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마시아 스토리 업데이트








전통을 기반으로 세워졌고 명예를 중시하는 왕국에서는 가장 높은 이상 또한 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무력 충돌이든 영혼의 투쟁이든, 데마시아의 챔피언들은 명예, 의무, 그리고 역경 앞에서 굴하지 않는 용기로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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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마시아를 위하여




'이 머나먼 북쪽 땅, 포스배로우에 마지막으로 왔던 게 언제였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7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오빠 가렌이 훈련 차 불굴의 선봉대를 이끌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럭스와 나머지 가족들은 증조부 포시안의 묘지에 참배를 하기 위해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묘지로 향하는 숲속 길은 끝도 없이 구불구불했고 양옆은 바위투성이의 가파른 협곡이었다. 게다가 쉴새 없이 비가 내리는 바람에 럭스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럭스는 증조부의 묘지가 용기의 전당 같은 웅장한 대리석 건물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을 배경으로 풀 덮인 봉분이 달랑 하나 솟아 있는 광경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봉분 앞에 세운 대리석 묘비에는 럭스의 증조부가 왜 전설 속 영웅인지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포시안은 절벽에서 내려온 악마와 싸웠고, 악몽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 듯한 무시무시한 악마의 시커먼 심장에 데마시아의 검을 찔러넣어 치명상을 입혔다.

그때도 비가 내렸고,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음물처럼 차가운 북쪽의 폭우가 짐승의 송곳니처럼 뾰족뾰족한, 데마시아와 프렐요드를 가르는 산맥을 적셨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일어난 폭풍우가 봉우리 반대편에서 넘어와, 혹독한 바람에 줄기가 구부러진 데마시아의 파릇파릇한 소나무 숲을 덮쳤다. 서쪽과 동쪽에 솟은 산맥은 푸르스름한 안개에 싸여 윤곽이 희미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은 자못 위협적이어서, 오빠가 화를 낼 때의 분위기가 생각났다. 북쪽은 나무가 무성한 고원 지대로, 험준한 바위투성이 절벽과 날카로운 각도로 패인 협곡이 가득했다. 게다가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온갖 포악한 괴물과 야수가 들끓는 위험한 땅이었다.

럭스는 2주일 전에 데마시아를 떠나 에데사로, 다시 피나라와 리서스를 거쳐 벨로루스를 지나 칼날부리의 도시 하이 실버미어에 도착했다. 기사의 바위 아래에 자리 잡은 집에서 가족과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 말을 몰아 데마시아의 북서쪽 국경 지대로 들어섰다. 마치 깃대에서 깃발이 찢어져 나가듯, 데마시아의 중심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마을과 주민들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옥한 땅이 완만한 구릉 지대를 이루던 평원은 가시금작화와 엉겅퀴 덤불만 드문드문한, 바람이 몰아치는 척박한 땅으로 바뀌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구름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은색날개 칼날부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며 내는 새된 울음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프렐요드의 두껍디두꺼운 얼음이 내뿜는 냉기를 실은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고,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도중에 만나는 정착지의 방어벽은 점점 더 높아졌다. 포스배로우까지의 여정은 길었고 또 피곤했다. 하지만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럭스는 짧게나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곧 사원에 들어갈 거야, 불꽃별이." 그녀는 타고 있는 말의 갈기를 쓸어 주었다. "거기 가면 따뜻한 마구간에서 곡물을 먹을 수 있어. 약속할게."

먼 길에 피곤해진 말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코를 힝힝거리더니, 조급하게 발을 굴러댔다. 럭스는 박차를 가해 바퀴 자국이 깊이 패인 도로를 따라 말을 몰았다. 포스배로우의 정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포스배로우는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뱀자리강 강변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강물은 세찬 기세로 산맥을 지나 서쪽 해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매끈매끈한 화강암을 쌓아 올린 도시의 성벽이 산을 따라 늘어섰고, 성벽 안에는 돌과 잘 건조시킨 목재로 만들고 암녹색 기와로 지붕을 덮은 건물이 즐비했다. 빛의 인도자 사원은 동쪽에 우뚝 솟은 첨탑이었다. 어스름이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탑 안에 피워놓은 화로에서 나오는 불빛이 마치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럭스는 파란 망토의 후드를 젖히고 머리를 흔들어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황금빛 긴 머리카락이 젊음이 넘치는 고귀한 얼굴을 감쌌다. 바다처럼 파란 눈은 단호한 의지를 담고 반짝였다. 럭스는 안장에 지팡이를 묶어두었던 가죽 끈을 풀고, 황금과 흑단으로 만든 지팡이 자루를 가볍게 잡았다. 테두리를 강철로 두른 정문 위 감시 망루에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물푸레나무와 주목나무로 만든 강력한 장궁을 들고 있었다.

"멈춰라, 여행객이여." 경비대원 하나가 말했다. "성문은 내일 아침에나 열릴 거다."

"내 이름은 럭산나 크라운가드입니다." 럭스가 말했다. "늦었다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내 증조부께 예를 표하고 싶어 이렇게 먼 길을 왔답니다. 그러니 들여보내 준다면 고맙겠어요."

남자는 눈을 찡그려 뜨고 어둠 속 럭스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그녀를 알아보고는 휘둥그레졌다. 럭스는 포스배로우에 오지 않은 지 꽤 되었으나, 가렌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럭스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절대 그녀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레이디 크라운가드 아니십니까!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황급히 외치고는 성벽 아래쪽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성문을 열어라."

럭스는 불꽃별이를 앞으로 몰았다. 묵직한 강철 사슬이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며 단단한 목재로 만든 성문을 감시 망루 안으로 들어 올렸다. 럭스가 열린 성문을 통과하자 의장대 열 명이 황망히 뛰쳐나와 그녀를 맞았다. 가죽 흉갑 위에 날개 달린 검 모양의 은핀으로 여민 파란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모두 긍지 가득한 데마시아 군인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어깨는 축 늘어졌고 눈빛은 기진맥진했다.

"포스배로우에 잘 오셨습니다." 아까 망루에서 내려다보던 경비대원이 말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께서 오신 걸 알면 지젤 치안판사님도 안도하실 겁니다. 치안판사 댁까지 모셔다드리도록 호위대를 편성하겠습니다."

"고마운 말이지만 사양할게요." 럭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가 왜 '안도'라는 표현을 썼는지 의아했다. "빛의 인도자 사원에서 묵기로 퍼닐 님과 미리 약속해 두었어요."

럭스는 말을 몰아 가려다가, 경비대원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낌새를 채고는 불꽃별이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크라운가드 님..." 경비대원이 말했다. “...저희의 악몽을 끝내 주시려고 오신 겁니까?"

빛의 인도자 사원은 따뜻하고 쾌적했다. 럭스는 불꽃별이를 마구간에 넣어준 다음 본관에서 퍼닐 여사제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포스배로우 부근의 숲과 협곡에 어둠의 마법이 깃들었다는 소문은 데마시아 수도에 자리한 빛의 인도자 사원에도 전해졌다. 그래서 광휘단의 카히나가 럭스에게 조사를 청한 것이었다.

럭스는 도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암암히 흐르는 어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자 속에 숨은 존재가 줄곧 지켜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다 마주친 주민 몇 명은 피로에 젖은 기색으로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포스배로우 전체에 두려움이 짙은 먹구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게다가 럭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았다.

"지젤 치안판사 님의 아드님도요." 퍼닐이 말했다. 아마빛깔 머리카락에 빛의 인도자 치료사가 입는 희끄무레한 로브를 걸친 여성이었다.

"아드님이 왜요?" 럭스가 물었다.

"이틀 전에 실종되었어요. 어둠의 마법사가 뭔가 끔찍한 목적 때문에 그 아이를 납치해 갔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나요?”

“그 질문은...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봐 주세요.” 퍼닐이 말했다.

럭스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쿵쿵거렸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바람에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머릿속은 공포로 가득 찼다. 악몽 속에서 짐승의 발톱 같은 갈고리가 럭스의 몸을 땅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진흙이 입속을 가득 채웠으며, 어둠이 그녀의 빛을 꺼뜨리려 했다. 럭스는 눈을 깜빡여 악몽의 마지막 잔상을 몰아냈다. 눈 한 켠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르 물러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입속에서 썩은 우유 맛이 났다. 마법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럭스는 손바닥에 광채를 피워올렸다. 빛이 방 안을 밝히면서 질기게 남아 있던 악몽의 흔적이 사라졌다. 럭스의 온몸에 따스함이 번져나갔다. 익숙한 진줏빛 광휘가 그녀의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다.

아래층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던 빛이 사라졌고, 이제 방 안을 밝히는 것은 덧문을 닫아놓은 창으로 비어져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뿐이었다. 럭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마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끔찍한 환상을 밀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조금 전 꾸었던 악몽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려 했지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시큼한 악취가 진동하는 숨결을 내뿜으며 온몸을 짓누르던 얼굴 없는 어둠뿐이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럭스는 얼른 옷을 꿰입고 방구석에 세워놓았던 지팡이를 들었다. 사원 주방으로 내려온 그녀는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빵과 치즈로 아침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 안에 무덤 속 흙 같은 맛이 퍼지는 바람에 접시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이제 답을 아시겠죠?" 퍼닐이 그렇게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와 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퍼닐의 눈 밑은 수면 부족으로 자줏빛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고, 어젯밤에는 난로 불빛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르께한 피부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이제야 럭스는 퍼닐이 생기 하나 없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슨 꿈을 꾸셨나요?” 럭스가 물었다.

“남에게 털어놓고 위안을 얻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꿈이죠."

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 전체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럭스가 마구간에 들어서자 불꽃별이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양쪽 귀를 머리에 바싹 붙을 정도로 내려뜨리고 눈은 휘둥그레져 있었다. 말은 럭스에게 코를 마구 비벼댔다. 럭스는 진주처럼 뽀얀 녀석의 목과 어깨를 쓸어주었다.

"너도니?" 럭스가 묻자, 녀석은 갈기를 마구 흔들었다.

