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 쯤은 보았을 이탈리아 폼페이 카사 델 파우노(Casa del Fauno)유적 벽면에 묘사된 알렉산드로스의 얼굴

"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그저 신이라 불러주는 수 밖에"
-스파르타인 다미스(Damis) 알렉산드로스가 도시국가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스키피오 : 장군, 장군은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 말할 것도 없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능가할 사람은 없소."
-한니발 바르카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대담 중-



역사속에 존재한 많은 정복군주들 중 탑3를 꼽으라 한다면 거의 반드시 들어가는 군주라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겠죠.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그리스를 제패한 후 암살 당하고 20세의 나이(탄생년이 기원전 356년, 필리포스 2세의 사명년도가 336년)에 왕위에 오른 후, 죽기까지 그리스 도시국가 중 하나였던 테베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고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 왕의 호칭인 파라오가 되었고, 인도부근까지 진출한 그리스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입니다.

전체 생애에 대해서까지 다 쓰게되면

너무너무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주요 전투위주로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페르시아 원정의 길
그리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트(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게 됩니다.
비잔티움 쪽으로 가는 길 쪽이 좀더 편한 길이지만 그 쪽엔 독립된 도시국가가 있었기에 헬레스폰트를 건너게 되죠.


알렉산드로스가 상륙하자 근방의 페르시아 샤트라프들은 군대를 모아 그라니쿠스라는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와 대치하게 됩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파르메니온 장군은 다음날 새벽에 강의 상류를 넘어 기습하자는 작전을 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거부하고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하죠

이러한 즉각 적인 공격은 페르시아군의 허를 찌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마케도니아 군은 팔랑크스를 중앙에, 기병부대를 양쪽 측면에 배치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컴패니언 기병(헤타이로이)과 함께 우익에 있었습니다.

(컴패니언 기병대 혹은 헤타이로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정예기병대로 마지막까지 함께 한 동료들이었죠)

페르시아 군은 마케도니아군의 돌격이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방면 집중 될거라 예상하고 병력을 중앙에서 측면으로 이동시키게 됩니다.

1) 전투의 시작
전투의 시작은 파르메니온 휘하의 마케도니아 좌익 기병들과 경무장 보병대가 양동작전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며 시작되었고 이에 페르시아군은 마케도니아 좌익의 공격을 대비해 방어를 강화해서 마케도니아 군의 공격을 격퇴해내게 됩니다.

2) 전투의 본격화
페르시아 군이 마케도니아군 좌익의 공격을 방어하는 중 알렉산드로스가 휘하의 기병부대를 이끌고 쐐기꼴 진형으로 페르시아 군의 전열 중앙 부분을 강타하게됩니다.
이에 페르시아군은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시작하였고 전투는 점점 혼전의 양상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3) 위기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부대는 페르시아 귀족 여럿을 잡아내지만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스피트리다테스(Spithridates)라는 페르시아 귀족의 도끼에 가격당해 기절하게 되죠, 그러나 결정타를 날리기 직전 스피트리다테스는 마케도니아군의 무장 클레이토스의 공격에 전사하게 되고 알렉산드로스가 정신을 차릴 시간을 벌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4) 결말
전면전이 시작된 후 페르시아군의 기병대는 마케도니아군 좌익부대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중앙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는 좌측으로 방향을 전환해 페르시아 기병대를 향해 이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부대가 진군함에 따라 생겨난 빈틈으로 마케도니아군 보병대가 돌격하여 훈련도가 낮았던 페르시아군 보병대를 공격하게 되고 수많은 귀족들을 잃고 중앙마저 무너지자 페르시아군은 기병대부터 패주하기 시작합니다.

5) 결과
마케도니아군의 총 사상자는 300~400명이었고 페르시아군은 대략 1,0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이 전사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측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남겨진 로도스의 멤논휘하의 그리스 용병대를 한사람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18,000명이 학살당하고 2,000명이 노예로서 마케도니아로 보내지게 됩니다.

이 후로 아나톨리아 지방 서부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보다 그리스와 친한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흡수하며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남하하며 아나톨리아 서부지역 해안선을 쭉 점령하며 내려왔는데 이는 해군이 없는 마케도니아로서는 유일하게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었죠.
*이 도중에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매듭 이야기에서 나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어내기도 합니다.

2.이소스 전투
아나톨리아 서부를 제압하고 겨울을 난 뒤 2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시리아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리아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 중 하나인 이소스라는 곳에서 다리우스 3세가 모아놓았던 페르시아의 대군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 대군은 다리우스3세가 직접 지휘하는 약11만의 대군으로 약 4만가량의 알렉산드로스의 군세는 병력상으로 열세를 겪게 됩니다.

