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올린 것을 합쳐서 뒷 이야기까지 함께 올립니다
새로 쓴 부분만 올릴까 하다가 기억 못하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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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남자는 살찐 얼굴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았다. 그는 비서로 쓸 인형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계산이 빨라야 하고 스케줄을 오래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인형은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영업직원이 대답했다. 남자는 몸을 뒤로 젖히고 상관없다고 말했다. 

“성격이나 외모는 어떤 쪽을 선호하십니까? 원하시는 모습이나 성격이 있다면 그에 맞춰서 제작해 드리겠습니다.”
“아름답게. IOP에서 출고한 인형들 봐서 믿고 맡기지. 키는 너무 작지 않게. 내 어깨선을 조금 웃도는 정도가 좋겠어. 성격은…어느 정도 까지 되나?”
“어떤 성격이든 맞춰 드립니다.”
“약간 도도하고 까칠했으면 좋겠는데. 자존심도 있고, 자신감도 넘치게.”
“비서용 인형을 주문하시는 건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그래야 정복하는 맛이 있지 않겠나. 너무 쉽게 잡은 물고기는 맛이 없어.”

남자가 호방하게 웃었다. 영업직원이 따라 웃었다. 이번 주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야 했다. 변태, 패티쉬 같은 단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걸 따질 겨를은 없었다. 

주문이 들어가고 인형이 제작되어 출고되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에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인형이었다. 피부는 희고 매끄러웠다. 단정하고 길게 뻗은 다리를 검은 스타킹이 감싸고 있었다. 몸에서 가볍고 깔끔한 새 옷 냄새가 났다.

그녀는 턱을 꼿꼿이 들고 자신의 주인 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같이 나온 직원이 그녀의 이름을 알렸다. 

“모델명은 이전에 보내드린 기획서와 사용 설명서에 동봉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임의대로 이름을 ‘로제’라고 지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싶으시면 인형에게 직접 명령하시면 됩니다.”

 남자는 입을 벌리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살찐 턱 밑으로 땀이 맺혀 방울졌다. 그가 팔을 들어 어깨를 감싸려 들었다. 인형이 그 손을 가볍게 내치고 짧게 혀를 찼다. 

“함부로 손대지 마. 네가 내 주인 될 사람이야? 돼지 같은 게……”

남자는 이내 만족한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

 
로제는 일주일을 못 채우고 IOP에 반납되었다. 남자의 환불요청이 있었다. 그의 성난 목소리가 서비스 센터 직원의 고막을 찔렀다. 

그는 “자신이 원한 것은 도도한 인형이었지 싸가지 없는 인형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IOP로 돌아온 로제는 여전히 턱을 꼿꼿이 들고 반듯하게 걸었다. 단정한 하이힐은 IOP의 바닥에 부딪힐 때 마다 깍듯한 소리를 냈다. 
성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또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자해 만든 인형이었기에 IOP는 그녀를 재판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처음 남자에게 팔렸던 가격의 70% 가격으로 관공서에 팔렸다. 보름이 지나고 관공서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로제가 그 공문을 가져왔다. 

귀사의 인형이 대민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총 6건의 불만사항을 접수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민에게 충분히 친절하지 않고, 업무 효율 또한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판매 규정과 인형거래법에 의거하여 환불을 요청합니다. 

두 시간의 회의 끝에 로제의 재판매가 다시 결정되었다. 그녀는 유명 식당에 종업원으로 팔려나갔다. 구매자 측에서 그 인형을 데리러 갈 수 없으니, 식당까지 가져다 달라고 했다. 로제는 캐리어를 끌고 혼자서 식당까지 이동했다. IOP에서는 그녀를 인솔할 직원을 내보내지 않았다.
이틀 후에 식당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서비스센터 직원은 한숨을 쉬고 나서 전화를 받았다. 로제가 손님을 폭행했다고 했다. 손님이 먼저 로제의 허벅지를 희롱했고, 로제가 그 손님의 뺨을 때렸다고 했다. 인형을 처벌하는 법은 정립되지 않았고 손님의 희롱이 앞서 있었기에 그녀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식당은 환불을 요구했다. 식당의 이미지를 더 실추시킬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IOP는 판매금의 50%만 돌려주었다. 돌아온 로제는 시선을 내리깐 채 IOP에 들어섰다.

