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금 틀어주시고 감상해 주시면 몰입감이 2배?!, 마우스 우클한 뒤 연속재생으로 틀어주세요!)

원랜 작전 별로 크게크게 (바르바로사 작전->청색 작전...)뭐 이런 식으로 할려했는데, 자료를 수집하면서 알게 됬습니다.
저러면 지나치게 수박 겉핡기 식으로 될 수밖에 없겠다 싶어서! 연도 별이 아니라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 순으로 소개해드릴려합니다.(연도가 좀 겹치거나 꼬일 수 도 있는데 제가 최대한 연동 해 보도록하죠)
자 그럼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죠.

사실 주력으로써 엄청난 전과를 올린 중부집단군이라던지, 후에 청색작전으로 인해 인류사에 길이길이(?)남을 대규모 전투를 치뤘던 남부집단군과는 다르게 전선이 동결 되 있습니다.(물론 종착지이자 작전목표였던 레닌그라드에서 900일동안이나 포위전을 치뤘던 게 크겠습니다만)그래서인지 잘 안 알려져있습니다.
에를 들자면 "전쟁이 발발했다 → 독일군이 기습했다 → ?????? → 레닌그라드 도달". 이런 식입니다. 
 중간과정이 싹 빠진 거죠. 쾨니히스베르크(現 러시아 칼리닌그라드)부터 레닌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직선거리만 800 km 가까이 됩니다. 그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 혹은 "특기할 만한 일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는 건 문자 그대로 어불성설이죠. 그래서 그런지 영문 위키피디아는 물론이고 독일어나 러시아 어의 위키피디아도 (그놈의 언어로 인한 접근성 문제가 제일 크긴 합니다만) 뭔가 속시원하게,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쫙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규모 자체가 집단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북부 집단군의 목표였던 레닌그라드는 독일로서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목표였습니다. 아무리 듣보잡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해도 북부 집단군의 중요성이 제로인 건 아니란 말이죠.

오늘은 1941년 6월 22일부터 1941년 7월 초까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첫 보름간 동안 북부 집단군의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공격측이 독일군이었던 만큼 초점은 독일군을 따라갑니다.


독일군 북부 집단군 (Heeresgruppe Nord) : 집단군 총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제18야전군 : 사령관 게오로그 폰 퀴흘러 상급대장(4성 장군에 상응)
  야전군 직속 1개 보병사단, 예하 3개 군단(6개 보병사단)
 제4기갑집단군 : 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제41기갑군단 : 사령관 게오르그 한스 라인하르트 기갑대장(3성 장군에 상응)
   예하 1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2개 기갑사단 : 6기갑사단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토마 중장(2성 장군에 상응)
  제56기갑군단 :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보병대장
   예하 1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1개 SS기갑사단(토텐코프) : SS사단 사령관 테오도어 아이케 SS기갑대장
 제16야전군 :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 상급대장
  예하 3개 군단(7개 보병사단), 1개 예비 보병사단
 예비 2개 군단(4개 보병사단, 1개 SS 경찰사단), 3개 후방 지원사단
 항공지원 : 제1항공군 (사령관 알프레드 켈러 상급대장)

소련군 북서 전선군(Северо-Западный фронт) : 전선군 총사령관 표도르 이소도로비치 쿠즈네초프 상장(3성 장군에 상응)
 제8군 : 사령관 표토르 페트로비치 소벤니코프 중장(2성 장군에 상응)
  예하 2개 소총군단(5개 소총사단), 1개 기계화군단(1개 차량화소총사단, 2개 전차사단)
 제27군 : 사령관 니콜라이 에라스토비치 베르자린 중장
  예하 2개 소총군단(4개 소총사단), 직속 2개 소총사단
 제11군 : 사령관 V. I. 모로소프 중장
  예하 2개 소총군단(5개 소총사단), 1개 기계화군단(1개 차량화소총사단, 2개 전차사단), 직속 3개 소총사단
 항공지원 : 직속 1개 공수사단, 6개 항공
(당시 북부집단군과 소련군의 전투서열)

자 일단 전투서열부터 보도록 하죠. 어디에 어떤 누가 이끄는 부대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글 읽기가 수월해질 것 같아서요.
그래도 이 좁은 북서 지역에서만 양측 합계 50개가 넘는 엄청난 수의 사단들이 대격돌을 벌였는데요, 주 무대는 발트 해 연안의 3국인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였습니다. 단, 현재 국경선을 놓고 보면 리투아니아의 남동부는 중부 집단군 담당이었는데, 전쟁 직전에는 빌노(Wilno)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아래 있었습니다(실은 이건 폴란드가 리투아니아 독립 과정에서 뒤통수를 때린 것었습니다만).

