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만든 한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기분


시작부터 영화에서 볼 법한 애니메이션이 흘러나오는 게임은 오랜만이었습니다. 그것도 인디 개발사에서 만든 게임에서요. 애니메이션은 제작 단가가 좀 되는 편이라 자금에 여유가 부족한 인디 회사 차원에서는 쉽게 넣기가 어렵습니다. 굳이 애니메이션을 넣지 않아도 게임을 즐기는데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데에 투자를 하는 편이죠.

처음에는 단순히 초반의 이팩트를 강렬하게 남기고자 넣은 줄 알았습니다. 한 번 정도는 해볼 만 하잖아요. 근데, 게임을 하면 할수록 텍스트로 주고받는 대화보다 인게임 컷 신과 애니메이션으로 스토리를 진행하는 빈도수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상 퀄리티도 엄청나게 대단합니다. 단순한 인디 회사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정체가 뭐길래 이럴까요.

개발사 Ember Lab은 2009년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오던 회사였습니다. 규모가 큰 제작사는 아니지만, 특유의 귀여운 그래픽과 입체적인 묘사로 많은 영상을 제작해왔죠. 과거에는 '젤다의 전설: 뮤주라의 가면'의 팬메이드 영상을 만들어 닌텐도에게 극찬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즉, 게임과 관련된 팬메이드 영상은 만든 적이 있어도 게임 자체를 만들어본 적은 없는 회사죠. Ember Lab에서 지난 21일에 출시한 '케나: 브릿지 오브 스피릿(이하 케나)'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처음으로 도전해본 게임인 셈입니다. 단순히 흐름에 편승해서 돈을 목적으로 만든 게임일까요. 아니면 게임에 대한 애정을 갖고 도전해본 걸까요. 디즈니풍 다크소울이라고 불리는 케나를 한 번 해봤습니다.

게임명: 케나: 브릿지 오브 스피릿
장르명: 액션 어드벤처처
출시일: 2021. 09. 21.
개발사: Ember Lab
서비스: Ember Lab
플랫폼: PC, PS4, PS5

관련 링크: '케나: 브릿지 오브 스피릿' 오픈크리틱 페이지



탄탄한 스토리와 영화같은 애니메이션 연출

▲ 표정 연기가 일품

케나는 영혼인도자인 주인공 케나의 여정을 그린 액션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케나를 조작해 고대 신전으로 가서 영혼들이 환생하지 못하는 현상을 밝혀야 하죠. 스토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게임의 분위기는 마치 디즈니풍에 젤다의 전설을 이식한 듯한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탐험에 집중한 최신 시리즈의 젤다의 전설 보다는 내러티브에 집중했던 과거의 젤다의 전설을 보는 느낌이죠. 퍼즐과 함정, 몬스터로 가득한 던전은 없지만, 구역별로 나뉜 숲 속이 던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애니메이션 연출과 인게임 그래픽에 차이가 없어 굉장히 자연스러운 연출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스토리를 중심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만큼 스토리가 중요하겠죠. 케나는 앞서 말했듯 영혼과 관련된 샤머니즘 세계관으로 기승전결이 알맞게 짜인 탄탄한 스토리를 보여줍니다. 시작부터 스토리의 복선을 깔고 분기마다 유저가 궁금할 만한 내용을 풀어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줍니다.

다만, 영혼과 관련된 샤머니즘 세계관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조금씩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특히, 게임 내에서만 사용되는 고유 명사가 꽤 등장하기 때문에 몇몇 부분에서는 다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준수한 한국어 번역 퀄리티와 자잘한 부분을 넘겨도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없는 스토리와 미션들, 그리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 덕분에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퀄리티 애니메이션의 존재가 이 게임의 스토리, 그리고 게임 플레이 전반적으로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보통 게임을 해보면 플레이어와 주변 인물들이 대화하는 모습은 텍스트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일이 애니메이션 컷 신을 넣기에는 번거롭기도 하고 비용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이죠. 자본이 부족한 인디 게임사라면 아예 애니메이션 컷 신을 넣지 않는 경우도 자주 발생합니다.

하지만, 케나는 텍스트 대화보다 애니메이션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더 많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는 비중이 컸습니다. 원래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회사답다고 할까요. 애니메이션의 퀄리티가 뛰어난 것은 둘째치고 연출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잦은 등장에서도 딱히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원한다면 스킵도 가능하니 보기 싫다면 넘기는 것도 가능하고요. 또, 단순히 영상 애니메이션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인게임 그래픽을 활용한 애니메이션도 섞어서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12년 동안 애니메이션을 전문적으로 만들던 회사답게 퀄리티만큼은 대기업 게임사에 꿀리지 않았습니다. 텍스트 지문을 다 스킵하고 애니메이션만 봐도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충분했기 때문에 게임을 끝내고 나면 한 편의 재미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픈 월드와 메트로배니아가 섞인 탐험

케나는 오픈 월드 스타일의 맵에 메트로배니아 방식을 결합해 선형 구조를 띤 게임입니다. 즉, 오픈 월드인데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는 거죠.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얻는 코어 아이템이 있어야 갈 수 있는 지역도 있고 또, 특정 아이템을 얻어야 길이 열리는 곳도 있거든요. 이 때문에 오픈 월드 특유의 자유로운 플레이를 기대했다면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냥 로딩이 없다는 선에서 만족해야죠.

