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잭스


 잭스만큼은 아닐지라도, 카타리나 역시 전장에서 구를만큼 구른 암살자였다. 그녀는 잭스를 상대로 겨우 같이 있던 소나를 인질로 잡았다고 해서 방심할 정도로 우둔한 위인이 아니었다.


 카타리나는 한쪽 다리로 교묘하게 소나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의 뒤에 완전히 밀착해 있었다. 이리저리 각을 재봐도 도저히 파고들만한 틈이 보이질 않자 잭스는 작게 혀를 찼다. 고용주가 인질로 잡혀있다는 상황은 그리 기분좋은 일이 아니었다.


 거리는 약 5미터 정도. 잭스나 카타리나같은 싸움의 달인급 실력자들에게 그정도의 거리는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호흡의 틈만 있으면 잭스는 카타리나의 손모가지를 작살낼 수 있었고 카타리나 입장에선 그 단 한 호흡의 틈만 있으면 소나를 가지고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왜 카타리나가 소나를 인질로 삼았는가, 잭스는 거기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뒀다. 그걸 생각하고 있을 만큼 여유만만한 상황도 아닐뿐더러 잭스는 카타리나를 상대로 딴생각을 한다는 모험을 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카타리나 역시 잭스와 똑같이 그를 견제하며 안전하게 도망가는 틈새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즉, 둘 다 서로에게 신경쓰기 바빠 정작 인질인 소나가 에뜨왈의 현에 그 가녀린 손가락 하날 걸치는 행동 따위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하긴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게 이 대치상황을 뒤집어엎는 최대의 변수가 될 줄을.


 띵!


 “큭-!”


 

 일순간 잭스의 귀가 울릴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소나를 중심으로 확 퍼져나갔다. 거리를 둔 잭스의 귀가 울릴 정돈데, 소나와 제일 가까이 있던 카타리나가 무사할 리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카타리나는 아예 칼을 놓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머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그 틈을 놓칠 잭스가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카타리나와 소나 앞에 다다른 잭스는 소나를 에뜨왈 째로 자기 품에 끌어안은 다음, 가로등이 마치 창이라도 되는 것 마냥 쓰러진 카타리나에게 겨눴다. 그의 품 안에서 소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또 멋대로 나서서…….

 “나중에 얘기합시다.”


 혹시 모를 습격이 또 생길까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잭스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의 의도보다 훨씬 무뚝뚝했다. 순간 소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지만 꾹 참고선 살짝 에뜨왈의 현을 어루만져서 미세한 음파를 퍼뜨렸다. 에뜨왈이 손에 들어온 이상 어떻게든 잭스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은게 지금 그녀의 심정이었다. 소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잭스의 귓가에 닿았다.


 -잭스 님,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경계를 푸셔도 될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아시오?”

 -에뜨왈로 미세한 음파를 퍼뜨려서, 음, 저기, 돌아오는 소리를, 그러니까…….

 “아, 박쥐가 먹이를 잡을 때처럼 말이군. 잘 알겠소.”

 -박쥐…….

 “…좀 전부터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지?”


 잠시 존재감이 사라졌던 카타리나가 어느새 회복이 다 된듯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하긴 소나의 목소리는 오직 잭스에게만 들리니 둘의 대화는 남들에겐 그저 잭스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잭스는 굳이 그 사실을 설명해 줄 필요성 따윈 느끼지 못했기에 그녀의 질문은 싹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말했다.


 “왜 공격했지? 우리들은 소환사들과 연결이 끊겼네. 설마 아직도 경기 중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연결이 끊긴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뭐야, 그런 질문을 하는거 보니 당신 아직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 무기의 달인이라는 이름이 울겠는걸, 잭스.”

 “…….”


 잭스가 말없이 가로등을 슥 들어올리자 카타리나가 찔끔하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아는거 다 말해줄테니까 일단 서로 협력하는게 어때? 당신 말대로 지금 상황에서 진영따윈 무의미해. 그리고…….” 카타리나가 소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난 도움이 필요해. 당신들은 정보가 필요하고. 이 정도면 우리가 협력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죽을 때까지 여기 갇혀있을 생각은 아닐거아냐?”


 물론 잭스는 그러고 싶은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고덩어리 아가씨를 협곡 밖으로 내팽개치고 오두막으로 돌아가 낮잠 한 번 늘어지게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것과 이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잭스는 암살자만큼은 꺼리는 편이었다. 전쟁터에서 등을 맡겼다가 뒤통수를 후려맞을 뻔한 경험도 한 두 번이 아니었거니와 어떤 이유에서든지 카타리나는 이쪽에 칼을 들이대지 않았던가.


