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제목임을 인정한다. 혹시 알면서 왜 그랬냐고 따지듯 물어본다면 이번 만은 할 말이 있다. 인터뷰 때문에 처음 최연규 이사를 만났을 때다. 이번 인터뷰의 콘셉트에 대해 설명하는 내게 그는 ‘어젯밤 생각해봤는데 제가 창세기전 말고는 따로 한 게 없더라고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개발자로 열심히 살았다는 말이겠지’라며 그냥 그렇게 넘겼다. 그러나 단지 게임이 아니라 개발자로 사는 삶을 묻는 말에도 ‘창세기전을 만들었다.’라고 한결같이 답변하는 그를 보면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소프트맥스에 입사해 창세기전을 개발해 온 최연규 이사의 삶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창세기전 1, 2’부터 ‘서풍의 광시곡’, ‘템페스트’, ‘창세기전3’, 그리고 최근 발표한 MMORPG 창세기전4 까지 대한민국 패키지 게임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전’ 시리즈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두 가지 뚜렷한 곡선이 완벽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창세기전만 바라보고 살았던 최연규 이사만의 고유한 특징에 기인한다. 나는 이 기사가 앵무새처럼 창세기전의 역사를 단순히 옮겨놓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소프트맥스 회의실에서 최연규 이사와 단둘이 2시간이 훌쩍 넘는 인터뷰를 끝낸 직후였다. 그의 40년 인생 속에서 성공과 실패, 그리고 주위 환경들이 창세기전 시리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왜 지금 시기에 ‘창세기전4’를 MMORPG라는 카드로 꺼내 들었는지 드디어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최초로 ‘창세기전’ 보다는 ‘최연규'라는 개발자에 초점을 맞춰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울티마 만들겠다고 부모님께 편지를 쓴 사연
최연규 이사도 보통 여느 아이들처럼 동네 오락실에서 처음으로 게임을 접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에 대해 애정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동생의 피아노 콩쿠르 우승 선물로 부모님께서 애플2를 사주셨을 때부터였다.
위저드리부터 마이트앤매직 , 울티마까지 이른바 3대 RPG에 매료돼 높은 완성도와 깊이 있는 세계관에 감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애니메이션, 만화로 대표되는 일본 문화까지 받아들이며 JRPG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이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습니다. 애플2와 MSX가 비슷한 비율로 보급되면서 자연스럽게 서양과 일본 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이게 됐는데요, 게임 자체를 한쪽에 쏠리지 않고 폭넓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울티마와 일본의 드래곤퀘스트를 동시기에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80년대 초반에 발표된 이 두 RPG시리즈는 의외로 초반시리즈들이 시스템이나 그래픽에서 흡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90년대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면서 게임을 바라보는 눈의 폭이 넓어진 것 같습니다.”
게임에 푹 빠져 지내던 고등학교 시절. 그는 부모님께 장문의 편지를 쓴다. 일종의 출사표였는데 다름 아닌 “울티마같은 게임을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놀란 부모님은 최연규 이사의 그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울티마가 뭔지 물어보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직접 만든 ‘게임기동’, 인생의 중요한 사람을 만나다
그렇게 최연규 이사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게임개발자의 꿈을 드러내놓고 펼치게 된다. 부모님도 386 PC가 대세던 시절, 아들에게 486 PC를 선물해주며 함께 응원해 주는데 이 시기 PC 통신을 통해 최연규 이사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콘솔게임 잡지의 필자로 활동할 만큼 콘솔게임을 굉장히 좋아했던 터라 아예 PC 통신 동호회도 직접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게임기동(콘솔게임동호회)’이다. 최연규 이사와 함께 운영진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현 소프트맥스의 조영기 전무와 창세기전 전석환 아트디렉터였다. 어떻게 보면 창세기전의 핵심멤버가 이미 그때부터 완성된 셈.
그 당시 세 명의 운영진은 나름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정했는데 MSX용으로 나온 게임을 PC로 컨버전 해보겠다는 계획이었다. 목표는 MSX용으로 나온 코나미의 메탈기어.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아무튼, 메탈기어 스테이지 하나를 그대로 카피해서 PC에서 돌아가도록 구현했습니다. 그런데 해놓고 보니까 좀 더 욕심이 생겼어요.”
