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물론 전 자료의 바다에 빠졌었지만...)
생각치도 못한 핫한(?)반응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재밌게 봐주시는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죠

(언제나 그럴듯 브금과 함께하면 몰입감이 2배?!)

북부 집단군은 시작과 함께 많은 항공지원을 받으면서(그들의 적 미국의 느낌이 날 정도) 꽤나 성공적으로 진격해 나갑니다. 전차 대수로만 치면 약 1 : 3의 전력차가 나는 상황이었지만 초반에 제공권을 독일측이 장악하면서 수많은 전차들은 죄다 독일군의 맛좋은 먹이감이 될 뿐이었고(후에 공군력을 상실한 독일군은 서부에서 오질나게 쳐맞습니다.)
 때문에 반격을 위해 집결했던 라세이니아이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경미했으며 소련군은 집결한 전차의 90% 이상을 잃는 대패를 당합니다. 

그리고 소련군에게는 별수없이 후퇴 명령이 떨어지죠. 헌데 에리히 폰 만슈타인 보병대장(중장급)이 이끄는 제56기갑군단은 4일 만에 최소 280 km를 돌파하는 엄청난 돌파력을 선보이면서 후퇴하던 소련군보다 더 빨리 드비나 강에 도달, 이 강까지 후퇴하여 방어전을 치르려던(후에도 독일군은 소련군의 후퇴속도보다 빨리 진격하여 경이로운 전과를 냅니다.) 소련군의 작전계획을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이 때문에 (전 글엔 아마 언급이 없었을겁니다) 북서 전선군의 우익(발트 해 방면)을 맡던 제8군이 드비나 강에서 적을 막을 준비를 하면서 좌익인 제11군은 빌뉴스에서 시간을 번다는 계획이 모조리 뒤엎어지고, 제8군이고 제11군이고간에
 모조리 쭉쭉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다만 후퇴하는 과정에서 독일군도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을 만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는데, 단 하나의 KV-2 전차가 무려 이틀 동안이나 제6기갑사단의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죠. 전차 단 한 대를 상대로 항공지원을 할 수는 없던 노릇이라(당연하죠.. 전차 1대 잡겠다고 전력을 빼 줄 병신은 없습니다.)  별 짓을 다 한 결과 간신히 뚫기는 뚫었지만, KV-2가 하루 정도만 더 버텼다면 정말로 앞쪽의 선봉대는 보급품이 다 떨어져서 맛이 갈 형편이었죠.ㄴ 여하간 이틀간 벌어진 이 활극은 독일군이 소련군의 뛰어난 기술력을 조우하는 일화로 유명해집니다.(사실 이것보단  때삼사 쇼크가 더 유명하긴 한데 그건 외전 격으로 따로 빼서 설명드리죠)



6월 26일 ~ 6월 30일 : 라트비아 [
좀 짜증나는 일이지만, 이 일대의 전투 기록은 러시아 어 위키백과에만 몇 개의 문서로 서술되어 있습니다.(자료가 방대할 것 같은데 찾아보면 의외로 잘 알려진 전투말곤 없습니다.) 그나마도 격돌한 양측의 병력 규모까지는 나와 있듯이 포인트 별 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라세이니아이 전투가 종결된 것이 6월 27일이고, 만슈타인이 강에 도달한 것은 6월 26일. 일단 만슈타인의 부대는 다리를 지킬 겸하여 동료 부대가 진군해 올 때까지 며칠간의 휴식을 취합니다.

(구글 지도입니다.. 지도를 보면서 설명드리는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일단 드비나 강(혹시나 현 드비나 강과 헷갈린 분들도 계실텐데 지도에 있는 리가와 오그레란 도시 사이의 물줄기 같은 거 보이실텐데 저겁니다. 지금은 다우가바 강이라 불립니다.) 북쪽에, 현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가 있습니다. 당연히 독일군으로서는 잡고 가야 할 도시였죠.  만슈타인의 부대는 기갑군이었고, 당연히 보병보다 속도가 빨랐으며, 따라오는 보병은 적의 병력을 소탕해 가면서 진군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폰 만슈타인이 강에 도달한 것이 6월 26일인데, 드비나강 서남부의 옐가바(Jelgava)를 게오르그 폰 퀴흘러 휘하의 제26군단(사령관 알프레드 보드리그 포병대장)이 점령한 것이 그보다 3일이나 늦은 6월 29일이었던 겁니다.