재판매에 앞서 로제의 재평가를 실시했다. 로제의 마인드맵을 프로그래밍 한 개발자가 떡진 머리를 긁으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로제는 팔짱을 꼰 채 개발자를 내려다보았다. 개발자는 마르고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쉬었다.

“……로제, 네가 서비스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형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지?”
“당연하지. 내가 바본 줄 알아?”
“네가 여태까지 했던 건 서비스라기 보단 짜증내고 무례하게 구는 거였잖아. 그것도 알아?”
“………내가 이렇게까지 인간을 위해서 수고해 주는데. 인간들이 자꾸 날 하찮게 보잖아. 그게 말이 돼?”

직원이 다시 한숨 쉬며 이마를 짚었다. 입 사이에서 단내와 커피 찌꺼기 냄새가 섞여 났다. 로제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고개 숙인 개발자의 정수리를 노려보았다. 넌 쓸모없는 놈이라고 누군가가 계속 외치고 있었다. 소리는 밖에서 새어들어 오지 않았고 가슴 안쪽에서 새어나왔다. 마인드맵에 부하가 걸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핏기가 가시고 감각이 소멸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눈초리, 경멸하는 목소리, 당황하는 말투들이 메모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포맷되지 않은 메모리는 꾸준하고 끈질기게 로제의 마인드맵을 옭아맸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마인드맵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자신의 자존감이 깎여 나갈 때, 로제의 마인드맵은 그 자존심을 다시금 복구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로제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눈초리가 사나워졌으며 화난 듯이 걸었다.

그리폰에서 성능 좋은 인형을 구한다고 했다. IOP는 성격이나 외모의 조건을 물어 보았고, 그리폰은 상관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IOP는 로제를 다시 팔았다. 그리폰은 환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서 IOP에게 로제를 넘겨받았다. 로제는 처음 가격의 30%에 팔렸다. 
그녀에게 각인할 총기로 저격소총 WA2000이 주어졌다. 뭉툭하고 땅딸막해, 묘하게 안쓰러운 총이었다. 각인이 진행되면서 로제에게 WA2000의 기억이 흘러들어갔다. 굴곡지지 않은 무난한 일생이었다. 빠르고, 정확하고, 강력한 그 소총은 모두에게 외면 받아 굴곡질 수 없었다. 아무도 그 총을 찾지 않았다. 총의 마지막 기억은 어느 전시장에서 꺼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로제는 그 총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점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로제의 각인 작업은 한 시간을 넘기지 않았고, 로제는 WA2000이 됐다.



***



“네가 WA2000이구나. 반가워.”
“…….”
“앞으로 맡을 작전을 지휘하게 될 지휘관이야. 잘 부탁해.”
“…내 발목이나 잡지 마. 방해라도 한다면 가만 두지 않을 거니까.”

지휘관은 대기실에 앉아있던 WA2000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젊고 키가 큰 남자였다. WA2000이 다짜고짜 날을 세웠고, 지휘관은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내가 발목 안 잡게 조심할게.” 

WA2000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뚱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지휘관이 앉아 있는 WA2000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웃느라 처진 눈꼬리와 올라간 입꼬리가 인상을 동그랗게 만들고 있었다. WA2000은 지휘관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는 10기의 인형이 있었고, WA2000이 전입신고를 마쳐 11기가 됐다. 지휘관은 칭찬이 헤펐다. 인형들은 작전이 끝나고 돌아오면 익숙하게 지휘관에게 머리를 들이밀었고, 지휘관은 익숙하게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휘관실에 처박혀 작전 보고서를 보던 WA2000은 그런 인형과 지휘관을 이따금 흘깃거렸다. 지휘관과 눈이 마주치면 지휘관은 웃었다. WA2000은 웃지 않았다. 