그 점만 제외한다면 필드 탐험 요소는 꽤 잘 갖춰진 편입니다. 선형 구조라고는 해도 오픈 월드의 맛 정도는 느낄 수 있다고 해야 할까요. 단순히 직선 형태의 길보다는 골목길이 좌우로 뻗어있는 느낌의 길이기 때문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수집 아이템을 줍는 재미가 있습니다.

▲ 탐험에 약간의 제약이 있지만, 그래도 구석구석보는 맛이 있습니다

수집 아이템은 필드 탐험에 동기를 부여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탐험에 대한 보상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단순히 절경을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케나의 수집 요소는 크게 부식령, 카르마, 재화, 마음, 모자 등 꽤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부식령과 카르마는 캐릭터의 성장과 직접 연관되어 있으니 많이 찾을수록 수월하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맵에 지역별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을 실시간으로 표시해주니 내가 이 맵에서 무엇을 빼먹었는지도 쉽게 알 수 있고 수집 가능한 아이템 근처에 가면 표시가 떠서 수집 자체는 꽤 간단한 편입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구석에 숨겨뒀거나 혹은 퍼즐을 풀어야만 얻을 수 있는 수집품도 있기 때문에 유저들의 탐험심을 자극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 특정 아이템이 있어야 갈 수 있는 부분은 메트로배니아를 닮았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수집품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눈에 불을 켜고 모든 맵을 돌아다니면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큰길을 따라 걸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주워도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거든요. 탐험을 강제하기보단 적절한 보상과 성취욕으로 밸런스를 조절했다고 보면 됩니다.

탐험에 어느 정도의 퍼즐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액션 어드벤처에 집중한 게임이니만큼 복잡한 퍼즐보단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끔 만들어졌습니다. 파동으로 특수한 돌과 공명을 하면 문이 열린다거나 하는 식이죠. 퍼즐과 관련이 있는 오브젝트는 항상 특별한 표식이 새겨져 있으니 누가 봐도 여기에는 어떤 장치가 숨겨져 있겠다는 것을 딱 알아챌 수 있습니다.

▲ 수집품 덕후라면 반길 시스템이죠



귀여운 부식령과 귀엽지 않은 전투 난이도

▲ 귀여움을 담당하는 부식령

앞서 캐릭터 육성은 탐험과 연관되어 있다고 언급했죠. 케나는 부식령이라는 숲 속의 정령을 모아 레벨업을 할 수가 있으며, 부식령은 맵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부식령은 작은 털 뭉치 모양으로 케나의 주변을 계속 따라다니는데요. 참고로 진짜 귀여워서 굳이 레벨과 상관없이 모으고 싶어지는 욕구를 일으킵니다. 수집품 중 하나인 모자를 부식령에게 씌우면 귀여움이 폭발해요.

아무튼, 부식령을 모아 레벨업을 하면 배울 수 있는 기술과 부식령의 행동 게이지가 늘어나는데요. 부식령 게이지는 전투 상황에서 다재다능하게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 중 하나입니다. 부식령 게이지는 강력한 스킬을 쓸 수 있는 마나의 역할, 체력을 채울 수 있는 체력 포션의 역할, 적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CC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죠. 부식령 게이지를 모으기 위해선 적을 때리거나 제압해야 하며, 특정 기술을 배워 좀 더 원활하게 게이지를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자원으로 여러 가지를 행할 수 있으니 직관적이라고 볼 수 있긴 한데 그만큼 게임이 어려워졌다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부분은 아래 몬스터 전투에서 한 번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케나의 전투는 솔직히 말해서 난이도가 있는 편입니다. 그래픽만 봤을 때는 꿈과 희망이 가득 찬 동화 나라처럼 생겼는데 전투는 무슨 다크소울마냥 빡빡하게 굴러가거든요. 적들의 행동이 재빠르고 복잡한 수준은 아닌데 후반으로 갈수록 한 번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많고 원거리 몬스터도 추가돼 잡몹 구간에서도 방심하면 게임 오버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보스 몬스터마다 강력함이 들쑥날쑥해 전체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레벨디자인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게임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나무 기사 보스 몬스터는 일반 난이도 기준으로 3~4번만 맞으면 주인공을 사후세계로 보낼 만큼 강력한 공격력에 넓은 타격 범위, 근거리와 원거리 공격 패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해당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적당히 구르면서 싸우면 쉽게 이길 수 있는 몬스터만 등장했기에 한순간에 난이도가 확 올라갔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전투의 불합리함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적의 공격을 파훼할 수 있는 수단은 구르기와 막기 두 가지로 이뤄져 있는데 보스 몬스터는 대부분 넓은 범위의 연타 공격을 빠르게 쏟아내기 때문에 구르기로 피하기가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타이밍을 맞춰서 회피해도 뒤따라오는 후속타에 얻어맞을 수 있죠. 막기는 확실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적의 공격력이 워낙 강력해 실드가 금방 부서져 버립니다.