때마침 손노리에서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데모버전을 공개했고 마을 하나 정도 구현된 버전에 불과했지만, 게임 관련 PC 동호회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그걸 보고 최연규 이사는 이럴 바엔 우리 게임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드디어, 게임개발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어떤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가 파이널판타지와 드래곤퀘스트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JRPG가 득세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울티마 시리즈를 많이 좋아했었거든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식 RPG는 스케일이 엄청나서 도저히 만들 역량이 안되어 보였어요. 결국, JRPG로 가기로 했죠. 자유도는 제약이 있지만 리소스도 절약할 수 있고 스토리텔링을 강조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게임기동호회에서 모인 사람들이라는 영향도 컸습니다.”
바로 그때 최연규 이사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현 IMC의 김학규 대표다.

위기의 학규굴, 소프트맥스에 입사하는 이유
최연규 이사의 기억에 의하면 그 당시에도 김학규 대표는 게임계의 도사 같은 이미지였다. 여기저기 인맥도 많고 동료와 후배들에게 게임개발론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김학규 대표가 살던 집에 지하실이 있었고 아마추어 개발자들은 이 지하실을 ‘학규굴’이라고 불렀다. 함께 모여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가르쳐주기도 하는 대한민국 아마추어 개발자들의 산실 역할을 한 것이다.
김학규 대표는 그때 플래포머 액션게임 ‘리크니스’를 개발 중이었는데 콘솔처럼 PC에서 게임스크롤이 부드러운 프레임을 내도록 구현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테스트베드가 필요했던 최연규 이사와 김학규 대표는 두 팀을 합병해서 리크니스를 먼저 개발하기로 합의하고 게임 개발에 전념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93년 겨울, 학규굴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김학규 대표에게 덜컥 군대 영장이 떨어진 것이다.
“김학규 대표가 그렇게 군대를 가버리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다행이었던 것이 바로 그때 당시 저희 팀 팀장이시던 조영기 전무 지인께서 소프트맥스를 소개해주셨어요. 정식 입사라기보다는 ‘소프트맥스가 사무실을 빌려주고 우리는 게임을 다 만들면 나중에 임대료를 갚겠다’ 이런 개념이었어요.”
그 당시 소프트맥스의 전신이었던 ‘갑인물산’은 일본에 메가드라이브 게임을 납품하던 업체였으나 부도를 이기지 못하고 도산 처리하고 만다. 지금 소프트맥스 정영원 대표이사가 대리로 근무하던 시절. 정원영 대표가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퇴직금 3천만 원으로 도산한 갑인물산과 그 멤버들을 인수하게 된다.
“상당히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저희도 사무실이 필요했고 소프트맥스도 게임이 필요했고. 진짜 사장님이 대단하신 건 격동의 90년대를 보내면서도 한 번도 직원들 월급이 밀린 적이 없어요. 직원으로서 정말 신뢰가 갔죠.”
“5개월 걸려 리크니스를 소프트맥스의 처녀작으로 발표하고, 다시 5개월 개발해서 스카이&리카라는 비행슈팅 게임을 출시합니다. 큰 수익은커녕 손해는 안 본 정도였는데 제가 사장님께 떼를 썼어요. 1년 안에는 꼭 만들어볼 테니 RPG 만들게 해달라고요. 창세기전이 그렇게 탄생하게 됐습니다.”
“창세기전의 탄생, 일생일대의 모험”
“창세기전을 SRPG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기도 했지만 리소스를 적게 쓰고도 유저들에게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었거든요. 그 당시 일본의 랑그릿사나 화이어 엠블램같은 SRPG들도 그렇게 수준이 높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가 파이널판타지나 울티마 같은 엄청난 스케일의 대작은 만들지 못해도 파이널 엠블렘 정도 볼륨의 게임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질과 양 모두에서 엄청난 리소스의 볼륨이 필요한 일반적인 RPG와는 달리 SRPG는 제한된 리소스로도 웬만한 스케일의 게임구성이 가능한 장르적 특성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당시에 일본에서 인기가 있던 거의 모든 SRPG들을 철저히 연구하고, 미국식 SRPG라 할 수 있는 HOMM(히어로즈 오브 마이트앤매직)같은 게임도 참고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의 개발역량은 대부분 액션이나 슈팅게임 중심이었기 때문에 SRPG를 만들만한 개발자를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마침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회사에 들어온 프로그래머가 대학다니던 시절 ‘랑그릿사’라는 일본 SRPG를 PC버전으로 리메이크해서 한 스테이지정도 만들었던 것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가 메탈기어를 PC로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그분은 랑그릿사를 PC로 그대로 만들어 보신 거죠. 당시 국내는 게임학과나 학원도 없었고 개발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전무 했기 때문에 다들 외국 게임을 그대로 따라서 만들어 보면서 하나둘씩 배워간 것 같아요. 어쨌든, 저로서는 행운이었죠. 둘 다 SRPG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금방 죽이 맞아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창세기전의 메인 프로그래머였던 안정구 씨로 이후 창세기전2까지 함께 개발하게 된다. 랑그릿사를 만들면서 만들어 놓은 맵 에디터나 스크립트툴들이 창세기전 개발에 매우 유용하게 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창세기전 시리즈에 버그가 많았기 때문에 스스로 ‘버그맨’이라고 자학개그를 하고는 했다고 하는데, 최연규 이사는 프로그래머 문제라기보다는 체계적인 디버깅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탓이 크다고 말한다.