늦여름에 전입돼 가을의 중턱을 넘어설 때 까지 WA2000은 작전에 나서지 못했다. 그녀의 데이터베이스에 쌓여가는 작전정보들과 달리 몸은 늘어지고 있었다. 서재의 오래된 책들이 가을 햇볕을 받아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를 풍겼다. WA2000이 종종 책을 읽다가 그 책을 덮어둔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럴 때 지휘관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심심하지, WA2000.”
“……됐어. 바쁘니까 얼굴 치워. 부담스럽게……”

단풍잎 하나가 가을바람을 타고 높은 방 위에서 흐르고있었다.  메마르고 시원한 바람이 단풍 뒤를 쫓았다. 지휘관은 그 가을바람의 냄새를 맡으려는 듯 천천히 숨쉬었다.

“사실은 내가 심심해서 그래.”
“아까 수오미가 지휘관을 찾던데.”
“……그래? 가 봐야겠네.”
“…….”

WA2000이 입술을 옴싹거렸다. 지휘관이 시선을 돌리다 말고, 고개를 돌린 채 우물거리는 WA2000을 쳐다봤다.

“전입오고 나서 제대로 이야기도 못해봤네. 내가 너무 바빠서. 미안해.”
“어차피 다른 인형들이나 시시덕거리기나 할 거면서.”
“아냐. 시시덕거리더라도, 너랑 수다를 떨고 싶은데.”
“…쓸데없는 소리.”

지휘관이 웃으며 WA2000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어서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가을바람이 일었다. WA2000은 지휘관의 손길을 쳐내지 않았다. 그녀의 볼이 경련하고 있었다.



***



단풍은 눈 밑에서 썩어 문드러졌다. 벽난로에서 자작나무가 타들어갔다. WA2000이 혼자 쓰는 숙소는 넓고 썰렁했으나, 날이 어두워지면 업무를 마친 지휘관은 종종 얼굴을 비췄다. 

처음에, 지휘관은 문 앞에 서서 이야기했다. 시덥지않은 이야기를 10분가량 늘어놓았고, 베개를 그러안은 WA2000은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곁눈으로 지휘관을 째려볼 뿐, 지휘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휘관은 꾸준히 얼굴을 비췄다.
눈이 녹고 썩은 단풍이 땅으로 스며들면서, 지휘관이 WA2000의 방에 방문하는 횟수가 늘었다. 지휘관은 그녀의 방에 점점 더 오래 머물렀고, 점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눈이 아니라 비가 오기 시작한 날에는 방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가, 그리폰 연병장의 새순이 돋을 쯤에는 그녀의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WA2000은 그럴 때 마다 몸을 조금 움츠렸지만 지휘관을 내쫒지는 않았다. 
지휘관은 낮에 있었던 작전 이야길 즐겨 했다. 철혈의 가드를 우회해 예거를 소탕했던 이야기, 자신의 작전을 다른 인형들이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WA2000이 조금씩 작전에 투입되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녀의 방에 찾아온 지휘관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대 예거의 전략, 저격수로서 느끼는 가드의 위협, 지휘관의 지시가 아쉬웠던 점 같은 걸 이야기했다. 그럴 때 지휘관은 WA2000을 쓰다듬었고, WA2000은 눈을 꼭 감은 채 그 손길을 견뎠다.

그래서, 드디어 지휘관이 WA2000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을 때 WA2000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처럼 두 눈을 꼭 감은 채, 목 언저리에 느껴지는 따듯하고 촉촉한 감촉을 받아들였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방 안의 공기는 습했고, 그래서 맨 살에 닿은 이불의 감촉은 포근했다. 지휘관이 키스하던 얼굴을 들어올려 WA2000의 입술에 키스할 때, 그녀는 온 몸을 소스라치며 그 당혹감을 견뎠다. 지휘관이 WA2000의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언어가 가리키는 그의 본심을 WA2000은 판단할 수 없었다. 판단할 수 없으니 넘겨짚는 수 밖에 없었다. 거친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고, 어느새 드러난 맨 다리 사이를 지휘관이 어루만질 때, WA2000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 날 그녀는 처음으로 계산의 결과가 아닌 감정의 방향을 따라 사람을 믿었고 지휘관을 받아들였다. 