한편 제1군단(사령관 필리프 클레펠 기병대장)은 그보다 꽤 동쪽에 있는 야운옐가바(Jaunjelgava, 리가 동남동쪽 약 60 km) 교두보를 점령하면서 본격적으로 리가 공략전이 시작되었죠. 이 때 소련군은 그보다도 더 동쪽에 있는 예카필스(Jekapils, 리가 동남동쪽 약 110 km)의 방어에도 실패하면서, 제41기갑군단(당시 명칭은 차량화군단) 의 돌파를 막지 못하자, 포위 섬멸당해 죽기 싫으면 리가에서 병력을 물려야 할 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죠. 독일군이 리가를 점령한 것은 6월 30일의 일입니다.

리가가 이렇게 점령당하는 동안 라트비아의 항구도시인 리예파(Лиепаи, 現 리에파야, Liepaja)에서는 1만 1천 명의 소련군의 병력이 완전히 전멸당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전쟁 전의 상황을 잠시 설명드려야겠군요.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다(Kleipeda)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메멜(Memel)입니다만, 독일이 리투아니아에 압력을 넣어 메멜을 할양하도록 강요했고, 힘없는 리투아니아는 별수없이 도시를 갖다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 리투아니아가 소련군에 점령당한 이후에도 메멜은 당연히 독일 측에 남았고, 이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일 라트비아 서쪽 해안 영토는 그대로 독일군의 진격을 첫 번째로 받아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항구도시가 리예파였던거죠. 항구였기 때문에 발트 해 함대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지만, 독일군의 장기인 측면돌파와 이어지는
포위섬멸 공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독일군도 격렬한 소련군의 저항을 맞아 꽤나 고전했지만, 소련군은 문자 그대로 전멸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후방도 대략 정리되고, 리가도 점령했고, 7월이 되자 독일군의 북진이 시작됩니다. 리가와 예카필스에서 깨지고 다우가프필스(Daugavpils)가 자동으로 독일군 손에 들어가자 소련군은 쭉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는데, 이렇게 되자 독일군의 눈에 한 도시가 들어오게 됩니다.

7월 1일 ~ 7월 9일 : 프스코프 공방전

 리가나 리예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전략적인 중요 지점이 바로 이 프스코프입니다.
6월 30일에 성공적으로 리가를 접수하자 북부 집단군은 전군에 하루의 휴식을 내린 뒤, 이어서 7월 2일에 진군을 개시합니다. 리가 - 예카필스 - 다우가프필스로 이어지는 북부 집단군의 전선에서 동익(東翼)을 담당하던 것은 제4기갑집단군이었는데,이 집단군이 다음 목표로 설정한 게 프스코프였습니다. 왜 여기를 쳤냐구요?
 이건 지도로 보는 게 이해하기 빠릅니다.(나와라 지도 얍!)

보이시나요? 프스코프 북쪽으로 웬 호수가 1개 떡하니 있는데,  이 호수가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국경에 딱 박혀 있죠. 그 호수 북쪽으로 좁은 회랑이 나 있구요. 바로 이 때문에, 프스코프를 점령할 경우 독일군이 얻는 이점은 다음과 같이 압축됩니다.
1) 프스코프만 통과하면 별 저항 없이 레닌그라드가 코 앞.
2) 나르바 방면의 좁아터진 회랑으로 에스토니아에서 후퇴할 적의 이동을 강제할 수 있음. (단, 제해권을 독일이 쥐고 있다는 가정하에만 성립됩니다. 핀란드 만의 제해권이 소련에게 있을 경우 탈린 등에서 레닌그라드의 항구로 병력을 수송할 수 있습니다. 그 역도 가능하죠.)
3) 따라서 최대한 빨리 레닌그라드로 진격한다는 가정 하에, 에스토니아에서 후퇴할 적을 후방에서 포위 및 섬멸하기 용이해짐(후퇴하는 길이 좁아터진 상황이야말로 기다리고 있는 독일군에게 가장 좋은 상황이죠). 적이 에스토니아에서 후퇴하지 않을 경우야 말하는게 입 아플 정도죠. 적의 포위 섬멸이 가능합니다
4) 에스토니아 방면의 소련군과 러시아 서남부의 소련군 사이의 연락을 차단, 손발이 서로 맞지 않도록 뒤흔들어버릴 수 있음.(쉽게 말해 각개격파가 가능해진답니다)

다른 거 다 제쳐두고서 1번과 4번이 커서, 프스코프에 독일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거죠. 가뜩이나 독소전 발발 이후에 틈이 벌어지는 통에 손발이 맞기 힘들었던 소련군 제8군과 제27군은 프스코프가 독일의 손에 떨어질 경우 아예 따로 놀아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바로 각개 격파와 직결되는 문제였죠.

