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저야 뭐..... 노코멘트)
오늘은 불금입니다 다들 놀러가실 준비 하시고 그 전에 제 글 1번 읽고 나가주시면 감개무량할 것 같네요!
지금부터 무적 독일군이라는 신화를 태동시킨, 무려 전공(戰功)만으로 친다면 프랑스 침공을 아득히 능가한 주역들인
중부집단군을 얘기를 시작해볼까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스압 주의하시고 심호흡 한번 한 뒤 읽어주세요. 시작하겠습니다!

(브금과 함께하면 몰입감이 2배?!)
자 북부에선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시점으로 더 이상의 유동적 전선변화는 전무합니다. 이제 900일동안 벌어지는 처절한 레닌그라드 공방전만이 있죠. 
하지만 북부집단군은 결코 독일군의 주공이 아니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독일군의 주공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상식이 있다면 당연히 적국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부집단군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겁니다만..
자 그럼 일단 당시 전투서열을 한번 보도록 하죠.

독일군 전투서열
독일군 중부 집단군(Heeresgruppe Mitte) : 집단군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육군원수, 참모장 한스 폰 그라이펜베르크 소장(1성 장군, 독일군은 소-중-대-상급대장-원수 순으로 진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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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기갑집단군 : 사령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
  제5군단 : 사령관 리하르트 루오프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6군단 : 사령관 오토-빌헬름 푀르스테르 공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39차량화군단 : 사령관 루돌프 슈미트 기갑대장
   제7기갑사단 : 사령관 한스 폰 풍크 남작, 중장
   이외 예하 1개 기갑사단, 2개 차량화보병사단
  제57차량화군단 : 사령관 아돌프 쿤첸 기갑대장
   제12기갑사단 : 사령관 요제프 하르페 중장
   이외 예하 1개 기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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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군 :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 상급대장
  제8군단 : 사령관 발터 하이츠 상급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제20군단 : 사령관 프리드리히 마테르나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2군단 : 사령관 발터 쿤체 공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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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군 :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육군원수
  제7군단 : 사령관 빌헬름 파름바허 포병대장
   예하 4개 보병사단
  제9군단 : 사령관 헤르만 가이어 보병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제13군단 : 사령관 한스 펠베어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3군단 : 사령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보병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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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기갑집단군 :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
  제12군단 : 사령관 발터 슈로스 보병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제24차량화군단 : 사령관 레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남작, 기갑대장
   제3기갑사단 : 사령관 발터 모델 중장
   이외 예하 1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1개 전차사단
  제46차량화군단 : 사령관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상급대장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 : 사령관 파울 하우서 SS대장
   이외 예하 1개 기갑사단, 1개 보병연대 : 대독일(Großdeutschland)연대
  제47차량화군단 : 사령관 요아힘 레멜젠 포병대장
   제17기갑사단 : 사령관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중장
   제18기갑사단 : 사령관 발터 네링 중장
   이외 예하 1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사령부 직속 : 예하 1개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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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부 예비
  제53군단 : 사령관 발터 피셔 폰 바이케르슈탈 보병대장
   예하 1개 보병사단
  이외 예하 3개 주둔병사단
  이외 6월 26일부터 7월 1일에 이르기까지 6개의 보병사단이 추가 배치.

전체 보병사단 31 + 6개, 기갑사단 9개, 차량화사단 5개, 기병사단 1개. SS사단 1개

보시면 알겠지만 북부집단군이 정말 소규모 병력같이 보입니다. 전차 수는 무려 1,936대로 비교 자체를 불허하죠(참고로 북부집단군은 600여대). 3호 전차 수가 모자라서 상당 부분을 체코산 38(t)로 때우기는 했습니다만, 각 사단마다 반드시 들어가 있는 4호 전차는 2개의 전차사단이 4호 전차를 20대 배속받은 것을 제외하면 30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 내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성능이 좋은 전차였던 (티거가 등장한 것은 42년입니다.)4호 전차를 무려 259대나 보유(남부, 북부집단군 보다도 훨씬 더)하고 있던 중부 집단군은 명실공히 독일군의 주력이었습니다. 게다가 훗날 여러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헤르만 호트, 하인츠 구데리안, 발터 모델, 귄터 폰 클루게,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발터 네링, 파울 하우서 등등 라인업도 쟁쟁했죠.

