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파괴! 죽음! 군주의 분노를 두려워하라!
안 돼, 난 싸워야해! 알렉스트라자여, 도와주소서! 난 싸워야 해!



이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서 외울 정도가 되어버린,
밸라스트라즈의 대사를 들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검은 날개 둥지 트라이가 시작되던 시기에는 두 파티 이상 대기 인원이 있었지만,
그 수가 줄고 줄어 오늘 공격대에 참여한 인원은 고작해야 서른다섯 명 남짓.

오늘 공략에 실패한다면 수 없이 파괴된 다른 공격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공격대 역시 해체의 길을 걷게 될 것 같은 암울한 분위기였다.


허용되는 시간은 고작 3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긴 3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3분.



전투 시작 전에 먹어둔 화염 보호 물약의 효과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렸고,
다시 한 번 화염 보호 물약을 삼켜보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 사라질 뿐이다.



‘용서해라, 나도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또 한명이 아드레날린의 폭발에 휩쓸려 사라진다.
그만큼 밸라스트라즈의 체력이 빠지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밸라의 피는 11%나 남아있는데 메인탱커가 아드레날린에 휩쓸려 사라지고,
2탱커는 1%가 빠지는 짧은 시간동안 버틸 뿐이었다.

흑요석 대검을 들고 마무리 일격의 희열을 느끼고 있던
3탱커는 탱킹 타이밍 못 잡고 1초 만에 휩쓸려버린 상태…….


위협수준 관리를 위해 도적들은 일제히 소멸을 쓰고,
마지막 남은 3%를 빼기 위해서 발악 아닌 발악을 할 때쯤
공격 프레임의 절반은 검은색 바탕에 ‘Dead’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차례의 브레스와 함께 탱커에게 또 다시 아드레날린.
남아있는 탱커는 한 명, 남아있는 힐러도 나를 포함해서 두 명.


1% 남은 상태에서 도적들이 뭉쳐있는 자리에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해
순간적으로 6~7파티의 노란색이 검은색으로 탈바꿈하는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아, 또 이렇게 실패인가…….’하는 탄식이 퍼진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화산 심장부 입구부터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다섯 달, 밸라에 헤딩하기 시작한 것도 한 달 째인
우리 공격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레이드였으니까…….


최후의 저항도, 방패의 벽도, 화염 보호 물약의 효과도 사라져서
순식간에 빨갛게 된 탱커에게 즉시 시전의 치유의 손길을 밀어 넣고 달빛 섬광을 난사한다.

치증만 높을 뿐, 주문 공격력은 50을 갓 넘기는 회드의 공격이 별 효과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때는 그저 이 거대한 벽 같은 밸라스트라즈에게 흠집이라도 내고 싶었다.


그렇게 마지막 남아있는 힐러인 내가 아드레날린의 폭발로 사망하고,
마지막 탱커까지 쓰러지면서 그날의 레이드는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캐스터 두 명의 공격으로 밸라스트라즈가 쓰러지는 것으로 말이다.



▲ 이날 새벽, 기쁨에 발광하다 Mother Attack을 당했다.
그리고 성폭 허리는 확팩 시작까지 보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사람들은 이야기를 한다.
과거는 좀 더 즐거웠다고.
그리고 과거는 좀 더 행복했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미화된 추억이고, 현재의 뒤처짐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인 경우가 많다.

옛날이 좋았다’라는 이야기는 오래된 온라인 게임이라면 어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였고,

와우만 해도 오리지널 중반엔 클로즈 베타 시절의
그때는 미구현 지역에 들어가려고 블리자드의 수호자와 치열한 혈투가...’ 운운,

오리지널 후반엔 ‘전엔 필드의 로망이 있었는데 알방 룰방 뺑뺑이질 뿐이다’라는 탄식이,

불타는 성전 때는 ‘오리땐 세세한 컨트롤이 더 중요했는데 탄력이 모든 걸 망쳤다’라는 불만이,

리치왕의 분노 때는 ‘아서스 이거 일리단보다 포스도 딸리네요’같은 투덜거림이 계속되어 왔으니까.




▲ 라그나로스의 위압감에 비해 리치 왕이 좀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그 토 나오던 남작 레이드 시절로 돌아가시죠?
부사 한번 달아보려고 하루 24시간 게임방에서 죽돌이질 하고,
가덤에서 반나절동안 시체 지키기 당하던 시절이 좋았습니까?
’라며 반발한다.


확실히, 그 사람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다.

지금은 15분정도면 한 바퀴 씩 ‘영웅 난이도’로 돌던 5인 던전은
오리지널 때는 한번 가려면 최소한 2시간씩 잡고서 가야 하는 장소였고,
스트라솔름을 비롯한 5대 던전은 공격대를 꾸려서 가지 않으면 클리어가 힘들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 첫 솔름 후문. 모든 장비가 파괴된 끝에 클리어를...



