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창세기전에 올인한 20년 청춘, 소프트맥스 최연규 이사“에 이어서.. [링크]


= 신작의 잇따른 실패, ‘서풍의 광시곡’이 나오게 된 이유

원래 한편으로 기획된 창세기전을 1, 2편으로 나눠서 출시했고 2편에서는 이전의 부족한 부분을 대부분 보강했기에 최연규 이사는 ‘외전’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소프트맥스가 1996년, 1997년 잇달아 출시한 PC게임 에임포인트(액션 RPG)와 판타랏사(RTS)가 흥행에 참패하면서 회사 사정은 크게 어려워진다.

“그 당시 RTS 게임들이 크게 흥행했습니다. 커맨드앤컨쿼가 대세였고요, 워크래프트1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프트맥스에서도 큰 기대를 하고 두 개의 별도 개발팀을 둬서 에임포인트와 판타랏사를 개발한 겁니다. 근데, 시장에서의 반응이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위험에 처한 회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창세기전을 다시 들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더라고요. 해서 ‘서풍의 광시곡’이 급하게 기획됐던 겁니다.”

최연규 이사는 ‘서풍의 광시곡’ 세계관을 원래 창세기전에서 일부러 50년 정도 떨어뜨려 놓는다. ‘외전’이라는 표현을 강조한 것도 창세기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

“서풍의 광시곡 개발 초기는 게임 그래픽 쪽이 큰 변혁을 겪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픽 카드의 성능이 월등히 올라가면서 640X480 해상도에 16비트 컬러가 가능해졌어요. 한마디로 당시로는 엄청난 그래픽 표현이 가능해진 거죠. 즉시 샘플 스크린샷을 만들어봤습니다. 저 해상도 게임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래 이거다. 이걸 바탕으로 ‘서풍의 광시곡’을 만들자. 바로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했죠.”



[ ▲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스크린샷 ]




창세기전에서 느낀 바가 있었던 최연규 이사, ‘서풍의 광시곡’에서도 오마주와 패러디를 살리되 아예 원작의 이름을 표기하기로 한다. 그게 바로 소설 몬테 크리스토 백작. 그뿐 아니라 좋아하는 무협, 애니메이션 등 서브컬쳐를 한데 모아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임특성에 맞게 몬테 크리스토 백작 소설 원작으로 그 외, 서브컬쳐 작품 등을 오가며 비율을 조정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갔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가가 에반게리온의 감독을 맡았던 ‘안노 히데아키’인데요,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를 보시면 알겠지만 거의 소설 ‘해저 2만 리’를 기반으로 각종 패러디 열전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체가 별도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어요. ‘서풍의 광시곡’도 그런 걸 원했죠. 지금도 서브컬쳐를 좋아한다고 하면 ‘오덕(=오타쿠)’이라고 하면서 굉장히 천대받는데, 그 당시에는 더 심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스스로 굉장한 오타쿠였던 안노 감독은 자신의 작품안에 자기가 좋아하던 6~70년대 애니메이션을 녹여놓았고, 또 팬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옛날 애니메이션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그런 흐름이 아주 좋았어요. 창세기전 시리즈의 팬들도 게임 내에 녹아있는 여러 가지 서브컬쳐들에 대해 관심을 두고 같이 즐겨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서풍의 광시곡부터는 창세기전 시리즈의 음악감독을 맡은 장성운 씨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장성운 씨가 작곡한 서풍의 광시곡의 메인테마인 ‘Wind of memory’는 아직도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명곡이다.

‘서풍의 광시곡’과 관련한 추가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창세기전 1편과 2편은 순정만화를 그리던 김진 씨가 원화 작업을 했는데, ‘서풍의 광시곡’은 이례적으로 일본인 작가를 추천받아 기용했다고. 분위기가 굉장히 잘 나왔고 퀄리티 자체가 매우 높았으나 중간에 작가가 잠적해버려 나머지 부분을 국내에서 따라 그려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그렇게 소프트맥스는 ‘서풍의 광시곡’을 무사히 끝냈고 1998년에 정식 출시하면서 회사 재정의 안정화를 꾀하나 싶었으나 IMF라는 현실 속 거대 보스몬스터가 등장하면서 다시금 위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 IMF와 템페스트, 미소녀 육성 창세기전의 탄생

‘서풍의 광시곡’을 끝낸 최연규 이사의 머릿속은 이랬다. “이제 창세기전은 끝내자. 지금까지 너무 진지한 게임만 했다. 이번에는 좀 가벼운 게임을 만들어 보자.”