아, 그리고 생뚱맞게 왠 2차대전기에 기병사단?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독일군 하면 이미지가 그렇죠? 좋은 전차를 몰고 적을 훌륭하게 사냥하면서 밀어붙이는 이미지가 대부분고, 게다가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군의 기갑부대에게 멍청하게 들이받았다고 프로파간다를 할 정도로(물론 얼마 전에도 관련 글이 오이갤에도 올라왔엇습니다만. 명백히 그들을 모욕한 선전물이죠.) 주장할 정도로 독일군 하면 전차, 전차 하면 독일군 하는 이미지가 매우 강합니다. 오죽하면 축구에서 전차군단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독일군에게 있어서 말이라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동물이기는커녕 매우 중요한 운송수단이었습니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죠. 뉘른베르크 재판이었을 겁니다.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독일군이 신경 가스(Nerve gas)를 쓰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긴 한 전략 및 전술 연구가가 뉘른베르크에 서신을 보내서 괴링에게 물어보았더니, 괴링의 답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뭐라 했냐구요?

"물자 운송을 말들이 하는데 그놈의 말들이 버티지를 못하더라고. 방독면을 씌워도 소용없더라니까."-by 괴링

그래서(아예 안 쓰인 건 아니겠지만)상대적으로 독일군은 화학전이라는 범죄에서는 꽤나 자유로운 편이었던 겁니다. 물론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전쟁범죄를 도배하다시피 한지라.... 
자 이번엔 상대하는 소련군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작전개시 당일의 전투서열 - 소련군

소련군 서부 전선군(Западный фронт) : 사령관 드미트리 그리고예비치 파블로프 육군대장, 참모장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클리모프스키 소장(소련군은 소-중-상-대 순서로 진급합니다.)
담당 구역 : 벨라루스
사령부 : 민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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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군 : 사령관 바실리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중장, 사령부 위치 : 그로드노
  제4소총군단 : 사령관 예브게니 아르센티에비치 예고로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11기계화군단 : 사령관 드미트리 카르포비치 모스토벤코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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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군 : 사령관 알렉산데르 안드레예비치 코로브코프 소장, 사령부 위치 : 코브린
  제28소총군단 : 사령관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포포프 소장(하리코프에서 기갑군을 날려먹은 마르키안 포포프와는 다른 사람)
   예하 4개 소총사단
  제14기계화군단 : 사령관 스테판 일리치 오보린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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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군 : 사령관 콘스탄틴 드미트레예비치 골루베프 소장, 사령부 위치 : 비아위스토크
  제1소총군단 : 사령관 표도르 드미트레예비치 루브초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5소총군단 : 사령관 알렉산데르 바실레비치 가르노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6기계화군단 : 사령관 미하일 게오르기예비치 하츠킬레비치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제13기계화군단 : 사령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아흘류스틴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제6기병군단 : 사령관 이반 세묘노비치 니키틴 소장
   예하 2개 기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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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부 직속 배치
  제2소총군단 : 사령관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예르마코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21소총군단 : 사령관 블라디미르 보리소비치 보리소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44소총군단 : 사령관 바실리 알렉산데로비치 유스케니치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47소총군단 : 사령관 스테판 이바노비치 포베트킨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4공수군단 : 사령관 알렉세이 세묘노비치 자도프 소장
   예하 3개 공수여단
  제17기계화군단 : 사령관 미하일 페트로비치 페트로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제20기계화군단 : 사령관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니키틴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이외 1개 소총사단, 다수 각종 여단 및 각종 항공대

확실히 뭔가 빈약헤보입니다.. 23개 소총사단, 12개 전차사단, 6개 차량화소총사단, 2개 기병사단, 그리고 전선군 직할 항공지원군단. 전차사단 수는 독일군에 비해 한참 모자랐고, 그나마도 오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전차를 갖추지 못한 사단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일례로 제10군 제13기계화군단 소속 제31전차사단의 전차 수는 불과 40대였는데, 이것은 같은 군 소속의 제6기계화군단 소속 제29차량화보병사단이 보유한 전차 수인 200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였습니다.

심지어는 벨라루스 일대를 모조리 서부 전선군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북서 전선군(17개 소총사단, 4개 전차사단, 2개 차량화소총사단)에 비하면야 이쪽이 규모가 크기는 했습니다만 그쪽은 히틀러고 스탈린이고 애초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 수를 그렇게 많이 잡지 않았었고... 물론 이 병력들이 독일군의 침략 당시에 눈뜨고 그냥 있는 병력은 아니었습니다만, 상대는 주력부대였다는 게 문제였죠.(상대 주공을 상대하는 병력이 이 정도니....)