럭스는 얼른 말에 안장을 얹고 포스배로우의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동이 튼 지도 한 시간이 지났지만, 도시는 여전히 아침의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빵집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풍기지 않았으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뚱한 표정의 상인 몇 명만이 느릿느릿 가게 문을 여는 중이었다. 데마시아 인은 규율에 충실하고 근면성실한 사람들이었기에, 국경 지대 도시가 이렇게 하루를 늦게 시작하는 것은 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럭스가 보냈던 것과 같은 밤을 보냈다면 일찍 일어나지 않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다.

럭스는 성문을 통과하여 널찍한 들판으로 나갔고, 불꽃별이의 근육이 풀릴 때까지 달리게 해준 다음 진흙투성이 도로로 들어섰다. 불꽃별이는 오래전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으나 전속력으로 달리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 녀석, 너무 용쓰지 마." 럭스는 숲으로 들어서며 한마디 했다.

소나무와 들꽃의 향이 공기 중에 차올랐다. 럭스는 북쪽 지역 특유의 그 강렬한 자연의 향취를 마음껏 들이켰다. 울창한 나뭇잎 지붕 틈새로 비스듬한 햇살 줄기가 내려꽂혔다. 젖은 흙냄새 때문에 잠시 지난 밤 악몽이 떠오르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럭스는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길은 구불구불거리며 북쪽으로 이어졌다. 럭스는 한 손을 들어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 줄기로 뻗었다. 햇살이 닿자 그녀 몸속의 마법이 요동쳤다. 럭스는 내면의 빛이 영약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마법의 힘이 오감을 가득 채우자 그녀 주변의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숲의 온갖 빛깔들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지며 생명력으로 충만해졌다. 빛이 눈 부신 입자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나무의 숨결 속으로, 땅이 내쉬는 탄성 속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흐르는 에너지를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가냘픈 풀잎 한 줄기에서부터 강철처럼 올곧은 자작나무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가 이 세계의 심장에 닿아 있다는 모든 존재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숲속을 달린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럭스의 기억이 맞다면 동쪽으로 가는 길은 나무꾼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이어졌고, 서쪽으로 가는 길은 매장량 많은 은광을 둘러싼 정착지로 이어졌다. 럭스의 아버지가 그 은광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럭스가 제일 좋아하는 망토 핀도 그 은광의 깊숙한 갱도에서 캐낸 은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두 길 사이에는 좁다란 오솔길이 하나 나 있었다. 말을 타든 걷든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아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럭스가 7년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당장 저 길로 들어서지 않는 거지?' 사실 럭스가 그 길을 택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증조부의 묘지에 예를 표하러 왔다는 말은 그냥 해본 소리일 뿐이었다. 럭스는 눈을 질끈 감고 양팔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마법의 힘이 손가락과 지팡이 끝에서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차가운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고, 숲속의 빛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 속에는 빛과 그림자의 상반된 어조가 뒤섞였고, 섬광 같은 색깔과 강렬한 빛이 혼재했다. 럭스는 아득한 저편의 별빛,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적시던 빛이 안개처럼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데마시아의 빛이 어둠 속으로 떨어질 때, 럭스는 움찔했다. 데마시아의 빛이 살아 있는 존재에게 내리는 순간, 럭스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안장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온몸의 감각이 다른 필멸의 존재들을 넘어 멀리까지 뻗어 나가며, 저주처럼 이 땅에 파고들어 있는 힘을 찾아 나섰다. 해는 이제 거의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다. 럭스는 숲속의 빛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그림자도 깃들지 못하는 곳에 깃들어 있는 그림자가 느껴졌다. 빛만이 존재해야 하는 곳에 어둠이 숨어 있었다. 숨이 콱 막히면서 누가 움켜쥐기라도 한 듯 목이 갑갑해졌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면서 무겁게 내리눌렸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고 싶은데 깨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숲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도 자취를 감추었고, 살랑거리던 풀잎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은색날개 칼날부리들도 침묵을 지켰고, 동물들이 내던 소리도 사라졌다. 수의를 단단하게 여밀 때 나는 듯한, 사그락거리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잠들어라...

"싫어." 럭스는 힘주어 말하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권태가 그녀의 온몸을 보드라운 담요처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편안했다. 럭스의 머리가 앞으로 수그러졌다. 그리고 눈이 감겼다.

갑자기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와 금속이 긁히며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럭스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차디찬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허파에 스며드는 냉기에 다시 한 번 졸음이 날아갔다. 럭스는 눈을 깜빡여 그림자의 잔상을 몰아내고 몸에 들어온 차디찬 공기가 내면의 마법을 일깨우도록 기다렸다. 말을 탄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굴레가 잘랑거리고,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며 짤깍거렸다.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사람들이었다. 최소한 네 명이고, 어쩌면 더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럭스는 두렵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특히 사람이라면 더욱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금은 이 숲속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 모를 어둠이 훨씬 더 생생하게 두려운 존재였다. 그 힘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그 능력은 마치 사람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 듯했다. 럭스는 불꽃별이의 고삐를 당겨, 다가오는 사람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프렐요드 사람들일까?' 하지만 이곳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프렐요드의 약탈자들이 여기까지 진출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산악지대 요새가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면 럭스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 무법자들?' 그렇다면 럭스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럭스는 언제라도 강력한 빛을 쏘아낼 수 있도록, 마법을 손으로 집중시켰다.

앞쪽의 나뭇잎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말을 탄 사람 다섯 명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이는 방어구로 감싼, 완벽하게 전투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타고 있는 말은 하나같이 가슴팍이 떡 벌어진 회색 준마에 키는 180센티미터가 족히 넘어 보였고, 짙은 파란색 천으로 호화롭게 치장을 했다. 다섯 명 중 넷은 검을 뽑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자루가 금으로 된 검을 파란색 칼집에 넣어 등에 메고 있었다.
“럭산나?” 남자가 말했다. 얼굴을 가린 투구 때문에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남자가 투구를 벗고 짙은 빛깔의 머리칼과 화강암으로 깎아놓은 듯한 얼굴을 드러내자, 럭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얼굴은 그야말로 데마시아의 정신을 형상화해 놓은 듯한 생김새여서, 왜 데마시아가 아직도 그 얼굴을 동전에 새겨넣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가렌 오빠." 럭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들은 럭스의 오빠와,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었다.

부대라고 하기에 네 명은 너무나 적은 숫자이지만, 불굴의 선봉대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영웅이자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날에는 갖가지 무용담이 깃들어 있었고, 그들의 용맹은 데마시아 방방곡곡의 술집과 난로 곁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로 전해졌다.

검은 머리칼과 예리한 눈매, 수염을 기른 남자는 디아도로라는 검사로, 혼자서 꼬박 하루 동안 무장한 트리파르 군단을 상대로 애도의 성문을 지켰던 일화로 유명했다. 그 옆의 남자는 잔델의 사바토르라는 이름으로, 100년마다 한 번씩 깨어나 피의 향연을 즐기는 흉측한 용지렁이를 처치한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 덕분에 용지렁이는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놈의 송곳니는 지금 자르반 왕의 알현실에 걸려 있고, 그 옆에는 그의 아들과 정체불명의 여인이 함께 가져온 용의 해골이 걸려 있었다.

사바토르보다 체격은 작지만 위압감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는 쪽은 바리야라는 여전사로, 던홀드에서 바다늑대 함대 습격 작전을 지휘했다. 바리야는 놈들의 배를 불태우고 함대를 거의 궤멸시켰을 뿐 아니라 광전사 우두머리를 베었다. 바리야의 쌍둥이 형제인 로디온은 먼 북쪽 프렐요드의 항구인 프로스텔드까지 배를 타고 나아가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그 누구도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와 행패를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럭스는 그들 하나하나를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 밤 식탁에서 그들의 무용담을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진력이 났다. 물론 그들은 데마시아의 영웅이었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바토르가 용지렁이의 목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거나, 바리야가 쪼개진 노로 그렐몬을 후려쳐 죽였다는 얘기는 열 번도 넘게 들어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럭스와 불굴의 선봉대는 포스배로우로 향했고, 가렌은 여동생과 나란히 말을 몰았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는 해가 중천을 넘어설 때까지 도시를 돌아다니며 행방불명된 치안판사의 아들의 행적과 더불어 무언가 사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수색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고 했다. 하기야 이토록 요란하게 행차했으니 그 어떤 악마의 종복이라도 일찌감치 달아나 어디론가 숨어버렸을 것이었다. 묵직한 갑옷을 걸친 다섯 명의 전사가 기척 없이 돌아다니기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으니까. 럭스 또한 마법의 힘이 돕지 않았더라면 아까 갈림길에서 어둠의 힘이 덮쳐드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너 진짜로 포시안 증조부님의 무덤에 가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그렇게 말했을 텐데?"

"그랬지." 가렌이 대꾸했다. "놀랍지는 않은데, 어머니께서 네가 전에는 여기 오는 걸 싫어했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아서."
"어머니가 별 걸 다 기억하시네."

"그러게 말이야." 가렌은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고귀하신 럭산나 크라운가드께서 무언가를 안 좋아하시면 하늘은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퍼붓고, 숲속 동물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지 않던가?"

"내가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애 같다는 소린데."

"전에는 그랬잖아." 가렌은 싱긋 웃었지만, 말 속의 뼈를 다 감추지는 못했다. "네가 무슨 일을 벌이면 그 뒷수습을 하는 건 내 몫이었지. 어머니께선 항상,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럭스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절대 오빠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사람들은 가렌이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성격이며 전술과 계략에 밝은 건 전쟁터에서만 그럴 뿐이라고 여겼다. 가렌이 예민하다거나 교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럭스는 그것이 사람들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가렌이 저돌적인 전사라는 것은 옳았다. 하지만 저돌적이라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오빠는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럭스가 물었다.

가렌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굳이 말하라면, 그냥 가출한 것 같은데. 아니면 모험이라도 떠났다가 숲에서 길을 잃은 거겠지."

"어둠의 마법이 그 아이를 납치했다고는 생각 안 하는 거야?"

"그것도 가능한 얘기지만, 바리야와 로디온이 불과 반 년 전에 여길 지나갔었는데 수상한 마법 같은 건 찾아내지 못했어."

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스배로우에서 하룻밤 자고 왔어?"

"아니." 가렌이 대답했다. 그들은 도시가 보이는 쪽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

"저기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사바토르가 일몰의 햇빛을 가리느라 한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말했다.

