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민과 연제길은 첫 맞대결에서 패했던 상대를 다시 만나 이겼다. 이광노는 두 번의 출전에서 모두 승리하며 팀이 더 밀리지 않도록 지켰다. 첫 패배에서 무엇을 봤기에, 다음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캐릭터 선택, 상대 분석, 선수들의 마음가짐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담아봤다.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 태극마크

배재민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격투 게임이 들어갔을 때부터 반가웠다. 지난 항저우에 이어서 이번에도 ‘스트리트 파이터’가 종목으로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철권’과 ‘더 킹 오브 파이터즈’까지 묶어 단체전으로 치른다는 소식이 들렸다. 세 게임을 한 종목으로 묶는 방식은 낯설었지만, ‘무릎’에게도 국가대표에 도전할 기회가 생겼다.
선발전에서는 같은 DRX 동료들과 경쟁했다. 배재민은 여러 감정이 교차했지만, 대표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다음 대회에도 자신의 종목, 철권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기회는 꼭 잡아야만 했다.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잖아요. 꼭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습니다.”
배재민에게 태극마크는 오래 남은 기억이기도 했다. 가장 기쁘고 기억에 남는 대회를 물으면 늘 2010년 WCG를 꼽았다. 한국 대표로 메달을 땄을 때의 벅찬 감정 때문이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그때보다도 더 큰 중압감이 있었다.
“WCG 때는 프로라는 이름을 달고 게임을 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락실에서 게임하는 사람이 태극기를 달고 나갔다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DRX라는 프로 팀의 선수로서 뛰다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나갔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다르게 느껴졌어요”라고 배재민은 설명했다.
더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도 결과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무대였다. 배재민에게 이번 금메달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 금을 안긴 전략, 세 명에게 다른 임무를 내린 강성훈 감독

결승은 최대 아홉 세트 중 다섯 세트를 먼저 이기는 팀이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한 세트에서는 한 종목으로 3전 2선승제 승부를 벌였다. 세 종목은 세 세트씩 묶인 구간마다 한 번씩 나와야 했다. 첫 종목은 동전 던지기로 선택권을 정하고, 이후에는 직전 세트에서 패한 팀이 남은 종목을 고르거나 마지막 종목이 자동 배정됐다.
강성훈 감독은 상대가 강한 종목을 피할 수 없는 규정에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봤다. 강한 종목을 뒤로 미루고 먼저 두 세트를 얻으면 유리하게 풀 수 있었다. 한국은 세 종목의 전력이 고르게 갖춰졌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감독 선임 뒤부터 각국의 예상 출전 선수와 규정을 대조하며 경우의 수를 준비했다.
결승전에서도 선택권을 얻으면 ‘더 킹 오브 파이터즈 XV’로 먼저 한 점을 가져오고, 선택권을 내주면 일본이 ‘스트리트 파이터6’를 먼저 꺼낼 것으로 예상했다. 복잡한 경우의 수는 감독이 계산하되, 선수에게 전달할 주문은 단순하게 정리했다.
배재민과 연제길에게는 초반 패배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두 선수 모두 상대를 직접 겪고 나면 다음 승부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강 감독은 이를 “다운로드 능력이 좋다”고 표현했다. 첫 대결을 통해 상대를 파악할 때까지 팀이 버텨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 역할을 이광노에게 맡겼다. 일본의 ‘SCORE’를 상대로 한 번도 지면 안 된다고 주문했다. 강 감독은 이광노가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으며, 상대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제길에게는 최대 세 번 돌아올 수 있는 출전 기회 가운데 한 번만 이겨달라고 했다. 배재민에게는 경기를 마무리할 가능성이 높으니 그때 끝내달라고 주문했다. 이광노가 점수를 지키는 동안 두 선수가 재대결의 답을 찾는 구상이었다.
한국은 첫 ‘스트리트 파이터6’ 대결을 내준 뒤 이광노가 두 번째 세트에서 승리했고, 이어진 ‘철권8’ 대결에서 패하며 1:2로 밀렸다. 강 감독이 대비한 경우의 수에 들어가는 흐름이었다. 경기는 강 감독의 손바닥 안에서 흘러갔고, 그렇게 이번 아시안게임 e스포츠 종목에서 첫 금메달이 나왔다.
배재민, “한일전은 반드시 잘해야만 한다”

