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시디스(Wiliam James Sidis,1898~1944) 


추정 지능지수(IQ) 250~300(비율 지능 기준), 200(편차 지능 기준, 표준편차 16) 




수학, 물리 등 이공계 전교과, 언어능력에서 이례적으로 비상한 지능을 가진 유태인계 미국인 




그의 행보 


생후 6개월 때 처음으로 말을 시작 

생후 18개월 때 뉴욕타임즈를 읽을 수 있게 됨 

8세때까지 독학으로 9개국어를 습득 

8세때 스스로 자신만의 언어인 vendergood를 창조 

8세에 하버드 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대학에서 너무 어리다고 거부 

11세에 하버드 대학교 입학(하버드 대학교 역대 최연소 입학) 

12세에 하버드생의 자격으로 4차원 물체에 관련한 논문 발표 

16세에 하버드 대학교를 우등생(Comluade)으로 역대 최연소 졸업(재학기간 1910~1915) 

17세에 미국 텍사스 주 라이스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 



시디스는 17살에 라이스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천재였던 자신에게 쏟아지는 언론과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심과 대접을 견디지 못하고 교수직을 그만둔 뒤, 

한때 법학대학원을 다니다 중퇴하는 등 방황하다가 21세에는 전쟁반대 시위 도중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시디스가 성인이 되었을때 그는 40여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우주 암흑 물질(Dark Matter)의 존재를 미리 예견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시디스는 징역후 곧 출감하기는 했으나 

그 이후 부모와 의절하고, 언론을 피해 대형 마트 종업원, 일용직 등 이공계와는 인연을 끊은 생활을 하다 1944년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천재가 일반인들과 같이 살아남는 방법이 세가지 잇대요

 

첫번째가 난 멍청하다 난 멍청하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서 스스로의 천재성을 봉인하는 방법

남들이 아는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지만 스스로 모른다고 최면을 걸어 진짜로 모르게 된다함

 

두번째가 일반인들의 행동과 방식, 패턴을 연구해서 그대로 똑같이 행동하는 방법

 

세번째가 하나를 보거나 배우면 열 아니 백을 습득하지만 그 하나를 100% 완벽하게 이해할때까지 반복적으로 행동해서 일반인으로 보이는 방법

 

그게 아니면 외부와 단절된채 홀로 사는 수밖에 없다네요

 

 

 

 

 

우리나라에도 저런 분이 한분 계셧엇죠

 

김웅용 이라는 분이신데

 

워낙 유명하신분이시라 ㄷㄷ

 

7살때 일본에서 아이큐 테스트를 햇더랍니다

 

200점이 만점이엇는데 보란듯이 200점을 받아서

 

측정불가 판정을 받고 추가점수 10점을 더 받아 210으로 공식 기록됫다고 합니다

 

몇년 후 이 테스트를 본 영국 기네스 협회에서 세상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 이라고 이름을 올렷다고 합니다

 

 

 

김웅용은 생후 80일이 되자 걷기 시작햇고

 

첫돌 때 한글과 천자문을 마스터

 

3살때는 일기를 쓰기 시작햇으며 미적분 계산

 

4살때는 한양중학교(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중학교)를 입학하여 외국의 기자들과 6개월간 합숙

 

외국어를 배우는데는 1달이면 현지인과도 대화가 가능 ㅋ

 

당시 외국 기자들과 합숙하며 일어, 독일어, 영어 그리고 한국어까지 더하면 4개국어를 습득

 

5살 되던 해에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입학 (이건 아버지 영향을 받은듯... 아버지가 당시 물리학과 대학 교수)

 

8살때 미국의 나사(NASA)에 스카웃

 

9살(1970년) 콜로라도 주립대학 입학 

 

13살(1974년)대학원에서 핵물리학. 열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이후 4년간 17살까지 나사 선임연구원으로 근무

 

해외에서의 활동들은 루머다 아니다 말들이 많고 정확한 정보는 잘 모르겟어요

 

 

 

 

하지만 나사에서의 생활에 치를 떨던 김웅용은 (아마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닌 강요된 삶이라 느낀듯)

 

한국으로 돌아와 검정고시를 치르고 충북 청주시에 위치한 충북대에 입학합니다

 

전공도 전문 분야인 물리학이 아닌 토목공학으로 바꾸고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충북개발공사의 처장직을 맡고 잇죠

 

어쩌면 그는 천재라는 꼬리표를 버리고 평범한 삶을 원햇던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