아준다고 해도,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작 발표에서도 그 걱정을 덜어낼 만큼의 기대를 갖지는 못했다. '디아블로5'가 공개됐고, '스타크래프트'는 슈팅게임으로 돌아왔다. 이름만 들으면 흥분할 만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느끼기에 반응은 기대만큼 뜨겁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분명 흥분할만한 소식이었는데, 마음 속부터 우러나오는 기분은 아니었다.

‘디아블로5’, ‘스타크래프트 신작’. 10년 전이라면 이름과 로고만 떴어도, 애너하임 컨벤션 센터가 뒤집어졌을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이 이전만큼 극적이지 않았던 건, 그만큼 상황이 바뀌었고, 나도 바뀌었다. 그리고 블리자드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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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즈컨 첫째 날, 디아블로V가 공개되는 모습 ©Blizzard

무엇보다 너무 먼 소식이기도 했다. 각각 2029년 봄과 2030년 봄 출시를 예고했다. '디아블로5'는 세계관과 직업, 시스템에 대한 구상도 공개했지만, 내게는 앞으로 어떤 게임을 하게 될지보다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3~4년은 가볍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게임업계에서는 몇 년째 감원이 이어지고 있다. 큰 회사가 만드는 대작이라고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올해만 벌써 몇 개의 AAA급 작품들이 엎어졌다는 뉴스를 들었다.

블리자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도 역시 힘든 시기를 겪었다. 2022년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는 2023년 마무리됐다. 2024년에는 개발팀을 포함한 여러 부서에 감원이 있었다. 여기에 AI가 일자리를 어떻게 바꿀지까지 걱정해야 하는 때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도, 앞으로 그 일을 하려는 사람도 몇 년 뒤를 편하게 내다보기 어렵다.

몇 년 뒤에야 나올 게임을 이렇게 일찍 발표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디아블로5' 개발진은 일찍부터 팬들의 의견을 듣고 개발에 반영하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때까지 이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를 자르지 말아 달라고 마이크로소프트에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새 게임을 기다려 달라는 발표에서, 그 게임을 끝까지 만들 수 있을지부터 걱정하게 되다니...

물론, 나도 고용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블리자드가 약속한 게임들이 나올 때까지 내가 기자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만드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몇 년 뒤 자기 처지를 자신할 수 없는데, 먼 훗날의 출시 예고만으로 마냥 들뜨기는 어렵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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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의 첫 문을 연 조해나 패리스 블리자드 대표 ©Blizzard

블리자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다. 이미 많은 팬이 좋아하는 게임을 다시 만들고, 익숙한 세계를 다시 찾게 하는 건 블리자드가 오랫동안 쌓아온 노하우이다. 게다가 게임 하나를 잘못 만들었을 때 감당해야 할 손해를 생각하면 새로운 시도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기존 팬들을 붙잡는 것만으로 블리자드의 미래가 해결되지는 않을 거다.

지금의 팬들은 앞으로도 블리즈컨을 찾아줄 것이다. 게임을 하고, 기념품을 사고, 좋아하는 캐릭터로 분장하고, 예전에 함께 즐겼던 게임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번에 직접 본 팬들의 애정은 그 정도로 깊었다.

그러나 새로운 팬이 들어오지 않은 채 기존 팬들끼리의 모임으로만 남는다면, 그들이 늙고 하나둘 떠나갈 때 블리즈컨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블리자드가 한때의 위세를 그대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부터 이제 컴퓨터를 켜면 배틀넷보다 스팀을 켜는 일이 더 많다. 한 회사의 게임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시절에서 그만큼 멀어졌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데, 그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뀔 시간이 지났다. 그때처럼 모든 게임이 블리자드 게임일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블리자드를 좋아할 이유는 있어야 한다.

새 게임을 보고 열광하는 팬들, 좋아하는 캐릭터로 분장하고 부모 손을 잡고 온 아이들. 이번 블리즈컨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봤다면 나는 이 축제가 앞으로도 오래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지금의 팬들에게 다음 게임을 기다릴 이유를 주고, 아직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 처음 게임을 시작할 이유를 주는 것. 블리자드가 해내야 할 일은 결국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찾아간 블리즈컨은 강렬했고, 아련했고, 조금은 슬펐다. 일생에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에 왔다는 기쁨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블리즈컨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많은 팬이 찾아오는데도, 이대로라면 언젠가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팬들이 벌어주는 시간이 그래서 소중하다. 그들이 계속 찾아주는 동안 블리자드는 다음 게임을 만들고, 새로운 팬을 불러들일 기회를 얻는다. 지금의 팬들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확인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팬들이 기다려주는 동안 다음 세대도 찾아오게 해야 한다.

지금의 아이들이 블리자드 게임을 하며 자기만의 추억을 쌓고, 언젠가 처음 블리즈컨을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또 10년, 또다시 10년을 이어가는 회사가 됐으면 한다. 그럼 나도 언젠가 운이 좋으면 기자로서, 아니라면 한 명의 팬으로서 블리즈컨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가질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