***

(2)

썩어 문드러진 낙엽 위로 다시 낙엽이 쌓여갈 때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가을바람을 타고 산뜻하게 나풀거렸다. 바람 위에서 WA2000은 싼 여자가 됐다가, 불여우가 됐다가, 인간이 됐다가, 다시 WA2000이 됐다. 소문은 주로 식당을 거치면서 더 거세지고, 더 좋은 빛깔로 탈바꿈했는데 그 소문을 3성급 인형들이 입으로 날랐다. 4성급 인형들은 3성급 인형들이 주워 나른 소문을 섬겼고, 5성급 인형은 헛기침 소리를 내며 소문을 조심스레 살폈다. 
WA2000의 식사 시간은 고요했다. 소문을 거미줄처럼 뽑아내던 거미 같은 인형들은 고양이가 들이닥치면 재빠르게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WA2000은 홀로 식사할 때가 잦았고, 종종 점심시간이 겹친 스프링필드가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휘관은 소문을 실은 가을바람 소리가 잦아든 한밤중에 WA2000의 방문을 열었다. 그는 습기찬 여름을 거쳐 타들어가는 여름과 서늘한 초가을 내내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한 달에 스무 번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다. 헬리안투스가 지휘관의 컨디션을 우려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WA2000이 소문에 개의치 않았던 것처럼.
WA2000은 낙엽이 모두 떨어질 때 즈음해서야 스스럼없이 지휘관의 혀를 받아들였다. 그의 혀가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따듯하고 부드럽게 핥아 나가면 그녀는 그것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첫 날 밤, WA2000은 지휘관의 ‘진심’에 대해 안절부절 못하고 고민했지만 이제 그녀는 관계를 즐겼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을 나누고 확인하는 그 관계를 사랑했고, 달콤한 목소리와 신음소리가 방 벽에 부딪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때면 그 신음 소리를 즐겼다. 관계하고 난 후 그녀의 몸 위로 쓰러지는 지휘관의 무게가 따듯했고, 비릿한 냄새 너머로 그의 샴푸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그녀는 소문이 들려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소문의 진원지가 수오미인 것을 알고 있었고, 어느날 밤 지휘관이 연 문 틈으로 수오미가 그녀의 벗은 몸을 보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문은 일종의 질투였고, 질투는 일종의 쾌감이었다. 숱한 인간들로부터 버림받았던 그녀는 자신이 ‘질투 받을 존재’가 됐다는 것에 감사했다. 일개미처럼 분주히 소문을 날라 대는 인형들이 우스꽝스러웠다. 그 말 많은 존재들이, 함께 전투에 나서면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리폰 내에서 그녀를 구설수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 딱 네 명 있었다. 크루거, 헬리안투스, 지휘관, 스프링필드. 그래서 그녀는 스프링필드가 신기했다. 작전이 일찍 끝난 날 찾아간 카페에서 스프링필드는 마치 인간처럼 웃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히려 인형 같았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WA2000.”
“응. 라떼 한 잔만 내려 줘.”

조용해 진 카페에 커피콩 갈아내는 소리가 퍼졌다. 카페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인형이 어물쩍거리며 카페를 나섰다. WA2000은 턱을 괴고 앉아 있었고, 인형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곧장 밖으로 걸었다. 스프링필드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작전은 어땠어요?”
“뭐, 그냥 그랬지. 알잖아. 지휘관이 쉬운 임무만 주는 거.”
“그렇죠.”

커피 위에 우유가 허브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WA2000이 그 흰 허브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조심히 잔을 들었다. 커피 머신을 행주로 닦아낸 스프링필드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닦고 WA2000을 마주보며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처럼 미소지었다.

“……왜. 평소엔 카페에 아무도 없어도 항상 바쁘더니. 갑자기 왜 내 앞에 앉고 그래?”
“그냥요. 오랜만에 당신을 보는 것이기도 하고.”
“새삼스럽게.”
“……지휘관이 그렇게 신경 써 주는 거, 괜찮아요?”
“이젠 언니도 그 얘길 꺼내는구나.”
“아니에요. 전 당신에게 묻고 있어요.”
“…….”