팀 스코어 1:1에서 나선 3세트. 배재민은 ‘노비’가 스티브를 먼저 꺼낼 것으로 보고 파캄람을 준비했다. 앞서 진주에서 맞붙었을 때 ‘노비’가 스티브로 자신을 이겼던 경험이 근거였다. 예상은 맞았다. 파캄람으로 첫 게임을 가져왔고, 이어 상대가 드라구노프로 바꿀 가능성까지 생각해 뒀다.
‘노비’가 드라구노프로 한 게임을 되찾자 배재민은 브라이언과 드라구노프 사이에서 고민했다. 한 달 정도 연습한 드라구노프를 꺼내 같은 캐릭터끼리 맞붙는 미러전에 나섰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긴장이 앞섰다. 평소보다 공격을 많이 내밀었고 유효타는 적었다. 배재민에게 불리한 흐름이었다.
수많은 대회에 출전한 그에게도 아시안게임의 중압감은 달랐다. 자신의 패배로 상대 팀의 점수가 올라가면, 동료가 그 점수를 만회해야 했다.
“제가 지면 다음에 나오는 선수의 부담감이 커지잖아요. 게다가 한일전이라는 것 때문에 반드시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말 컸어요.”
이광노가 2:2를 만든 뒤 돌아온 5세트에서는 상대도 자신의 파캄람을 의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노비’가 스티브를 먼저 꺼내지 않을 것으로 보고 브라이언으로 시작하되, 스티브가 나오면 파캄람으로 대응할 준비도 했다. 실제로 브라이언으로 드라구노프를 잡은 뒤 스티브에 한 게임을 내줬고, 파캄람을 꺼내 마지막 게임을 이겼다. 한국이 3:2로 앞섰다.
연제길이 6세트에서 승리해 한국이 4:2로 앞선 뒤, 배재민에게 다시 차례가 돌아왔다. 7세트에서도 브라이언으로 드라구노프를 꺾자 스티브가 나왔다. 앞선 패배에서 무엇을 많이 맞았는지 알고 있었다. 배재민은 “많이 맞았던 것만 안 맞으면 브라이언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브라이언으로 실패하면 파캄람으로 다시 승부할 생각이었다. 세트 자체를 내주더라도 다음 기회는 남았다. 규정상 한국이 8세트 선택권을 얻어, 해당 구간에서 아직 쓰지 않은 ‘더 킹 오브 파이터즈 XV’를 고를 수 있었다. 배재민은 “만약 내가 져도 이광노 선수가 마무리해 줄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다음 카드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브라이언의 카운터가 연이어 적중했고, 마지막 게임은 라운드 스코어 3:0으로 끝났다. 배재민은 두 번의 재대결을 모두 이기며 금메달을 확정했다.
위기 때마다 팀을 구한 기둥 이광노

첫 게임을 내준 한국이 두 번째 세트에서 내세운 선수는 이광노였다. 먼저 한 게임을 가져왔지만 ‘SCORE’가 다음 게임을 되찾으며 게임 스코어를 동점으로 만들었다. 한국이 1:2로 역전당했을 때도 나선 건 이광노였다. 그는 어김없이 동점을 만들면서 동료 선수들에게 믿을 구석이 되어줬다.
이광노는 상대가 자신의 익숙한 캐릭터 구성에 대비했다고 봤다. 주력 구성이 널리 알려져 있는 만큼 준비해 왔을 것으로 예상했고, 경기에서도 그 대응을 느꼈다. 그는 컨디션이 나빴던 것은 아니라고 짚었다. 상대가 기존 구성을 잘 상대하고 있었기에 자신도 준비한 다른 선택을 꺼냈다.
그 캐릭터가 나즈드였다. 평소 좋아하고 연습해 둔 캐릭터를 투입해 흐름을 되찾았다. 마지막 게임을 잡아 세트를 2:1로 마무리했고, 한국은 팀 스코어 1:1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에게 결승전 4세트는 정말 중요했다. 여기서 이광노가 무너지면 경기 흐름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이광노는 경기에 나서면서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광노는 “지면 지는 거고, 이기면 좋고, 그런 마음으로 항상 부담 없이 해 왔어요. 내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잖아요. 컨디션만 좋으면 다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광노는 대단한 자신감을 보여줬고, 그걸 실력으로 증명했다.
자신감은 준비한 내용과 연결돼 있었다. 여러 연습 파트너와 상대가 사용하는 캐릭터를 상대했다. 공격을 막은 뒤 반격하는 방법과 방어법도 반복해 익혔다. 그래서 1:2로 밀린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력과 컨디션이 나오면 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광노는 4세트에서도 승리해 2:2를 만들었다. 자신의 두 승리를 모두 한국이 뒤진 상황에서 보탰다. 배재민과 연제길은 이광노의 경기를 보면서 너무 잘하고, 든든했다는 이야기를 인터뷰 내내 전했다.
PTSD까지 왔었던 지난날, ‘복수’ 두 글자로 버틴 연제길