가렌의 시선이 부하가 말하는 곳으로 향하더니,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셨다. 몸가짐도 일순간에 달라졌다. 온몸의 근육이 당장이라도 무슨 행동을 취할 듯 팽팽히 긴장했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눈빛이 매서워졌다. 불굴의 선봉대는 즉각 가렌의 옆에 늘어서며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럭스가 말했다.

화가 잔뜩 난 군중이 비틀비틀 걷고 있는 어떤 남자의 뒤를 따라 시장 광장으로 몰려가는 중이었다. 군중이 뭐라고 외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외침이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선봉대! 전속력으로." 가렌이 박차를 가하며 말했다.

불꽃별이도 아주 빠른 말이었지만 곡물을 먹여 키우는 데마시아의 군마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럭스가 성문을 통과할 무렵, 성난 외침 소리는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불꽃별이의 옆구리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말굽은 연신 자갈과 부딪치며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럭스는 시장 광장에 이르자 불꽃별이를 억지로 멈춰세우고는 말등에서 뛰어내렸다. 눈앞에는 데마시아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안 돼, 이건 안 돼..." 럭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경비대원 두 명이 흐느껴 우는 남자 하나를 질질 끌어 보통 때는 가축을 사고팔 때 쓰는 경매용 단 위로 데려가고 있었다. 남자가 걸친 옷은 피에 절었고, 애처로울 정도로 울부짖고 있었다. 사법관을 상징하는 흰 족제비 털로 가장자리를 두른 로브를 입고 데마시아 치안판사의 청동 날개핀을 꽂은 여자가 남자 앞에 섰다. 치안판사 지젤인 듯했다. 포스배로우 주민 수백 명이 광장을 메운 채 남자를 향해 고함을 질러댔다. 그들의 증오심이 어찌나 강렬한지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럭스의 몸속에서 마법의 힘이 솟아나 피부 표면으로 올라왔다. 럭스는 내면의 빛을 애써 억누르며 군중을 헤치고 남자 쪽으로 나아갔다. 가렌이 단 위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알도 다얀." 지젤 치안판사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격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대를 살인자이자 어둠의 마법사에게 협조한 자로 부르겠다!"

"아니에요!" 남자가 울부짖었다. "당신들은 몰라요! 그것들은 괴물이었어요!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요! 놈들의 진짜 얼굴을! 어둠, 오로지 어둠뿐이었다고요!"

"어서 자백해라!" 지젤이 외쳤다.

군중이 화답하듯 소리를 질렀다. 복수를 갈망하는 먹먹한 외침이 모두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경매 단으로 돌진하여 알도 다얀의 몸뚱이를 산산조각낼 기세였다. 아니, 연단의 각 모서리에 검을 뽑아든 채 서 있는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 아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냐고?" 럭스는 겨우 오빠 곁으로 와서 물었다.

가렌은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단 위에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놈이 잠들어 있던 자기 아내와 아이를 죽였어. 그러고는 집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에 있던 이웃 사람들에게 도끼를 휘둘렀지. 세 명이나 희생당한 끝에 간신히 붙잡았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제야 가렌은 시선을 돌려 럭스를 보았다. "왜 그랬겠어? 이 부근에 마법사가 있는 게 틀림없어. 어둠이 이 지역에 스며들어 있는 거야. 선량하고 충실한 데마시아 인을 부추겨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할 수 있는 건 어둠을 퍼뜨리는 마법사뿐이겠지."

럭스는 잔뜩 화가 나서 쏘아붙이려다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그리고 가렌을 밀어붙이고 계단을 올라가,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레이디 크라운가드? 왜 이러십니까?" 지젤이 말했다.

럭스는 지젤을 무시하고, 남자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남자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고, 몽둥이나 주먹으로 맞았는지 한쪽 눈이 부어올라 거의 감겨 있었다. 코에서는 피와 콧물이 섞인 액체가 흘러내렸고, 찢어진 입술 위로는 침이 여러 줄기 늘어져 있었다.

"나를 봐요." 럭스가 말하자, 선해 보이는 남자의 눈이 럭스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 기를 썼다. 흰자위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고 눈가는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어 며칠 동안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선량한 시민 다얀이여, 왜 가족을 죽였는지 내게 말해 주세요. 왜 이웃을 습격했는지 말해 보세요." 럭스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가족, 이웃이 아니었어요. 내 눈으로 봤습니다. 놈들은... 괴물이었어요..." 남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둠이 덮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놈들의 진짜 얼굴을 봤어요! 그래서 죽였어요! 그래야만 했어요! 죽여야만 했다니까요!"

지젤 치안판사가 다가왔다. 럭스는 고개를 들었고, 치안판사의 얼굴에 영혼이 찢길 듯 괴로운 슬픔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지난 이틀 동안 십 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치안판사는 역겹다는 눈길로 알도 다얀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네가... 우리 루카를 죽였나?" 그녀의 목소리는 슬픔에 사무쳤다. "네가 내 아들을 죽인 거냐? 그 애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복수를 요구하는 외침 소리가 군중을 휩쓸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알도 다얀의 친구와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지금 당장 다얀을 죽이라며 고함을 쳤고, 진흙과 똥덩어리 몇 개가 다얀에게 날아들었다. 다얀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경비대원의 손을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입가에는 침과 피가 섞인 거품이 일었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니까!" 다얀은 사람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외쳤다.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그냥 어둠이었다고. 어둠뿐이었어. 당신들 중에도 그 괴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럭스는 지젤 치안판사를 돌아보았다.

"루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지젤의 얼굴에는 슬픔 외의 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럭스는 그 아래에 말 못할 수치심이 언뜻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치안판사의 눈은 충혈되었고 피로 때문에 눈가는 짙은 그늘이 드리웠지만, 그래도 표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럭스가 어릴 때, 내면의 마법을 통제하지 못해 겉으로 그 힘이 드러날 때면 어머니의 눈에서 항상 보이던 그 표정이었다. 또한 오빠 가렌이, 여동생은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떠올리던 그 표정이기도 했다.

"무슨 뜻이었죠?" 럭스는 다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지젤이 말했다. "아무 뜻도 없었어요."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점에서 다르죠?"

"그냥... 달라요."

럭스는 전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돌리는 상황을 겪어 보았기에, 문득 치안판사의 아들이 어떤 면에서 다르다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됐어." 가렌이 말했다. 그는 단으로 올라오며 검집에서 커다란 장검을 뽑아들었다. 석양을 받아 검신이 번득였다. 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했다.

"오빠, 안 돼." 럭스가 말했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내가 이 사람하고 얘기를 좀 더 해볼게."

"그놈은 괴물이야." 가렌은 검을 돌려 어깨 위로 치켜올렸다. "악마의 종복은 아닐지 몰라도, 살인자인 건 확실해. 살인을 저지른 자가 받을 처벌은 하나뿐이지. 치안판사님?"

지젤은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을 럭스에게서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도 다얀, 그대에게 유죄를 선언한다. 또한 불굴의 선봉대인 가렌 크라운가드로 하여금 데마시아의 정의를 시행할 것을 요청한다."

다얀은 고개를 쳐들었다. 럭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무언가 껄끄러운 감정이 다얀을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속삭이는 느낌. 그 느낌은 럭스가 미처 확신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차디찬 바람 한 줄기가 휙 지나가는 듯한 감각 때문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다얀의 팔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정신 나간 방랑자가 발작이라도 일으킨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목이 잔뜩 쉰 채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기절해 버렸다. 가렌은 검을 높이 치켜들고 사형집행인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했다. 다얀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사형 집행을 독촉하는 군중의 고함 소리에 거의 묻혀 버렸지만, 가렌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럭스는 간신히 몇 마디를 이어맞출 수 있었다.

"빛이 사라지고 있다..."

"잠깐!" 럭스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가렌의 검은 이미 할 일을 다한 뒤였다. 포스배로우 주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다얀의 몸뚱이가 풀썩 주저앉았고 피가 흘러나왔다. 무덤 구덩이에서 시커먼 즙이 흘러나오듯 연기가 그의 몸에서 나선을 그리며 피어올랐다. 갑자기 머리에서는 흉측한 발톱과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눈을 지닌 망령이 튀어나왔다. 지젤 치안판사는 충격을 받고 움찔했다.

어둠의 망령은 사악하게 낄낄거리더니 치안판사에게 달려들었다. 지젤은 비명을 질렀다. 망령은 그녀의 몸을 통과하더니 바람에 재가 흩어지듯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럭스는 망령이 사라지며 남긴 숨결을 느꼈다. 그 에너지는 불쾌하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감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지젤 치안판사는 그대로 쓰러졌다. 안색은 잿빛이 되었고 극심한 공포로 흐느끼고 있었다.

럭스도 주저앉다시피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형상화된 환상이 무수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산 채로 무덤에 매장당한 갑갑함, 오빠의 손으로 데마시아에서 쫓겨나는 먹먹함, 느리고도 고통스럽게 죽는 천 가지 방법이 한꺼번에 엄습하며 숨통을 조였다. 럭스의 내면에 자리한 빛이 공포스러운 환상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럭스는 입속에 가득 찬 죽음의 맛을 침으로 뱉어냈다. 그녀의 숨결에서 빛의 입자가 희미한 빛을 냈다.

"럭스..."

가렌이 속삭이듯 말했다. 한 순간, 럭스는 미친 듯이 환성을 지르는 군중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오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럭스는 울고 있는 치안판사에게서 돌아섰다. 마법의 힘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온몸을 휩쓸었다.

군중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럭스, 이게 무슨 일이지?" 가렌이 말했다.

럭스는 눈을 깜박여 아직도 머릿속을 맴도는 끔찍스러운 환상을 쫓아냈고, 가렌이 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불굴의 선봉대 네 명이 단 위로 뛰어올라와 가렌의 곁에 섰다.

그 순간,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하나씩 둘씩 땅바닥에 쓰러졌다. 마치 갑작스레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럭스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태양은 포스배로우의 서쪽 성벽 너머로 막 사라지려는 참이었다. 럭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시커먼 수증기로 만들어진 것 같은 형상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주민들의 몸뚱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똑같은 형상은 하나도 없이 제각기 다른 모습이었다. 녹서스 갑옷을 걸친 악마,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미, 머리가 여럿 달린 뱀, 탑처럼 우뚝 솟은 몸집에 서리 도끼를 든 악마의 전사, 흑요석 단검 같은 송곳니가 입 안 가득 나 있는 거대한 비룡, 그 외에도 제정신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갖가지 끔찍스러운 형체들이었다.