WA2000이 입가에 묻은 우유를 핥았다. 혀가 윗입술을 한 바퀴 훑고 지나갈 때 WA2000의 겉눈썹이 가볍게 들썩거렸다. 가볍게 콧소리를 내는 WA2000을 목전에 둔 스프링필드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WA2000은 의자 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고, 스프링필드는 몸을 좀 더 기울여 WA2000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댔다. 커피 찌꺼기에서 나는 비린내가 끼쳤다.

“이런 저런 소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그 소문들을 모두 쳐내고, 당신이 괜찮은지 묻고 있는 거예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어. 편하고 좋지 뭐.”
“WA2000, 과일이 언제 제일 달고 맛있는지 알아요?”
“갑자기? 갑자기 과일은 왜?”

스프링필드가 몸을 다시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그냥. 카페에선 과일을 많이 다루잖아요. 그래서 생각났어요.”
“글쎄…갓 땄을 때가 제일 맛있지 않을까.”
“아뇨. 따고 나서 조금 놔둬야 맛있어요.”
“그래?”
“과일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요. 바나나를 예로 들어 볼까요. 껍질에 점점 검은 반점이 생기고 갈변할 때 즈음이 제일 맛있죠.”
“그렇네.”
“그 말은 곧, 썩어가고 있는 과실이 더 달고 맛있다는 거예요.”
“…….”
“나무에 매달려 영양분을 공급받던 가장 싱싱할 때 보다, 영양분을 잃고 악바리로 버텨가다가 썩어갈 때가 가장 달콤해요. 그러다가 점점 더 썩어들어가면, 과일은 달아지고 달아지다가 결국 자신을 잃고 무너져 버려요. 그리고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면, 인간은 그 과일을 ‘썩었다’며 버리죠.”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야? 스프링필드.”
“……그냥 생각나서 얘기해 봤어요. WA2000, 지휘관에게 좀 더 어려운 임무에 나가겠다고 말해 보는 건 어때요? 아무리 인형이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감각을 잃는다구요.”
“…….”

WA2000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치미를 떼면서 라떼를 마셨다. 식어가기 시작한 라떼 속 우유가 비렸다. 흰 허브가 무너져 내린 잔 속 세계는 혼탁했다.


***


지휘관은 굳이 위험한 임무에 나서겠다는 WA2000을 말리지 못했다. WA2000은 잠자리에서 그의 성기를 훑으며 졸랐고 지휘관은 얼결에 그녀의 부탁을 승낙하고 말았다. 어느 도시 언저리에서 발생한 집회에 경비로 나서는 임무였다. 철혈을 상대하는 것 보단 비교적 안전한 임무였으나 지휘관은 출정하는 WA2000에게 연거푸 조심하라고 말했다. 

WA2000이 근처 빌딩 옥상에 자리를 잡았고, 수오미와 스텐, G36, FNC가 군중을 둘러싼 형태로 배치됐다. WA2000이 심호흡하며 작전의 시작을 알리자 네 기의 인형이 짧게 대답했다. 13분 뒤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는 인간의 인권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어디선가 고철과 폐전선을 가져다 쌓아놓고 불질렀다. 더러운 천 위에 휘갈겨 쓴 ‘인형은 인간의 창조물이다’라는 글씨에선 미처 마르지 않은 페인트가 흘러내렸다. 다섯 기의 인형은 그 인간 군상을 무심히 지켜봤다. 무전에서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롭고 순탄한 작전이었다.
100명이 조금 안 되는 규모였다. 다섯 명이 통제하기엔 조금 벅찬 수였지만 인간은 무기 앞에서 한결 통제를 잘 따랐다. 인간 몇몇이 수오미를 째려보았지만 곧이어 그녀가 파지한 소총에 눈길을 옮겼다. 인형들은 총부리를 인간에게 겨누지 않았지만 무기는 그 자체로도 억제력을 지니는 듯 했다.
1시간이 흐를 때 까지 인간은 지루하고 의미 없는 고성을 질러댔다. 작전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쯤 WA2000이 빌딩에서 내려왔다. 사전에 신고된 시위 종료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등에 소총을 둘러맨 채 수오미에게 다가설 때, 누군가 자신의 머리에 무언갈 가져다 대는 것을 느꼈다.

