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마지막 약혐주의>

 

독일 저널리스트 역사가 귀도 크놉 저 <히틀러의 뜻대로-히틀러의 조력자들>의 내용,
인용된 자료들과 인터넷 여러곳에서 얻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작성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0.29~1945.5.1]는 히틀러의 조력자 중 가장 지적이면서 광신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의해 비로소 숭배의 대상으로 치켜세워진 바로 그 우상에게 혼을 내맡긴 그는 "제3제국"이 불을 밝히도록 불씨를 당긴 방화범이었으며, 우직한 추종자들이 책과 유대인 교회당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을 불태우도록 사주한 선동가였다.

 

그는 언술로 살인을 저질렀다.

만약 히틀러 정권을 인간을 오도하고 인간에게 폭력을 휘두른 권력의 복합체로 볼수 있다면, 이 작달막한 키의 박사 양반은 "인간을 오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또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신뢰감을 불러일으키고 증오심에 불을 지르며 그가 추구하는 목적에 헌신하도록 자극하는 탁월한 재능, 강력한 언어적 수사법 그리고 냉소적인 태도를 지닌 그는 나치 정권하에서 대단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것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다.

연약한 면이 있었지만 강인한 면도 보여 주었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지만 스스로에게 엄청난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호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일에 완전히 냉담하기도 했고, 열등감에 빠져있기도 했지만 과도한 자의식을 보이기도 했고, 구원을 동경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절멸시키려는 의도를 내보이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그를 사랑했던 부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흔들리지 않는 그의 믿음의 토대였다. 빈곤에 시달렸던 그의 과거는 그의 끝없는 야망의 동인이었다. 불구인 그의 다리는 인간에 대한 무자비한 증오심의 근원이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단신의 괴벨스

 

하지만 그는 아웃사이더로서 받은 상처를 씻어내지 못했고 심지어 나치스에 헌신하면서도 그랬다. 그는 히틀러에게는 순수할 정도로 일편단심이었다. 믿음이 깊은 이 도제는 마이스터에게 헌신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도자에게 연결시켰다. 지도자는 괴벨스의 충성심, 날카로운 지성 그리고 세련된 수사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괴벨스와 개인적으로 거리를 두었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도 그를 배제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의지하듯이 그는 자신의 우상이 보여 주는 호의와 총애에 매달렸다 그는 감성 속에 모든이들의 우상 아돌프 히틀러를 만들어갔다.

그는 히틀러를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아로 연출했다. 그가 만든 총통 신화는 다음의 문장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총통께서는 언제나 옳으시다."

 

 

일생동안 수없이 많은 연설을 했던 괴벨스 - 그는 나치 제국의 두뇌이자 입이었다.

 

"제3제국"의 선전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항상 모든 사람들의 감정과 의지 그리고 생각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의 선전에 나타나는 통제와 획일화 양상은 공모자가 되어버린 민중들에게 파고들어 그 효과를 나타냈다.

분위기를 잡으려는 논쟁에서 그가 사용한 무기는 언제나 같은것이었다. 간단하게 내용을 전달했고 감명을 주는 형식을 이용했다. 그는 매우 영악하여, 대놓고 거짓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흐리게 만드는것보다는 반쯤 진실을 얘기 하는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종말이 다가올수록, 더욱더 진실을 은폐하게 되었고 그런 거짓을 통해서 현상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현상 유지 노력도 별 효과를 내지 못하자, 그는 그 대신 "기적의 무기"가 있다는 거짓 약속을 하며 소년 병사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았고 자신의 자식들도 무덤까지 끌고 갔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넣는것. 바로 그것이 완전한 것이다."

 

 

타임지 표지로 실린 괴벨스의 그림 - 미국인들은 그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불렀다.

 

히틀러를 섬긴 충복들 중에서 그는 가장 광적으로 유대인을 증오한 사람이었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삐뚤어진 인종 이론의 발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결과였다. 회의가 들때에도 그는 봉사할것을 선동한 사람이었다. 히믈러는 그를 "최종해결책 - 대학살"을 주창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이었다고 했다.

나는 유대인을 모두 없앨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괴벨스가 이 모든것에 책임이 있다 - 대학살의 실질적인 집행자였던 SS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가 1942년 그의 개인이발사에게 한 말.

 

괴벨스는 평생 일기를 썼으며 전후 발견된 그의 일기의 양은 엄청나서 발견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 였다고 한다. 그는 같은 나치인사들에 대해서 자세한 인물평과 성격묘사를 하였고 나치스의 집권과정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며, 대학살의 과정에 대해서도 암시적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일기는 나치스의 발전과정과 2차세계대전의 연구에 높은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요제프 괴벨스는 광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광기에 불을 지른 그 자신이 제국의 범죄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이 범죄성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옹호했기 때문에. 그는 매우 특별하고 대단한 범죄자라고 볼 수 있다.