독특한 점은 이소스 평야는 의외로 좁은 평야로 병력상에서 우세했었던 다리우스3세가 어째서 그 곳에 진을 펼치게 되었는지 여러가지 말들이 많습니다. 본디 정석적인 군대운용이라면 병력량의 우세를 살리고 싶다면 넓은 곳에서 싸워야하기때문이죠.


다리우스군은 좁은 해안가에 진을 펼치고 중앙의 강가에 말뚝을 박아 적을 저지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리우스 본인은 그 중앙의 배후에 최정예보병과 위치하고 그 앞에 그리스 중장보병과 페르시아 보병을 배치, 기병은 우익을 맡아 타격대로 배치했습니다, 왼편 산기슭에는 경보병 한부대를 배치하여 알렉산드로스 군의 후방을 노리는 것도 잊지 않았죠.
반면, 알렉산드로스 군은 본인이 최정예 기병대 컴패니언들을 이끌고 우익을 맡고 테살리아 연합군을 좌익에, 중앙은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팔랑크스를 배치합니다. 이때 기병은 좌익보단 우익에 집중되었는데 전장의 특성상 좌익은 바다에 면하여 기병의 움직임이 방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알렉산드로스의 판단 때문이었죠.

1) 전투의 시작
전투의 시작은 페르시아군 우익의 기병들이 강을 건너 마케도니아군 좌익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마케도니아군 좌익은 상당한 난제를 맡게되었는데요 그건 수적에서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최대한 막아내면서 우익에 있는 정예 마케도니아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죠.

2) 전투의 진행
마케도니아군 좌익이 최대한 페르시아군을 막는 도중 마케도니아군 중앙 보병은 강을 건너 페르시아군 전열을 타격하는데 성공하게 되고 이를 본 알렉산드로스는 보병진 우익에게 명령을 내려 최대한 페르시아군을 밀어내게 하였습니다, 팔랑크스가 장창을 내세워 밀어내기 시작하자 페르시아군 좌익과 중앙에 약간의 틈이 생기게 되고 이 틈으로 알렉산드로스와 컴패니언 기병대가 다리우스를 노리고 돌격하기 시작합니다.

3) 결말
알렉산드로스의 돌격을 본 다리우스3세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되고 총사령관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게 된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케도니아 군은 해질 때 까지 페르시아 군을 추격하였고, 이때 쌓인 페르시아군의 시체로 강이 붉게 물들고 댐을 이룰 정도였다고하네요.

이 전투 후 다리우스의 아내와 딸들을 사로잡았는데 이들 가족을 매우 정중하게 대우했다고합니다. 특히 다리우스의 아내는 역사서에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기록이 남을 정도였는데 생포된지 일년 후 사산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누구의 아이였을까?) 두 딸중 하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고(모녀덮밥?) 남은 하나는 알렉산드로스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진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됩니다.
다리우스는 강화를 제의 하며 엄청난 조건들을 내걸기도 하는데 파르메니온은 이 조건들을 보고 "제가 왕이라면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럼 나는 파르메니온 장군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이니 이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소" 패기가 넘쳐나는 모습이 느껴지지 않나요?

알렉산드로스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손쉽게 점령합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티레의 공성전에서 공성전까지 완벽하게 지휘해내며 본인의 능력을 자랑합니다. 이집트에 도착해서는 이집트인들에게 '해방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고 아문신(그리스인들에게 아문신은 제우스와 같은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기도 하는데 본인은 이를 매우 좋게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3. 가우가멜라 전투
25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빌론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다리우스의 왕비가 사망하는데 아주 성대한 장례를 치뤄주고 이 이야기를 들은 다리우스는 출전하게 전에 올린 기도에서 말하길 "신이시여, 이 늙은이가 이 전투에서 혹 이긴다면 알렉산드로스에게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또한 혹 제가 패한다면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의 왕좌에 앉게 해 주소서." 라고 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다리우스3세와 기병 호위대, 이모탈과 그리스 용병대,궁병대를 배치시키고 좌익의 베수스와 우익의 마자에우스는 중앙의 양옆으로 길게 기병대를 포진시켰고, 징집병들은 모두 후위에 중앙 전방에는 전차대를 배치하여 전차돌격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양익의 기병대로 포위, 중앙군으로 섬멸하는 작전을 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예전대로 팔랑크스를 중앙에 기병들을 양익에 배치시켰지만 기병전력에서 너무 밀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용했던 망치와 모루전술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죠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양익에 기병을 묶어놓고 중앙을 직접공격하여 다리우스3세를 노리기로 했습니다. 팔랑크스는 사선진 형태로 진군시키고 그리스 중장보병 일부를 팔랑크스 후방에 배치 적이 팔랑크스의 측면이나 후면을 노리는 것을 방비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우익을 총지휘하는 동시에 컴패니언기병대를 직접 이끌고 전면에 섰고 좌익은 파르메니온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1) 전투의 시작

