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이계윤 성우 / (우)류승곤 성우

최근에는 많은 게임이 보이스 더빙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단편적으로만 녹음할 뿐, 생각보다 풀 보이스 더빙, 즉 모든 대사에 목소리를 입힌 작품은 찾아보기 힘든 편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국내에서 풀 더빙, 심지어 나레이션까지 모두 녹음한 게임이 출시됐다. 바로 시프트업의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이다.

그 중 주인공 캐릭터들을 담당한 두 명의 성우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바로 창세기전의 조안 카트라이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티란데, 하스스톤의 발리라 생귀나르 등을 담당해 국내 게이머라면 단 한마디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이계윤' 성우. 그리고 사이퍼즈의 잭 더 리퍼, 리그 오브 레전드의 타릭, 베리드 스타즈의 이규혁 등으로 게이머들에게 익숙하고도 친근한 '류승곤' 성우다.





"워낙 베테랑 성우들이라 더 궁금하다. 성우 시작을 어떻게 하게 되었나."

이계윤: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특이하다는 소리를 워낙 많이 들었다. 가족들의 영향으로 성우라는 직업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 계기가 되었다. 처음부터 성우가 꿈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쌓여온 것들이 성우의 길로 이끌어 준 것 같다. 1년 정도 준비해서 투니버스 1기에 합격했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을 따라 영화, 그것도 더빙된 외화를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빙'과 '성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한국말을 참 잘하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웃음). 언니들이 모아둔 만화책을 하나하나 읽으며 연기를 하기도 했다. 얼마나 몰입해서 열심히 했으면 옆집 할머니가 찾아오셔서 왜 울고 있느냐고 한 적도 있다.

류승곤: 군대에 있을 때 고참의 말이 계기가 됐다. 나가서 뭘 해야 하나 한창 고민하던 시기, 목소리가 일반인들과 좀 다른데 관련된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더라. 그때 머리에 정말 번개가 탁 쳤다. 그전까지는 전혀 생각도 못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하다. 나와서 일 년 반 정도 준비하면서 이곳저곳 떨어지다 MBC 시험에 운 좋게 합격했다.


"인기 성우다 보니 새로운 연기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이 크다. 그런 부분들이 부담스럽지는 않나."

류승곤: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그만큼 제 목소리를 좋아해 주는 것이지 않나. 오히려 팬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 기쁘다. 물론 그만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사실 성우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마이크 울렁증이 있었다. 아무래도 외화 더빙이 끝나가던 시기라 전속동안 일을 많이 못했다. 그러다 보니 프리랜서 초반에 정말 많이 긴장되고 떨리더라. 선배들 사이에서 연기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가 정말 재미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 참 즐겁고 연기할 때마다 보람을 많이 느낀다.

새로운 연기를 해야 할 때 역시 압박감 대신 즐거운 설렘을 느끼는 편이다. 아무래도 일상 생활에서 감정을 크게 나타내지 않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특히 캐릭터와의 갭이 크면 클수록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어서 좋아한다.

이계윤: 저도 새로운 역에 대해 압박감은 없다. 연기하는 게 처음부터 정말 즐거웠다. 활자로 축약되어 있는 것을 내가 표현하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지 않나.

전속 시절부터 마이크 앞에만 서면 다른 사람 같다고 참 신기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평소에 긴장해 있다가 연기하는 순간 모든 걸 잊다 보니 주위에서 더 그렇게 느낀 것 같다. 뭐랄까. 연기를 통해 모든 것을 토해내는 것, 그 즐거움을 알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나만의 무대를 세우고, 나만의 그림을 그려서 연기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합치되는 접점을 느끼는 순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하다. 성우로서, 연기자로서 참 행복하다. 이렇게 훌륭한 직업을 가질 수 있어서 난 참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우에게 이러한 타고난 목소리가 어느정도 역할을 한다 생각하나."

이계윤: 성우라는 게 목소리로 행하는 일이다 보니, 어느 정도 재능 자체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들었을 때 좋다고 느끼는 목소리, 그 특유의 음역대는 타고나는 것 같다. 성우 대다수는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보통 그게 모티브가 돼서 시작하는데, 결정적으로 성우에게 중요한 건 연기력이다. 얼마나 역할에, 상황에 몰입할 수 있느냐가 정말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내 경우 '소리'로서 탁월하진 않은 것 같다. 대신 목이 정말 강하다. 아무리 일을 해도 목이 잘 안 가더라. 그래서 관리만 잘하면 끊임없이 녹음할 수 있다. 물론 이제는 나이가 있다 보니 좀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류승곤: 목소리로 성우의 가능성을 한정 짓고 싶진 않다. 뭐랄까 목소리의 좋고 나쁨보다는 사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매력이나 전달력 등이 뛰어나야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캐릭터에 따라 바뀌어야 하기에 목소리 자체보다는 연기할 때의 말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노력이나 연습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잘생긴 사람들만 배우를 하는 게 아니듯, 성우도 다양한 배역의 여러 목소리가 필요하며 표현을 넓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타고나는 소리가 절반 이상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절반은 후차적인 노력에 달려 있고. 캐릭터를 표현함에 있어 딕션, 말투, 강세 이런 모든 것이 다 중요한데, 음성 연기를 시작하는 분들은 아무래도 목소리 하나로만 이를 해결하려 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게임에 풀더빙을 진행하는 경우가 잘 없는데, 경험해보니 어땠나"