“사악한 마법이군." 가렌이 단언했다.

살아 있는 그림자 같은 형체들은 단으로 다가왔다. 마치 허공 속을 미끄러지듯,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무시무시한 악몽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저것들은 대체 뭐죠?" 바리야가 물었다.

"포스배로우 주민들이 꾸었던 악몽 속에서도 가장 사악한 존재들이에요." 럭스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사바토르가 물었다.

"그냥 알아요." 럭스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곳에서 저것들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럭스가 익힌 능력은 다른 곳에서 더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것을. 그리고 불굴의 선봉대는 이곳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럭스는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쥐고 길게 휘파람을 분 다음, 가렌에게로 돌아섰다.

"내가 이 사태를 막을 수 있어."

"어떻게 하려고?" 가렌이 악마들의 형상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물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죽지 말아 줘."

휘파람 소리를 들은 불꽃별이가 악마들을 뚫고 달려왔고, 럭스는 단 가장자리로 향했다. 악마들은 녀석을 공격하지 않았다. 지금 포스배로우를 엄습한 사악한 힘은 말 한 마리의 꿈과 악몽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럭스는 단에서 뛰어내리며 불꽃별이의 갈기를 붙들었고, 가뿐한 동작으로 단번에 말등에 올라탔다.

“어디 가는 거야?”가렌이 물었다.

불꽃별이는 뒷다리로 버티며 일어섰고, 럭스는 안장에 앉은 채 몸을 틀며 오빠에게 답했다.

“아까 말했잖아. 포시안 증조부님께 예를 표하러 갈 거라고!”

가렌은 여동생이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쓰러진 주민들과 악몽의 형상들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악마들이 연신 발톱으로 럭스를 움켜쥐려 했지만, 그녀와 불꽃별이는 용케도 매번 공격을 피했다. 악마 군단을 벗어난 럭스는 짧은 순간 멈춰서서 황금으로 끝을 감싼 지팡이를 오빠 쪽으로 들어올리며 외쳤다.

"데마시아를 위하여!"

불굴의 선봉대는 검으로 방패를 치며 화답했다.

"데마시아를 위하여!" 그들도 한 목소리로 외쳤다.

럭스는 말을 돌려 다시금 전속력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 가렌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곧 시작하게 될 백병전에 대비하여 근육을 풀었다. 그러고는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위치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사들은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바리야와 로디온은 가렌의 왼쪽에,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오른편에 섰다.

"우리는 불굴의 선봉대다." 가렌은 검을 수직으로 치켜올렸다. "불굴의 용기와 예리한 눈으로 검을 인도하라."

맨 처음 도달한 것은 칠흑처럼 새까만 악마 사냥개들이었다. 놈들은 칼날 같은 송곳니와 번뜩이는 이빨을 내세우며 단 위로 뛰어올랐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는 방패를 맞대고 검을 들어 적을 맞았다. 강철 방패의 벽이 놈들을 튕겨냈다. 그림자와 악의로 만들어진 형상임에도, 적의 힘과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완강하고 포악했다. 가렌은 한 발을 딛고 나와 괴물의 허리께에 검을 찔러넣었다. 척추가 있을 법한 위치였다. 놈은 귀를 찢을 듯 새된 비명 소리와 함께 폭발하더니 검은 먼지로 변했다.

가렌은 검을 후퇴시켜 비스듬히 들었다가 방향을 바꾸어 다른 악마의 입속으로 찔러넣었다. 가렌이 손목을 비틀며 어깨 힘으로 검을 내리꽂자 악마는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가렌은 놈의 가슴팍을 짓밟았고, 놈은 으르렁거리다가 폭발해 버렸다. 이번에는 탑처럼 거대한, 프렐요드 전사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가렌을 덮쳤다. 가렌은 검을 위로 치켜들어 공격을 막아냈지만, 엄청난 기세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 가렌은 이를 악물며 내뱉고는 고함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그러고는 머리가 있을 법한 그림자 부분에 칼을 밀어넣듯 꽂았다. 전사의 형상이 폭발하며 어김없이 재 같은 먼지가 피어올랐고, 가렌은 곧장 검을 돌려 이번에는 다른 악마의 배를 노렸다.

사바토르는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사냥개의 목을 쳤고, 디아도로는 연신 쉬익거리는 거대한 뱀을 방패로 내리쳐 두동강이냈다. 바리야가 얼굴 형체도 없이 송곳니만 잔뜩 난 악마 전사를 칼자루로 내리치자, 쌍둥이인 로디온의 검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림자 형상의 악마들은 치명타를 입는 순간 폭발하며 재인지 먼지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가렌의 검이 번뜩이더니 은빛 날이 전갈처럼 생긴 괴물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전갈이 꼬리 끝 갈고리로 가렌의 머리를 노렸지만, 사바토르의 방패가 막아냈다. 곧이어 바리야의 검이 괴물의 다리를 잘라냈고, 놈은 폭발하며 사라졌다. 이제는 흉측하게 생긴 절름발이 괴물이 로디온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로디온은 형체 없는 놈의 얼굴 부분에 검을 찔러넣었고, 괴물은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그림자 괴물을 하나 처치할 때마다 곧장 다른 놈이 빈 자리를 메웠다.

"등 맞대기 진형!" 가렌이 외쳤다. 다음 순간 다섯 전사들의 어깨 갑옷이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불굴의 선봉대는 순식간에 등을 마주댄 원형 대열을 만들었다. 마치 어둠에 맞서는 빛의 요새 같았다.

"데마시아의 힘을 보여주리라!"

럭스는 숲속을 내달렸다. 양옆을 스쳐지나가는 나무들이 희미해 보일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다. 벌어진 지팡이 끝에서 발산되는 빛이 오솔길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아무리 빛의 인도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숲을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렌과 불굴의 선봉대가 맞서야 하는 악몽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상상력은 악몽이라는 물을 무한정 공급하는 샘물이나 다름없었다. 죽음의 공포, 질병의 공포,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공포...

럭스는 바로 오늘 아침에 택했던 길을 따라 달렸다. 마법의 힘이 불꽃별이를 이끌었고, 녀석이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주었다. 그렇게 밤의 숲길을 질주한 끝에, 럭스와 불꽃별이는 마침내 갈림길 바로 앞까지 왔다. 불꽃별이는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 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사리가 우거져 잘 보이지도 않는 중간 길로 곧장 뛰어들었다.
증조부 포시안의 무덤으로 향하는 북쪽 길이었다.

길은 갈수록 구불거렸고, 양옆은 가파른 협곡이거나 바위투성이 경사가 이어졌다. 마법의 빛이 앞을 비춰주고 불꽃별이도 자신만만했음에도, 럭스는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무덤이 가까워질수록 풍경도 변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어린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나무에서는 불쾌한 느낌의 찐득한 검은 수액이 흘러내렸고, 기괴하게 비틀리고 옹이투성이인 가지들은 구부러진 갈퀴손 같은 끝으로 럭스의 머리칼과 망토를 잡아당겼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은 마치 송곳니가 늘어선 거대한 입처럼 보였고, 높직한 가지에는 독을 잔뜩 품은 거미들이 거미줄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발밑의 땅은 기묘하게 물컹거렸고, 기분 나쁜 금속 냄새가 나는 물 웅덩이가 곳곳에 패여 있었다. 마치 숲속 요정이 가꾸다가 버린 과수원 같았다.

불꽃별이는 그림자가 가장자리를 빙 두르고 있는 공터 입구에서 멈춰섰다. 녀석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두려움에 코를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진정해." 럭스는 애마를 달랬다. "포시안 님 무덤이 바로 앞이야. 조금만 더 가면 돼."

하지만 말은 한 발짝도 더 가려 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나 혼자 갈게."

럭스는 말등에서 내려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공터로 들어섰다. 지팡이 끝에서 나오는 빛은 마치 폭풍우 속 홀로 빛나는 초롱불 같았지만, 간신히 앞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포시안의 무덤 봉분은 어둠 속에서 보니 풀이 난 야트막한 언덕 같았고, 꼭대기에는 돌을 대충 쌓아 만든 이정표 같은 것이 얹혀 있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로 올라갔고, 고대의 공포스러운 형상들이 소용돌이처럼 빙빙 돌며 자신들의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시안의 업적을 새긴 거대한 묘비는 꿈틀꿈틀거리는 검은 끈 같은 것이 휘감고 있었다.
묘비 앞에는 열두 살이나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아지경 상태에 빠진 듯, 야윈 상체가 느릿느릿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촉수들이 무덤에서 뻗어나와 마치 덩굴처럼 소년의 목을 휘감아 조르고 있었다.

"너, 루카니?" 럭스가 말했다.

럭스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소년의 상체가 딱 멈췄다.

소년은 럭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공허하고 시커먼 눈이 럭스를 응시했다. 럭스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소년은 무시무시한 미소를 지었다. 웃는다기보다는 얼굴에 틈이 생긴다고 표현해야 맞을 듯했다.

"이젠 아냐." 소년이 말했다.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날선 갈고리 같은 다리로 가렌에게 다가왔다. 불룩한 배에는 튀어나올 듯한 눈과 연신 닫았다 벌렸다 하는 입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가렌은 거미의 가슴팍을 검으로 찌르는 동시에 발로 차서 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거미의 몸통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다.

가렌은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검은 발톱 하나가 어깨갑옷을 치자 어깨 근육에 뼛속까지 저린 냉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갑옷의 금속은 갈라지지 않았고, 이음매도 풀리지 않았다. 발톱은 그대로 갑옷을 통과했다. 가렌의 온몸에 소름 끼치는 역겨움이 퍼져나갔다. 코에서는 습기찬 묘지의 흙냄새가 풍겼다. 몇 백년이나 된 무덤에서 파낸 듯한 썩은 흙의 악취였다. 가렌은 늘 훈련했던 대로 그 사악한 고통을 떨쳐냈다.

그때 갈고리 검 하나가 로디온의 갑옷 아래를 파고 들며 로디온을 옆으로 거꾸러뜨렸다. 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방패를 내려뜨렸다.