굵은 글씨로 표시해 두었는데,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바로 이 때 북부 집단군에 있었습니다.

라세이니아이 전투 (Battle of Raseiniai)
제가 맨 처음 글에서 언급 드렸던 kv쇼크라고 기억하시나요? 자 이제 그 이야기를 해드리죠.

남부 리투아니아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독소전쟁에서 가장 결판이 먼저 난 전차전입니다. 그리고 초장부터 상당 규모로 벌어진 전차전이기도 했죠.(순수한 대전차전이라기 보단 공군을 등에 업은 독일기갑VS소련기갑으로 보시면 될듯?)
의외로 소련군이 무능하진 않았던 건지, 아니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전날에 스탈린이 경계명령을 내린 게 먹힌 건지 하여간 기습당한 것치고는 소련군의 대응이 재빨랐습니다. 용케도 당일 오전에 반격명령이 개시된 거죠.)(프랑스군은 명령 하달하는 데만 하루는 걸렸는데말이죠.. 멍청한 프랑스)

북부 집단군에게 있어서 최종 목표는 레닌그라드였는데, 이 레닌그라드까지 진군하기 위해서는 두 번의 도하작전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강은 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당시 쾨니히스베르크, 즉 동프로이센)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흐르는 강인 네만 강(Neman)이었고, 두 번째 강은 라트비아를 가로지르는 드비나 강(Dvina, 現 다우가바, Daugava)이었죠. 도하 작전이라는 것은 늘 골치아픈 일입니다(이때 쓸려나간 공병들에게 잠시 애도의 묵념). 
실제로 서부 전선에서 스당 돌파시도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들 중 하나가 이 도하 문제였는데, 동부 전선이라고 강 위를 걸을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문제는 어느 정도 똑같은 셈이라 볼 수 있죠.

그래서 다리를 파괴/사수하는 게 지엽적인 항공작전에서 분수령이 되고는 했는데... 
독일군이 시작부터 대규모 항공군을 띄운 것도 띄운 거겠습니다만, 특히 비행장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타격한 탓에, 전 전선에서 소련군은 6월 22일 오전에만 무려 1,200대의 항공기를 잃어야 했습니다(<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79). 때문에 전쟁 초기 며칠간 제공권을 잃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첫 도하는 어이없을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특히나 경악스러운 것은 폰 만슈타인의 진격 속도였는데, 단 하루 만에 무려 70 km를 진군해 버립니다. 적의 저항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군대에서 행군해 보신 분들이면 더 놀라실 겁니다. 그냥 40km걸어도 디지겠는데 심지어 적의 영토에서 적군의 저항을 받으면서 70km...?)

허나 소련군이 무능햇어도 전부 다는 아니였는지(임진왜란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어딜가나 시대를 거스르는 명장은 있기 마련이죠.)북서 전선군의 사령관이었던 쿠즈네초프는 제3기계화군단(제11군 소속)과 제12기계화군단(제8군 소속)을 뒤로 물리면서 독일의 제4기갑군단을 상대로 적의 옆구리를 치는 계획을 구상했고, 그 반격지점으로 선택되어 집결하던 곳이 바로 라세이니아이였던 것이죠.

당시 이 전투에 참가했던 독일&소련 측 전력입니다.

