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두 달 만에 다시 만난 '데프트' 김혁규는 확실히 이전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9월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선발전을 통과해 기대보다는 걱정으로 롤드컵을 기다리는 한 명의 선수였다면, 11월의 그는 모든 것을 이룬 뒤 자신의 결실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여유로운 월드 챔피언이었다.

근황을 묻는 가벼운 질문에 '데프트'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짧고 바쁜 비시즌을 보내고 있지만, 그 모든 게 마냥 재미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덕분일까. 인터뷰 역시 굉장히 편안하게 진행됐다. '데프트'의 마음을 울린 친형의 눈물, DRX를 우승으로 이끈 어떤 것, 현 e스포츠 시장에 대한 그의 생각 등 다양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시점에서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는 내년에 대한 계획을 물었다. 차기 행선지는 당연히 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데프트'에게 1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는 거다. 10년 동안 간절히 바란 꿈을 이룬 '데프트'. 그는 과연 무엇을 원동력 삼아 2023 시즌에도 달릴 수 있을까. 그의 솔직한 대답은 이어지는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본 인터뷰는 11월 18일에 진행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돌아오고 나서 휴가가 길 줄 알았는데, 아예 없는 수준이더라. 귀국 하자마자 밀린 촬영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귀국 한 날 빼고는 계속 일정이 있었다. 개인 시간이 없어서 지인들도 아직 못 만났다. '케리아' (류)민석이나 '라스칼' (김)광희 만나서 잠깐 밥 먹은 게 다다. 프로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꽉 찬 시즌을 보낸 기억이 없다. 잠도 잘 못 잘 정도로 바쁘게 보내고 있어 몸은 힘들지만, 뭘 하든 재미있다.

처음 해보는 것들도 있어서 '아직도 내가 해보지 못한 게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 중 하나로, 얼마 전에는 EBS 방송국도 다녀왔다. 앵커님과 앉아서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내 이미지 속 EBS는 교육 방송국이고 해서 딱딱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까 나를 너무 환영해주셔서 깜짝 놀랐다.


가족, 친구, 전 동료 등 주변에서 축하도 정말 많이 해주고, 함께 기뻐했을 것 같다.

나와 같은 팀을 했던 동료들에게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래도 지금 가장 떠오르는 사람은, 친형이 정말 좋아했다고 하더라. 형이랑 굉장히 가까운 사이고, 형도 나만큼 내 롤드컵 우승을 간절히 바랐다.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나만큼 절실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 결승 보면서 완전 오열을 했다고 하더라.

나는 형이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근데, 형이 울었다는 거 듣고 나서 '진짜 날 많이 위해주는구나' 하는 새삼 생각이 들었다. 경기 끝나고 통화했는데 목소리가 엄청 흥분해있더라. 어떻게 이겼냐, 진 거 아니었냐, 불안해서 경기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스킨은 뭐 만들 거냐 하면서 질문을 쏟아냈다. 되게 재미있게 통화했다.

그리고, 형이 결승 전에 나랑 팀원들 보라고 선발전부터 지금까지 했던 걸 담아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영상을 만들어서 보내줬다. 내가 그걸 못 보고 들어갔다. 끝나고 나서 봤냐고 물어봐서 못 봤다고 하니까 아쉬워 하더라. 근데, 봤으면 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웃음). 나중에 봤는데, 퀄리티가 음... 내가 전문적으로 만드시는 분들의 영상 너무 많이 보다 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고맙긴 했다.


우리가 선발전 통과 후에 바로 이 건물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월드 챔피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와 너무 많은 게, 좋은 쪽으로 변했다.

▶[인터뷰] '데프트', "선발전 뚫지 못했다면 은퇴 했을 것" - ①
▶[인터뷰] '데프트', "RNG '갈라', 걷는 것만 봐도 느낌 있어" - ②

나도 몰랐다(웃음). 많은 생각이 든다. 그때는 걱정이 참 많았다. 우리가 플레이-인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까. 플레이-인 팀들이 너무 강해 보이는데 어떡하지. 내가 발전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이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 후련하다. 시험을 잘 치르고 온 기분이다. 말도 안되게 짧은 시간 동안 말도 안되게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게 다 좋은 일들이라 너무 행복하다.


▲ 9월 인터뷰 당시 '데프트'

그때 인터뷰에서 이대로는 팀의 경쟁력이 부족할 것이고, 강팀의 장점을 흡수해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원하는 방향대로 잘 풀려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걸까.