당시는 지금처럼 개발 외의 운영팀이나 QA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서 일반유저들을 테스터로 임시고용해서 진행했는데 그나마, 출시일정에 쫓겨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프트맥스 전신이었던 갑인물산 시절부터 일본에 메가드라이브용 게임을 납품하면서 도트캐릭터에 잔뼈가 굵었던 남은영 씨가 캐릭터를 맡으면서 대략적인 진용이 짜진다.
참고로 이올린(Iyoline)은 남은영 씨의 하이텔 아이디였다고 한다. 남은영 씨 역시 서풍의 광시곡을 거쳐 창세기전3 파트2까지 창세기전의 거의 모든 2D 도트 캐릭터들을 전담하게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획자 1명, 그래픽 3명, 프로그래머 2명의 단출한 팀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작업을 공동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기획자가 맵을 찍거나 프로그래머가 필살기 그래픽을 그리거나 하는 경우도 다반사. 막판에 스케줄 압박이 시작되자 다들 야근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래픽 쪽에는 여성스탭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부담이 많이 됐다고.
한편, 최연규 이사는 창세기전의 세계관을 만들면서 80년부터 무협작가로 활동하다 90년 중반 신무협을 창시했던 소설가 ‘용대운’에게 조언을 구한다. 뻔한 소재가 반복되면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던 무협계에 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이나 프랑스 모험소설을 차용한 작품을 선보이며 새 바람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당시에는 잠시 활동을 접고 비디오대여점을 하면서 하이텔 ‘무림동’을 통해 활동하던 시기였는데 당시 무림동은 국내 무협작가들의 커뮤니티로는 가장 컸다. 최연규 이사 역시 무림동에서 활동하며 무협평론을 하면서 작가들하고 친해졌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매일 밤 대화방을 통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저에게는 스승과 같은 분입니다. 아마도 게임개발자가 되지 않았다면 이분을 따라서 무협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SRPG는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서 이야기 작법에 대해서 많이 여쭤보았었는데, 특정장르의 평범한 클리셰(판에 박은 듯한 표현)가 다른 장르로 건너가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참신한 느낌이 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시 한국 무협계는 지금의 양판소와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서로서로 베끼는 전부 비슷한 이야기 천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엉뚱하게 하드보일드적 분위기를 모티브로 무협소설을 쓰시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이 매우 독특했어요.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게임스토리도 다들 비슷했거든요. 다들 마왕 잡는 거였어요.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어떤 마왕을 잡느냐 정도였죠. 조언을 듣고 나니 창세기전에서 뭔가 독특한 느낌을 내보자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바로 창세기전의 스토리 기획에 들어갔다. 기본은 퓨전판타지 즉, 영화 ‘스타워즈’를 모티브로 했다. 제국에 쫓기는 왕녀 이올인(레이아 공주)이 정체불명의 남자(루크 스카이워커)를 만나게 되는 스토리. 적의 대장은 검은 색깔의 철가면을 쓰고 있다. (다스베이더)
“제가 스타워즈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조지 루카스 감독도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향을 받아 SF에 사무라이를 섞어 스타워즈를 탄생시켰다고. 여기에서 창세기전 모델을 생각해 냈습니다. 루카스 감독이 SF 판타지에 일본 사무라이무협을 접합시켰다면, 저는 SF 판타지에 우리나라무협을 접합시켜 보자. 개인적으로 한국 무협소설들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러브 스토리는 국내 드라마를 바탕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어요. 이전 RPG는 보통 청소년 물이라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본격적으로 엮은 게 별로 없었 거든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국내 무협지와 드라마들의 기억상실, 기연 같은 소재나 클리셰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조지루카스 : 미국의 영화감독이자 각본가, 제작자이다. 《스타 워즈》시리즈로 크게 성공하여 영화 업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 아키라(일본어: 黒澤明, くろさわ あきら, 黒沢明로도 표기, 1910년 3월 23일 ~ 1998년 9월 6일)는 일본의영화 감독이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와 함께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 영화의 거장이다.