괴벨스의 어록 -

포기란걸 난 이제 알게되었다 협잡꾼의 끊임없는 경멸
나와 내 아내에게 저주가 내려진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만나기 이전 자신의 처지에 늘 절망했다. 박사학위를 딴 이후에도 그는 가난했으며 끊임없이 자살을 생각하였다. 그당시 그의 일기는 "나는 제로이다. 그러나 위대한 제로이다." "나에게 인생이란 도무지 살 가치가 전혀 없다." 등의 절망적인 체념들로 가득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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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인정한다.

히틀러는 호의적이고 나를 믿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가 내게 얼마나 친절한지.

민주주의가 철천지원수에게 자신을 파멸시킬 방법을 손수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민주주의를 비꼬는 풍자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될것이다.

공산당원들로부터 많은것을, 특히 선전술에서 많은것을 배울 수 있다.

적어도 유대인들 중의 일부가 그렇게 최악의 상황은 안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은 그 선전술이 매우 뛰어났고 목적에 맞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유대인 역병은 근절되어야만 한다. 철저하게, 아무것도 남지 않아야 한다.
국민들이여 이제 궐기하여 폭풍처럼 나아가라.

 

우리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아니면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너는 내가 이 과도한 반유대주의에 특별히 공감하지 않는다는 점을 물론 알고 있겠지, 유대인이 나의 특별한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냐. 내말은 욕을 하며 인신 공격을 가하고 심지어 박해를 가한다해도 유대인들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유대인 박해가 비인간적으로 잔인하게 이루어진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거야.

- 괴벨스가 친구인 앙카 슈탈헤름에게 보낸 편지,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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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들에게 오랜 전통의 독일적 충성심에 대해 다시 일깨워 주었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혹은 패배할 때까지 그에게 충성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운명에 감사하라. 우리에게 난국을 헤쳐갈 사람, 진리의 사도, 자유의 인도자, 사랑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 전투에 앞장 서는 자, 충성심에 불타는 영웅, 독일 양심의 상징인 이 사람을 우리에게 준 운명을 감사하라.  - 괴벨스가 히틀러에 관해 한 연설, 1924년

 

독일은 단 한 사람을 갈망한다. 여름의 대지가 비를 갈망하듯. 주여, 독일 민족에게 기적을 보여주소서! 기적을! 한 사람을!!! - 괴벨스 1924년

 

이제 그는 장군들의 말만 들으려 한다. 내게는 매우 고통스런 일이다. - 괴벨스 1938년

 

왜 여자들은 우리처럼 모든 것을 다 걸지 못할까? 여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은 도대체가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가? 여자들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영웅이 될수 있다!
- 괴벨스, 1925년

 

괴벨스 박사란 인물 유형은 내게 항상 낯설게 다가왔다. 그래서 판단을 주저했던 것이다. 그는 오늘날 독일에서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이전에 우리들은 자신의 부하 여직원을 성적으로 희롱한 유대인 지배인을 욕한 적이 있다. 이제 그 짓을 괴벨스 박사가 하고 있다 . - 히틀러의 심복 중 하나였던 나치 SS친위대 대장 하인리히 히믈러가 괴벨스에 대해서 한말, 1939년

 

 

SS친위대장이자 제3제국의 사형집행자 라는 별명을 얻은 하인리히 히믈러.. 그는 괴벨스와 유사한 신념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우 싫어했다.

우리 독일인들은 삶이란 걸 잘 이해하지 못한다.하지만 죽음이란 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 괴벨스, 1932년

 

우리가 사람들 보고 4층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그들은 그렇게 했을것이다.
-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행한 "전면전"에 관한 괴벨스의 연설, 1943년

 

자신이 선전 이념에 흠뻑 빠져 있음에도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사람을 사로잡는것, 이것이 선전의 비결입니다. 물론 선전에는 의도하는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도하는 바가 아주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어 선전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되죠. - 라디오 방송협회 국장 및 부장들에게 괴벨스가 행한 연설, 1933년

이 사람이 연설을 행하고 조직을 만드는 데서 보여준 재능은 훌륭했습니다. 그를 덜된 사람이라고 볼 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었죠. 동료 당원들은 그에게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돌격대도 자신을 위해 몸을 바치게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괴벨스는 우리의 괴벨스였습니다 . - 호르스트 베셀, 1926년

 

괴벨스박사라 불리는, 지옥에서 온 엄청난 입을 가진 이 선전장관은 꼴도 보기 싫다.

육신과 영혼이 모두 병든 이 자는 세상의 유일한 지배자인 신에게까지도 비열한 거짓말을 하려는 자다.
-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대문호 토마스 만이 괴벨스에 대해서 한 말, 1933년

 

그는 의심할 바 없이 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어휘와 어투로 그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수 있는 지식인이었다.