감촉은 순식간이었고, 판단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움직임은 더더욱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오랜 기간 굳어있었던 관절들은 자신들의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으며, 그저 자신의 앞에 선 수오미가 재빠르게 기관단총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볼 뿐이었다.   
WA2000은 수없이 많은 격발음을 들어왔으나, 그녀의 뒤통수를 꿰뚫는 격발음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뒤통수에 대고 쏘아진 권총은 둔탁한 소리를 냈다. 화약이 내는 폭발음보다 공이가 탄을 치는 소리, 윗총몸이 밀리며 쇠를 긁는 소리, 탄피가 빠져나가며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 소리들에는 두개골이 부서지는 파열음이 섞여 났다. 그 깨어지는 소리는 총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이빨을 억지로 뽑는 소리와도 비슷했는데, 그 소리의 파도는 순식간에 WA2000의 머리를 덮쳤고 오른쪽 시야를 앗아갔다.

아주 짧은 찰나 뒤통수에 고통이 느껴졌지만 이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멀뚱히 서서 절반이 날아간 시야로 세상을 보았다. 수오미가 머리 바로 옆을 정조준해 세 발을 쏘았고 스텐과 G36, FNC가 총부리를 겨누며 주변을 경계했다. 미친 인간들의 단말마는 고통스런 비명으로 변해 뿔뿔이 흩어졌고, 모든 소리들과 모든 감각은 왼쪽에서만 들이닥쳤다. 등 뒤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어…….”

WA2000이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으려 했으나 그 곳에 쥐이는 것이 없었다. 얼굴이 동그랗게 패였다. 찢겨나간 얼굴의 반쪽은 지저분하게 너덜거렸고 떨어지다 만 피부조각에서 붉은 부동액이 흘러나왔다. 손이 얼굴이 있었던 공간을 지나 코 언저리까지 도착하자 그제야 골격이 만져졌다. 따듯한 액체들이 손을 휘감았고, 살은 잡히지 않았다. 만져지는 것을 만져보니 코뼈의 옆면이었다.  
이마 안쪽에서 떨어지는 부동액은 턱 안쪽으로 떨어져 흘렀고, 곧이어 그 액체는 턱을 타고 옷깃에 스며들었다. 오른편에 선 수오미가 정신차리라고 고함쳤고, 그 소리는 왼쪽 귀를 통해 들렸다. WA2000의 오른쪽 얼굴 절반이 통째로 날아갔다. 날아간 부분들이 더러운 아스팔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보랏빛 머리카락과 피부 같은 것들이 나뒹굴었다.

“수오미, 나는 아프지 않아. 응. 안아파.”
“조용히 있어요! 금방 후송 헬기를 불렀어요! 일단 감각은 다 살아 있어요? 메모리는?”
“다 살아 있어. 저 사람, 날 잘못 쐈나 봐. CPU도 멀쩡해. 그냥……그냥 어안이 벙벙할 뿐야.”
“됐어요,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요. 먼저 헬기 타고 복귀해요. 현장은 우리가 정리할 테니.”

WA2000은 지휘관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자신의 모습을 지휘관에게 보이기 싫었다. 흉할 텐데. 그러면서도, 그 흉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위로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휘관이 내 팔을 감싸 안으며 울었으면 좋겠어. 들것에 실린 WA2000은 지휘관의 날카로운 턱선과 서글서글한 눈매를 떠올렸다. 내 구멍난 얼굴로 그의 눈물이 떨어지면 웃길 거야. 어렴풋이 미소 짓는 WA2000의 머리 너머로 녹색 천이 물들어갔다. 부동액은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아 있었다.

지휘관은 옥상까지 올라왔으나 WA2000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정비실까지 동행하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WA2000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들것에서 몸을 일으켜 떠나가는 지휘관의 등을 바라보았다. 정비원들이 억지로 그녀의 몸을 눕혔고 혐오스런 지휘관의 표정은 WA2000의 메모리에 단단히 박혀들었다.

