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유목민에게 완전히 멸망해 사라진 2개의 왕조가 있으니

몽골에게 멸망 당한 송나라와

여진에게 멸망 당한 명나라입니다.


그리고 두 왕조의 최후는 전혀 달랐죠



 

(몽골 군의 남송 공격루트)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3040

'세계최강 제국에 맞선 지상 최강의 장벽' 이란 글에

그 처절한 항쟁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최후의 방어선인 양양성을 함락 했을 때

사실상 남송의 운명은 끝장이 났습니다.


과거 삼국지 시대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 시킬 때

형주를 접수하자 '파죽지세' 라는 고사성어를 만들며

오나라를 단숨에 멸망 시켰듯

세계 최강의 몽골군 역시 방어선이 무너진

남송의 수도로 물 밀듯 진격했죠

 


이미 망하는게 기정사실이 되었음에도

몽골군이 진격하는 루트에서 항전하는 송나라 장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도 투항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습니다


 

(간신 가사도)


심지어 매국노이자 간신으로 그 악명이 높은

남송의 가사도 조차도

몽골군이 송나라 수도에 이르자

최후의 송나라군 13만 병력을 이끌고

벌판으로 나가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물론 모두 전멸하였지만


생각해 보면 기괴한 일이죠.  

한국으로 치면 매국노 이완용 조차도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군대를 이끌고

한양성 앞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했단 뜻입니다.


 



송나라 수도 임안이 함락되고

황제인 공제는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끌려갔지만

그럼에도

송나라는 멸망한게 아니었습니다!!!


승상 육수부를 비롯한 송나라 신하들은

살아남은 황족을 모아서 새로 황제를 옹립한 뒤

남쪽으로 피신하여

오늘날의 홍콩까지 도망을 가서 항전을 계속 했죠

그 과정에 송나라 신하가 거짓투항을 하여 목숨을 바쳐가며

도망칠 시간을 벌기도 했습니다.


 


애산이란 지역에 모여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마지막 송나라 조정의 모습은 애잔하면서 비장하기 까지 했습니다

이들을 지휘하던 승상 육수부는

밖에서는 의연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였지만

막사로 돌아와 혼자 있을 때에는

어린 황제와 신하들 그리고 20만에 달하는

관병과 백성들의 힘겨운 모습을 보며

나라가 멸망해 가는 것을 애통하며 울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때 최후 항전에서

과거 송나라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했던

전 왕조 후주의 시씨 가문의 일족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송나라가 전 왕조의 황족인 후주의 시씨일가를

300년간 보호하고 우대해 준 그 의리를 지킨 것이죠  



 

(애산 전투 지도,

이걸 보면 몽골이 강화도를 함락 못 시킨게 아니라 안 한거 같죠)


몽골군은 최후의 일격을 앞두고 항복한 송나라 장수를 장홍범을 통해

최후의 저항군을 이끌던 장군 장세걸의 투항을 권유합니다

둘은 친척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절하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역시 항복이 무슨 말인지 안다. 생명의 귀중하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주군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변심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다."


몽골군은 포로로 사로잡은 송나라 관료 문천상에게

최후의 저항군들에게 항복을 하게 권유 하라고 편지를 쓰게 시킵니다.

그러자 문천상은 다음과 같은 짧은 시한 편을 대신 써 주죠


예로부터 누구나 인생은 한번 죽는 법. 
단지 일편단심 보존하여, 역사에 길이 남겨야 할 뿐


결국 몽골군은 총공세를 하여 최후의 송나라 저항군을 궤멸 시킵니다.


 


애산에서 포위 당한 송나라 병사들이 처절하게 싸우다

물이 떨어서 결국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를 하면서까지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송나라 최후의 멸망이 다가오고

패망이 확실시 된 그 마지막 순간 까지

승상 육수부는 7살의 어린황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최후에는

어린황제를 안고 바다에 뛰어 들어 함께 자결했습니다.