클리셰: 진부한 표현 혹은 상투구를 칭하는 비평 용어. 원래 인쇄에서 사용하는 연판(鉛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였지만 판에 박은 듯 쓰이는 문구나 표현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했다. 영화에서 사용될 때 역시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쓰여 뻔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나 캐릭터, 카메라 스타일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사전 출처: 위키디피어, 네이버 지식사전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 아키라(일본어: 黒澤明, くろさわ あきら, 黒沢明로도 표기, 1910년 3월 23일 ~ 1998년 9월 6일)는 일본의영화 감독이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와 함께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 영화의 거장이다.
클리셰: 진부한 표현 혹은 상투구를 칭하는 비평 용어. 원래 인쇄에서 사용하는 연판(鉛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였지만 판에 박은 듯 쓰이는 문구나 표현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했다. 영화에서 사용될 때 역시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쓰여 뻔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나 캐릭터, 카메라 스타일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사전 출처: 위키디피어, 네이버 지식사전
당시 국내 TV드라마와 무협소설은 판에 박은 듯한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무협과 드라마에서는 흔한 이야기가 SF 판타지에서는 오히려 참신해 보일 수 있다는 역발상의 결과였다.
“기억상실과 그로 말미암은 삶의 굴곡은 어찌 보면 국내 드라마에서는 그 당시에도 이미 식상한 소재였어요. 무협지에서도 굉장히 단골소재였고요. 하지만, 게임에서는 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조차 없던 때이기 때문에 먹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창세기전을 개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의 샘플을 만들었었는데 초안들을 보고 팀원들이 불륜치정 작가라고 놀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정도로 남녀관계의 치정극에 집중했었어요. 실제로, 본편에서는 생략되었지만 흑태자 스타이너와 베라딘, 아이린 왕녀와의 삼각관계, 그로 인한 배신, 흑태자의 몰락과 추락 후 기억상실, 이후에 기억을 되찾으며 복수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대만 현대로 옮겨 놓으면 TV드라마의 치정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흔한 이야기가 SF 판타지 게임에서 펼쳐지니까 제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독특하고 재미있더라고요"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무협지의 기연식 전개를 많이 사용했어요. 무협지를 보면 절벽에 떨어지거나 하면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무공비급을 발견해서 한번에 무공이 강해지거나 하잖아요. 이런 것을 ‘기연’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서서히 레벨을 높여가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이런 기연식 전개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전에서는 의도적으로 기연식 전개를 택했어요. 라시드가 형을 만나 갑자기 능력이 급상승한다거나 흑태자가 데이모스에게 궁극의 그리마를 전수받는 등의 장면이죠. 무협지에서는 흔한 장면이지만 게임에서는 드물었고, 일반적인 게임문법을 깨는 행위였죠. 덕분에 밸런스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좋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합니다만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성의 극대화에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전까지 힘들게 싸워야 했던 적들이 필살기 한,두 방에 나가떨어지게 되죠. 지금으로 치면 ‘먼치킨물’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기연’이나 ‘먼치킨’ 모두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게임 스토리 텔링에서는 좋은 방법은 아니었습니다만 효과는 예상이상으로 좋았습니다. 게임에서 그런 식의 스토리 전개는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이었거든요. 역시, 개인적으로도 기연과 먼치킨이 난무하는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창세기전에는 잘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최연규 이사는 창세기전이 스타워즈와 다양한 서브컬쳐들을 향한 오마주임을 분명히 밝히고 싶어 몇 가지 게임 내 장치를 일부러 설치했다. 창세기전2 맨 처음 장면에서 남,녀 레인저의 이름이 ‘마크’와 ‘하밀’인 것도 그 중 하나. 마크 하밀은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의 실제 배우 이름이다. 이외에도, 의식적으로 패러디나 오마주가 들어간 부분에는 원작을 연상할 수 있는 단어나 상황을 배치하여 단순한 표절로 오해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창세기전은 그때까지 좋아하던 각종 서브컬쳐(무협, SF, 판타지, 애니메이션)들에 대한 경의로 만들어진 게임입니다. 그런 점을 게임 내에서 분명히 알리려고 노력했고, 유저들이 그러한 점들을 찾아서 저희와 함께 즐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다른 매체나 장르에서의 흔한 소재들을 모아 창세기전이라는 게임 내에 녹여내서, 원작들하고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매력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각각의 평범한 이야기와 소재들을 완전히 다른 장르에 잘 섞어서 모아놓으니 엄청난 시너지가 생기며 굉장히 재미있어졌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이라는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이 영화가 바로 비슷한 케이스입니다. 금발의 여자가 대놓고 이소룡의 노란 옷을 입고 전형적인 무협영화와 사무라이영화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나 원한관계 등도 전부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고요. 따지고 보면, 매니아였던 감독의 의도적인 짜깁기입니다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재미있습니다. 하나하나 놓고 보면 대놓고 비슷한데 모아놓고 보면 굉장히 참신한 그런 영화였죠. 창세기전도 이와 비슷한 컨셉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저 자신이 각종 서브컬쳐들의 굉장한 매니아였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는 달리 특정 부분이 어디서 본듯하니 표절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많아서 이러한 제작 의도를 100% 전달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사실, 당시는 프로개발자로서의 책임감보다는 아마추어적인 접근으로 장난처럼 만든 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국내에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생겨났고, 괜한 논란을 자초할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서풍의 광시곡’ 이후에는 실제 역사나 사건 등을 소재로 삼아서 이런 논란을 근본적으로 비껴갔습니다. 개인적으로 역사물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하나였던 창세기전이 두 개로 나뉘고.. 소프트맥스의 새 전기가 열리다.