따라서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리스크가 큰 구르기와 몇 번 못 쓰는 막기보다는 확실하게 피해를 막을 수 있는 패링을 요구하게 됩니다. 패링은 타이밍을 맞춰야 하므로 어느 정도 컨트롤을 요구해서 누구나 쉽게 쓸 수가 없는 기술입니다. 이런 기술을 강제로 쓰게 만드는 것 자체가 난이도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죠. 패링을 하면 좀 더 수월하게 보스를 쓰러트릴 수 있을 뿐 구르기와 막기 만으로도 충분히 보스 몬스터를 공략할 수 있게 하였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죽으면 마지막으로 저장된 곳으로 돌아가는데 페이즈별로 나눠진 보스와의 전투에서도 죽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버려서 게임의 진입 장벽을 높이고 말았습니다. 템포가 길어지는 전투 구간이 있다면 중간에 세이브 포인트를 하나쯤은 둬도 괜찮았을 텐데 그런 부분에서 다소 미흡한 모습을 보여준 셈입니다.

물론 보스를 수월하게 쓰러트릴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만들긴 했습니다. 보스마다 약점을 만들어 해당 포인트를 공격할 때 강력한 피해를 줄 수 있고 부식령을 사용해 경직을 걸고 쉽게 때릴 수도 있죠. 다만, 약점 피해는 딱 한 번만 할 수 있고 강력한 공격이라고 해도 보스의 총 체력에서 보면 10% 미만이기 때문에 살짝 아쉽게 느껴집니다.

▲ 활을 얻은 이후부터는 나름 수월한 느낌이 들지만 여전히 어렵긴 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부식령 게이지도 난이도를 높이는 주범 중 하나입니다. 하나의 자원으로 여러 가지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하나의 행동을 하면 그 외에 행동을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강력한 공격을 하면 체력과 CC기를 걸 수 없고 체력을 채우면 그 외를 못해요. 전투 중에 체력을 채울 수단이 한정적이라는 소리는 작은 피해도 최소화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인데 앞서 말했듯 피하기 까다로운 보스 몬스터와 많은 적이 이를 방해합니다. 굳이 모든 것은 하나의 자원으로 묶어서 해야 했나 싶더군요. 그렇게 만들지 않더라도 충분히 난이도 있고 재미있는 전투 플레이를 느낄 수 있는데 말이죠.

아쉬운 레벨디자인을 제외한다면 전투 자체는 재미있습니다. 캐릭터의 공격 모션이 빨라서 시원스럽고 약공격과 강공격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적들을 패는 맛이 있거든요. 타격감도 준수하고 조작감도 나쁘지 않습니다. 고퀄리티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캐릭터의 모션은 다소 뻣뻣한 편이지만, 엄청나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라 컨트롤만 좀 익숙해진다면 찰진 손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귀여운 부식령 한 번 더 보고 가세요

케나는 인디 개발사에서 처음으로 만든 게임답지 않은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게임입니다. 12년 동안 게임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던 회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죠. 자신들의 강점인 애니메이션을 적극 사용한 만큼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하며, 게임으로서 갖춰야 할 부분에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인디 게임을 하다 보면 너무 욕심이 과해서 이것저것 넣다가 조화롭지 못해 이상해지거나 혹은 너무 많은 부분을 생략해 게임의 재미 자체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케나는 스토리를 따라가는 선형 구조의 방식에서도 탐험 요소를 적절히 배치하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각종 편의 기능을 넣는 등 세세한 부분에서도 플레이어가 어떻게 해야 만족할지를 생각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따지자면 앞서 언급했던 전투 레벨 디자인과 관련된 부분인데 난이도를 낮추면 일반적인 3D 액션 게임 정도이니 평소 액션 게임을 즐겨왔던 분들이라면 금방 익숙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부분은 게임을 직접 만들어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니 첫 작품에서 이 정도의 밸런스라면 나름 적절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서 게임 회사로 성공적인 변화를 마친 Ember Lab입니다. 첫 작품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앞으로의 경험을 통해 보완해 나간다면 앞으로는 더욱 멋진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개발사로서 꾸준하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