독일군
 제41기갑군단
  제1기갑사단 예하 145대 (2호 전차 43대, 3호 전차 71대, 4호 전차 20대, 지휘차량 11대)
  제6기갑사단 예하 258대 (2호 전차 53대, 3호 전차 167대, 4호 전차 30대, 지휘차량 15대)
 제56기갑군단
  제8기갑사단 예하 212대 (2호 전차 49대, 체코산 38(t) 118대, 4호 전차 30대, 지휘차량 15대)

소련군
 제12기계화군단
  제23전차사단 예하 381대 (이 중 T-26 362대)
  제28전차사단 예하 314대 (이 중 BT 236대, T-26 69대)
  제202차량화소총사단 예하 105대 (이 중 T-26 66대)
 제3기계화군단
  제2전차사단 예하 252대 (이 중 KV-1 32대, KV-2 19대, T-28 27대, BT-7 116대, T-26 19대)
  제5전차사단 예하 268대 (T-34 50대, T-28 30대, BT-7 170대, T-26 18대)
  제84차량화소총사단 예하 149대 (BT-7 145대, T-26 4대)

물론 전선의 규모가 규모였던지라 이 많은 전차들이 죄다 뒤얽힌 건 아니지만, 상당수의 전차들이 라세이니아이 인근에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의 제6기갑사단과 소련의 제12기계화군단이 얽혔는데, 전술의 미비점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당한 탓에 개활지의 소련군 전차는 융커스 사의 Ju 88 중폭격기의 아주 쉬운 먹이감이 될 뿐이었죠. 이 때문에 전투 당시 전력차는 세 배 가까이 났는데도 불구하고(독일군 245대 / 소련군 749대) 독일군의 손실은 경미했고, 외려 소련 전차사단의 전력의 90% 이상이 날아가는(손실만 704대, 이 정도면 국군 전차량 절반인데 말이죠....)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기갑 전력차가 크기는 했는데, 독일군은 최전선에 있던 전력은 꽤나 제대로(생각보다는?) 파악하고 있었던 참이라(<제2차 세계대전 : 탐욕의 끝, 사상 최대의 전쟁>) 그 점은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완전히 소련군이 눈 뜨고 '개박살'이 났던 건 아니었던 게, 바로 여기에서 그 유명한 KV쇼크의 한 장면이 나오거든요. 여기서는 《German Tactics on the Eastern Front》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하겠습니다.( 책이 좀 오래 된 걸 감안하셔야합니다;; 제가 본 자료는 2013년도 개정판인데, 이거 초판이 미 육군소장 오를란도 와드가 1953년에 쓴 책;;)

네만 강의 지류인 드비사 강(Dubysa)이라고 있습니다. 이 강을 건너기 위해 제6기갑사단이 진군하고 있었습니다만, 웬 KV-2 한 대가 가는 길목에 대고 대놓고 탁 막아버린 거죠.(후에 보시면 압니다만 이 놈.. 삼국지 장비입니다;;)
하필이면 이게 교량 방면으로 향하는 유일한 보급선이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러시아는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리 사회 기반 시설, 소위 말하는 인프라가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우회로 같은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던 거죠. 우회 생각을 안 한 건 아닙니다만은, 이게 죄다 진창으로 빠져버린 터라... 한 번 진창에 빠진 병력은 뭐 말할 것도 없이 인근에 있던 소련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죠.

게다가 당시 독일의 인근 사령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아무래도 인지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 다음날 12대의 보급트럭을 보내려고 시도하다가 이 단 한 대의 KV-2에게 죄다 박살나고 맙니다. 이에 일이 점점 심각해지자 다음날 독일군은 5.0 cm 대전차포를 동원하는데, 제법 위장도 잘 하고 사격 거리도 600 야드(약 550 m)였던데다가 명중까지 했는데도, 얼렐레? 이 KV-2가 터질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외려 여덟 발이나 쐈기 때문에 결국 위치가 노출되어서 76 mm 포에 얻어맞고 문자 그대로 "조용해졌죠". 그러자 독일의 입장에서 그야말로 전장의 신이라 할 만했던 8.8 cm 대공포, 일명 아흐트아흐트까지 동원되었지만 이들조차도 KV-2를 박살내는 데 실패했습니다.(대체 이런 놈들 가지고 왜 진거야...)