"자세 유지해!" 가렌이 소리쳤다. "고통을 떨쳐내야 한다."

로디온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림자 형상들은 더욱 미쳐 날뛰며 불굴의 선봉대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이 끝도 없이 몰려옵니다!" 바리야가 외쳤다.

"그럼 우리도 끝까지 싸울 수밖에!" 가렌이 대답했다.

럭스는 오로지 이 으스스한 공터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소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년의 눈 속에서 어둠의 힘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인간의 취약한 마음을 풍부한 자양으로 삼는 악몽들이 깨어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냉정한 지적 존재가 럭스를 요모조모 평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끄러운 동작으로 일어섰다.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는 그림자들이 공터 가장자리로 모여들었다. 온갖 괴물과 공포스러운 형체들이 럭스 주변으로 몰려들며 그녀의 눈이 닿지 않는 바로 바깥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고 머리통 속에 악몽이 잔뜩 들어 있구나." 소년이 말했다. "돌멩이로 네 머리를 치면 그것들을 꺼내줄 수 있겠는데."

"루카, 이건 진짜 네가 아니야." 럭스가 말했다.

"그럼 뭔데? 네가 말해 봐."

"저 무덤 속의 악마지. 사람들이 포시안 증조부님을 매장할 때 악마도 죽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야."

루카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양 입꼬리를 너무 치켜올린 나머지 피가 작은 개울처럼 흘러 턱으로 떨어졌다.

"그래, 죽지 않았지. 그냥 잠들었던 거야. 스스로를 치료하면서, 부활시키면서, 대비했던 거지."

"뭘 대비했다는 거야?" 럭스는 억지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소년은 쯧쯧 소리를 내더니 경고를 하듯 한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럭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가 없었다.

"그래, 거기까지야." 소년은 몸을 숙여 모서리가 날카로운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 악몽들을 내가 꺼내줄게."

"루카..." 럭스는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으나 말을 할 수는 있었다. 아직까지는. "네가 싸워서 이겨내야 해. 넌 할 수 있어. 네 속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으니까. 나는 알아. 그래서 포스배로우에서 도망친 거잖아? 그렇지? 그래서 여기로 온 거고. 악마를 물리쳤던 사람 곁에 있고 싶어서 말이야."

소년의 육신을 걸치고 있는 존재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자 그 웃음 소리에 주변의 풀들이 시들어 버렸다.

"요놈의 눈물이 마치 사막에서 만난 물 같았지." 소년은 앞으로 다가와 럭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두개골의 어느 쪽을 부수는 게 좋을까 가늠하기라도 하듯. "그 눈물 덕분에 내가 깨어나서 양분을 얻을 수 있었거든. 너무 오랫동안 잠들었던 바람에, 필멸의 존재가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달콤하고 맛좋은 것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니까."

소년은 한 손을 뻗어 럭스의 뺨을 쓸었다. 악마의 손길이 닿는 순간, 럭스의 몸에서 서늘한 공포의 불꽃이 튀었다. 소년이 손가락을 떼자, 연기 같은 실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왔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공포가 럭스의 전신을 덮쳤다. 럭스는 숨이 막혀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난 녀석을 잠재웠지. 그랬더니 녀석의 꿈에서 공포가 자라나 형상을 갖추었지 뭐야." 소년이 말했다. "물론 힘은 약해. 네 몸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용광로에 비하면 그냥 작은 불씨 수준이지. 그 정도 힘으로는 내 형상을 갖출 순 없었지만, 어린아이의 공포심은 내겐 만찬이나 다름없어.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데마시아는 이제 공포의 악몽의 세계가 될 거야. 요 꼬마나 너 같은 인간들에게 말이지."

럭스의 내면의 마법이 이 악마의 힘에 밀려났다. 어둠이 공터를 가득 채우면서, 럭스의 빛은 이제 희미한 불꽃 정도로 약해져 버렸다. 하지만 단 하나의 불꽃이라도 숲 전체를 집어삼키는 대화재가 될 수 있는 법.

"사람들은 요 루카라는 꼬마를 증오했지. 요놈도 그걸 알고 있었어. 너희 필멸의 존재들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걸 보거나 접하면 일단 겁부터 먹거든. 그 정도 두려움이면 충분해. 그때부터는 부채질만 살살 해주면 아주 정교하고도 공포스러운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럭스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것은 그 힘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럭스는 몸속으로 파고든 공포와 멀찍이 떨어진 마음 한 구석에 조용히 불꽃을 피워올렸고, 그 불꽃의 따스함이 온몸으로 조금씩 번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루카, 제발." 럭스는 안간힘을 쥐어짜내 힘겹게 말했다. "이건 네가 싸워서 이겨내야 해. 그놈이 너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요 꼬마놈은 네 말을 못 듣는다니까. 설령 들을 수 있다 해도 무서워서 아무 짓도 못할 걸. 사람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요 꼬마놈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꼬마놈이 잘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 것, 저 끔찍한 환상이 바로 요 꼬마놈의 작품이라는 것 말이야. 그 끔찍한 악몽을 모두들 뼈저리게 맛보지 않았나?"

럭스의 양팔에 고통이 퍼져나가더니 가슴께로 옮아갔다. 마법의 힘이 커지고 있음을 눈치챈 듯, 소년의 새까만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 두려움은 내가 너무나 잘 알아." 럭스가 말했다. "하지만 난 두려움에 굴복하진 않아."

럭스는 지팡이를 소년 쪽으로 내뻗었다. 지독한 통증 때문에 비명이 새어나왔다. 팔다리가 마치 불이 붙은 듯 아팠기에, 공격은 어설펐다. 소년은 껑충 뒤로 피했지만 한 발 늦었다. 지팡이 끝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소년의 뺨을 스쳤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불굴의 선봉대는 잔인할 정도로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검술과 어떤 타격도 막아내는 방패술로 전투를 이어갔지만, 그들이라고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림자 형상들이 다섯 전사들에게 가까이 다가들었다.

무기를 잔뜩 움켜쥔 사람 떼 같은 형상이 왼쪽에서 덤벼들었고, 디아도로는 놈의 몸통을 내리쳤다. 하지만 놈의 공격이 디아도로의 방패를 맞고 튕겨나오며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디아도로는 앓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검을 들어 용의 머리가 달린 시커먼 괴물의 배에 찔러넣었다.

"정신 차려! 놈들이 다가오기 전에 해치우라고!" 사바토르가 질책했다.

가렌은 일격을 맞고 몸을 뒤트는 악마의 배를 찔러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깊숙이 찔러넣고 손목을 비틀 것. 멈추지 말 것.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큼지막한 곤충 같은 머리통에 단검 같은 송곳니가 잔뜩 난 괴물이 포효했다. 가렌은 놈의 눈을 베었다. 놈은 비명을 내지르고는 연기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두 놈이 더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를 여유가 없었다. 한 놈을 검자루로 후려쳐 다른 놈의 가슴팍으로 밀어붙인 다음 검으로 놈의 배를 찔렀다가 빼냈다. 괴물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가렌은 한 발짝 물러나 바리야와 로디온과 나란히 섰다. 다들 투구에서부터 정강이받이에 이르기까지 재를 흠뻑 뒤집어쓴 상태였다.

"여기서 이대로 싸운다." 가렌이 말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디아도로가 물었다.

가렌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먼 숲속에서 빛 한 점이 아련히 빛나고 있었다.

"럭스에게 필요한 시간만큼." 가렌은 각오를 다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림자 악마들이 다시 다가왔다.

럭스는 내면의 빛을 모아 루카에게 던졌다. 눈이 멀어버릴 듯 환한 빛이 폭발하며 공터를 비추었다. 소년의 몸속에 깃들었던 악마가 떨어져나왔다. 놈은 격노와 절박함에 사자후 같은 비명을 토해냈다. 새하얀 밫이 럭스를 감싸더니 곧이어 주변의 모든 것이 그 빛 속으로 들어갔다. 럭스의 어마어마한 힘 앞에 어둠의 악마는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다. 그녀의 작열하는 빛 앞에서 그림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빛은 점점 커지면서 무덤 주변과 숲속을 채웠고, 그 광휘 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직 순백의 끝없는 공간만 존재할 뿐이었다. 럭스의 앞에는 양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자세로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은 작고 겁먹은 아이의 눈이었다.

"저를 도와주려 오셨어요?"

"그럼." 럭스는 앞으로 걸어가 소년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나하고 같이 돌아가야 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못해요. 너무 무서워요. 저 밖에 악몽을 몰고 다니는 아저씨가 있어요."

"맞아. 하지만 우리가 그 남자를 물리칠 수 있단다. 내가 도와줄게."

"정말요?"

"내가 널 도와주게 해준다면 말야." 럭스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알아. 사람들이 네 능력을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서운 거지? 나도 너와 똑같은 일을 겪었어. 하지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네 안에 있는 힘, 그건 사악한 게 아니야. 어둠의 마법도 아니고. 그건 빛이야. 그 빛을 통제할 수 있도록 내가 너를 도와줄게.”

럭스는 한 손을 내밀었다.

“정말요?” 소년이 말했다.

“그럼, 약속할게. 넌 혼자가 아니야, 루카."

소년은 물에 빠진 사람이 밧줄을 잡듯 럭스가 내민 손을 덥석 붙들었다.

빛이 다시 한 번 커지면서 눈이 멀 정도로 광채를 발산했다. 잠시 후 광채가 가라앉자, 공터는 럭스가 7년 전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봉분을 덮은 풀은 맑은 초록색이었고, 돌을 쌓은 이정표와 묘비에는 포시안의 업적이 새겨져 있었다. 숲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던 어둠의 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수의 발톱 같은 가지를 달고 있던 나무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무들로 돌아왔고, 암청색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밤에 깨어나 사냥을 다니는 새들이 내는 소리가 나뭇잎 천정에 반사되어 돌아왔다.

루카는 여전히 럭스의 손을 꼭 붙든 채, 럭스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악몽을 몰고 다니는 아저씨는 사라졌나요?"

"그런 거 같아." 어둠의 힘이 내뿜던 역겨운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당분간은. 무덤 속으로 들어간 건 아닐 테고, 적어도 이 근방에는 없어.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이제 집에 가도 되나요?" 루카가 물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갈 수 있단다."