이때 승상 육수부와 어린황제만 자결한게 아니었죠


황태후는 패망의 대혼돈 속에서 겨우 구출되어 살았음에도

황제가 자결을 했는데 살아서 무엇하냐며

다시 바다로 몸을 던져 자결을 하였고

이하 황족과 신하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대장군 장세걸은 패잔병을 다시 수습하였지만

이미 황제가 자결하였단 소식을 듣게되죠

그럼에도 저항을 포기 안하고

지금의 베트남까지 다시 도망을 쳐서

다시 한번 저항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이때 태풍이 불어와 패잔병의 배를 덮지게 됩니다.

폭풍우 속에서 마지막을 직감한 장군은

비통한 심정으로 하늘에 외칩니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그리고 풍랑이 배를 삼켜버렸습니다.


세계 최강 몽골에 저항한 송나라는

말 그대로 처절하고도 비장한 항전을 끝까지 하다

황제, 황태후, 황족, 재상, 대장군, 신하 모두가

순국을 하며 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후대에 송나라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나라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 청나라 문인 조익 이십이사차기 -


13세기 몽고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당시,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만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에서 남송 최후의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내릴 때 까지,
남송은 장장 40여년간 전쟁을 벌여 몽케 칸 또한 합주 조어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급제 출신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조송(趙宋)의 제실(帝室)이 300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 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

-중국 과거 문화사 中-



그럼 명나라의 최후는 어떠했을까요....


 


명나라의 농민반란은 사실상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들불 처럼 일어나 전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반란이

급기야 명나라 역대 황릉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자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 관군으로 겨우 진압을 했음에도

거의 다 진압했다 싶으면 작은 불씨처럼 살아남아

다시 어마어마한 규모의 반란으로 들불이 번지었죠


농민반란에는 농민만 참여한게 아니거든요

급료를 받지 못한 실직관료, 군인까지

무기를 거꾸로 들고 반란했습니다

   

 

(이자성에게 사로잡힌 복왕 주상순)


방어 요충지인 양양성을 함락하여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더니


급기야 중원의 요충지인 낙양을 함락해

복왕 주상순을 삶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냥 삶아 죽임을 당한게 아니라 먹혔습니다.

180키로가 나가는 거구였던 복왕 주상순을 사로잡아   

복록연이라는 것을 열어서 삶아 죽이고

사슴고기와 함께 나눠 먹었죠


명나라 최후의 방어군 관병이라 할 수 있는

동관에 주둔한 손정전까지 패사 시키자

반란군 이자성은 장안에서 대순 황제로 즉위하였고


산해관에서 청나라군대와 대치 하느라 발이 묶여

구원을 못하는 명나라 주력군을 비웃으며

바로 북경으로 진격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미 방어군이 궤멸된 명나라 조정은

이를 막을 군대가 없었으니 끝장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300년간 천하를 다스린  

대명국의 최후라고는 볼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허망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성 앞에 나타나자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환관으로 하여금


긴급사태를 알리게 하고

북경 성내에 거주하는 친왕들과

문무대신을 소집하는 종을 미친듯 울렸지만

단 한명도 조정에 나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평소 조정에서 공자님의 말씀 맹자님의 말씀 등

성현의 명언을 나열하며 충의를 논하던 고명한 대신들과

비분 강개하여 강경 토벌을 주장하던 열정 넘치던 신하들은

이미 전부 도망을 쳐버렸거든요


거짓말 처럼 텅~비어버린 거대한 궁궐 자금성에

오직 환관 왕승은만 옆에 있었을 뿐입니다.


 


북경의 수비를 결국 환관들이 나서서 막아 본다고 발악했으나

결국 외성의 수비를 맡은 환관 조화순 역시 이자성에게 투항했고


성문을 넘어 들어 온 이자성에게

어제까지 조정에 나와

명나라 황제 만만세를 외치던 관료들은

돌변하여 대순황제 만만세를 외치며 맞이했습니다


자금성으로 몰려오는 농민반군을 지켜보던 숭정제는

진짜로 혼자 궁궐에 남겨진

믿겨지지 않는 비참한 광경 속에서

능욕당하여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 할께 뻔한

황후와 장공주를 칼을 들어 직접 죽인 후

자금성 뒤 경산에 올라 목을 메어 자결을 했습니다.


