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군부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가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새겨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한 민주화 운동입니다.

1. 배경

때는 79년 12월 12일, 반란군 수괴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권까지 손에 넣으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이 군사반란에 대한 강한 반대를 주장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이 군사반란은 박정희 사망이후 커져만 가던 민주화에 대한 바램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새로운 군부독재를 시작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란군 수괴 전두환은 이 모든 학생운동들이 북한에 의한 사주로 벌어진 것이라 주장하며 12.12에서부터 시작된 비상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당시 반란군 수뇌 전두환과 그 일당들인 하나회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던 군사력을 이용하여 반대를 누르기 위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계엄령이 확대 될 조짐을 보이면서 전국적으로 시위는 더욱 더 열기를 더해갔고,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에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2. 진행

 1) 사건의 시작은 5월 17일 저녁부터 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각 대학 학생회장단이 계엄당국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총학생회장단은 무등산장으로 피신하였고

 당일 23시에는 경찰과 보안사 요원들이 재야인사 및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면서 잡히지 않은 간부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학생들의 지휘체계가 무너지게됩니다.

 또한, 당일 23시 40분에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무장 공수부대를 투입 본격적인 무력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이틀전 벌어진 시위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을 학교 본관에 감금하고 구타하는 등 무분별한 폭력 행위가 벌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2) 5월 18일 아침 10시, 전남대에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무장 공수부대와 대치 하였고, 학생측의 숫자가 2~3백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전날 벌어진 학생들에 대한 구타를 비난하며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휴교령을 철폐하라는 시위를 시작합니다.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시위를 시작하자 공수부대 지휘관은 "돌격 앞으로" 라는 명령을 내리고 무장 공수부대원들은 쇠심이 들어있는 진압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폭행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마저도 폭행하였습니다.

폭력이 과격해짐에 따라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공수부대의 무차별적인 구타를 비난하던 학생들 마저 구타를 당했고, 이 일로 학생 시위대가 시내로 이동함에 따라 계엄군은 가스차를 이끌고 가톨릭센터, 광주역, 광주터미널 인근에서 진압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진압작전은 3시경 공수 특전단이 추가로 투입되면서 점점 더 심해져 갔고 시위대만이 아닌 인근 일반시민들을 폭행하고, 주변 건물들에서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대답을 안한다는 이유로 청각,언어 장애인을 구타하여 죽이기까지 합니다.

 3) 이와 같은 계엄군에 의한 무차별 진압작전은 일반시민들의 반감까지 사며 시위대와 일반시민들이 연계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히려 반감만 늘어나게 되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버렸습니다.


3. 결과

5월 27일, 반란군 수괴 전두환의 충직한 개였던 계엄군은 총, 칼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끝에 진압을 끝내게 됩니다.
수 많은 목숨들이 스러져 갔고, 수 많은 사람들이 다쳤으며, 수 많은 부모들이 울부 짖었습니다.

이 5.18 민주화 운동은 이후로 벌어진 수 많은 민주화 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끝까지 반란군 수괴 전두환의 발목을 잡아냅니다.

4. 기록들...




4. 또 다른 진실들


목욕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12살 소년도,


친구들과 뛰어놀던 11살 아이도,



한참 꿈많은 나이인 16세 소녀도 모두 스러져 갔습니다. 이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한 것 일까요? 반란군 수뇌 전두환은 차지하더라도 계엄군들은 자신들 또한 피해자라며 주장합니다.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요.

과연 그들이 그랬을 까요?

당시 광주에 있던 외국분이 영화 화려한 휴가의 도청 발포씬 밑에 쓴 댓글입니다.