 -그녀를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소.”

 -전 도와주셨잖아요.

 “그 얕은 물에 빠져 익사하려는게 기가 막혔을 뿐이오.”

 -그러니까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신다는거죠? 멋져요!

 “…….”


 소나가 잭스의 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잭스는 골이 아픈지 눈썹을 콱 찌푸렸다(물론 그게 보일 리는 없었다). 이거 얌전하고 온실 속 화초같은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에뜨왈을 잡고 나니 성격개조라도 된 듯 활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가씨지 않는가. 에뜨왈을 찾기 전엔 죽네 마네 징징거리고, 찾은 뒤엔 철없는 어린애처럼 방글방글 웃기나 하고, 정말 이래저래 맘에 들지 않는 아가씨였다. 감정 표현을 이렇게까지 풍부하게 하는 사람은 잭스의 평생에 있어서 소나가 처음이었다.


 “어머, 친절하기도 해라. 소나는 날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잭스?”


 게다가 말릴 틈도 없이 잭스의 품에서 쏙 빠져나가더니 제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사람을 손수 일으켜주기까지 했다. 그러고선 잭스를 향해 ‘언제 출발하나요?’ 라고 묻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니 잭스 입장에선 환장 터질 노릇이었다. 차라리 둘 다 남자였다면 털끝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가로등으로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을 텐데, 차라리 남자였다면……. 소나와 카타리나를 번걸아가며 쳐다보면 잭스는 가면을 한 번 쓸어내리고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협력하지.”



***



 “챔피언들이 조종당하고 있어, 잭스. 협곡의 시설도 그 조종하는 놈들 손에 넘어간 것 같고 말이야.”


 카타리나가 선두에 서서 숲길을 헤쳐나가며 잭스에게 말을 건냈다. 시설이 이상하단거야 포탑이 자신을 공격할 때부터 알고 있던 잭스였지만 챔피언들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정보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이른 타이밍이었다. 그럼 이곳을 점거한 놈들이 벌써 넥서스의 지배권마저 손에 넣었다는 뜻인데, 챔피언들을 찾아 힘을 모아보자는 잭스의 계획이 또 한 번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누구에게?”


 “모습은 몰라.” 카타리나가 신경질적으로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탁 쳐내며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렸어. 아주 감미롭고, 거역하기 힘든 목소리……. 그 목소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 ‘모두 죽여라.’ 라고. 뭐랄까, 그 목소리는 아주 그립고도 너무 친근해서 거역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정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어.”

 -잠깐만, 학, 잭스 님……. 카타리나 님께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악, 해주시면 안될까요…….

 “…잠깐 멈추지. 의뢰주께서 힘들어 하시는군.”


 잭스와 카타리나의 걷는 속도는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낸 소나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하물며 에뜨왈을 들어주겠다던 잭스의 호의를 거절하고 부득부득 자기가 에뜨왈을 들쳐매고 따라오니 소나의 체력이 바닥나는건 순식간이었다. 소나의 모습은 단정한 경기 중의 모습과는 달리 꽤 엉망이었다. 그녀의 소맷자락과 치맛단 아래쪽은 곳곳에 튀어나온 나뭇가지 덕분에 요란하게 찢겨있었고 긴 머리에도 나뭇잎이며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잭스 입장에서야 이 정도 숲길을 가는데 저렇게 몰골이 망가지나 싶었지만, 소나 입장에서는 이런 숲길을 휘적휘적 산책이라도 하는 듯 걷는 잭스와 카타리나가 괴물처럼 보였다. 소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에뜨왈을 꼭 끌어안은 채 주저앉았지만 잭스는 옆에 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 조금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둘의 소환 마법이 엉켰다라……. 그 둘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카타리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 다 왔으니까. 하던 얘기를 계속하자면……그래,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구름 위에 둥둥 뜬 느낌이 들고 있던 도중이었어. 그때 누가 뺨을 때려서, 정말 아프게 때려서 눈물 쏙 빼면서 정신이 맑아졌지. 뺨을 때린건 탈론이었어. 그리고…….” 카타리나는 자기 팔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꽉 감싸안으며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난 그녀석의 배에 칼을 쑤셔넣고 있었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어서 나온 카타리나의 목소리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제서야 난 내가 뭔가에 홀렸다는걸 깨달았어. 그놈을 둘러메고선 미친듯이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봤을 땐 데마시아 놈들이고 녹서스 놈들이고 죄다 보라색 진영으로 걸어가더군. 기계태엽 인형처럼 텅 빈 눈을 하고선 말이야. 탈론이 아니었으면 나 역시 그놈들과 똑같은 꼴을 한 채 그쪽으로 가버렸을거야.”