 


 


 

지금도 북경 자금성 관광을 가면 코스로 가보게 되는 장소가 

북경 자금성 뒤편에 있는 경산공원입니다.


바로 숭정제가 자금성 궁궐로 몰려드는 농민반군을 지켜보며

홀로 비참하게 목을 메달아 자결을 한 장소죠



 

(숭정제가 목을 메달은 나무)


 

(그 나무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전경)


숭정제가 목을 메달은 그 나무가 현재까지 남아서 그대로 서 있습니다

그 위치에서 보면 자금성 전체가 위에 처럼 전부 보이죠


아내와 딸을 죽이고

황궁인 자금성이 반군에 유린당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장면을 전부 지켜보다

목을 메었던 것입니다.


숭정제는 죽기전에 유조를 세상에 남겼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짐을 망쳤다." 죽기전에도 신하들 때문에 망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스스로는 잘못한 게 없다는 고집스런 성격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또한 실망의 심정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너희 신하들이여,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었으면서...

가장 너희들이 필요할 때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구나,

헛되히 너희를 먹여살렸구나."


-명사 장열제 본기


이때 보통 사실상 명나라가 망했다고 평가하지만

사실 망한게 아니었죠

아니 망하는게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명나라는 중국 최초로 양자강 이남에서 건국하여

천하를 통일한 왕조입니다.

때문에 주원장이 건국한 수도는 북경이 아니라 남경이었고

북경으로 수도를 이전 한 이후에도

옛 수도인 남경에는 작은 조정과 작은 정부를 만들어 운영했습니다


 

(북경함락 이후 남명정부 세력 이자성 세력 판세)


때문에 북경이 함락이 되었다고 한들

남경에 정부가 이미 있는데

당연히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세워지고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세워졌듯

남명이 세워지는게 자연스런 이치죠

어쩌면 지금 중국의 모습과 현대사가

전부 바뀌었을지도 모르죠

다만 명나라는 이전의 국가들과 다르게

 나라가 개판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남경 정부에서 새로 황제를 옹립하고자 하는데

그 유력 후보가 복왕 주유승입니다.

이전에 낙양에서 농민반군에게 잡혀서

삶아 죽임을 당한 복왕 주상순의 아들입니다.


황위 계승서열이 가장 높아서 옹립을 해야하는데

신하들의 가장 큰 고민이

그 아버지 복왕 주상순이 탐욕스러운 돼지였듯

아들 복왕 주유승 역시 멍청한자였단 것입니다


똑똑한 노왕을 옹립해야 한다.

그래도 정통성 있는 복왕 주유승을 옹립해야 한다

당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하고 자빠지다

결국 복왕 주유승이 남경에서 즉위하게 되니


남명 홍광제입니다.

 

(남명 정부 시절 세력 이동)


사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으니

사람이라면 당연히 정신차리겠지라는

그런 소박한 희망도 품을 법하고

신하들도 제발 그러길 빌었지만


그럴리가요..


홍광제가 즉위하자 하는 짓이

나라가 망하고 겨우 남경에서 연명하는

아니 당장 북쪽에 아버지의 원수 이자성의 농민 반군과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을 돌파해 남하하는 급박한 그 와중에


놀랍게도 후궁을 왕창 뽑고

궁궐에서 술판을 벌이며

쳐 놀기 시작을 합니다.

이 짓거리를 남경이 함락되는 그날까지 하죠


 

(나라도 막장인데 황제는 더 막장인 것은 명나라 후기의 전통인듯)




홍광제의 술판에 대한 아름다운 고사가 전해집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임시정부에서 옹립한 황제가 매일 술판을 벌이니

신하 유종주가 통곡을 하며 술을 먹지 말라고 간언합니다.

진심어린 충언을 듣자 홍광제가 반성한다고 위로한 후

그럼 한 잔씩만 마시겠다 라고 하죠

이후 금으로 커다란 술잔을 만들어 한잔씩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만 마시고 아직 한잔이 안되었다며 첨잔하여 마시니

주량이 더욱 늘었다고 합니다.

 

그럼 신하들은 정신을 차렸는가?