이 서부 전선군 전체의 전차 수가 2,309대였는데, 앞서 지적했듯이 중부 집단군의 전차 수는 약 1,900대 가량. 수에서 약간 앞섰다고는 해도 문제는 제공권이 모조리 박살나고 전치 운용 교리가 뒤떨어져 있다는 점에선 완벽한 열세였습니다.

비아위스토크에서 민스크까지

바르샤바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브레스트(Brest, 프랑스의 노르망디 끄트머리의 브레스트와 구별하기 위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Brest-Litovsk라 쓰기도 합니다)를 거쳐 민스크 - 스몰렌스크 -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루트가 있고, 북쪽의 비아위스토크(Białystok)를 지나 리다(Lida)를 거쳐 민스크로 이른 후 스몰렌스크-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루트가 있죠. 어느 길을 선택하던, 민스크는 지나야 할 관문이었고, 민스크를 공략하려면 민스크 앞에 있는 병력을 잡아야 했습니다.

당시, 히틀러의 전략은 이랬습니다. 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모조리 잡아 족치면 동원 능력이 떨어지는(물론 이건 독일군의 엄청난 오판이었습니다)소련군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을 것이고, 그러면 나머지 점령지역은 힘 안 들이고 접수할 수 있다. 그렇게 한 이후에 슬라브 인들을 우랄 산맥 너머로 쫓아내서 알아서 살라고 하고, 독일은 비옥한 우크라이나 땅을 바탕으로 독일들이 살아갈 땅(이게 그 유명한 레벤스라움)을 건설한다.

따라서 최중요 목표는 무엇보다도 적의 병력 섬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군의 교리와 일맥상통했고, 그래서 전략은 이대로 수립되었죠. 그 첫 발을 비아위스토크와 브레스트에서 내딛은 것입니다. 

(출저는 무려 러시아 국방부;;)

잘 계획된 독일의 기습으로 제3기갑집단군과 제2기갑집단군을 양 주먹으로 하는 작전이 개시되었고, 순식간에 제10군이 포위됩니다. 소련군은 계획된 대로 반격명령을 내리지만 제대로 된 계획도 전술도 항공지원도 (시작부터 폭격을 얻어맞아서 최전선의 비행장이 거의 몰살된 상황이었습니다) 없었던 소련군의 반격이 성공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죠. 이 과정에서 6월 23일에 빌뉴스(당시는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에 삥뜯은 상태여서 빌노(Wilno)로 통했습니다)를 점령합니다.

서부 전선군 부사령관 볼딘 중장은 6월 24일에 제6, 제11기계화군단과 제6기병군단에 그로드노(Grodno) 방면으로의 반격을 명령합니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탈출하려는 움직임이었죠. 간신히 탈출에는 성공해서 민스크로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만, 계속되는 폭격과 포위 섬멸 시도로 인해서 제6기병군단의 전력은 절반이 소진되었고, 어느 전차사단은 탄약마저 바닥났으며, 또 다른 전차사단의 병력은 전차 3대(절대오타가 아닙니다)로 줄어 있었습니다(<독소전쟁사>, p. 83).

초기에 이 제6기계화군단과 제13기계화군단 및 제6기병군단에 편제된 전차 수가 1,411대였음을 생각해 보면, 서부 전선군 기갑전력의 60%를 날려먹는 큰 손실을 본 것이었죠. 
기병군단에 웬 전차냐 하실 수도 있는데, 당시 전차사단에 전차를 죄다 편제하기는 좀 모자랐던 소련군이 그 약점을 적당하게 커버하려고 연구했던 게 기병-기계화사단입니다. 기병의 기동력과 전차의 돌파력을 결합한 것이죠. 그 일환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아무튼 주력부대를 날려먹고 포위 섬멸당하기 싫으면 후퇴해야 하는 입장에서 6월 25일이 되자 계속해서 민스크 방면으로 후퇴하려고 시도했지만, 통신 장비와 수송 수단의 부족으로 많은 수의 병력들이 제때 후퇴하지 못하고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제10군이 포위, 섬멸됩니다.