I lived in South Korea from 1973 to December of 1980. I taught English there after doing my stint as an Army broadcaster at AFKN radio / TV in Seoul. I saw all this stuff happen. Don't believe the "200" dead figure that is given. It is more like 2,000 at the hands of the "Special Warfare Brigade" and other units. Other villages and towns tried to send help to the rebels by city busses. Many of these were shot to pieces by helicopter gunships on the road from Mokpo. Korea had no WMD's but they did have their "Special Warfare Brigades" that were designed to parachute into a city and kill every thing that crossed their path. Kwangju was a city of about 600,000 in 1980. Jimmy Carter gave strong man Gen. Chun Do Hwan the green light (a structure left over from the Korean War until 1993). American troops took their place on the DMZ and the Korean troops dropped in and started killing students and demonstrators in Kwangju and other cities in Cholla South Province. In some cases, the horrified policemen simply handed over their WWII vintage carbines to the rebels! The Korean Army had M-16's. There was a tank factory (M-113's) in Kwangju. Some workers drove one into a police armory wall and started handing out weapons and ammo. Some cops just unlocked their armories for them. Today, we would call "Operation Fascinating Vacation" a "Military Riot". Even with no 2nd Amendment, (They are an unarmed populace in Korea), to try to destroy a city of over half a million with only 3,000 suicide troops did not really work out. They kicked out the Army and for about 10 days created their "own republic" on the very tip end of Korea. They fed people, gave them medical care, kept them informed by loud speakers mounted on captured jeeps and prepared for the counter attack that was coming. It only lasted 10 days or so.  Note that for a little while, Korea was divided into THREE parts. North Korea, South Korea and Cholla Nam Doh (About 1/4 of South Korea's land mass). We Americans have 9-11. The South Koreans have 5-18. They re-enact the Massacre every year. Do they do this for 200 people? Nope. It was more like a couple thousand who died in Kwangju, the surrounding villages and off shore islands such as Wan-Do and others. This figure is not admitted to.  It still haunts me to this day.

 Don Shively라는 분으로 1973년부터 80년 12월까지 서울에서 AFKN 라디오/TV 활동하신 분입니다.
이 분이 다신 다른 댓글 중 하나가 주목할만 한데

I agree. Because of what I saw with my own "round eyes", I had to spend 47 days in Suweon Prison, locked in a closet sized room with a shit hole at one end to prove it. I WAS one of those victims. We fled in a taxi that took a wrong turn and was met with 50 calibre machine gun fire. It killed the driver, the front passenger and spun that little Pony car around on four flat tires in a spray of gasoline. It sounded like being inside a metal trash can being hit with baseball bats! Have you ever been shot at?  We climbed out the back window, unhurt amid the smell of deadly fuel. Two ROK troops followed us laughing. Stole my Nikon, $2000 US in currency and tried to rape my wife. If I had not claimed to be a news reporter for the Associated Press (in Korean, yes, I spoke it as well in 1980) it would have happened. We had to be smuggled out of Cholla province, through the military lines by the Student Government of Kwangju in a pig crate covered in radishes! You Koreans eventually won. Be proud to be a Korean. I actually smile with pride when I see a Hyundai or KIA car drive by. I am proud of Korea! I used to work for both of those companies. Why can't you be proud also?

이 분과 이 분의 와이프 및 다른 승객이 타고 있던 택시에 군인들이 50구경 기관총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운전기사와 동승햇던 승객은 사망하고 귓자리에 탔던 이분과 와이프가 내리자 소지한 카메라와 현금을 탈취하고 와이프를 강간하려 했지만 이 분이 기자라는 것을 알려서 다행히도 벗어 났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은 '미움받는 백성, 한 많은 백성 전라도 사람'들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개돼지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도망가는 사람의 등 뒤에서 착검한 총을 휘둘렀고, 잡은 사람을 때릴 때도 얼굴과 머리를 주로 때렸다.

-한국현대사사료연구원 편,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1112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는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도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와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21~122


젊은 여성이나 양복이라도 반반히 입은 청년들에 대한 계엄군의 폭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일단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청년이 달아나면 끝까지 추척, 그 청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을 못할 때까지 갖은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으로 도피했는데, 뒤쫒던 계엄군은 고시학원 계단 위를 무장한 채 따라가기에는 거추장스러워지자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 뒤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한 무리의 병력은 학원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험생들을 무자비하게 내갈겼다.