우선 롤드컵을 치르면서 기본적으로 다들 라인전 기량이 최상위권까지 올라갔다. 거기에 더해 그때 말했던 강팀의 장점을 우리가 다 흡수한 것 같다. 그리고, 롤드컵은 리그와 달리 모든 팀을 상대로 짧은 기간 내에 준비해야 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한 팀 한 팀 목적성을 가지고 준비할 수 있다. 우리는 각 팀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팀을 어떻게 상대할 지를 잘 그린 상태로 경기에 임했던 것 같다.


철저하고 정확한 분석과 준비가 DRX 우승에 가장 큰 밑거름이 됐다고 보면 될까.

그것도 있지만 이번 롤드컵에서 우리 팀과 다른 팀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는 경기장 안에서의 피드백이 빨랐다. 시리즈 내에서 인게임 피드백과 밴픽 수정을 우리 팀이 제일 잘했다고 생각한다.

밴픽 같은 경우에는 감독님과 코치진 쪽에서 우리가 경기를 하는 동안 다음 걸 잘 준비해줬고, 인게임 플레이는 다섯 명 다같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사실 경기를 하면서도 뭐가 잘못 됐는지는 다들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1세트만 좀 실수가 나오고, 이후부터는 거의 실수 없이 잘 운영했던 것 같다.


또, 개인적으로는 DRX가 유독 선수들끼리 끈끈해 보이는 게 있었다. 단순히 팀합, 팀워크를 넘어서 진짜 한 배를 탄 동료 같은 느낌이었다.

다들 1년 동안 굉장히 힘든 시간을 겪었기 때문에 멘탈이 기본적으로 굉장히 강했다. 많은 팀을 경험하면서 결국 팀적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것, 그리고 팀끼리 단단히 뭉쳐 무너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았다.

선발전을 기점으로 내가 우리 팀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그런 쪽으로 많이 집중했다. 인게임에서 잘하는 건 당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안 흔들려야겠다는 생각이 컸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그 와중에 흔들린 적도 있지만, 그럴 때는 또 팀원들이 나를 잘 잡아줬다.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는 진짜 팀다운 팀이었다.


결승에서는 어떻게 보면 봇이 희생 포지션을 맡았다. 전략적 선택이긴 하지만, 실제 인게임에선 라인전이 워낙 힘들다 보니 멘탈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밴픽적으로 T1은 카르마를 선호했고, 우리는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카르마에 쓸 밴 카드가 없었다. 결국 상대하는 쪽으로 생각을 했어야 했고,그 와중에 어떻게 하면 밴픽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상체에 대한 믿음이 커서 내가 부러지지만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조금 더 욕심을 냈을 만한 상황에서도 그러지 않았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다.



이번 대회에서 유독 눈물을 많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많은 이들이 함께 울었다.

이번 8강전은 정말 여러가지가 겹쳤다. EDG는 내 전 소속팀이었고, 난 그 팀에서 8강을 넘어본 적이 없었고, 그 팀을 나오고도 4강 이상을 가본 적이 없었다. 경기 내용 자체도 정말 벼랑 끝까지 몰렸었고, 심지어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너무 많은 게 겹친 순간에 아나운서 분이 2,942일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 전에 힘들었던 시간들이 생각나면서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가장 많이 생각난 건 20년도다. 담원 기아한테 8강에서 지고 나서 장비 챙기고 나오는 길에 뒤돌아 경기장을 보는데, 뭔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이게 내 마지막 경기구나 싶었다. 그때 생각이 많이 나면서 '여기 다시 돌아왔다. 앞으로 나아가는 구나' 그런 기분이 들었고,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무대에서 관객석을 내려다 봤을 때는 다들 마냥 좋아하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함께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팬분들도, 관계자분들도 많이 공감을 해주셨던 것 같다. 감사하다.


'데프트' 선수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만큼, 최근 몇 년 간 화제가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먼저, 최근 EBS에 다녀오기도 했고, e스포츠가 여러모로 많이 발전한 것을 체감하고 있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연봉부터 시작해보면, 내가 처음에 할 때는 아예 연봉이라는 건 없었다. 상금으로 세 달에 한 100만원 정도 되는 돈을 받는 게 다였다. 지금은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다시피 굉장히 잘 벌고 있고, 만족스럽게 돈 걱정 없이 게임만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됐다.