그야말로 빡칠 대로 빡치기도 했고 선봉대의 보급물자가 다 떨어져 가던 판이라 절박했던 독일군은 공병 중 지원자를 받아서 아예 KV 전차에 폭발물을 붙이고 튀는 작전까지 동원했지만, 이것마저도 실패합니다. 
이도 저도 방법이 없자 결국 항공동원을 요청하지만 하필이면 공군은 이 때 무진장 바빴던 터라 이런 곳에 전력을 나눌 여유 따위는 없었고(당시 공군 입장이 단 1대의 전차때문에 루프트바페를 동원할 순 없다! 였습니다), 짜증이 날 대로 난 독일군은 전차 몇 대를 미끼로 던져주면서 그 틈에 8.8 cm 아흐트아흐트가 전차 뒤편으로 우회해서 사격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 방법은 결국 먹히긴 먹혔습니다만, 다섯 발을 쐈는데 죄다 명중하고 KV가 크게 박살나긴 했지만 불이 붙지는 않았다는 게 더욱 황당할 노릇이었죠.(본격 독일군 kv레이드 아 딜러님;; 딜 안하세요?)

나중에 독일군이 잠잠해진 전차에 다가가서 상태를 살펴보니, 공병부대의 거의 반쯤 자살돌격성 폭탄 설치 및 발포의 결과는 단지 포탑과 궤도가 약간의 손상을 입은 것뿐이었고, 그 수많은 포들 중에서 전차의 장갑을 뚫어낸 것은 아흐트아흐트 단 두 발이였습니다. 그나마도 조용해졌다 싶어서 다가갔더니 여전히 포탑이 살아 있던 터라 이게 회전하기 시작하니까 황급히 구멍 뚫린 곳으로 수류탄을 던져 내부 승무원을 폭사시키고서야 마침내 잠잠해졌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이틀. 그러니까, 단 한 대의 KV-2 전차가 독일군의 도하 및 보급을 무려 이틀이나 늦춘 것이죠. 이걸 <모에! 전차학교> 제3권에서는 한 컷으로 정리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하지만 나중에 이게 kv-2가 아닐 수도 있다곤 하지만요)

"아 그게, KV-II, 진짜로 딴딴한 녀석이라." - 힐데가르트 카일

비록 전차 1대론 상상할 수 도 없는 전과지만... 대국적으로 보면 전혀 작전을 굴리는데 지장은 없었던 터라(이게 큰 지장이였으면 죄다 kv-2같은 놈들만 뽑지 다른 병기가 왜 있겠습니까)독일군은 거침없이 진군합니다.
게다가 독일 항공군의 대공습으로 90%의 기갑 전력이 날아가자 제아무리 KV를 다수 보유한 소련군이라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고, 첫 번째 강은 이미 돌파당했으니 소련군 입장에서는 두 번째 강(드비나 강)에서 반격을 기도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은 제8군은 리가 방면으로, 제11군은 빌뉴스 방면으로 군을 물리면서 북서 전선군 소속 제27군 및 스타브카(Stavka, 소련군 최고사령부. 이거 약자가 아닙니다.) 소속 제22군과 조우, 반격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스타브카 직속으로 편성된 제21기계화군단을 보내서 나름대로 독일 전차들을 상대하고자 했죠.

그런데 말입니다? 6월 26일에 강에 먼저 도달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던 제56기갑군단이었습니다. 더구나 이게 무슨 뭐 어디 캅카스 정상에 깃발 꽂았다던지 모스크바 첨탑을 쌍안경으로 구경했다던지 하는 설레발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완벽하게 다리를 장악해버리고 나머지 독일군의 도하를 기다리느라 진격을 멈춘 것이었다는 게 문제였죠. 어중이떠중이 수준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제대로 된 시기에 제대로 된 일격을 제대로 얻어맞은 격이었던 거죠. 이 때문에 도하를 저지하면서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겠다는 스타브카의 계획은 삽시간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게, 쾨니히스베르크(現 칼리닌그라드) 쪽의 現 러시아 리투아니아 국경부터 드비나 강까지 직선거리만 280 km 가량이 되고, 실제 사단이 이동한 거리는 대략 320 km 정도라는데(이게 불분명하긴 합니다만은) 어쨌든 적게 잡아도 하루에 최소 70 km는 이동한 수준이거든요. 말이 70 km지, 아무리 기갑군단이라고 해도 어디 이들이 전차로만 움직인답니까? 기름 넣어야지, 보급 넣어야지, 만나는 적들 모조리 쓸어가면서 앞으로 헤쳐나가야지, 소련의 인프라는 엉망이지(라스푸티차.. 물론 이 시기엔 안일어납니다만 잘 아시죠?)하루에 70 km(그나마 이것도 최소입니다;;)라는 이동거리는 고대에 비해 크게 복잡해진 현대의 군에 있어서는 정말 어려운 것이거든요. 
그걸 하루도 아니고 무려 나흘 동안이나 진격 속도를 유지한 겁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턱이 빠질 수준이죠(이런 놈들이 득실득실 했던 동부전선 인데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길 롬멜이 있었으면 동부전선이 달라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십니다;;). 하긴, 그러고 보니 폰 만슈타인의 자서전 제8장이 바로 이 시기의 자신을 다루고 있는데, 챕터 제목이 아주 볼만합니다... "Panzer Drive".(사실 이 것 때문에 제가 브금을 판처리트로 했죠 크크크)