아니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가질 권력이 남아 있다고

그 와중에  당파 싸움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죠


최전선에서 주력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방어하는  

좌량옥과 남경의 마사영간의 권력 다툼이 발생해

좌량옥이 양자강 수비군을 이끌고 남경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결국 이를 막는다고 싸우다 양자강 방어군이 증발해 버립니다.


사실 장군들도 쓸모 없기는 매한가지 입니다.

강북 4진이라 불리워지는 남경을 수비하는 중요 방어거점의 장군들은

땅을 수복할 생각은 전혀 없고 나라가 망하는 그와중에 재물을 탐욕하며

남경 정부에 돈을 보내달라 식량을 보내달라 보채기만 할 뿐이죠

안보내 준 것도 아닙니다. 1년치 군량이 240만섬인데 1년 반치 군량인 340만섬을

단 4개월만에 전부 쏟아 부어서 보내주었는데 돌아오는건 계속 달라 하니 미치는 노릇이죠


 


이 와중에 가장 중요한 거점인 양주를 수비하는 사가법 장군만

다행히도 제정신을 가진 정상인이라서

묵묵히 청나라 군대를 온전히 혼자 막으며 버티었을 뿐입니다

아니 양주가 함락되면 바로 남경이 함락되는 상황이라

못 막느면 진짜 나라 망하거든요.

그야 말로 필사적으로 수비했던 것이죠

남경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매일 애타게 부르짓으며...


그리고

남경 정부는 구원병을 안보냅니다...

왜냐고요? 좌량옥 처럼 장군들의 군사력이 강해지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 와중에 사가법을 견제하고 자빠지는 위엄을 보여주죠

결국 양주성이 함락되고 사가법은 순국하였으며

청나라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주며 항전한 양주성에서

10일간 대학살을 벌여 보복을 합니다

자그만치 80만명이 살육을 당했고

훗날 양주십일기라고 그 장면을 담은 무시 무시한 기록이 남죠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남명 정부가 끝장이 납니다  

양주성이 함락되어 방어선이 사라진 남경성으로 청군이 들이닥치자

홍광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지 않고

환관들과 몰래 남경을 빠져나와 도망을 칩니다.


그러다 무호 라는 지역에 이르는데

그곳을 지키던 장군 황득공이 다행이 정상인이라

목숨을 바쳐 황제를 보호하고 항전을 하겠다 다짐하였는데


그게 통할리가요.

그 부하장수 전유승과 마득영이 황제를 사로잡아 투항하면

큰 포상을 받을 것이라 여기며

상관인 황득공을 뒤에서 죽여 버리고

홍광제를 산채로 잡아 투항합니다.


홍광제는 전유승과 마득영에게 울고불고 사정하며

제발 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는데 전혀 먹히질 않죠

마치 큰 사냥감을 잡은 것 마냥

통나무에 돼지처럼 손과 발을 묶어 매달아 끌고 갔는데

살아있는 보배가 행여 도망칠까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홍광제는 청나라에 끌려가 북경에서 참수 당합니다.  


그럼 황제가 몰래 도망간 남명 왕조의 수도 남경성은 어찌 되었을까요?


북경성에서 벌어진 장면이 똑같이 재현이 됩니다.

성문을 열고 백관이 나와서 향을 사르며

입성하는 청나라 군대를 환영한 것이죠


바로 얼마 전까지 남명 조정에서 권력쟁탈전을 벌이고

누가 충성이니 누가 반역이니 하며 싸우던 고관대작들이

이제는 청나라 군대를 환영하며 만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그 어이없고 치욕스런 장면을 지켜보던

거지가 비분강개하여


사대부를 삼백년간 길렀다는 나라인데

내가 비록 거지로 미천한 신분이라지만

  이런 치욕을 어찌 볼 수 있냐!! 통곡하며   

관리와 사대부들을 욕하는 말을 남기고

다리에서 몸을 던져 자결을 했습니다


남명 정부가 세워지고 홍광제가 즉위한지 딱 1년만의 일입니다.



멸망 당한 이전 왕조의 후손 조차 의리를 지키며 충성을 다한 송나라

일개 거지 조차 치욕스러워 했을 정도로 너도 나도 나라를 팔아먹은 명나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