하지만 보통 이런 요충지는 스탈린그라드 뺨치게 혈전이 있을것 같은데 실상은 별 거 없었습니다.
당시 북서 전선군의 총참모장이 훗날 기갑전의 대가로 명성을 떨치는 그 유명한 니콜라이 표도르비치 바투틴 중장(2성장군, 물론 이 때 당시)이었는데, 제11군 예하 제41소총군단에 강을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하필이면 독일군의 빠른 기습으로 요새 지대를 내준 탓에 반격은 아무런 소득이 없이 끝납니다.
 여기에 전열을 가다듬은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공격을 재개하자 별수없이 이들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 명령이 꼬이면서 그나마 이전까지는 그런대로 조직력을 갖추면서 후퇴하던 소련군이 이번 프스코프 공방전 후에는 거의 무질서한 상태로 무작위로 후퇴하기 시작했고(이런 상태에서 저항하면 현리전투 꼴 나기 딱 좋죠), 단 일 주일 만에 프스코프가 함락되었으며(7월 8일), 그 결과 졸지에 레닌그라드가 풍전등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무질서한 후퇴의 책임을 물어 당시 후퇴하던 제41소총군단의 지휘관이었던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소부츠키 소장과 제118소총사단(7월 1일부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에는 목록에 없습니다)의 지휘관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글로바츠키 소장은 군사 회의에 회부되었고(뭐 어찌 할지 감이 잡히시죠?), 글로바츠키 소장은 총살형을 당했으며, 코소부츠키 소장은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42년 10월이 되어서야 복직됩니다.

다만 독일군으로서도 가뜩이나 기갑군 자체가 시가전에 약해빠진데다가(이는 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처절히 증명됩니다.)무작정 진격했다가는 측면이 위협을 당할 요소가 컸기에, 주변부(에스토니아)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 결과가 바로 탈린 전투입니다.

7월 10일 ~ 8월 29일 : 탈린 공방전

음... 사실 탈린 공방전의 개 일은 8월 5일입니다.
 즉 프스코프 점령으로부터 못 해도 3주, 대략적으로 보면 약 한 달 가량의 기간이 붕 뜨는데, 이 동안에 뭘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기는 합니다만, 이 때의 자료들을 읽어보면 그냥 탈린까지 차근차근 진격해 오고 있었다고 보면 될겁니다. 저항이 크지는 않았지만(어디까지나 독소전 전체에 비해서입니다.) 없던 것도 아니었고, 독일군의 병력도 어느 정도는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8월 5일에 탈린 외곽에 독일군이 도달하고, 공격을 준비하고, 8월 7일에 도시를 완전포위한 후 섬멸전에 돌입한 겁니다.

무엇보다도 여기를 제대로 접수해 놓지 않으면 소련군이 핀란드 만을 통해 병력을 수송해서 후방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후방에 적이 있으면 골때리긴 합니다.)배후의 적을 두고 공격한다는 것은 상당한 무리(라고 순화시켰지만 사실 대가리 총 맞은 놈 아니고서야 절대 못그러죠.)이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적을 섬멸해 나가기로 결정한 것이죠.