최연규 이사가 처음 기획했던 창세기전은 원래 1편에서 완전히 마무리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90년대는 소프트맥스의 전성기면서도 운영 면에서는 제일 어려운 시기였고, 최연규 이사의 원래 약속대로 1년 안에 다 만들 수도 없었다. 해서 창세기전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지 8개월 만에 1, 2부로 나눠서 발매해야겠다는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희 프로그래머가 아마추어 시절부터 SRPG를 개발하면서 맵이나 스크립트 에디터를 미리 만들어놨었어요. 그렇게 전체적인 개발기간이 상당히 단축됐는데도 1년 안에는 도저히 다 만들기가 불가능한 겁니다. 사실은 제가 무모했던 거죠.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전1’은 1995년 12월 플로피디스크 10장으로 출시된다. 게임 내적인 버그도 있었지만, 그 당시 플로피디스크 자체의 오류 문제가 심각했다. ‘창세기전1’을 구입한 유저 2명 중의 1명은 무조건 오류가 발생할 정도. 소프트맥스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창세기전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창세기전1의 성공은 자연스레 창세기전2의 개발로 이어졌으며 96년 12월 발매된 창세기전2는 당시로써는 상당히 높은 완성도와 특유의 스토리로 소프트맥스를 일약 국내 정상급 개발사로 끌어올리게 된다. 창세기전2는 창세기전1의 내용을 보다 완벽하게 가다듬었음은 물론 아직도 회자되는 아수라파천무를 비롯한 초 필살기들과 해전, 공중전등 다양한 스타일의 전투를 지원하는 당시의 국내 게임으로서는 획기적인 스케일의 게임이었다.
“‘창세기전2’에 대한 완성도가 좋아지게 된 이유가 이미 대부분 시스템은 1편에서 다 만들었던 거라서 그래요. 2에서는 초 필살기 같은 새로운 시스템만 도입하면 됐거든요. 원래 계획했던 창세기전 스토리도 잘 끝냈고 주위로부터 성공적인 프로젝트였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들었던 '창세기전2'였지만 최연규 이사에게는 굉장히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다. 바로 ‘용자의 무덤’이라는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퍼즐형 도전 던전. 창세기전1편에서도 등장했었는데 2에서 개발일정 관계로 ‘공사 중'이라는 푯말과 함께 폐쇄되게 된다.
“용자의 무덤은 스토리의 부담 없이 퍼즐형으로 만드는 던전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시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어요. 레벨 디자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금의 상업용 게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정도의 장난스러운 요소도 많이 있었는데, 1편의 32층에 이어 2편에서는 적어도 50층까지는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본편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시간이 너무 소모되었기 때문에 별책부록 같은 용자의 무덤까지 만들 만한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요. 이러한, 아쉬움 때문에 이후 외전들에 용자의 무덤이라는 장소가 자주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번 창세기전4에서는 만레벨 콘텐츠로서 제대로 만들어볼 계획입니다.”
이러한, 창세기전2의 성공은 아직 아마추어 개발자라는 인식을 하고 있던 최연규 이사 본인은 물론 소프트맥스라는 회사도 한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97년은 최연규 이사 개인은 물론 소프트맥스에게도 보다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