이 과정에서 민스크로 가는 중요 관문인 바라노비치(Baranovici)가 넘어가면서 민스크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려버린 상황이 되어버렸고, 게다가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던 제3기갑집단군과 제2기갑집단군의 선봉대가 전쟁 개시 고작 5일 만에 민스크 동부까지 진격하여 적의 퇴각을 막아버리는 대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거리가 무려 321 km. 북부 집단군의 만슈타인만큼이나 정신나간 속도로 적을 외려 앞질러 간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6월 25일. 서쪽에 포위된 것은 소련군 제3군.)



6월 28일. 독일군의 전선은 민스크 동쪽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회색 바탕의 별표가 바로 민스크입니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민스크에 병력이 없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제10군이 비아위스토크에서, 제3군이 민스크 서쪽에서 포위당한 상황에서 사령부 직속 부대였던 제20기계화군단과 공수부대의 반격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6월 30일에 서쪽의 포위망이 닫히면서 민스크 일대에 남은 것은 철저한 소탕전이 될 뿐이었고, 이렇게 스탈린 스스로가 애착을 갖고 육성한 도시인 민스크가 어이없이 넘어갑니다.

민스크가 넘어가면서 스몰렌스크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고, 서부 전선군은 사실상 전멸했으며,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제대로 된 전투 없이 군을 물렸다는 이유로 여하 다른 서부 전선군 참모들과 함께(너무나도 당연히) NKVD에 의해 처형됩니다. 이들의 가족들조차 가혹한 운명을 겪어야 했고, 이들은 1956년에야 신원됩니다.

중장은 일부 병력과 함께 독일군 배후에서 보급조차 받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45일간의 사투 끝에 간신히 스몰렌스크 인근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시기의 소련에서 항전의 영웅이 됩니다.

 이는 독일군의 놀라울 정도로 빠른(소련군이 후퇴하는 것보다 독일군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는 이야기죠)진격 속도와, 병력의 차이로 인한 완벽하지 못한 포위망이라는 문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한 장면입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겨울전쟁 이후 한동안 총참모장으로 있다가 주코프로 교체되었던 키릴 메레츠코프가 뜬금없이 걸려드는데, 파블로프와 친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단 한 가지 이유로 인해서 메레츠코프는 NKVD에게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아야 했고, 그래도 그 때까지의 능력은 인정받아 간신히 목숨은 살아서 레닌그라드 전선에 복귀합니다.

여하간 이 결과, 34만 명의 소련군이 전사하고 7만 5천 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힙니다. 독일군으로서는 무시무시한 전과였죠. 여기에 소련군은 5천 대에 가까운 전차, 9천 대가 넘는 야포, 그리고 1,669대의 항공기까지 잃는 어마어마한 패배였습니다.


"적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 드미트리 파블로프, 서부 전선군 총사령관

모스크바행 고속도로

읽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두시면 좋은 것은, 어디에서 어디로 통하는 철도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면 진로 파악에 좀 도움이 됩니다. 왜냐고 물으시냐며, 대량의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데 있어서 내륙에서는 철도가 도로보다 우위입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지금이야 트럭 있고 APC(Armoured Personal Carrier) 있고 IFV(Infantry Fighting Vehicle) 있고 뭐 있고 기타등등 있고 물자는 풍요롭고(아, 근데 석유는... 어험;) 한 시대이니만큼 철도의 중요성이 예전보다 빛이 바랜 건 사실입니다만, 당시에는 트럭이 모자라서 후방의 병력이 전방으로 동원되지 못하는 경우도 속출하던 시대였으니 한 방에 잔뜩 병력을 옮길 수 있는 철도 쪽이 아무래도 유리한 면이 있었죠.

민스크에서 중부 집단군의 최종 목표인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것이 스몰렌스크입니다. 아예 개전 당시부터 차근차근 적어보자면, 브레스트 - 바라노비치(Baranovichi) - 민스크 - 오르샤(Orsha) - 스몰렌스크 - 뱌지마(Vyazma) - 모스크바 순이죠.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전투가 벌어진 순서를 보면 브레스트 - 민스크 - 스몰렌스크 - 뱌지마 - 모스크바 순으로 벌어지는데, 이게 괜한 우연이 아닌 겁니다. 나중에 가면 레닌그라드의 외곽 철도,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굼락, 쿠르스크에서의 포니리와 프로호로프카 등이 격전지로 떠오르는 것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자연적인 장애물이 적거나 없는 곳이라면 이런 곳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지게 마련이었다는 것이죠.