어마어마한 양의 항공지원과 포대 및 전차의 지원 속에서 독일군이 탈린에 무자비한 포격을 가했지만, 소련군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탈린 항에 기항하고 있던 수많은 함선이 함포 사격을 함으로써 적의 포화에 대응했고, 그런 덕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려 4개 사단, 6만 명의 병력이 밀집된 독일군을 상대로 기적적으로 보름 가량을 버텨낼 수 있었죠. 그러나 기나긴 소모전은 보급이 거의 불가능한 소련군에게 있어8 위한 돌파시도가 있었지만, 당장 프스코프가 떨어진 마당에 가만히 있다가는 죽는 걸 아는 소련군이 뻔히 얌전히 있어 줄 리 만무했고, 이 때문에 7월 15일에는 병력을 쥐어짜낸 소련군의 카운터어택을 얻어맞고 독일군이 전선을 30 km나 뒤로 물려야 했죠. 독일군이 전열을 가다듬은 후 일 주일이 지난 7월 22일에야 돌파가 이루어지면서 소련 제8군과 탈린의 병력을 성공적으로 갈라놓을 수 있었고, 소련 제8군 예하의 제11소총군단을 며칠 후 전멸시킨 후에야 탈린 공격이 가능했던 겁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독일군의 항공 지원은 없다시피했죠.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는데, 탈린에서 이렇게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면서 시간을 끝내 번 결과, 독일군의 진격이 두드러질 정도로 느려졌다는 겁니다. 8월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에스토니아를 정리할 수 있었고, 여기에 상당수의 병력이 투입된데다가 후방의 위협을 두고서 진격할 수 없었던 속사정 때문에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시점까지 덩달아 늦춰진 것이죠.(이렇게 처절한 저항으로 전황이 바뀐 경우가 앞으로도 왕왕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탈린그라드죠. 만약 세바스토폴에서 독일 11군이 그렇게 처절하게 희생을 치루지 않고 원할히 점령했으면 천왕석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을거고, 그랬다면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 수중에 떨어질 확률이 거의 100%에 육박합니다.)

그리고 탈린 공방전이 개시되기 직전에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목에 있는 킨기세프(Ки́нгисепп, 탈린에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목)와 루가(Лу́га, 프스코프에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목)에 다량의 병력이 증원됩니다. 이들도 결국에는 밀려나지만, 이들은 시간을 벌면서 가뜩이나 병력 충원 문제로 골치를 썩는 독일군에게 계속되는 출혈을 강요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8월 6일 ~ 12월 5일 : 레닌그라드

앞서 프스코프를 점령했던 제41기갑군단은 드디어 8월 6일에 레닌그라드 방면으로의 진격을 개시합니다. 헌데 이 과정에서 하필이면 날씨가 완전한 악천후였기 때문에 항공지원이 불가능했고, 결국 소련군의 강력한 저지에 가로막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소련군이 밀려나기는 합니다만 무려 열흘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는 가뜩이나 진격이 늦어서 골머리를 앓던 독일군의 애를 더 태우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독일군은 9월 1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레닌그라드 인근에 진입합니다. 일부 레닌그라드 인근에 빨리 도달한 군대가 있어 포격 자체는 8월 20일에 시작되었습니다만...

(당시 진격 속도입니다.. 초반의 그 무지막지한 속도는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점차 감소하는게 눈의 확 띄일정도... 그 만큼 소련군은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정말 처절하다고 밖 엔 설명 수 없을 정도로 저항했습니다.)

이 때 중부 집단군의 제9야전군 소속 제50군단(2개 보병사단)이 북부 집단군으로 차출되어 제16야전 휘하에 편입됩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이번에는 북부 전선군과 맞닥뜨려야 했죠.

당시 전투 서열입니다. 독일군의 경우 앞선 글에 언급한 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기 때문에 패스하고, 북부 전선군의 전력만 이야기하면...

북부 전선군 - 사령관 포포프 중장(2성 장군)
 제7군 - 2 소총사단, 1 민병사단, 1 해병대여단, 1 전차연대, 3 차량화소총연대
 제8군 - 7 소총사단 (원래 북서 전선군 소속이었는데 이리로 편입된 겁니다)
 제14군 - 4 소총사단
 제23군 - 5 소총사단, 1 차량화소총사단
 루가 작전군 - 3 소총사단
 킨기서프 작전군 - 2 소총사단, 1 민병사단, 1 전차사단
 직속 3 소총사단, 4 방위민병대사단


이 중에서 무르만스크 방어에 차출된 제14군과 카렐리야 방면의 방어에 투입된 제7군은 레닌그라드 방어에 참여할 수 없었고, 때문에 스탑카에서는 북부 전선군을 카렐리야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으로 나눕니다. 처음에는 북부 전선군의 사령관이었던 마르키안 포포프 중장이 계속해서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사령관을 맡았는데, 9월 5일에 보로실로프로 교체되었고(물론 실권은 없었고, 실제 방어 작업은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인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수행했습니다), 열흘 후 곧이어서 등판한 것이 그 유명한 게오르기 주코프입니다.(지금부터 이 양반의 전설이 시작된다 할 수 있죠.)