온몸이 마비될 것 같은 냉기가 가렌을 엄습했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팔다리에 어둠의 괴물들이 발톱을 박아넣었다. 핏속으로 들어온 얼음장 같은 기운이 심장과 영혼을 파고들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이미 쓰러졌고, 안색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로디온은 무릎을 꿇은 채 목에 갈고리발톱이 달린 그림자 손이 휘감겨 있었다. 바리야는 여전히 싸우는 중이었다. 방패를 든 손은 힘없이 옆구리에 축 처져 있었지만, 검을 든 손은 여전히 적을 베어넘기고 있었다.

가렌의 입속에 재와 절망의 맛이 배어났다. 그는 패배를 모르는 전사였다. 적어도 이런 패배는... 자르반 4세가 죽었다고 믿었을 때에도 가렌은 싸움을 계속해야 할 의지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을 한 번 몰아쉴 때마다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탑처럼 거대한 그림자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둠의 도끼를 들었고,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달린 악마였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처치했던 야만인 전사의 모습 같기도 했다. 가렌은 검을 들어 올렸다. 데마시아 전사답게 전투 함성을 지르며 죽음을 맞이할 작정이었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여름의 미풍이 불어왔다. 마치 해가 뜨기라도 하듯, 북쪽 하늘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림자 악마들은 태풍에 바짝 마른 낙엽이 날아가듯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바람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채가 마을 광장을 한바탕 휩쓸자 어둠의 그림자는 그 기세에 밀려 물러났다.

가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버텨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로디온은 허파 가득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고, 쓰러져 있던 사바토르와 디아도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굴의 선봉대는 주변을 돌아보며 마지막 남은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포스배로우 주민들도 정신이 들어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바리야가 헐떡이며 물었다.

"럭스 덕분이지." 가렌이 말했다.

루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빛의 인도자 사원의 퍼닐에게 루카를 지도해 줄 것을 신신당부한 후, 럭스와 가렌은 불굴의 선봉대를 이끌고 포스배로우의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도시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길에서 마주치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손에 잡힐 듯 무거운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포스배로우 주민들 중에 처형 이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한 남자의 죽음에 한몫 거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베일의 여신께서 그대를 자신의 품 안에 받아들이시기를." 다얀의 시신을 묻은 곳을 지날 때 럭스가 말했다.

“그자한테 그런 자비를 베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렌이 말했다. “그자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어."

"그래, 맞아. 하지만 그랬는지 오빠도 알잖아?”

“그게 뭐가 중요해? 그놈은 범죄를 저질렀고, 합당한 대가를 치렀어.”

“당연히 중요하지. 알도 다얀은 친구이자 이웃이었어." 럭스가 말했다. "포스배로우 사람들은 주막에서 다얀과 같이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만나면 농담을 주고받았어. 아들 딸들은 다얀의 아이들과 같이 놀았고 말이야. 그렇게 판결을 서두르는 바람에 왜 다얀이 그런 살인 행위를 저질렀는지를 이해하고 납득할 시간이 전혀 없었잖아.”

가렌은 시선을 눈 앞의 땅에 고정한 채였다.

“사람들은 이해 같은 건 원하지 않아."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럭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자잘한 감정을 용납하지 않아. 데마시아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어. 북쪽은 야만족이 드글드글하고, 동쪽은 탐욕스러운 제국이 우릴 넘보고 있지. 게다가 어둠 마법사의 힘이 바로 우리 발밑까지 파고들어와 있다고. 우리는 만사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어. 우리의 판단에 의심이 깃든다면, 데마시아는 약해지겠지. 난 데마시아가 약해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거야.”

“이런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론.” 가렌이 대꾸했다. "그게 내가 행동하는 이유야.”

“데마시아를 위해서?”

“데마시아를 위하여.” 가렌이 말했다.


갈리오
새롭게 업데이트된 갈리오는, 기존에 공개되었던 갈리오 배경 이야기, '깨어난 영웅' 단편 소설과 이번 유니버스 페이지에서 새롭게 공개된 '소녀와 석상'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소녀와 석상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소녀는 조그맣게 되뇌었다.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다고 느낄 때면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소녀는 고작 13살이었지만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해 가라앉히는데 이미 익숙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주문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오늘 소녀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서 완전히 혼자여야 한다.

날카로운 눈빛의 보초병이 지키고 있는 도시의 성문을 향해 짐짓 씩씩한 척 걸어가는 소녀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애쓰면서 자꾸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보초병이 그녀를 세운다면 아마 겨우 다잡은 마음이 왈칵 무너져내려 모든 걸 쏟아낼지도 모른다. 그럼 적어도 다 끝나긴 하겠지. 소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치형 성문을 지나 도시 밖 너른 평야로 향하는 소녀에게 보초병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 도로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소녀는 나무가 우거진 산비탈 한쪽에 움푹 들어간 자리를 찾았다. 다시 한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마음 놓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둑이 터지듯 쏟아진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려 내렸다. 이렇게 울고 있는 모습을 누가 본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데마시아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명랑하게 인사를 건네는 쾌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다른 얼굴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추하고, 너무나 데마시아답지 않은 얼굴이.

한참을 울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눈에 어린 눈물을 닦으며 용기를 짜내 조금 전 사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친구들과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소녀는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시선이 팔렸다. 현장 작전에 대한 선생님의 지루한 강의보다 후크시아 꿀벌들의 춤이 훨씬 재미있었다. 잘 짜인 군무는 아니었지만 생기 넘치는 무질서가 묘하게 아름다웠다. 벌들의 조화로운 춤에 푹 빠져 기분이 정말 좋다고 느낀 그 순간 갑자기 몸의 중심이 점점 따뜻해져 오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익히 아는 온기였다. 보통은 이불에서 빠져나온 깃털을 다시 집어넣듯 온기를 잘 달래 몸 안에 가두어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뜨거울 정도로 격렬했다. 전에 혼자 있을 때처럼 열기가 폭발해 무지갯빛으로 온 사방에 퍼질 것 같았다.

갑자기 가느다랗고 하얀 빛줄기가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새어 나왔다.

안 돼! 다른 사람이 보면 절대 안 돼! 소녀는 새어 나오는 빛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난생처음 너무 강한 그 힘에 압도되어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교실에서 나가야 했다. 소녀는 일어서서 짐을 챙겼다.

“럭산나,” 선생님이 불렀다. ”너 지금 어디로……”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소녀는 중얼거리며 아무런 설명도 없이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조용한 숲에서 한참 눈물을 쏟고 난 후, 그녀의 발길은 도시 반대편으로 향했다. 소녀는 이 사건으로 인해 치를 대가를 생각해보았다. 한 학생이 허락도 없이 교실을 뛰쳐나갔다는 소문이 성 전체에 빠르게 퍼질 것이다. 이런 교칙 위반엔 어떤 벌을 받게 될까?

그 벌이 무엇이든 그대로 교실에 있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교실에 그대로 있었다면 건물 전체를 눈부신 섬광으로 채우며 폭발하고 말았을 테고 결국 모두들 그녀가 마력이 생기는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거원들이 등장했겠지.

소녀는 마법을 쓰는 이들을 소탕하는 데 쓰이는 신기하게 생긴 장비를 들고 다니는 제거원들을 길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일단 제거원에게 발각되면 마력을 가진 이들은 왕국 밖 격리촌으로 쫓겨나 격리된다. 그리고 럭스의 가문이 속한 위대한 사회에는 다시는 발을 들일 수 없다.

그 점이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다. 가족들이 그녀를 가문의 수치로 여길 거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녀의 오빠는……아, 그녀의 오빠. 그녀는 가렌이 할 법한 말들을 생각하며 진저리를 쳤다. 소녀는 가끔 신비한 힘을 타고난 사람들이 영웅으로서 사회의 존경과 가족의 축복을 받는 세상에서 사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러나 소녀가 살고 있는 곳은 데마시아다. 마법의 파괴적인 힘을 잘 알고 그 힘을 악으로 정의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점점 절망적으로 변하는 상황을 생각하다 럭스의 발길이 멈춘 곳은 갈리오의 석상이 보이는 곳이었다. 거대한 석상은 먼 옛날 데마시아 군을 보호하기 위해 제작되어 군인들과 함께 국경 밖 전투에 동행했다. 페트리사이트로 만들어진 갈리오는 마법을 흡수하는 능력 덕분에 전투마법사들의 공격으로부터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전설에 따르면 갈리오는 충분한 마력이 몸속에 쌓이면 생명을 얻어 움직인다고 한다. 지금은 주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기억의 길에 산처럼 우뚝 서 있다.

럭스는 조심스럽게 석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오래된 거인이 그의 발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오늘 석상은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며 그녀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상상이긴 했지만 소녀는 그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럭스는 다른 데마시아인들과 달랐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찬란한 미소와 쾌활한 기운의 럭스는 진중하고 고지식한 데마시아인들 사이에서 단연코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바로 그 빛. 아주 어렸을 때부터 럭스는 자신의 심장이 가슴 속에서 뛰쳐나오려는 듯 뜨겁게 불타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땐 빛의 세기가 약했고 감추기도 쉬웠다. 하지만 이제 감추기엔 그 힘이 너무 강해졌다.

럭스는 죄책감에 휩싸여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자, 말해봐!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해보라고!” 럭스는 소리쳤다.

이런 모습은 그녀답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소리라도 지르니 상처 입고 지친 영혼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마음을 고르며 짧은 숨을 내쉬고 난 후 그런 식으로 감정을 내뱉은 것이 금방 부끄러워졌다. 세상에, 내가 정말 석상한테 소리를 지른 거야? 민망한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주위에 본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특정 시기가 되면 많은 여행자가 데마시아인의 결의를 상징하는 이 조각상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억의 길로 순례를 온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기억의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지 여기저기 살피던 중 저 위에서 건조하고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럭스는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 석상의 꼭대기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석상의 왕관에 둥지를 짓고 사는 새들이 있긴 했지만 새소리 같진 않았다. 마치 흙으로 빚은 무거운 항아리를 자갈 위로 끌고 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럭스는 한참 석상을 쳐다보았지만 석상은 미동도 없었다. 아마도 오늘 일 때문에 너무 지치고 힘들어 착각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럭스는 움직인 것이 무엇이든 한 번 더 움직여보라는 듯 석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로 그때, 정말로 뭔가가 움직였다. 석상의 눈이었다. 돌로 만든 커다란 안구가 아래쪽으로 돌아 땅 위에 있는 럭스를 보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충격으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거대한 석상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분명 그녀의 상상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다리가 최선을 다해 석상으로부터 멀리, 그리고 빨리 달아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아주 깊어서야 럭스는 집에 도착했다. 가족들이 있는 대저택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새하얀 아치형 입구로 들어섰다. 집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이 잠들어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온종일 도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수 킬로를 걸어 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 사항일 뿐. 잠자리에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오가사는 웅장한 로비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문을 쏘아보고 있었다.