 카타리나는 커다란 나무둥치의 한쪽을 잡고 확 열어젖히자 진한 피냄새가 잭스의 면상에 확 하고 들이닥쳤다. 호리호리한 청년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죽겠군.”


 잭스는 자신의 감상을 그 한마디로 표현했다. 사실 그 한마디가 탈론의 상태에 대한 모든걸 말해주고 있었다. 거의 넝마 수준으로 찢겨진 옷 곳곳에선 잔뜩 피가 엉겨있었고 왼쪽 팔뚝엔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배의 상처가 치명적이었다. 잭스 입장에선 지금까지 숨이라도 붙어있는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탈론의 얼굴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쓰다듬던 카타리나는 갑자기 소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까 목에 칼을 들이민건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네가 조종당하고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아니, 이건 그냥 변명이야. 그 악기가 떨어져있는걸 우연히 발견하고선 네가 반드시 그곳으로 올 줄 알았어. 널 무슨 수를 써서든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었어. 부탁이야, 탈론을 치료해줘. 그 악기로 상처를 회복시키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잖아? 제발…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을 살리고 싶어!”


 카타리나는 굵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소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슬픔과 자책감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이 분에게서 들렸던 초조함의 정체였구나, 소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잭스를 바라봤다. 표정을 느낄 수 없는 가면을 바라보는 소나의 눈에는 허락을 바라는 간절함이 새겨져 있었다.


 -잭스 님.

 “알고 있었소?”


 소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이 누군가를 심하게 걱정하고 있다는건 알고 있었어요. 아까 만났을 때부터…저분에게선 끊임없이 자책감과 슬픔의 소리가 들렸거든요. 소중한 사람을 자기 자신의 실수로 잃기 직전의 다급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책망……. 저도 그 감정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분을 꼭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소나는 심판의 방에서 봤던 환상을 떠올렸다. 에뜨왈이 내뿜던 날카로운 선율,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는 양어머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죽어가는 양어머니만 봐야 했던 자기 자신에게 느끼던 무력감. 그래서 소나는 카타리나의 심정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치료할 수 있다면 나도 부탁하고 싶군. 정말 미안하오, 미스 부벨르. 내가 너무 옹졸하게 굴었던 것 같소.”

-아니에요, 잭스 님. 그렇지만 괜찮을까요? 악기를 연주하면 소리가 아주 멀리까지 퍼질텐데…….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소나의 손은 에뜨왈 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였다. 잭스는 확신을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미스 쿠토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챔피언들은 지금쯤 보라색 진영에 있을테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그 목소리라는게 들리지 않았던 걸로 봐선 그놈들이 적어도 우리 둘은 조종하는데에 실패한 모양이니 섣불리 움직이진 않을거요. 그리고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날 믿으시오. 정면으로 온다면 이 협곡의 그 누가 온다고 할지라도 모조리 때려눕힐 자신이 있으니까.”

 -네. 믿고 있어요.


 소나는 빙그레 웃으며 카타리나를 일으켜주고선 탈론 앞으로 가서 섰다.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소나의 손이 에뜨왈의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아침 이슬이 또그르르 굴러 떨어지는 듯한, 조용하면서도 경쾌한 소리가 에뜨왈에서 뿜어져나왔다. 비단 현을 뜯는 소리뿐만이 아니라 에뜨왈이 사람의 목소리를 가지고 부드러운 아리아를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에뜨왈에서 뿜어져나온 녹색의 빛이 탈론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줬다. 서서히 그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호흡이 안정되어갔다. 놀라운 마법이 아닐 수 없었다. 카타리나는 반쯤은 탈론이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반쯤은 소나의 연주에 넋을 잃고 있었다.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아가씨로군.


 잭스는 가로등을 품에 낀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음악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자신이 듣기에도 아름다운 음악이 아닐 수 없었다.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그녀의 힘은 정말로 놀라웠다. 음악으로 엮어내는 마법이라니. 베사리아나 멘드레이크가 에뜨왈을 한번만 연구해보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잭스의 평가가 달라지진 않았다.


 잭스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잠시 긴장을 놓고 그녀의 음악을 음미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그녀가 챔피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잭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나의 연주는 주위를 울리며 협곡 안에 은은하게 울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