그때, 마침 사내 스탭 중 한 명이 미소녀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아이디어를 낸다. 예전 어려운 시절에 ‘졸업’, ‘탄생’ 같은 일본산 게임을 들여와 PC용으로 컨버전한 적이 있었던 소프트맥스. 회사 내부에서도 자연스럽게 미소녀 육성게임의 노하우를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때 아이디어를 냈던 스탭은 지금 중견급 간부로 성장해 ‘아이엔젤’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다.


[ ▲ 소프트맥스의 iOS 최신작 '아이엔젤' ]


[리뷰] '내 손안의 작은 천사' 아이엔젤 리뷰


“처음부터 일본의 ‘미소녀전사 세라문’ 이나 ‘사쿠라 대전’처럼 미소녀들이 잔뜩 등장해서 변신하거나 메카닉을 타고 싸우는 게임으로 기획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도 그 방면에서 꽤 유명하던 타카 토니 씨를 섭외하게 된 것이고요.

단지, 이번에는 전작들과는 달리 실제 역사를 모티브로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영국의 세익스피어 풍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역사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유저들이 게임을 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게임을 기획하면서 영국의 역사책을 하도 보다 보니 나중에는 영국 국왕의 계보도를 줄줄 외울 정도가 됐었죠.

영국의 장미 전쟁을 무대로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미소녀 육성게임을 만들자는 것이 애초의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창 만들고 있을 때 당시 ‘서풍의 광시곡’의 유통사였던 ‘하이콤’이 IMF로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꽤 잘 팔렸던 ‘서풍의 광시곡’의 판매대금을 하나도 못 받게 된 거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다시 한번 회사에서는 개발 중인 육성게임에 ‘창세기전’ 브랜드를 넣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청이 있었고 이때가 바로 1998년 6월, 템페스트의 원래 발매일이 6개월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창세기전 자체가 흥행 보증수표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는 고백.

“아무리 개발자의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 자체가 망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어른들의 사정이죠. 억지로 창세기전을 접목하다 보니 설정에 무리수가 많이 들어갔고 완성도도 떨어지게 됐습니다. 버그도 상당했고요. 원래 계획했던 기획들도 대거 삭제되거나 다른 것들로 대체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쉬웠던 프로젝트였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만들어야 했던 창세기전의 외전, ‘서풍의 광시곡’과 ‘템페스트’로부터 얻은 교훈도 있었다. “서풍의 광시곡” 개발 시기부터 토대를 갖추기 시작한 자체 개발툴 “넥스트스텝”이 확립되었고 이후 소프트맥스 신작들의 개발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최연규 이사의 스토리텔링법에 있어서도 변화가 생긴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개발한 ‘서풍의 광시곡’의 멀티엔딩, 즉 분기에 따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했던 ‘시라노의 선택’이 의도한 만큼 유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




[ ▲ 미소녀 육성 창세기전 '템페스트' ]




“RPG게임을 만드는데 있어 '분기'라는 것은 만들기는 힘든데 유저가 느끼는 만족도는 크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메르세데스의 편지를 받고 목숨을 건 선택을 했어야만 할 시라노와는 달리 유저입장에서는 세이브 해놓고 로드하면 그만이니까요. 약간의 자유도가 늘어났다고 느낄지언정 시나리오적인 완성도에는 오히려 역효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에, 템페스트를 개발하면서 부터는 단순한 분기가 아닌 게임진행의 과정이 반영되서 엔딩이 갈리게 되는 ‘연애 시뮬레이션’적인 스토리 텔링 기법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캐릭터의 스탯과 호감 등의 요소를 참조해서 독립적인 사건을 객체적으로 생성해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사건들과의 인과성은 떨어지지만, 스토리를 창조하는데 있어 상당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이벤트라도 하더라도 어떤 유저가 플레이했느냐, 세계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왔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형태가 된다고. 그리고 수년이 지난 후 이 객체지향적 스토리텔링은 MMORPG 창세기전4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선형적으로 이벤트를 짤 때는 창세기전2관련 시나리오의 경우 이올린이 팬드래건 대장으로 반드시 등장하는 구조였다면 객체지향적 기법은 되면 그때 상황만 맞다면 누구나 팬드래건 대장을 계승할 수 있도록 짤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저들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키느냐에 따라서 스토리가 새롭게 짜질 수 있다는 것이죠. 샌드박스와는 다른 의미의 자유도라고 할 수 있고요. 유저들이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조작해서 역사를 바꿀 수도 있게 됩니다.”