뭐 여하간... 그런 "모스크바행 고속도로"의 첫 관문인 민스크에서, 부대가 격파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전선의 구멍이 뻥 뚫린 상황이었으니 소련의 경악은 쉬이 예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파블로프가 처형됐죠. 죄목도 볼 만했던 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죄"였습니다. 하긴 국가의 명운이 걸린 판이었으니 그 정도 죄목이 붙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리고 이렇게 전선의 구멍이 뻥 뚫린 상황을 독일군은 놓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몸을 추스릴 여유를 주기 전에 계속되는 공격으로 이득을 점하려고 했고, 따라서 민스크에서 적을 정리하자마자 바로 스몰렌스크로 향한 공격을 개시한 겁니다. 민스크에서 스몰렌스크까지의 거리는 330 km. 이 거리는 전쟁 초기부터 민스크까지 독일군이 달려온 거리(340 km)와 비슷했고, 또 스몰렌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이르는 거리(400 km)와 비슷했습니다. 이런 만큼 스몰렌스크를 최대한 빨리 점령하면 모스크바가 코 앞에 다가올 것처럼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한편 파블로프를 총살대로 보낸 소련은 서부 전선군을 재편할 구원투수로 세묜 티모셴코를 올립니다. 그러나... 애초에 지적한 바대로 공군의 지원도 뭣도 없는데다가 주력군은 죄다 남서 전선군으로 몰려가버린 상황인데 티모셴코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겠습니까?(그럼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님은 대체.....) 그래서 이를 인지한 스타브카(Stavka)에서는 티모셴코에게 4개의 야전군, 즉 제19, 20, 21, 22군을 쥐어 주기는 했습니다.

사실 이는 독일군으로서도 약간 당혹스러운 이야기긴 했습니다. 왜냐면 독일군은 최전선의 전방 배치되어 있는 소련군을 박살내면 적의 동원 능력은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죠. 문제는 이 제19~22군은 전방의 패잔병을 긁어모아 재편성한 부대가 아닌, 아예 후방의 예비 군대였다는 겁니다. 분명히 최전선의 소련군을 깔끔하게 섬멸했는데 그만큼의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독일군의 수뇌부를 적잖이 당황시키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밀어붙이기가 시작된 이상,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어서 와 BOY~ 우리의 동원력은 한계가 없다구~)

스몰렌스크

본격적으로 스몰렌스크 공격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7월 3일의 전황도입니다.


지도 남동쪽에 나와 있는 건 중부 전선군(Central Front, Центральный фронт)인데... 기실 이 중부 전선군이 조직된 것은 7월 24일의 일입니다. 참조하시고... 하여간 지도의 붉은 바탕의 별은 스몰렌스크로 가는 길목상에 위치한 오르샤(Orsha)입니다. 스몰렌스크는 벨라루스와 러시아 국경을 넘어가야 나오죠. 
독일군 제16군은 폴로츠크(Polotsk, Полоцк)를 거쳐서 스몰렌스크 북쪽의 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 Великие Луки)로 진군하고자 했고, 제3기갑집단군과 제2기갑집단군은 스몰렌스크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스몰렌스크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북쪽의 비텝스크(Vitebsk, Витебск)에서 남동쪽으로 비스듬히 내려오는 길, 오르샤에서 정동쪽으로 진격하는 길이 그것입니다. 제3기갑집단군이 비텝스크로 이동하고, 제2기갑집단군은 오르샤를 그대로 돌파해 버릴 심산이었죠. 그리고 뜬금없이 후방에서 지원 부대로 달려온 소련군 제20군 소속의 제5기계화군단과 제7기계화군단이 북쪽의 비텝스크 방면에서 공격을 걸어옵니다.


군사용어로 파쇄공격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만, 이게 뭔 소리냐하면 특정 지점을 향한 적의 공격이 예상될 때, 적이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적의 조직력이나 통솔을 흔들어 적의 준비를 늦추는, 일종의 공격적인 방어가 그것입니다. 음, 이게 좀 사람들마다 이야기가 엇갈리는 것으로 압니다. 뭐가 엇갈리냐면, 공격을 걸어온 제5기계화군단과 제7기계화군단이 스탈린이 원한 전면적인 반격이었느냐 아니면 단순히 적의 진군을 늦추기 위한 것이었느냐 하는 건데...