류승곤: 개인적으로 게임을 정말 좋아하다 보니, 게임 녹음을 하는 것 역시 정말 즐겁다. 다만 서사가 이어지는 녹음을 하고 싶은데, 게임 녹음은 대부분 기합소리나 스킬명만 외치고 돌아올 때가 많다. 이런 경우 감정을 더 넣고 싶은데 그런 여지가 없기에 많이 아쉽긴 하다.

이번 녹음은 미리 원작을 읽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서사를 완전히 이해하고 흐름에 따라 푹 빠져서 연기할 수 있었다. 녹음 시간이 3시간 반 정도로 길었지만,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말 즐거웠다.


"나레이션 부분까지 모두 더빙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

이계윤: 나레이션 더빙 여부에 관해 고민이 많았다. 보통 게임 쪽에서 나레이션 녹음은 하지 않는 편이라서 더 그랬다. 하지만 제작진과 의견을 나눠보니, 기획 의도 자체가 다른 일을 하면서도 편안하게 게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나레이션까지 전체를 녹음했다.


"들어보면 텍스트 양이 엄청나다. 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 같다."

이계윤: 레리아나와 나레이션 모두 녹음하는데 하루 5시간 정도씩, 거기에 추후 수정 녹음까지 합쳐서 30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한 자리에 앉아서 오래 녹음을 하다보니 목 뒤부터 등쪽이 모두 딱딱하게 굳더라. 마사지 볼로 풀어가면서 그렇게 진행했다. 캐스팅 디렉터 역할도 같이 했기에 제 녹음을 빨리 끝내야 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집중해서 작업했다.

사실 그녀가 공작저로 가야 했던 사정 전에 비슷한 분량의 개인 프로젝트를 하나 했었다. 그러고 바로 이번 작업을 진행한 거다. 그렇게 두 가지 작업을 하고나니 너무 힘들었다. 성우 인생이 끝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웃음).


"개인적으로 나레이션 부분이 처음에는 살짝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계윤: 일부러 빠르게 했다. 게임을 즐기는 분들은 보통 화면 속 텍스트를 보면서 진행하지 않나. 그런데 일반적인 나레이션 템포에 맞추다가는 텍스트를 다 읽은 뒤에도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다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게 지루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텍스트에 맞춰서 진행했다. 그렇게 녹음을 하고 나니까 한 단계 레벨업 했다는 느낌이 들더라. 순간적인 독해 능력이 확 올라갔달까.


"이계윤 성우의 경우 나레이션과 캐릭터 대사가 이어지는 부분이 많은데, 어디에 가장 신경을 쓰고 녹음했는지 궁금하다."

이계윤: 나레이션은 나레이션답게, 대사를 할 때는 장면 자체에 푹 빠져서 진행했다. 쫓기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을 다 녹음하고 나니까 입고 갔던 후드가 땀으로 푹 젖어 있더라. 나레이션의 경우 레리아나의 시점과 3인칭 시점, 두 가지가 있었는데 아예 통일해서 진행했다.



"원작 자체가 워낙 인기 있는 편이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이계윤: 일러스트나 그림이 있는 경우 그 얼굴에 목소리를 맞춰야 한다. 그런데 게임 캐릭터들은 일단 그림체부터 웹툰이나 원작과는 달랐다. 캐릭터들이 전체적으로 날카롭다기보다는 동글동글했다. 그래서 게임 속 레리아나의 그림체와 모습에 맞춰서 연기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웹툰을 먼저 봤고, 잔상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1, 2화는 웹툰의 흔적이 조금 남더라. 그래서 이후에 녹음을 다시 진행했다. 1화 텍스트가 정말 많은 편이라 제작진 분들에게 정말 죄송했다.

류승곤: 원작이 있는 작품에 캐스팅되면 초반에는 정말 기쁘다. 원작이 있는데 오디오화 된다는 건 그만큼 인기 있는 작품이며, 기대하고 찾아볼 팬들도 많다는 의미지 않나. 그래서 처음에는 기쁜데 아무래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슬슬 부담이 생기는 편이다. 그래도 부담보다는 기쁨이 더 크다.