-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부임에 틀림 없었다.……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XX"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이송되는 도중 그 밀폐된 차 안에다 최루탄을 쏘았다. 순식간에 생지옥이 되었다. 전원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쌌다. ... 

목적지(광주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했다. 차에서 내려보니 내가 탄 트럭에서만도 서너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살아 있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최루탄 때문에 얼굴 피부가 벗겨져 지도를 그려놓은 듯 빨갛게 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장소는 교도소 면회실 근방이었는데, 우리는 내리자마자 곧바로 '원산폭격' 기합을 받았다….구타당하던 중 매에 못 이긴 한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돈으로 안 될 게 뭐 있느냐. 돈 먹어라!" 라고 소리치면서 자기 옷 속에서 만 원짜리 묶음 4뭉치를 꺼내어 확 뿌렸다. 지폐들이 원산폭격 자세로 있는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공수대 여섯 명이 그 사람에게로 달려들어 M16 개머리판으로 짓이기자 그 사람은 이내 쭉 뻗어버렸다. 그리고 원산폭격 자세에 있는 우리 머리 위로 총성과 함께 총알이 핑핑 지나갔는데, 총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시체처리 장면을 못 보게 하기 위한 위협사격인 듯하였다. 

그런 후 우리들은 교도소 안에 있는 창고(사형집행자 대기실)에 수용되었다. 며칠째 물 한모금 입에 대보지 못했으므로 탈진상태에 빠진 우리가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자 공수 한 명이 "야, 오줌 줘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수 한 명이 즉석에서 물컵에다가 오줌을 싸서 주었다. 한 사람이 그걸 덥썩 받아 마치 시원한 냉수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받아마셨다.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그 때 느꼈던 치욕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창고에 수용된 후에도 무릎을 꿇은 채 대검, 곤봉, 총 개머리판, 군화발 등으로 매일 수백대씩 구타당했다. 이러한 살인적인 구타는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교도소에 도착한 다음날은 잡혀왔던 예비역 해병 중사(본인이 그렇게 신분을 밝혔음)가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나 죽여라." 하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오냐, 죽여주마." 하면서 5, 6명이 개머리판으로 짓이기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또한 그들은 작전 나갔다가 대원이 죽거나 부상당하면 그 시체를 갖다놓고, "너희 같은 놈들이 죽였다. 너희들도 이렇게 죽어봐라." 하면서 짐승을 잡듯이 두들겨패서 한 명씩 한 명씩 죽였다. …무릎꿇은 자세에서 발가락을 바짝 곧추 세우고 있게 하다가 견디다 못해 발가락이 펴지면 대검으로 발가락을 짓이겨 버렸다. 일명 '닭발요리'라고 하는 기합이었는데, 말 그대로 닭발을 쪼듯이 탁탁 두들기며 짓이겼다.

-강길조 증언, 살인적인 고문에 죽어나가는 사람들


이 쓰레기나 할 법한 짓을 한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들 또한 5.18의 피해자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치며

잊지 맙시다, 잊으면 안됩니다. 어떤 짓을 했는지,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누구로 인해 피를 쏟았고, 누구로 인해 누릴 수 있는지.


부드러운 봄 향기 바람에 실려올 때
새 신부 분꽃 같이 고운 자태 꽃망울을 트이고
사랑하는 우리 아들 첫 출근을 나설 때

이웃집 숙이는 첫사랑에 함박 웃고
북어 두들기는 방망이 소리는 남편을 향한 마음인가?
골목어귀 아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어느 덧 밀려오는 얼룩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흩날리는 저 꽃잎들은 분꽃이 분명한데
하이얀 잎 덮고 있는 저 얼룩은 무엇의 자욱인가?

첫사랑에 웃음 짓던 소녀는 온데 간데
저기 저 방망이소리는 누굴 위한 마음이며
저 이들 가족에도 아이들은 있을 진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