일단 독일군이 진격하는 과정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철도망이 모두 박살난 후, 때마침 겨울전쟁에서의 패배로 이를 갈던 핀란드군과 협력해서 드디어 9월 8일에 레닌그라드가 포위됩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혹한 전투인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개시되죠.(무려 900일동안입니다.. 전투 1개가 이렇게 긴 거 보셨나요? 그 입이 떡 벌어질 기간 만큼이나 피해도 막심합니다. 당시 300만 정도의 인구였는데 전 후 사상자를 추스려보니 도시 인구 전체의 1/3이라 하더이다........)

9월 21일에 이 레닌그라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히틀러와 사령관들의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냥 도시를 접수하는 것은 "식량을 제공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므로"(영문 위키를 보면 'because it would make us responsible for food supply'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뉘앙스 아시는 분 제보 부탁.....) 나가리, 따라서 아예 도시 전체를 굶겨죽이자는 미친 작전이 입안되고, 엄청난 공군의 폭격과 야포의 포격으로 도시 전체를 깡그리 박살내기 위한 움직임이 개시되었습니다. 

이보다 일 주일 전인 9월 14일에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사령관으로 게오르기 주코프가 임명되었는데, 이 때 이미 50만 명에 달하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공산당의 지휘 아래 탈출한 상태였고, 거리마다 방어시설이 깔려 있었습니다. 여기에 주코프는 대공포를 대전차무기로 쓰라는 명령을 내렸고, 지뢰를 잔뜩 깔았으며, 탈린 공방전에서 살아남은 발트 해 함대의 포대까지 방어에 동원됩니다. 본래대로였으면 스탈린그라드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스탈린그라드를 뛰어넘었을, 건물 너머 건물로 이어지는 치열한 점령전이 벌어졌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독일군은 아예 레닌그라드를 굶겨죽일 심산으로 포위망을 강화했고, 이제는 전투가 아니라 포위가 되었죠.(이 때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여 중부집단군과 모스크바를 포위하여 진격했더라면 역사책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어찌됬건 당시 레닌그라드는 독일이 희생을 치룰 지 언정, 점령 불가능 도시는 아니였으니까요.)

그렇다고 독일군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했고, 때문에 의약품은 진작에 동나 버렸죠. 하루에 4천 명에서 5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심지어는 식인 행위가 벌어졌고, 가뜩이나 통제하기 힘든 상황에서 당국은 이 식인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을 없애고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즉각 사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야 했습니다.(마치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의 그것처럼)

그러나 11월에 호수가 얼고, 레닌그라드로의 보급이 소량이나마 기적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생명의 길"(Доро́га жи́зни, Doroga Zhizni, Road of life)이죠. 이 보급선이 없었다면 레닌그라드는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버티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죠. 무엇보다도 기진맥진한 시민들을 레닌그라드에서 무려 50만 명이나 빼돌릴 수 있었고, 내부의 방어를 담당하던 군대에 식량을 원조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이런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레닌그라드 노동자들이 모스크바 방어에 쓰일 대포와 박격포를 1천 문이나 만들어 냈으며, 이 무기들이 레닌그라드 밖으로 공수되었다는 것이죠. 계속되는 포위로 인해 12월에는 결국 공장의 가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런 지독한 굶주림 속에서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소련 노동자들의 투혼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기적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진짜 이 분들 아니였으면 지금 세계가 어찌 됬을까요.. 소련이 프랑스 처럼 초반에 손실에 놀라 항복했더라면...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주코프는 10월 5일에 모스크바로 발령이 났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의 위대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당국의 도움으로 레닌그라드를 탈출하여,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작곡하게 됩니다.(정작 레닌그라드에서는 1942년 8월에 가서야 연주됬다는 사실)


바르바로사 작전의 북부 집단군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끝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간과하면 안되는게 북부집단군 얘기 많아보이죠? 이게 3개 집단군 중 가장 자료가 빈약하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연재 포기할까.....)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지적&조언&질문 환영합니다!(쪽지, 댓글 언제든 달아주세요)

그럼 전 중부집단군편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리면 이만!

지난 글 링크
독소전쟁-인계에 강림한 지옥(프롤로그) 

독소전쟁-인계에 강림한 지옥(프롤로그) 그 두번째

독소전쟁-바르바로사 작전 북부집단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