항저우 이후 약 반년 동안 잠자리에 누우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을 보냈다. 돌이켜보니 그게 PTSD 증상이었더라고 고백한 연제길. 그가 포기하지 않았던 건 ‘복수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패배한 상태로 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걸 응원해준 아내도 있었고요”
‘스트리트 파이터5’에서 ‘스트리트 파이터6’로 아시안게임의 종목은 달라졌지만, 연제길의 실력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항저우 때와 비교해도 자신의 실력은 크게 달라진 게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달라진 건 그의 마음가짐이었다.
항저우 때는 주변에서 우승 후보라는 평가를 들으며 메달권에 들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이번에는 정신적으로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두 동료보다 멘탈 코칭을 더 많이 받았다. 그에게 심리치료는 큰 도움이 되어줬다.
결승 첫 세트에서 ‘히구치’에게 게임 스코어 1:2로 패했을 때, 연제길은 다음 승부를 생각했다. 돌아오며 두 동료에게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직접 맞붙어 보니 충분히 승부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본 것은 ‘히구치’의 공격과 방어 습관이었다. 무적기를 자주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기다려 막아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대만 더 맞히면 이기는 상황에서 자신이 급해졌다는 점도 되짚었다. 상대가 뒤로 걷던 모습을 기억하고 다음에는 하단 공격을 노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배재민도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연제길은 배재민이 “네가 다 이겼는데 참지 못해서 졌다”고 조언했다고 전했다. 첫 경기를 되짚으며 찾은 조급함을 동료도 짚어줬다.
한국이 3:2로 앞선 6세트에서 ‘히구치’를 다시 만났을 때도 연제길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상대의 습관에 대응하고 서두르지 않자, 피해를 허용하지 않는 퍼펙트 라운드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연제길이 이변을 만들면서 승부는 급속도로 한국에 유리해졌다.
승리한 뒤에는 자신의 몫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제길은 “두 분이 두 번씩 이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배재민과 이광노의 승리를 믿고, 그 사이에 자신에게 맡겨진 한 점을 보태려 했다.
연습 상대만 45명, 금메달을 도와준 사람들

선수들이 결승에서 설명한 준비에는 여러 사람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강성훈 감독에 따르면 부산 합숙에 직접 찾아온 각 종목의 스파링 파트너는 모두 45명이었다. 국내 정상급 선수들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대표팀의 연습 상대가 됐다. 강 감독은 흔쾌히 부산까지 와준 선수들, 특히 오래 머무르며 마지막까지 함께한 서진우와 강명구에게 감사를 전했다.
배재민은 정상급 선수들이 평소에도 늘 함께 연습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시안게임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고, 연습 상대가 되어주며 조언을 건넨 일이 고마웠다고 했다.
훈련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도 중요했다. 배재민은 하루 여덟 시간씩 며칠 연습하면 손목이 아파 게임을 하기 어려웠는데, 합숙에서는 물리치료를 받으며 연습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제길이 첫 패배 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과정에는 멘탈 코칭이 있었다.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일도 대회 준비의 일부였다.
이광노는 감독이 모든 준비를 맡아줬기에 자신은 걱정 없이 게임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습을 도운 파트너와 물리치료사 세 명에게도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배재민은 협회 관계자와 지원 인력, 소속팀 동료와 대표팀, 한 달 동안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아내에게 감사를 전했다.
연제길이 가장 먼저 꼽은 사람도 아내였다. 평소 아이를 돌보던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 아내는 재택근무와 육아를 병행했다. 자신을 대신해 아이를 돌봐주지 않았다면 이번 도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훈련을 많이 도와준 서진우와 물리치료사들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금메달을 딴 뒤 휴대전화를 확인했을 때는 가족의 축하가 먼저 와 있었다. 연제길은 아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아버지의 금메달에 웃고 기뻐하는 모습을 봤다. 그는 “아들이 너무 기뻐하는 모습에 내가 더 기뻤다”라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