오리지널과 불타는 성전을 거쳐 지금에 이르면 확실히 와우는 여러 가지로 나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구 수 문제 때문에 파티에 끼기도 힘들고 특정 직업이 인던 면역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느긋하게 놀면서 자동으로 파티가 모이길 기다리면 된다.




▲ 꿈풀, 지옥풀보다 많은 도냥풀의 시절도...
(썅또끼님의 카툰 中)



에픽 아이템도 레이드를 뛰지 않는 이상 열심히 파티 인던을 죽어라 달리거나
필드에서 가뭄에 콩 나듯 드랍되는 정도가 아니면 구할 수 없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5인 영웅 던전에서도 하나 이상씩은 얻을 수 있다.


아니, 골드만 있으면 제작템이다 레이드 쇼퍼다 하는 명목으로
얼마든지 에픽 아이템으로 캐릭터를 강화시킬 수 있는 현실이다.


레이드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위협 수준을 그저 감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딜러들 스스로가 몸을 사렸고,
힐러들도 디커시브 같은 몇몇 편리한 애드온을 제외하면 공격대 프레임과 게임 자체에 내장된 시계,
그리고 공격대원과의 거리를 체크해주는 애드온 말고는 쓸 게 없었다.




▲ 거리 애드온이 반 강제 되었던 쑨



하지만 지금은 위협 수준을 실시간으로 그래프화 해서 보여주는 어그로 미터기도 있고,
공략에 맞춰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면 화면을 흔들고 번쩍거리기까지 하는 공격대 경보가 있으며,
누가 얼마만큼의 딜링과 힐링을 어떤 스킬로 하고 어떻게 죽었는지까지 낱낱이 보여주는
애드온까지 개발된 상태이다.


또, 예전에는 특성을 바꾸려면 대도시까지 왔다 갔다 하던 것도
이중특성으로 해결되고 투기장 아이템을 얻기 위해 전장 입구에서 하루 종일 버티는 일도 필요 없다.


웬만한 대도시는 달라란에서 포탈로 이동할 수 있고,
귀환석 쿨타임도 30분밖에 되지 않으며, 그나마도 던전 찾기 기능 때문에
일일이 필드로 나가거나 그리폰/와이번을 타고서 멍하니 있을 필요도 없어진 상태다.




▲ 샤트라스 / 달라란으로 인해 게임 세계의 이동 시간이 대폭 줄었다.



그야말로 편리하기 짝이 없는 상황…….
하지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고개가 갸웃해진다.


유저들은 더 이상 모험을 하지 않는다.
만레벨을 찍고 나면 그저 달라란에, 아이언포지에, 오그리마에 앉아서
자동으로 이동되는 던전 찾기로 사냥을 다니며, 최상위 레이드 외엔 선호하지 않는다.


달라란에 서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자신은 고독하다.
힘들게 하루의 일상을 끝내고 WOW에 접속하면 무작위 영던과 적당한 막공을 한 바퀴 돌고,
입찰을 위한 채팅 정도 외엔 아무런 말도 없이 게임을 끝내는 사람도 많다.




▲ 인파 속에서 느끼는 고독...
(Riski 님의 카툰 中)




WOW의 플레이는 점점 쉽고, 편리해지지만 그러한 편리함과 바꾸어, 사람들의 만족감은 떨어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 게임을 즐기기보다 서리의 문장 2개를 얻기 위해 의무적으로 접속을 하고,
어떻게든 업적이건 스펙이건 맞추어 얼음왕관 성채에 끼어보려 한다.


쿠엘세라, 아쉬칸디, 설퍼라스 등 나름의 스토리가 이야기되고 명품이라 논란되던 아이템들도
이제는 공격력이 얼마인지, 주문력 가속도 치명타라는 예쁜 옵션이 붙어있나 정도만 중요시 한다.

참 슬픈 일이다.




▲ 전사의 로망, 그리고 사냥꾼의 로망(?). 그러나 성기사가 먹는 아쉬칸디
(천연벌꿀님의 팬아트)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편리함을 버려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최상위 컨텐츠를 즐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시되는 필드가 생겨나고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바쁘게 변해가는 WOW의 입장에선 필요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러한 편리함 속에서 너무도 획일화되는 것을 블리자드도 알고 있기 때문에
대격변을 통한 오리지널 느낌의 회귀나 통찰력과 같은 다양성의 요소를 추가하려는 것이다.


단순히 갈아엎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이러한 시도는 지금과 같은 ‘풍요 속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사가 이러한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즐기는 MMORPG의 특성상,
유저들이 재미를 만들어나가지 못하면 대격변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조금 더 여유있게 게임을 즐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단순히 옛날이 좋았다는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옛날과 같은 게임을 즐기는 마음이 필요한 때이다.




▲ 물론 별이 되던 이 시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찾은 무작위 영던에서,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낀다.



WOW Inven - Its
(its@inv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