= 인생의 갈림길, 최고의 완성도 '창세기전3'를 탄생시키다.

“창세기전3 파트1이 1999년 12월에 출시됐고 파트2가 2000년에 나왔습니다. 그 시점이 대한민국 게임계의 격변기였는데요, 게임형태도 패키지게임에서 온라인게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였고, 그래픽 쪽도 2D에서 3D로 넘어가는 전환기였습니다. PC방이 크게 유행하면서 리니지 같은 1세대 MMORPG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가 소프트맥스의 전성기이기도 했습니다. 템페스트가 아쉬운 부분은 많았지만, 상당히 많은 유저분들이 좋아해 주셨어요. 차라리 템페스트가 완전히 망했다면 정신 차리고 보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을 텐데, 어찌 보면 어정쩡하게 살아남은 게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창세기전이 수익이 되다 보니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변화의 흐름을 놓쳐버렸던 겁니다. 지금도 타이밍을 놓친 게 후회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창세기전3는 굉장히 훌륭했던 프로젝트로 남는다. 템페스트의 후반부부터 타카 토니 작가의 후임으로 들어온 김형태 일러스트레이터 (현 블&소 아트디렉터) 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맡았고, 서풍 때부터 창세기전 시리즈의 음악을 도맡아온 장성운 씨와 지금은 ESTi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진배 씨, 남구민 씨 등이 모여 당시 게임개발사로는 드물게 음악작업실을 따로 운영했다.




[ ▲ 많은 유저들의 호평을 받았던 '창세기전3' ]




템페스트를 급하게 만들면서 헝클어진 세계관 설정을 창세기전3에서 수습하려 했으며, 패키지게임이라 겉으로 표는 잘 나지 않았지만 ‘서풍의 광시곡’ ‘템페스트’에서 교훈을 얻은 객체지향적 스토리텔링 기법을 접목했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객체적 기법에 따라 구성, 에피소드끼리 서로 영향을 주게 하였던 것이다. 그 기법이 응축된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창세기전3 파트2의 ‘크로스 인카운터’.

“창세기전3 파트1과 파트2는 주위로부터 완성도가 굉장히 높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호불호가 갈렸지만 시나리오적인 완성도도 많이 칭찬해주셨고요. 회사 입장에서도 그렇고 제 입장에서도 그렇고 가장 잘 나갔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또 한 번 타이밍을 놓치고 ‘마그나카르타’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 인생 최대의 위기, 마그나카르타의 함정에 빠지다.

“창세기전 파트2를 개발할 때 다음 작품은 정말로 3D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서 3D 그래픽엔진인 아수라엔진을 개발한 후 마그나카르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우습게 봤던 거죠. 자만했던 겁니다.”

“이전까지 7년 동안 10개 정도의 작품을 만들면서 1년에 하나씩은 꼬박꼬박 출시했던 경험만 믿었습니다. 1년 안에 마그나카르타를 완성한다는 스케줄을 짰는데 프로듀서로서 판단을 크게 잘 못 했습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회사 기업공개 직후이기 때문에 마그나카르타가 반드시 12월에는 출시가 되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시도했던 3D 롤플레잉 게임, 마그나카르타의 개발기간을 너무 짧게 정했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디렉터라면 게임개발 전체적인 면을 조율해야 함이 옳은데 창세기전3를 거치면서 스토리적인 성공에만 집중하다 보니 스토리적 완성도만 높고 게임성은 떨어지는 게임이 나오게 됐다는 것이 최연규 이사의 고백.

“마그나카르타는 너무 힘들었어요. 개발기간도 짧았던데다 당시 급성장하는 온라인게임 회사들로의 인력유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고.. 막판에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탈 붕괴에 빠졌던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게시판에 제 심정을 토로하는 글을 올렸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3시간 뒤에 지웠거든요. 근데 그걸 캡쳐한 이미지가 돌면서 더 큰 문제가 됐어요. 그저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서 저 자체가 문제인 데 괜히 불법복제로 돌리고 주변 환경 탓으로 돌리고... 제가 어려서 너무 무모했었고요. 유저분들께 죄송스러운 일이었죠. 지금도 정말 후회가 됩니다.”