아예 오리지널 작품일 경우 내가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면 된다. 하지만 만들어져 있는 캐릭터, 원작이 있는 경우 모든 사람의 기대를 채우는 건 힘든 일이다. 그래도 최대한 인정 받을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녹음하고 있다. 물론 녹음할 때는 그런 모든 고민을 잊고 푹 빠져서 진행한다.


"담당 캐릭터를 표현할 때 어디에 가장 신경을 쓰고 연기했나."

이계윤: 일단 레리아나는 굉장히 독립적이며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래서 참 마음에 들었다. 다만 게임 속 레리아나는 원작보다 귀여워지면서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연령대로 봤을 때도 그렇다. 그래서 게임의 그림체에 맞춰서 연기했다. 색다른 매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류승곤: 노아의 경우 레리아나와 갈등을 가진 관계로 시작해서 가까워지는 캐릭터다. 가식적이고 거짓된 부분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걸 좋아한다. 모든 일에 능숙하고 능글능글 어른스러운 느낌이 있기에 표현할 때 정말 재미있었다.



"이계윤 성우는 이번에 연출도 함께했다. 어땠나."

이계윤: 일단 작업한 모든 성우들에게 감탄했다. 다들 준비도, 감정 몰입도 잘 해서 연기를 해주셨다. 정말 출중한 연기력을 가진 분들이다. 다만 감정이라는 것을 세대별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기에 그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고 서포트하려 노력했다. 잘 짜여진 대본과 잘 숙지해온 성우들이 있어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녹음할 때와 결과물에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나."

이계윤: 항상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만족하면 거기가 끝이지 않을까. 이번 작업의 경우 아무래도 게임 제작의 전체적인 일정이 있고, 거기에 맞추려다 보니 정작 스스로의 연기에는 신경을 많이 못 쓴 것 같다. 상황적인 측면에서 당시에는 최선이었지만, 지금은 아쉬움이 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다면 더 열심히, 꼼꼼히 잘하고 싶다.

류승곤: 아무래도 녹음 후에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서 봐야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연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니터링할 때 항상 아쉽다. 녹음실에서는 엄청 집중했다 싶은데도 이후에 보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혹시 캐릭터를 연기할 때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

이계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나름의 분석을 통해 캐릭터를 표현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옵티컬이 있는 애니메이션에서도 다르게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저항감을 느낀 팬분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이 주는 모든 의견을 다 보곤 했다. 지금도 다 확인하는 편이다. 보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파악하는 것 역시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팬분들의 의견 대부분은 앞으로의 방향성을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류승곤: 애니메이션의 경우 그 캐릭터를 잘 살리기 위해 일단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서사가 정말 중요하기에 보고, 또 보고 그렇게 여러 번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개인적으로는 가능하면 녹음 한참 전에 봐서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녹음 직전에 한 번 더 보는 편이다. 내 안에서 소화가 될 시간이 필요하달까. 캐릭터의 이미지나 느낌 이런 부분이 숙성될 시간이 필요하다.

이계윤: 마치 그런 것 같다. 어떤 사람을 알아가듯이 캐릭터를 만나 그에 대한 기억을 쌓아가는 거다.


"다시 해보고 싶은, 혹은 기억에 남는 게임 캐릭터가 있을까."

이계윤: 창세기전의 조안 카트라이트, 다시 하고 싶다. 그때는 NG도 많이 나고, 그러다 보니 녹음을 정말 정신없이 했다.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는데, 그래도 연기적인 만족감을 느끼면서 다시 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테일즈런너의 베라다. 베라의 경우 10년 전에 녹음했던 캐릭터인데, 얼마 전부터 유튜브 콘텐츠를 위해 다시 녹음을 하고 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난 캐릭터임에도 아직도 정말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더라. 보람을 많이 느꼈다. 블리자드 캐릭터들도 많이 한 편인데, 그래서인지 가끔 대중교통에서 통화하는 목소리를 듣고 근처에서 돌아볼 때도 있다(웃음).

류승곤: 사이퍼즈의 잭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컨셉인데, 사실 그전까지는 게임 쪽에서 항상 선하고 차분한 캐릭터들만 들어왔었다. 그래서 잭 더 리퍼라는 캐릭터를 정말 재밌게 녹음했다.

잭 덕분에 팬도 정말 많이 늘었고, 처음으로 킨텍스 행사장의 VIP실에도 가봤다. 정말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더라. 성우로서 대접받는다는 느낌도 들고, 팬들과 직접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