정황상 유추해보자면(물론 제 뇌피셜;;) 제5기계화군단과 제7기계화군단이 시도한 것이 바로 이런 파쇄공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헌데 이 파쇄공격은, 잘 먹히면 효과적으로 적의 진군을 늦추거나 아예 진군 자체를 못 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 만에 하나 무리해서 꼴아박아버렸다가는 그대로 알아서 방어선을 뚫어 달라고 내주며 자멸하는 격이나 다름없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각개격파 당한 단 소리죠.). 그리고 이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대전차화망에 제대로 걸려들면서 공격은 아예 무위로 돌아가버렸고, 결과적으로 제5기계화군단과 제7기계화군단의 병력만 잔뜩 날려먹는 결과를 초래했죠.(결국 전선의 변화없이 그대로 애꿎은 소련병사들만......)




그리고 본격적으로 총공세가 개시됩니다. 
남쪽의 구데리안이 소련군 제13군을 박살내고, 북쪽의 호트가 파쇄공격을 받아치면서 서서히 스몰렌스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죠. 지도 남쪽을 보시면 일부 부대가 포위섬멸당할 운명에 처한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저 지역이 모길료프(Mogilev, Могилёв, 現 벨라루스의 마힐료우)입니다. 이 지역은 스몰렌스크와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습니다만(열차로 스몰렌스크로 가려면 오르샤를 거쳐가던가 스몰렌스크 동남쪽의 로슬라블(Roslavl, Ро́славль)로 우회해야 합니다),스크 동남쪽의 로슬라블(Roslavl, Ро́славль)로 우회해야 합니다), 스몰렌스크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갈 독일군의 배후를 지키기 위해 지켜야 할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포위 섬멸에 들어간 것이죠.

돌파가 계속되면서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군도 남쪽 측면의 일부가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걸 노리고 남쪽에서 일부 병력이 북쪽으로의 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공격은 제21군에 의해서 수행되었습니다. 비텝스크에서는 제19군과 제20군이 계속해서 반격을 시도했습니다만, 반격은 손해만 컸을 뿐 별반 소득이 없었습니다.

이 반격에 동원된 것이, 프스코프 방면의 북서 전선군의 일부와 코로스텐 방면의 남서 전선군의 일부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 전선에서 중부 집단군을 막기 위해 기획된 긴밀한 연계 작전이었습니다만, 워낙 이게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누구도 이게 소련군이 연계 활동을 통해서 반격을 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군요.(대체 이놈의 삽질 몇명이 더 죽어야.....)

7월 15일에 일부 부대가 스몰렌스크 동쪽에 들어가면서, 제29차량화사단과 제18기갑사단이 스몰렌스크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합니다. 민스크 때와는 상황이 약간 달랐습니다. 계속적인 전투로 전투력이 상당히 소진된 두 기갑집단군은 스몰렌스크를 완벽히 포위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백병전에 돌입한 것이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시가전은 전차에게 있어서는 지옥을 넘어선 무언가입니다. 

 결국에는 스몰렌스크에서 소련군을 밀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3일간의 격전으로 가용 가능한 전차가 사단 전체에 12대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죠. 어떻게 보면 전투력 소진 -포위 불가 - 백병전 - 전투력 소진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들 조짐이 보인 셈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공격측은 항상 공세종말점에 주의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그 때문에 적절한 정지와 보급이 필수인 것이구요.


전투력이 잔뜩 소진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구데리안은 여기에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스몰렌스크 점령 이후를 보자면 다음 목표는 모스크바와 스몰렌스크 사이에 있는 뱌지마(Vyazma)인데, 단일 방면에서 뱌지마를 공격할 수 있을 리는 없었고, 그래서 스몰렌스크 동쪽 측선을 보고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스몰렌스크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길을 보면 강을 몇 개 건너야 하는데, 스몰렌스크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병력이 지나갈 수 있는 교두보 노릇을 하는 작은 마을이 바로 옐냐(Yelnya, Е́льня)였습니다. 즉 여기를 확보해야 모스크바로 가는 차후 공세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죠. 문제는, 그러자면 스몰렌스크의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구데리안과 호트(제3기갑집단군의 사령관)는 옐냐로 나아가길 바랬죠.

이때의 전황을 잠시 살펴보자면


7월 25일. 예, 아주 아수라장이 따로 없습니다.