좌우지간 결국 스타브카는 그나마 후퇴 중이었던 제8군과 제11군을 레닌그라드까지 쭉 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후퇴가 좀 유별나다는 걸 다른 전선군과 비교해 알 수 있습니다. 
중부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 일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후퇴불가 현지사수 방침이 내려지면서 어마어마한 수의 소련군이 포위 섬멸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컨대 키예프에서만 무려 67만 명이 문자 그대로 "지워졌죠"(참고로 지금 이 시간에도 국토방위를 하신 국군장병 여러분들이 총 60만명 정도 됩니다.......). 그 왜 태평양 전쟁에서 제대로 피를 보는 바람에 체스터 니미츠가 성심성의껏 유족들에게 편지를 써서 전달해야 했던 그 타라와 전투라고 있습니다.
거기 사상자가 미군 측만 따져서 3천 8백 명입니다. 적지는 않았습니다만(그리고 이걸 가지고 고작이라고 하면 전체주의를 상대로 피를 흘리며 죽어간 분들에게 엄청난 모독이죠), 단 한 번의 키예프 전투에서 "소멸되어 버린" 사람의 수는 두 자리나 다른 수였습니다. 이어 민스크, 스몰렌스크 등지에서 줄줄이 박살나면서 병력 손실은 이미 2백만을 돌파해 버렸죠.(참고로 한국전쟁 3년 통틀어 총 전사가 200만명인데.... 전투 몇번으로 이걸;;)

그런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은 무리하게 방어하려다가 포위섬멸되어 개발살 경우가 대부분인데(단,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소련군이 그야말로 모랄빵 상태에 빠져서 더욱 손쉽게 무너졌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북
서부 전선군은 그렇지 않았다는 게 특이하죠. 분명히 스탈린이 냅다 화를 내기는 했겠지만, 실제로 이 시점, 7월 3일에 이 북서 전선군의 대패의 책임을 물어 쿠즈네초프가 해임되고, 사령관이 표트르 페트로비치 소벤니코프 소장으로 교체된 뒤( 1성장군입니다. 우리로 치면 준장이 3군사령관을 맡은 격) 내린  후퇴로 북서 전선군은 병력의 일부나마 보존할 수 있었고, 최대한 북부 집단군의 진격을 늦추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할 수 있었으며, 그 귀중한 시간을 벌어 레닌그라드의 방어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만일 여기에서 북서 전선군이 죄다 포위, 섬멸당했다면 가뜩이나 기적적으로 버텨낸 레닌그라드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래서 (라세이니아이 이후 별반 큰 전투 없이 죽죽 밀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후퇴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구요.

다만 이건 어쨌든 결과론이고... 어쨌거나 당시 상황으로서는 드비나 강을 지키지 못한 건 못한 거라, 결국 소련군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제공권 등의 문제로 개활지에서 싸울 수는 없던 노릇이라 별수없이 한참을 쭉 밀려나야 했습니다.

(당시 북부집단군 진격을 나타낸 gif입니다.)
나머진 다음 기회로 미루죠(더 하면 스압이 사망수준입니다.)

후 전선이 동결된 북부집단군이 이 수준인데 중부,남부 집단군에 청색작전까지.....
아버지 빛이 보이지 않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 참 혹시 몰라 이전 글들 링크 올려두겠습니다
독소전쟁-인계에 강림한 지옥(프롤로그)
독소전쟁-인계에 강림한 지옥(프롤로그)그 두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