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원래 진성 키보드+마우스(이하 키마) 유저로 키마를 지원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게임은 키마를 선호했다. 그런데 패키지 게임을 조금씩 손대면서 점차 게임 패드의 사용 빈도가 늘어났고 이제 웬만한 액션 게임은 게임 패드를 선호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딱 한 장르만 여전히 키마를 고집하고 있으니 바로 FPS 장르다. 캐릭터 이동은 슬라이드 패드가 더 편하지만 시야를 움직여 에임을 조준하는 것만큼은 여전히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FPS 게임에서 게임 패드만 에임 어시 시스템을 제공해주는 게 이러한 불편함의 반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키마도 100% 완벽하다고 생각하진 않는 게 가끔 한 번에 많은 조작을 해야 할 때 손가락이 꼬이기 쉽다. 키마 유저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텐데 W, D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E 혹은 F를 누르면 손가락 위치를 바꾸거나 꼬아야 한다. 게임 패드의 경우, 엄지손가락만 써서 슬라이드 패드를 조작하니 훨씬 최적화 된 조작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키마와 패드의 조작에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에 문득, 시점 조작과 공격 등의 조작은 마우스로 하고 이동만 슬라이드 버튼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기상천외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슬라이드 패드와 키보드의 조합
이미 판매 중인 제품들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슬라이드 버튼과 키보드를 조합한 제품은 실존했고 실제로 판매 중인 제품도 확인했다. 현재 이쪽에서 가장 유명한 제품은 레이저사에서 만든 '타르타로스 V2'라는 모델인데 한 손으로 키보드와 슬라이드 버튼을 모두 조작할 수 있다.

호기심에 한 번 사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문제는 가격이 꽤 비싸다는 것. 오직 게임용으로만 구매하는 것 치고 10만 원을 훌쩍 넘는 돈을 주기엔 아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더 저렴한 제품을 찾아보던 중 유명 제조사가 아닌 해외 소규모 팀에서 제작하는 제품도 발견할 수 있었다. 슬라이드 버튼만 따로 빼서 만든 제품인데 평소 사용하는 키보드와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제조사에 의하면 누를 버튼이 많은 포트나이트 등의 게임에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캐릭터를 슬라이드 버튼으로 움직이면서 다른 손가락으로 설계와 점프 등의 버튼을 누를 수 있으니 더 빠르게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 평가도 꽤 괜찮고 아예 키보드를 사는 것보단 게임 패드를 사는 게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생각보다 합리적이지 않은 가격이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해외 제품이라 국내에서 구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궁금해서 써보고는 싶은데 덜컥 사기엔 가격이 부담스럽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두이노? 코딩? 무슨 말인지...
일단 못 먹어도 Go

불현듯 이왕 이렇게 된 거 직접 만들면 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작년쯤 '메이키메이키 보드'로 각종 컨트롤러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 당시 사용했던 '메이키메이키 보드'는 프로그래밍이 끝난 제품으로 전도성 물체에 전선만 잘 연결해주면 무엇이든 컨트롤러로 탈바꿈해주는 교육용 장치의 일종이었다. 어쨌든 이쪽 방면에선 한 번 뿐이지만 나름 경력자인 셈이다.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는 별 것 아니라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아 바로 실천에 옮겼다. 이번 패드도 '메이키메이키 보드'로 만들어 보려고 생각했지만, 한 번 만든걸로 또 만들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해당 제품에는 슬라이드 버튼도 없으니 하고 싶어도 못 만들게 뻔했다. 뭔가 그럴듯한 제품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아두이노'를 발견했고 이때부터 지옥의 제작기가 시작되고 말았다.

'아누이노'는 오픈 소스를 기반으로 한 단일 보드 마이크로 컨트롤러로 사용자가 직접 코딩을 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쉽게 말해 원하는 코딩을 짜서 제품에 입력해두면 내가 만든 설정에 맞춰 제품이 반응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코딩 난이도가 높지 않은데다 생각보다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어 어린이들의 코딩 교육용 제품으로도 많이 쓰인다.

▲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의 보드

코딩을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직접 코딩 프로그램을 써서 작업을 해줘야 한다. 여기서 다행인 점은 '아두이노'는 전용 코딩 프로그램과 한국어를 지원해 줘 접근 자체가 굉장히 쉬웠다는 것이고 불행은 기자가 코딩의 코자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튼 좀 알아볼까 싶어서 알려주는 곳을 찾아보니 어린이 교실밖에 없는 상황. 학문을 배우는데 나이는 관계없다지만, 그래도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기자가 원하는 코딩은 슬라이드 버튼과 관련된 내용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비슷한 코딩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아두이노 전용 프로그램으로 코딩을 만들면 끝

▲ 코딩의 코자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하다보니

▲ 부족하게나마 내가 원하는 기능을 넣은 코딩을 완성할 수 있었다

▲ 짜둔 코딩에 맞춰 제품끼리 전선을 연결해주면 기본 준비는 끝!