이 때 제16군에 전속된 것이 바로 앞선 남서 전선군에서 선전했던 로코소프스키였는데, 이 로코소프스키가 이번에도 독일군의 대폭격에도 불구하고 버텨내는 데 성공하면서 외려 지원군이 오면 뚫린 방어선이 메워질 수 있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구데리안의 부대에게 도시를 포위 섬멸하라고 명령이 떨어진 게 이 로코소프스키의 병력이 버티기에 들어간 이후 반격이 개시되기 일 주일 전이었는데(총통 지령 33호), 이걸 생각해 보면 저는 아무래도 이번에도 히틀러의 판단에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히틀러 혼자만의 판단은 아니었습니다. 중부 집단군 사령관인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 역시 적 전력의 물리적 섬멸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뭐... 사실 애초에 둘 다 잡을 수 없는 작전을 기획한 것 자체가 문제였죠. 커맨드 앤 컨커를 하다보면 제너럴 제로아워의 슈퍼무기 아줌마 알렉시스 알렉산더가 중간중간에 플레이어를 도발하는 대사를 날리는데, 그 중에 이런 게 있잖습니까.
 
"If you fail to plan, you plan to fail." = "계획하는 데 실패하게 되면, 실패만을 계획하게 되지."

어찌 되었건 독일군은 섬멸전에 들어가기로 작정합니다.
 구데리안이 제대로 열 받아서 나중에 기고하기를, 히틀러는 적의 소수 병력을 섬멸하기를 원했고, 약간의 상처로 점진적인 출혈을 거쳐 상대방이 죽기를 바랬다, 뭐 이 정도로 기고했는데, 그을쎄요... 

스몰렌스크의 제19군이 분쇄되었고 제16군과 제20군이 맛이 간 상태였다고는 해도, 뒤쪽(스타브카 예비, 스몰렌스크 북쪽)에서 달려오는 병력이 장난이 아니었는데 스몰렌스크에서 뒤통수 얻어맞을 걸 그대로 각오하고 모스크바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다에 한 표 던집니다.(제 아무리 당시 소련군이 무능했지만 저 정도 규모의 병력을 알보병으로 측후방에 들이 박기만해도 대형사고납니다;;)


하여간 포위망을 닫기로 한 이상 독일군은 포위 섬멸전에 돌입했고, 북쪽에서 달려온 제29군, 제30군, 제24군의 반격도 형편없는 작전 조율과 빈약한 화력 지원 및 병참의 한계로 실패로 돌아가면서 스몰렌스크에서 또 한 번 소련군은 대량의 병력을 잃고 맙니다. 포위된 제20군이 혈로를 뚫어서 포위망을 돌파할 수는 있었습니다만, 8월에 접어들자 스몰렌스크 전선은 깨끗하게 정리됩니다.


이렇게 말이죠

어쨌됬건 간에 독일은 스몰렌스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습니다. 
소련군 사망자 18만 6천 명, 포로는 30만 명, 부상은 27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이 소진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글을 쭉 읽으셨으면 아셨겠습니다만, 민스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서 거둔 승리였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소련군을 상대로 독일군은 상당히 지쳤고, 병력도 심하게 소진되면서, 점차적으로 모스크바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는 게 이 스몰렌스크 전투의 진정한 결과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졌지만 승리한 셈이고, 독일군은 이겼지만 패배한 셈이죠. 전과가 워낙 커서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대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 피로스의 승리나 다름없었습니다.(이 2개 전투로 벌어진 병력손실을 소련군만 계산해도 130만여 명 정도....)

여하튼 이제 모스크바는 풍전등화를 넘어서 불이 붙을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소련 당국은 점점 긴장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일본군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한 시베리아의 병력들 일본이 자신들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자 총동원령 선포하였고, 독소전은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됩니다.

후...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소련청년이 목숨을 잃어야 소련 수뇌부가 정신차릴까요..
저도 글을 연재중이지만 항상 가벼워지지 않게 경계합니다. 그래야 저분들의 희생이 허투루 돌아가지 않을테니말이죠.

그럼 전 이만 다음 글로 올 것을 약속드리며 지난 글 링크 해드리겠습니다
독소전쟁-인계에 강림한 지옥(프롤로그) 
독소전쟁-인계에 강림한 지옥(프롤로그) 그 두번째



독소전쟁-바르바로사 작전 북부집단군(1)







독소전쟁-바르바로사 작전 북부집단군(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