마케도니아 군이 숫적열세에도 진군해오자 페르시아군은 전차들을 출격시켰고, 마케도니아군은 직진 밖에 하지못하는 전차들의 특성을 이용해 이를 무력화 시키게 됩니다. 전차 돌격과 함께 페르시아군 좌,우익의 모든 기병들이 전진하기 시작하였고 베수스가 이끄는 박트리아 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의 컴패니언 기병대를 최우선적으로 노리는 임무를 갖고 있었죠

2) 전투의 진행


마케도니아군 좌익과 우익은 페르시아 기병대의 맹공을 받게되는데요, 중앙의 팔랑크스 부대는 이에 개의치 않고 페르시아 전열을 향해 계속해서 전진합니다. 페르시아 궁병대가 팔랑크스를 막기위해 사격을 가하고, 이모탈, 그리스 용병부대가 나서지만 팔랑크스의 정면 전투력은 무적! 막을 수 없었습니다.
허나 팔랑크스가 전진하며 마케도니아군 좌익과 중앙 팔랑크스 부대 사이에 공간이 생기게 되는데요.

이 틈으로 마제에우스군의 기병대가 돌파하여 마케도니아군 후방까지 침투하게 됩니다. 이 기병대가 한참 공격을 받고있던 파르메니온의 좌익 후방을 들이치게되면 마케도니아군 좌익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되어있었죠. 다행이 후위의 예비대가 이를 발견하고 반격에 나서고 페르시아 기병일부가 마케도니아 캠프방향으로 갈라져나감으로써 마케도니아 좌익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한편, 페르시아군의 전열에도 틈이 생기게 되는데 알렉산드로스를 쫒아다니던 베수스의 박트리아 기병대가 알렉산드로스의 속임수에 넘어가 페르시아군 좌익과 마케도니아군 우익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면서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의 사이를 막는 장벽이 사라지게 된거죠.

3) 전투의 결말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향해 돌격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를 본 다리우스3세가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위대하고 고귀한 왕중왕 다리우스3세가 도망치는 모습을 지켜보게된 징집병들은 멘탈이 무너지기 시작하여 달아나기 시작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 기회에 다리우스를 잡아 끝을 내려했지만 마케도니아군 좌익에서 온 전령이 전해온 좌익의 위기소식에 추격을 단념하고 좌익을 구하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으로 진군하여 페르시아의 절반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제국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후로도 페르시아 잔당들 퇴치 및 인도 원정까지 최전선에서 멈추지않고 달리던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32세의 나이에 원인불명의 열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20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단 12년만에 그리스 지방의 한 나라였던 마케도니아를 대제국으로 만든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의 인생은 짧았기에 그 불꽃이 더욱 아름답게 타올랐던 것 같습니다.

마케도니아군 주요 병력 소개

1.컴패니언 기병대(헤타이로이)


알렉산드로스가 보유한 최강의 망치, 헤타이로이라는 뜻은 왕과 가까운 자들이란 뜻으로 원래는 왕과 가까운 귀족들로만 이루어진 정예기병대였다고 합니다. 후로는 그리스/마케도니아 자유민이나 아시아 출신자들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위에서 양손을 사용하려면 허벅지만으로 말을 붙들고 조종하는 뛰어난 기마술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또한 당시 기병들은 투창이나 짧은 냉병기등을 사용한 근접 전투위주였으나 헤타이로이들은 처음 시작부터 긴 창을 사용한 돌격에 주안점을 두는 거의 최초의 제대로 된 충격기병이었죠.

2. 풋 컴패니언 (페제타이로이)


그리스어로 걷는 친구들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보병입니다. 가로 16명 세로 16명으로 한부대에 총 256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무장으로는 뿔투구와 5.4m길이의 사리사, 팔랑크스의 핵심인 호플론을 개량하여 한팔에 걸 수 있게 만들었고, 팔카타를 지참해 근접전 또한 대비하였습니다.

팔카타

이들 페제타이로이들은 최고의 모루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망치인 헤타이로이들과 함께 알렉산드로스군의 중심축이 되었죠, 정면에서의 거의 무적에 가까웠으나 다만 단점으로 측면이나 후방에서의 공격에 약하고 평지가 아닌 지형에서는 진형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결국 로마군에 밀리게 된 이유가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