“그 이후부터 외부 인터뷰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대인공포증에 걸리다시피 했어요. 10년이 지났으니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지 그때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더 힘들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를 결국 리콜 조치 됐습니다. 이 모든 게 제가 갓 서른 살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저를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20대에 뭐했나 찾아보니 게임개발 외에는 한 게 전혀 없는 거예요. 그 흔한 여행사진 한 장도 없고 게임 외에는 취미 생활도 전혀 없었고요. 그렇다고 돈을 크게 번 것도 아니고. 프로젝트의 말미쯤 되면 10일 넘게 잠도 못 자고 노력했는데 내 인생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다시 멘탈붕괴가... ”




[ ▲ 마그나카르타라는 함정, 가슴 아프지만 그 당시 유저들은 버그나카르타라고 부르기도. ]




어쨌든, 본의 아니게 찾아온 10년만에 여유(?)에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도 연락하게 되고 지금의 부인도 이때 만나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같이 월드컵 보러 다니면서 친해져서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게임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제 집사람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많이 알게 됐습니다.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면서 마음의 안정도 찾았고요.”

소프트맥스가 언리얼 엔진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아웃소싱을 적극 도입해보라는 김학규 대표의 조언에 따라 2000년대 초반부터 언리얼엔진 라이선스와 미들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노하우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현재 에픽게임즈 코리아에서 엔진 기술을 담당하고 있는 잭 포터 부장도 소프트맥스의 엔진 프로그래머였다.

길고 긴 방황, 그리고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최연규 이사는 일본으로 넘어가 마그나카르타의 콘솔 버전을 작업하는 일을 맡게 된다. 마그나카르타 PC판을 내기 전부터 일본 반다이와 콘솔판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어 있었던 것.

“일본의 개발환경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게임에만 신경 써서는 안 되겠구나. 이제부터는 프로듀서의 역할도 새로 정립해야겠다. 우리나라는 디버깅을 그냥 아르바이트로 처리하는 편인데, 일본은 디버깅 전문회사가 있을 정도로 디버깅에 신경을 쓰더라고요. XBOX360 마그나카르타2가 사전준비 1년에 실제 개발기간이 4년인데 막판 디버깅에만 1년을 썼을 정도였으니까요. 개발 중 버전을 보내주면 해당 게임을 처음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영상으로 촬영해 전달해 주기도 할 정도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 대망의 창세기전 온라인 프로젝트가 시작되다.

“2008년부터 마그나카르타 콘솔버전 팀원 중 일부를 차출해서 프로토타입TFT를 만들었습니다. 팀원들의 상당수가 우리나라 시장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했고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향이 그리웠던 거죠. 그 당시 저를 비롯한 상당수 개발진이 월드오브워크래프트에 빠져있었는데요, 같이 레이드 공대를 하면서 서버 1, 2등 할 정도로 열심히 했었고 판에 박힌듯한 JRPG보다는, 온라인게임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열망이 매우 강했습니다.”

JRPG로 게임 개발을 시작했던 최연규 이사는 2000년대 중반으로 오면서 그 관심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연출,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일본적인 요소들이 내리막을 걷던 시절. 최연규 이사의 차기작에 대한 구상이 점점 온라인게임 쪽으로 기울게 된다.

“온라인게임에서는 스토리텔링이 불가능하다. 이런 얘기가 있었는데 전 편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온라인게임에서도 싱글 RPG처럼 선형구조로 스토리텔링을 맞추려고 해서 그런 거라고요. 온라인게임에서는 온라인이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 요소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 형태에 맞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있을 거고 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게임을 개발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총 집결시키기 시작했죠.”

“오랫동안 즐겨야 하는 온라인게임이기에 객체지향적 스토리텔링을 접목하자. 유저가 쉽게 스토리상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는 패키지게임과는 달리 온라인게임은 유저가 이미 자신을 아바타에 투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이야기의 중심이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니, 1인칭이 아닌 2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자. 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끌면 안 된다. 기승전결도 너무 길면 안 된다. 하나, 하나의 사건이 거대한 줄기가 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런 개념들을 하나, 둘씩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 최초 공개된 창세기전4의 스크린샷 ]




정식 넘버링이 붙은 창세기전4. 원래는 MMORPG가 아니었다. 던전앤파이터 같은 캐쥬얼한 형태도 후보에 올랐으며 필살기가 있는 캐릭터 게임이기 때문에 TCG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웹게임이 크게 인기가 없었지만 지금 창세기전4 개발을 시작했다면 웹게임으로도 만들 수도 있었다고 밝히는 최연규 이사. 하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내부적인 기대가 점점 커지고, 개발팀 모집에 국내 굴지의 온라인 게임을 만들었던 인재들이 대거 들어오면서부터 창세기전4는 자연스럽게 MMORPG 프로젝트로 여겨지게 된다.