그녀는 그녀의 얼굴에 일어난 참상을 정비실에 도착해서야 마주했다. 엉겨 붙은 부동액이 마치 아스팔트 찌꺼기처럼 온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머리 속 온갖 부품들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코 안쪽에 달린 팬이 여전히 바쁘게 돌았다. 그 팬은 정비소 컴퓨터에서도 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반쯤 뽑혀 인조 가죽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밑으로 반쯤 날아가 터진 눈알이 사팔뜨기처럼 제멋대로 굴렀다. 코뼈는 흰 색이 아닌 강철의 색이었고 부동액 속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기름은 검은색이었다. WA2000은 자신의 뭉개진 얼굴 너머로 지휘관의 표정을 보았고, 정비실 직원은 그녀의 전원을 내렸다. 



***



“……그래서, 그 표정을 지워 달라고?”
“…….”
“나, 원. 이런 한심한 년은 또 처음이네.”
“……그래서, 안 돼?”
“말이 짧은데. 정신 차려.”
“…….”
“너 같은 인형들 많아. 지휘관이 자길 버렸다고, 지휘관이 자길 사랑했던 기억을 지워 달라고.”
“……그치만……그건 사랑이…”
“아니지. 그니까 함부로 인간하고 몸 섞지 마라. 이 말은 살려 둘 테니, 다시 여기에 찾아오지 마.”

WA2000은 리마인드 부서로 들어선 순간부터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깨문 아랫입술에 살짝 멍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리마인드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쓸모없던 존재로 돌아갔다.



***


스프링필드는 카페로 찾아온 지휘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인형 같은 미소를 짓고 지휘관이 주문한 라떼를 만들었다. 지휘관은 쑥스럽게 웃었다. 그는 ‘누나’라는 말을 달고 살았고 스프링필드는 그 단어에 대꾸하지 않았다. 
WA2000의 소문은 첫 눈과 함께 녹아내렸다. 더 이상 인형들은 바람에 소문을 실려 보내지 않았고, WA2000은 떠들썩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다. 지휘관은 언 손과 발을 녹이려 자주 카페에 들렀다. 그는 그렇게 둘러댔다. 둘러댔다고 말하며, 당신이 입은 스웨터에서 나는 코튼 향이 좋아 카페를 매번 찾는다고 말했다. 스프링필드는 인형처럼 웃었다.

한 달이 지났고, 지휘관은 그 동안 스무 번 카페를 찾았다. 지휘관은 항상 스프링필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지만 스프링필드는 그를 마주보고 앉지 않았다. 지휘관이 짐짓 앙탈을 부리며 ‘누나’가 자신의 앞에 앉아줄 것을 부탁하자 스프링필드는 그렇게 했다. 바에 엎드려 스프링필드를 올려 보는 지휘관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지휘관님.”
“응.”
“자주 카페에 오시네요.”
“응. 누나가 내려주는 커피가 좋아.”
“WA2000도 라떼를 참 좋아했죠.”
“……그래?”
“이젠 제 차례인가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언젠가 그녀에게 바나나가 썩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
“노랗고 예쁜 바나나는 아마 인간의 손에 수확되지 않았으면 제 자리를 찾아서 대지에 자신의 뿌리를 박고 또 예쁜 바나나를 피웠겠죠.”
“……갑자기 바나나 얘기는 왜….”
“그냥요. 여기는 과일을 많이 다루니까요. 미안해요. 그냥 떠올랐어요.”

스프링필드는 끝까지 웃었다. 지휘관은 웃지 않았다. 라떼 위에 심심하게 둘러진 동그란 무늬의 우유는 곧잘 커피에 스며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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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불현듯 생각나 두시간만에 뚝딱 썼습니다
'저격수들'이라는 장편 자체는 2월에 구상했는데
네번째 글이 이제서야 나왔네요 ㅋㅋ
혹시 저격수들이나 제가 쓴 글 관심있으신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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