“지금이 대체 몇 신줄 알고 있니?” 어머니가 물었다.

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보통 잠자리에 드는 시각을 훨씬 넘어 자정이 지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널 퇴학시키지 않기로 했다.” 오가사가 말했다. “이번 문제를 처리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니?”

럭스는 울고 싶었지만 종일 울어서인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들 그걸 봤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점점 심해지고 있구나. 그렇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걱정하는 것조차 지친 럭스가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말이야.” 그녀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네가 통제를 못 하고 있잖니. 계속 이러다간 결국 누군가 다치고 말 거다.”

럭스는 전투에서 마법사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육신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녹아버리고 영혼은 둘로 갈라졌다고 했다. 그런 파괴적인 목적으로 쓰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더 자책하고 싶었지만 온종일 끊임없이 감정의 격류를 겪었기 때문인지 그저 멍했다.

“내가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했단다.” 오가사가 말했다.

럭스는 욕지기를 느꼈다. 그녀의 병을 치료하는데 전문이라면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제거원이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은 친구야. 내가 진작에 불렀어야 했는데. 아주 신중한 사람이니까 믿어도 돼.”

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치욕의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어머니의 말처럼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신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치료제.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상담하러 오기로 했다.” 침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오가사가 말했다. “우리만의 비밀로 남을 거야.”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럭스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벌써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문제를 어둠 속에 묻어줄 깊은 잠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까다로운 문제는 하룻밤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언제고 또다시 폭발할 빛이 그녀 안에서 계속 커갈 것이다. 아침이면 제거원이 끔찍한 치료를 위해 약을 들고 도착할 것이다. 럭스는 치료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페트리사이트를 갈아 만든 약을 마시고 나면 여러 차례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친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소녀는 그 병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런 고통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그거야!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 번개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지금 막 떠오른 계획이 효과가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두렵기도 했지만 일단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고 나니 어렴풋한 희망도 느껴졌다.

더욱 깊어진 밤, 럭스는 미친 듯 온 길을 되돌아갔다. 새하얀 아치 입구를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가 성문 앞 보초들을 몰래 따돌렸다. 남쪽으로 쭉 내려간 후 기억의 길을 따라 수 킬로를 달려 갈리오의 석상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저기요?” 소녀는 자신이 석상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는 석상 거인이 밤의 정적 속에서 홀로 서 있는 단상으로 다가갔다. 페트리사이트로 만든 차가운 단상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놓았다. 페트리사이트는 무슨 맛이 날까? 분명 엄청 쓸 거야. 그녀는 만약 이 계획이 효과가 없다면 곧 알게 되리라 생각했다.

“저기, 당신이 마력이 생기는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 절 고쳐주세요. 전 진짜 데마시아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녀는 석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석상은 데마시아인의 삶처럼 고요하고 확고부동한 모습이었다. 오늘 밤엔 흔하게 날아다니던 박쥐조차 조용했다. 그녀가 몇 시간 전에 들었던 것, 아니 봤다고 생각했던것은 그녀의 상상이었나 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럭스는 단상에서 손을 뗐다. 그때였다.

“작은 소녀 사람.” 저 위에서 큰 울림이 들렸다.

럭스가 눈을 들어보니 거대한 석상이 고개를 아래로 기울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 바보야!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러니 너를 고쳐주지 않을 거야. 널 작은 벌레처럼 밟아 뭉갤 거라고.

“내 발이 너무 간지러운데……” 거인이 말했다.

갈리오는 이해하기 힘든 말로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소녀를 보곤 의아했다. 소녀를 몇 년 동안 지켜봤지만 저렇게 빨리, 저렇게 시끄럽게 움직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갈리오는 소녀가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매년 가족여행 길에 그에게 들를 때마다 그녀를 보았다. 깡총거리며 뛰어다니는 소녀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도록 애쓰면서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잘 놀다가 갑자기 웅대하게 선 석상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엄마의 치맛자락 뒤로 숨곤 했다. 갈리오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동안에는 세상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세상은 짙은 안개가 낀 듯 흐릿했고 사람들의 모습은 희미한 윤곽만 보였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소녀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빛이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밝은 빛이 아니었다. 소녀가 근처에 있을 땐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묘한 기운이 그의 돌덩어리 몸 안을 휘저어 안개를 걷어냈다.

그 시작은 아주 미미한 느낌이었다. 소녀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갈리오는 그녀로부터 전달된 묘한 따사로움이 그의 발가락을 간질이는 걸 느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그 빛이 자신의 다리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녀가 10살쯤 됐을 땐 그 온기가 너무 강력해서 1킬로 밖에서도 소녀가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평소 오던 날이 아닌데 오늘 그녀가 또다시 왔다. 그녀의 힘은 격렬히 타올라 갈리오의 차가운 몸속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녀가 그에게 생명을 준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갈리오는 놀랍도록 명료하게 그녀의 눈부신 광명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의 별을 모두 모아 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멀어지고 있었다.

갈리오는 그녀가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생명도 함께 빠져나가 다시 차갑게 굳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그대로 굳어버린다면 소녀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따라가야 했다.

거대한 두 다리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단상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어갔다. 단 몇 걸음 만에 소녀를 따라잡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인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은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소녀의 손가락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와 갈리오의 다리를 향해 발사되었다. 그 묘한 느낌이 그의 몸속에서 점점 강력해졌다. 갈리오는 자신의 몸이 폭발해서 데마시아 여기저기에 흩뿌려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리오는 폭발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은 더 따뜻해졌고 더 생기가 돌았다. 그는 몸을 숙여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소녀를 안아 올렸다. 소녀는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거인은 분수에서 뛰노는 아이처럼 웃었다.

“작은 금빛 머리 인간.” 거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넌 아주 재미있구나. 가지 마라.”

소녀는 충격을 다스리며 대답했다. “어……어차피 못 가요. 당신이 이렇게 잡고 있는데 어떻게 가요.”

자신의 행동이 소녀를 놀라게 했음을 알게 된 갈리오는 조심스럽게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작은 소녀를 만나본 적이 별로 없어서 몰랐다. 난 뭔가를 때려 부술 일이 있을 때만 깨어나거든.” 그가 설명했다. “내가 박살 낼 만한 게 있나? 커다란 걸로?”

“아니요.” 소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같이 찾아보자.” 그는 성큼성큼 몇 걸음 옮기다 제 자리에 그대로 선 소녀를 보았다. “나와 함께 가지 않는 건가? 소녀 사람?”

“안 가요.” 소녀는 자신의 대답이 거인을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대답했다. “전 지금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중이거든요.”

“아. 미안하다. 소녀 사람.”

“음. 전 그만 가 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뜻이 전달되리라 생각하며 럭스가 말했다.

갈리오는 그녀를 바로 뒤따랐다. “너는 도시 반대쪽으로 가고 있다.” 그가 지켜보다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모르겠어요. 저한테 어울리는 곳으로요.”

거인은 머리를 소녀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너는 데마시아 사람이다. 너는 데마시아에 어울린다.”

처음으로 소녀는 거인이 자신을 이해해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의 문이 살짝 열리는 걸 느꼈다.

“당신은 이해 못 해요. 당신은 이 왕국의 상징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녀는 많은 걸 말하지 않고도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단어를 찾고 있었다. “나는 문제가 있어요.” 그녀가 마침내 고르고 고른 단어를 말했다.

“문제? 넌 아무 문제가 없다. 넌 나에게 생명을 준다.” 석상이 그녀의 눈높이로 얼굴을 낮추며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게 문제예요.” 소녀가 말했다. “당신은 움직이지 않는 게 정상인데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나라고요.”

놀란 갈리오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놀람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넌 마법사구나.” 그가 기쁨에 들떠 큰 소리로 말했다.

“쉬! 제발 조용히 해요.” 소녀가 간청했다. “사람들이 듣겠어요.”

“난 마법사를 물리친다.” 그가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넌 아니다. 난 네가 좋다. 넌 내가 좋아하게 된 첫 번째 마법사다.”

럭스는 갈리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대신 짜증이 났다. “이봐요. 당신한테는 신기하고 기적 같은 일이겠지만 난 정말 괴롭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정말 혼자 있고 싶어요. 또 사람들이 당신이 없어진 걸 알아차릴 거라고요.”

“나는 상관없다. 알아차리라고 해라.”

“안돼요!” 럭스는 그 장면을 상상만 해도 암담했다. “제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갈리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곤 즐거운 것이 떠올랐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것을 한 번 더 해봐라. 너의 멋진 별빛으로!” 그는 럭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큰 소리로 말했다.

“쉿! 소리 좀 낮춰요!” 그녀가 다시 한번 사정했다. “내 병 말이에요?”

“그렇다.” 갈리오가 조금 낮아진 톤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항상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게다가 하면 안 되는 거고요. 자 이제 어서 돌아가세요.” 그녀가 또 한 번 사정했다.

“난 갈 수 없다. 너한테서 멀어지면 난 다시 잠들 것이다. 내가 다시 깨어날 때면 넌 아마 이 세상에 없겠지. 작은 소녀.”

럭스는 잠시 생각했다. 지칠 대로 지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인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빛을 소환하면 떠난다고 약속해 줄래요?” 그녀가 물었다.

거인은 잠시 고민하다 소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럼 한번 해 볼게요.” 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쪽으로 두 손을 모았다가 갈리오를 향해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녀의 손가락에서는 아주 미약한 빛이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었다. 계속 시도했지만 하면 할수록 빛은 점점 더 약해졌다.

“나 정말 피곤한가 봐요.”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쉬어라. 기운이 생기면 그때 나에게 너의 마법을 부려다오.” 갈리오가 말했다.