“게임브리오 엔진을 굉장히 잘 다루는 분도 계셨고, MMORPG 서버 프로그래머분들도 대거 입사하셨습니다. 특히, 개발시스템이 굉장히 업그레이드됐는데 이 정도 전력이면 가능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면서 있을만한 콘텐츠를 넣다 보니 어느 순간 MMORPG랑 별다를 바가 없어졌더라고요. (웃음) 사람들을 잘 만났던 것 같습니다. 아직 더 뽑아야 하는데 모델러와 엔진 프로그래머분들이 지원을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패키지게임 혹은 온라인 캐주얼게임만 만들던 회사에서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MMORPG 프로젝트를 가동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 회사를 설득하기 위해 최연규 이사는 아트디렉터와 함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

“꼭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시작할 수만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리스크가 워낙 큰 프로젝트라 회사적으로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큰 결심을 해주신 사장님께 항상 감사해 하는 거고요. 소프트맥스의 사운을 걸고 만든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 에필로그

처음 직접 최연규 이사를 만났던 것은 인벤의 사무실이었다. 창세기전4 공개를 위해 이득규 개발실장과 함께 방문했는데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겸손함과 개발자로서의 전문성이 기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팅 뒤에 이어진 술자리에서도 한참을 말이 없다가도 창세기전과 게임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대화를 이어가는 최연규 이사를 보며 ‘진짜 개발자란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공식적인 인터뷰 뒤, 따로 어려운 요청을 해서 이번 기사를 기획하게 된 것도 오직 최연규 이사의 개발자로서의 순수한 매력 때문이었다.

2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으로, 최연규 이사에게 앞으로의 꿈을 물었다.

“창세기전4 프로젝트가 2008년에 승인을 받았으니 벌써 햇수로 4년째입니다. 아마 5년짜리 프로젝트가 될 것 같은데요. 예전에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집사람이랑 하면서 나중에 애들이 생기면 힐러랑 탱커 시켜서 같이 파티 플레이하자고 한 적이 있어요.”

“애들 나이가 벌써 8살, 6살인데요. 아무래도, 제 직업상 게임을 쉽게 접하는 환경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게임에 익숙했어요. 저도 부모 입장에서 보니까 자연스럽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측면에서 게임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지금 희망으로는 창세기전4를 정말 잘 만들어서 더 멋진 아빠도 되고 가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기사 댓글을 보니까 군진시스템을 보면서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 8살짜리 꼬마도 할 수 있게끔 쉽게 만들려고 있습니다.”

“마그나카르타 사건 이후로 대인기피증도 생기고 인터뷰도 피했었는데 이제 서서히 용기를 내서 유저분들에게 다가가려고 합니다. 창세기전4에 대한 유저분들의 소중한 이야기도 빠짐없이 보고 있고요. 창세기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게임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많이 응원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부록 – ‘서풍의 광시곡’과 ‘템페스트’제목의 유래

서풍의 광시곡은 트레이딩 카드게임 매직더게더링(MTG=매직)에 등장하는 ‘Zephyr Falcon’(=서풍의 매)이라는 카드와 락밴드 퀸의 명곡인 ‘Bohemian Rhapsody’(보헤미언 광시곡)의 합성어이다. 당시, 최연규이사는 기획스탭 중 한명인 조남영 씨(현재,블루홀의 테라 기획팀장)와 매직을 즐겨했는데 조남영씨의 키카드가 ‘Zephyr Falcon’ 즉,’서풍의 매’에 하도 얻어맞아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인상이 깊었던 이 카드의 이름과 본래부터 좋아하던 퀸의 노래 제목을 합성해서 제목을 지었다. 전혀 연관성 없는 이름들이지만 연결해 놓으니 생각보다 어감이 괜찮았다는 평. 이런 경향은 후속작인 템페스트까지 이어져서 템페스트는 세익스피어 희곡이름이기도 하지만 당시 발매될 예정이었던 매직더게더링의 부스터팩 이름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