사람들의 인식 자체도 점점 좋아지는 걸 느낀다. 초반에는 미용실 같은 데 가서 프로게이머라고 하면 어디 PC방에서 컵라면 먹으면서 연습하는 줄 알더라(웃음). '뭐하세요?' 라고 해서 '프로게이머 합니다' 라고 하면 'PC방에서 연습하세요? 밥은 뭐 드세요?' 이런 얘기를 항상 들었다. 최근에는 다들 신기해 하고, 직업이 존중 받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자부심이 생긴다.

반대로 그럴수록 좀 더 책임감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처음 할 때는 책임감 같은 게 별로 없었다. 지금은 직업에 대한 책임감 뿐만 아니라 팀원으로서, 주장으로서 책임감이 많이 생겼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나를 좋은 쪽으로 발전시켰다.


또, 베테랑에 대한 시선도 한 3년 전보다 많이 바뀐 듯하다.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베테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나 역시 나이에 대한 걸로 안 좋은 이야기를 되게 많이 들었는데, 최근에 분위기가 그렇게 바뀐 것에 내가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 같아서 스스로 자랑스럽다.

롤드컵에서 우승을 했던 팀이나, 우승권에 있었던 팀을 보면 항상 팀의 중심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젠지의 '앰비션' 강찬용 선수나 FPX의 '도인비' 김태상 선수 등. 이게 무조건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런 걸 보면 리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린 선수도 베테랑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이라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선수의 특성이 어느 쪽으로 발달해 있는 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T1의 '케리아' 선수는 어리고 경력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리더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력과 나이보다는 선수의 특성이 더 중요하다.



질문을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최근 베테랑과 함께 뇌지컬이 뛰어난 선수의 필요성도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다.

나는 LoL은 팀 게임이다 보니까 다섯 명의 피지컬-뇌지컬 총량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다섯 명이 모두 뇌지컬 쪽으로 10 중 6 정도가 발달해 있으면 특출난 한 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 밸런스가 제일 중요하다. 올해 우리 팀이 밸런스가 딱 좋았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얻게 된 것 같다. 다들 무언가 하나라도 뒤쳐져 있었다면 우승을 못 했을 거다.

그래도 나누어 보자면 다들 그렇게 느끼실 텐데, 상체가 피지컬, 봇이 두뇌 쪽을 맡고 있는 것 같다. 연습할 때 상체 선수들이 가끔 힘만 믿고 플레이 하는 게 보이는데, 보통 결과가 안 좋다(웃음). 근데, 대회에서는 아무래도 기세가 중요하다. 우리가 인원이 딸리는 데도 공격적으로 나갔을 때, 상대가 당황하는 게 보인다. 그래서 대회 기준으로는 그런 플레이를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피지컬 하면 또 '미친 고딩' 출신 '데프트'를 빼놓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피지컬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나.

EDG 시절, kt 롤스터 시절, 킹존 드래곤X 시절까지가 메카닉적으로 가장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당시에는 내가 부족한 것들만 신경이 쓰여서 내가 잘한다는 인지를 딱히 못 했다. 사람들이 칭찬해줄 때마다 '왜 나보고 잘한다고 하는 거지. 난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이런 것도 못하는데. 롤을 잘 모르네'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당시에 당연하게 했던 것들이 잘 안 되는 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그때 내가 잘했던 것 같다' 는 생각이 들더라. 돌이켜 보면, 그때 나의 기준은 기계였다. 내가 기계라면 여기서 이렇게 하면 살지 않았을까. 여기서 이렇게 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다 이런 것들이었다.

이제는 기준점을 기계가 아닌 사람에 맞추고 있다. 플레이의 기준점도 그렇고, 연습량의 기준점도 조금 낮추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마음이 편해졌다.


마지막으로 1년을 마친 소회, 그리고 가능하다면 간단하게나마 차기 시즌의 계획을 들으며 인터뷰를 마무리 하겠다.

후련하다. 지금껏 해온 게 틀리지 않았고, 내가 연습한 방식이나 내가 플레이한 방식 등 내가 생각한 게 맞았다는 걸 증명했다. 단순히 우승한 게 아니라 내 10년의 시간을 보상 받은 기분이다.

2023 시즌의 원동력은 '나에 대한 시험'이다. 개인적으로 항상 생각했던 게 '변하지 말자' 인데, 우승을 하고 나서도 내가 변하지 않는지 나 자신을 시험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다섯 명이 함께 하고 싶다는 게 내 마음이다.

우승자라는 타이틀이 생겼지만, 한 달 사이에 갑자기 생긴 거고 한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사실 똑같은 사람이다. 내년에도 많이 응원해주실 바라고, 그동안에도 많이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 그럼 내년에 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