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개신교는 개독...천주교는 개념있는 기독이라는 일방적인 시각으로 쓴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걸 봅니다...

한국기독교가 상당부분 개독이라는건 이젠 더이상 이슈도 아닌게 사실이지만 천주교도 한국근대사에  있어서는

개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친일로 변절했지만...

개신교는 교단이 조직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한 흔적이라도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황청의 허용지시로 신사참배를 아무저항없이 수용했습니다...

교황도 추기경도 주교도 신부도 무엇도 아닌 다만 양심있는 일반신자들이 저항했을 따름이지요....

 

1938년 이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ㆍ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중심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ㆍ이주원(李朱元)ㆍ주남선(朱南善),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 함경남도의 이계실(李桂實) 등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다.

만주 지역에서도 박의흠(朴義欽)ㆍ김형락(金瀅樂)ㆍ김윤섭(金允燮)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순회활동을 통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운동방침에 관한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기도 하였다.

 

1940년 3월경의 안동회합에서는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세속화되어 신사참배를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신사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신앙 동지들을 확보해 신령한 교회 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등을 협의ㆍ결정하고, 각 지역에서 이러한 운동을 확산시켰다.

일제는 이들을 여러 차례 검속 탄압하다가, 1940년 6월경부터 9월에 걸쳐 본격적인 검거에 착수하고 재판에 회부해 광복되기까지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1940년에 나온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방침’이나 같은 해 9월 20일 새벽을 기해 전국에 걸쳐 실시된 ‘조선기독교 불온분자 일제검거령’은 바로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과정에서 조용학(趙鎔學)ㆍ주기철ㆍ최봉석(崔鳳奭)ㆍ최상림(崔尙林)ㆍ김윤섭ㆍ박의흠ㆍ권원호(權元浩)ㆍ김련(金鍊)ㆍ최태현(崔泰鉉) 등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ㆍ집단적 신사참배거부운동과는 달리 보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은 전국 어디서나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전라남도의 황두연(黃斗淵)ㆍ 양용근(梁龍根) 등과 전라북도의 배은희(裵恩希)ㆍ김가전(金嘉全), 충청남도의 정태희(鄭泰熙), 충청북도의 허성도(許聖道)ㆍ송용희(宋用熙), 경상남도의 조용학(趙鎔學), 황해도의 이종근(李鍾根)ㆍ박경구(朴敬求) 등이 있었다.

 

교파적으로도 장로교는 물론, 감리교의 이영한(李榮漢)ㆍ강종근(姜鍾根)ㆍ권원호, 성결교의 박봉진(朴鳳鎭)ㆍ김연, 동아기독교의 전치규(田穉珪)ㆍ김영관(金榮官), 안식교의 최태현 등이 있다.

 

일부 천주교 신자들도 교황청의 신사참배 허용지시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따라 참배를 거부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神社參拜拒否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예수입장에서는 개신교나 천주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