▲ 내가 만들었지만 작동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다


갖은 고생 끝에 겨우 코딩을 완성하고 보드에 입력 후 성공했을 때의 짜릿함. 실제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마냥 기분이 좋았지만, 아직 완성까지 갈 길이 멀었기 때문에 성취감에 마냥 흠뻑 젖어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일단,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을 완성했으니 남은 것은 케이스를 만들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일만 남았다. 이 부분 역시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는데, 구상한 게임 패드가 일반적인 게임 패드처럼 양손으로 움켜쥐고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닥에 내려놓은 상태에서 오직 엄지손가락만 써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용 시 몸체가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할 수 있는 단단한 소재가 필요했다.

▲ 하던대로 박스와 테이프를 사용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원래는 이전에 만들었던 것처럼 테이프와 박스를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만들어보니 지지력이 너무 부족했다. 강도와 무게가 가볍다 보니 쉽게 흔들거린달까. 게다가 누더기처럼 테이프와 박스를 덕지덕지 붙여 만드니 딱 봐도 볼품없어 보인다는 것도 큰 단점이었다.

어디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만드는 걸 보면 아크릴 가공으로 케이스를 만들거나 혹은 3D 프린터를 사용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하지만, 관련 업계 종사자도 아니고 일반 가정집에서 3D 프린트가 있을 리 만무한 데다 아크릴 가공도 쉽게 생각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뭐로 만들어야 튼튼하게 고정도 되고 멋도 있으면서 잘 만들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던 차에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아이템이 떠올랐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했던가. 3D 프린트가 없다면 3D 펜으로 해보는 거다.

▲ 본격적으로 만들기 전 대략적인 형태를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 이후 3D 펜으로 케이스를 만들어 주면

▲ 나만의 슬라이드 패드 완성

▲ 키보드 아래에 지지대를 넣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 뭐지? 이상하지만 그럴듯하다


남은 것은 실전 뿐
될까? 되네...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그럴듯해 보이는 자태가 이번 DIY의 성공을 알리는 듯하다. 컨트롤러를 만들게 된 계기가 FPS 게임 때문이니 우선 FPS 게임들을 해보면서 제품의 성능을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컴퓨터에 직접 만든 컨트롤러를 연결하고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는 것도 확인했다. 남은 것은 실전뿐. 부랴부랴 평소에 즐겼던 게임들을 실행하고 실전에 돌입했다.





총평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처음부터 뭔가 기대하고 컨트롤러를 만든 건 아니었다. 그저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시작했지만 만들면서 재미를 붙여 여기까지 오게 됐다.

원래 기획 의도는 뭔가 개그 요소를 잔뜩 넣고 나중에 "짜란, 결국 망해버렸답니다. 컨트롤러는 사서 쓰세요!"라는 멘트로 얼버무리려는 생각이었지만, 막상 만들어놓고 써보니 의외로 괜찮다. 진짜 직접 만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작동도 잘 되는 데다 DIY만의 장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장점은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완성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저렇게 생간 컨트롤러가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든 물건이고 내 손에 최적화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오는 편안함이 생각보다 컸다.

앞서 기자가 키보드를 사용해 게임을 할 때 손가락이 꼬이는 경우를 꽤 겪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걸 방지하고자 만든 컨트롤러였기에 적어도 저걸로 게임을 할 땐 손가락이 꼬이는 상황은 겪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해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몇 번 해보면서 익숙해지니 의외로 편안한 조작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쉬웠던 점은 기자의 부족한 아누이노 코딩 실력이 부른 한계점과 게임마다 전용 키 설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번거로움 정도일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대각선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럽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코딩 문제라 얼마든지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전체적인 만족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마냥 어렵게만 생각했던 컨트롤러 DIY였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만큼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관련 시장에서 일반 사용자가 응용해서 만들 수 있는 키트를 쉽게 구매할 수 있고 사용 방법도 인터넷 검색 몇 번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 초보자라도 부담없이 도전할만 했다.

전문가가 각 잡고 만든 컨트롤러에 비하면 훨씬 단조롭고 볼품없긴 하지만 내가 만족하면 그만 아닐까 싶다. 재료비 다 합쳐서 3만 원가량 들었으니 가격 측면에서도 만족이다. 덤으로 재미까지 딸려오니 혹시 이 기사를 읽고 흥미가 동했다면 실천으로 옮겨보는 것은 어떨까?

▲ 예능으로 시작했지만 다큐가 돼버린 컨트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