“음.” 럭스는 그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했다. “당신을 보낼 수도 없고 나도 갈 곳이 없으니 여기서 자는 편이 낫긴 하겠네요.”

그녀는 푹신한 풀이 자란 곳을 찾으려 바닥 여기저기를 만져보았다. 적당한 곳을 찾자 바닥에 누워 망토로 따뜻하게 몸을 감쌌다.

“자, 이제 난 잘 거예요.” 하품을 하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자야 해요.”

“아니다. 나는 너무 많이 잔다.” 갈리오가 대답했다.

“그럼 그냥……모르겠어요. 그냥 잠깐 동안 정지하면 안돼요?”

“난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럼 그냥 가만히 서서 살아있지 않은 척 해봐요.”

“알았다. 그냥 여기 서서 네가 쉬는 걸 지켜보겠다. 소녀 사람.” 갈리오가 말했다.

“그러지 마요.” 그녀가 말했다. “누가 날 지켜보는데 어떻게 편히 자겠어요. 돌아서서……저쪽을 보면 안 돼요?”

갈리오는 소녀의 말대로 몸을 돌려 저 멀리 데마시아의 수도에서 흘러나오는 어스름한 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은 소녀처럼 흥미롭진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갈리오를 등진 채 혼자 있게 된 럭스는 눈을 감고 잠 언저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잠시 후 갈리오가 등을 돌린 걸 확인하고서 조용히 일어나 살금살금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럭스는 빠르게 뛰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거인에게서 가능한 멀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달아나지 않으면 그녀의 마법이 다시 그에게 힘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분명 다시 그녀를 찾으러 오겠지. 아침이 되면 왕국의 모든 순찰대가 간밤에 사라져버린 크라운가드 소녀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상징하는 석상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심지어 그녀를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그를 깨운 마력의 원천이 그녀임을 어렵지 않게 추정해 낼 것이 분명했다.

럭스는 종일 혹사한 다리가 아팠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는 위치를 파악할 만한 지형지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구름숲 근처라는 건 확실했다. 숲을 이룬 장대한 홍피나무들이 남쪽으로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수색대로부터 몸을 숨기기에도, 아침으로 먹을 만한 걸 찾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틀 정도면 숲을 가로질러 바스카시안 산림촌 중 한 마을에서 쉴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선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기발한 계획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계획이었다.

럭스의 눈에 숲의 입구가 보였다. 장대 같은 나무들이 가운데 솟은 가장 키 큰 나무를 중심으로 피라미드처럼 솟아 있었다. 숲에 들어가기 직전, 그녀는 잠깐 멈춰 서서 헤어지게 될 많은 이들을 생각했다. 오빠 가렌과 그녀가 사랑하는 말 ‘불꽃별이’, 그녀의 어머니도 생각났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하니 슬펐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빛이 그림자를 몰아내리라. 그녀는 자신을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고 상록수가 빽빽이 자란 어두운 숲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가시 투성이 홍피나무 가지에 긁히고, 진동하는 송진 냄새를 참아가며 숲을 헤맨 지 한 시간 만에 럭스는 자신의 계획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배에선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고 열심히 걷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던 자신감은 구름 뒤로 숨어버린 보름달과 함께 사라졌다. 들리는 거라곤 야행성 동물들의 킁킁거림과 바스락거리는 소리뿐인 어두운 숲속. 럭스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빛을 조금만 쓰자. 멀리 나와 있으니까 조금만 쓰는 건 괜찮을 거야..

그녀는 두 손 사이에 빛을 뿜는 작은 구체를 불러왔다. 불빛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춤을 추자 주위의 동물들이 놀라 허둥댔다. 하지만 빛은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버렸고 다시 암흑이었다. 럭스는 손에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한 적도 없는데 그리 쉽게 나타났던 능력이 왜 정말 필요한 때에는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 때 깨달았다. “거인 때문이구나. 틀림없어.”

그때 숲속에서 소곤거림이 들렸다. 서서히 목표물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걸음과 나지막한 속삭임.

갑자기 뒤에서 쑥 나온 팔이 럭스의 목을 단단히 감아 그녀를 옭아맸다. 럭스는 적어도 두 명의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어딜 가시나, 아가씨?” 괴한들 중 한 남자가 물었다.

럭스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남자가 목을 더 세게 졸랐다.

“넌 격리촌에 있어야지. 안 그래?” 그가 말했다.

“아니야……” 럭스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가까스로 내뱉었다. 괴한은 그녀의 턱 아래에 끼운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컥! 난 아니……”

“우리가 바본 줄 아나, 아가씨?” 세 번째 남자가 말했다. “이리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주지.”

괴한들이 밧줄로 그녀의 두 팔을 묶으려 하자 럭스는 팔을 잡히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정신을 집중했지만 이상하게도 분명 그녀에게 있던 마법의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럭스는 가까스로 한 손을 빼내 정확하게 괴한의 턱을 가격했다. 그가 쓰러지면서 바닥에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은 두 명의 괴한은 분노에 휩싸여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무리 중 한 명이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어.”

그들은 그녀를 더 세게 묶었다. 그녀의 팔이 아프도록 최대한 매듭을 꽉 조였다. 바로 그때 천둥이 치는 듯 둔탁한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들리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리가 더 빨리, 더 크게 들리자 겁에 질린 괴한들은 그 출처를 찾으려 잠시 멈추었다.

쿵. 쿵. 쿵. 지진 같은 울림이 지속적이고 일정한 박자로 들렸다. 마치 거대한 발소리처럼.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공포에 질려 얼어 있던 한 남자가 물었다.

땅은 점점 더 심하게 흔들렸고 이젠 나무 부러지는 소리도 함께 났다. 뭐가 내는 소리든 그것은 이제 숲으로 들어왔고 점점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저건……”

모두 고개를 들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석상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갈리오의 뒤로 홍피나무들이 성냥개비처럼 부러져 있었다. 괴한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하지만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거대한 페트리사이트 손이 그들을 낚아채 들어 올렸다. 갈리오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손아귀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싸우는 시간인가?” 거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과 교전하겠다!”

그는 괴한들을 쥔 손을 펴고 손바닥으로 그들을 짓뭉개려는 듯 다른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안돼요! 제발 그만 해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인은 땅 위에서 밧줄에 묶인 팔로 그의 발목을 치고 있는 럭스를 발견했다.

“그러면 안 돼요!” 그녀가 소리쳤다.

당황한 갈리오는 럭스의 말대로 남자들을 땅으로 내려놓고 풀어주었다. 그들이 후다닥 꽁무니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전력 질주해서 도망가고 있었다. 럭스는 팔을 묶은 줄을 풀려고 꼼지락거리면서 거인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 말대로 돌아섰는데 너는 사라졌다. 소녀 사람.” 그가 말했다. “왜 숲에 있는 건가?”

“나……나도 모르겠어요.” 럭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갈리오는 새로 친구가 된 작은 금발 머리 소녀와 함께 언덕에 기댄 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가끔 깊은숨을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럭스가 자주 내뱉곤 했던 걱정의 탄식과는 달랐다. 조용하고 깊은 밤,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이 채워지는 완벽한 순간, 그럴 때 나오는 평온한 한숨이었다.

“나는 보통 이렇게 오래 깨어있지 않는다.” 거인이 말했다.

“나도요.” 소녀가 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인간들은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나? 우리도 대화를 해야 하나?”

“아니요. 이것도 좋은데요. 평화롭고……좋아요.” 소녀가 대답했다.

갈리오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소녀에게서 무언가 달라졌음을 알았다. 무언가 사라졌다. 그녀 안의 찬란한 빛이 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별처럼 빛나지 않았다.

“왜 슬픈 표정을 짓는 거예요? 당신 덕분에 난 다 나았는데.” 소녀가 말했다. “당신이 내 옆에 있으면 난 집으로 돌아가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어요.”

갈리오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소녀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내 말은, 병이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아마도 매일 당신을 보러 올 수도 있다고요.”

“안 된다.” 침묵을 지키던 거인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안 되는데요?” 소녀가 물었다.

“작은 소녀 사람. 넌 특별한 존재다. 네가 기억하기도 전부터 나는 너의 특별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 힘을 가까이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내 옆에 있으면……너의 힘이 사라진다.”

“하지만 덕분에 당신이 생명을 얻잖아요.”

갈리오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나에게 생명이란 아주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너의 힘은 모든 것이다.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된다.”

그는 일어서서 그녀를 자신의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둘은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도시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막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이른 아침, 럭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도시의 성벽 밖에서는 갈리오가 기억의 길옆 단상에 늘 서 있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럭스는 오롯이 혼자 자신의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리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문을 열었다.

응접실에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머리가 약간 벗어진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무릎에는 다른 나라의 약이 담긴 상자가 놓여 있었다.

“럭산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악문 이 사이로 오가사가 말했다.

럭스는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바로 이분이란다.” 그녀의 어머니가 속삭였다. “네 그……문제를 고쳐주실 분이야.”

어머니에게 단단히 결심한 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려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 순간 아찔함이 느껴졌다.

“있잖아요, 어머니?” 그녀가 드디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저분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사실은 그만 보내 드렸으면 좋겠어요.”

제거원은 기분이 상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가방을 걸쳐 맸다.

“아니에요. 그냥 계세요.” 오가사가 그를 말렸다. 그녀는 럭스를 구석으로 데려가 단호하게 말했다. “넌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게 분명해. 저분은 널 돕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고 오셨어. 네가 데마시아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야. 잊은 거니? 네가 병에……”

“그건 병이 아니에요!” 럭스가 외쳤다. “난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예요. 언제가 이 왕국에 그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나한테 불만 있는 사람은 덩치 큰 내 친구랑 먼저 얘기해야 할 거예요.”

그녀는 어머니와 제거원을 뒤로하고 의연하게 자신의 방이 있는 위층으로 향했다.

럭스는 침대에 몸을 던지며 깊고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마음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여름날 연못처럼 고요했다. 그녀 몸속의 초대받지 않은 빛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 시작과 끝을 느낄 수 있었고 분명 언젠가는 조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잠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이 늘 외던 주문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 어떤 빛도 절대 그림자를 없애지못한다.

그림자는 빛이 있을 때 더 선명해진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말에 담긴 기분 좋은 울림이 그녀의 마음에도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