괴링, 히믈러 그리고 보르만과는 달리 그는 일상사와 일정한 거리를 둘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또한 그는 결코 이기주의자도 겁쟁이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히틀러에게 말했는데, 그는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내가 보기에는 괴벨스는 선전의  천재였다. 난 히틀러가 그를 만들었듯이 그가 히틀러를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사람들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것이다. 그는 매우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매우 차디찬 사람이었다. 나치스가 가장 나쁜 상황에 처해 있을때, 즉 독일내의 유대인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을때, 그는 밀어 붙였다.

- 건축가이자 미술가이며 히틀러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알베르트 슈페어 박사가 괴벨스에 대해 한말, 1979년

 

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했으며 냉철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다.
- 괴벨스의 개인 속기사 오토 야콥스

 

선전은 본질상 - 난 확실하게 말할수 있다 - 일종의 예술이다. 그리고 선전원은 엄밀한 단어상 의미에 있어 민중 심리의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선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매일 매시간 민중의 맥박 소리에 귀기울이고 어떻게 맥박이 뛰는지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박의 박자에 맞추어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 괴벨스, 1935년

 

선전장관은 항상 "박사 괴벨스"라고 서명한다. 그는 정부 사람들 중에서 교육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 중 하나이다. 무학자들이 많은 정부 사람들 중에서 4분의 1만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의 정신적 역량을 평가하는 견해가 정부에 넓게 퍼져 있는데, 그를 종종 정부의 "두뇌"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얼마나 점잖은 호칭인가.
- 대학살 당시 드레스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유대계 독일 역사학자 빅토르 클렘퍼러의 일기 1934년.


전후(戰後) 클렘퍼러는 <제3제국의 언어>라는 책을 써서 파시스트와 나치스 인사들의 언사를 연구했다.

괴벨스는 항상 박사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했음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독일 최고의 명문대학들인 본 대학, 뷔르츠부르크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을 모두 거쳤으며 지금도 영국 타임즈지가 선정한 전세계 30대 명문대학에 속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전공 분야는 고전문헌학이었는데, 오늘날에는 보기 드문 학문이지만 문학과 철학, 역사학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학문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인문학 전반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괴벨스의 부인 마그다 크반트 (결혼 후 - 마그다 괴벨스)

 

결혼은 내게 고통이 될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사랑이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 괴벨스, 1926년


괴벨스는 1931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많은 교육을 받은 막다 크반트와 결혼했다.

괴벨스는 항상 인민 대중이란 본래 여성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거구의 사람들보다 신체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성애적 성향을 보인다고도 말했다. - 반프리트 폰 오펜, 괴벨스의 개인 보좌관

 

괴벨스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신체적인 약점으로 인해 군대 경력이 전혀 없다. 1차대전 중 자원입대하러 징병검사소에 온 그를 본 검사관은 하품을 하면서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는 스포츠를 직접 몸으로 즐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의 앞에서 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는것은 금기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개최를 히틀러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건의한 인물이었다

이 얼마나 이상한 민족입니까? 극단적인 자기 비판의 결과 나머지 국민들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이라면 저항하기 위해 대중들이 봉기했을겁니다. 가련한 독일! 상놈의 나라! 불량한 나라! 유대인들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우리를 평가했습니다.
- 1928년 괴벨스가 한 연설

 

유대인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승전하던 패전하든 간에 이 목표는 달성되어야 하고 달성될 것입니다. 독일군이 퇴각할 상황에 몰린다면, 그 퇴로에 남아있는 나머지 유대인들을 모두 없앨것입니다. - 괴벨스, 1944년

 

그는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짓말의 대가였고 냉소주의자 였죠. 그리고 그는 나치의 거물들 중에서 확실히 가장 지적인 인물이고 달변을 자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 베르트 내겔레, 종군 기자

히틀러가 도착했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중요한 연설을 하느라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러고도 그는 여기서 30분 더 연설을 했다. 위트와 반어, 유머와 빈정거림을 적절히 이용해서. 그리고 근엄하고 격정적인 톤으로. 이사람은 황제가 될 모든 자질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민중의 보호자, 미래의 지배자. - 괴벨스, 1925년

 

아돌프 히틀러..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사람....- 신화를 만들어낸 괴벨스 자신도 그 신화에 예속되었다.

괴벨스와 히틀러의 관계가 한결같지는 않았다. 체코 위기때 괴벨스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분명 그가 첨예한 군사적 대치 상황을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 그가 나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가 폴란드에 관해 말을 할 때, 갑자기 소리를 낮추면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될까봐 걱정이네. 신이 우리를 보살펴주기를 바랄 뿐이네." - 하인리히 훙케, 선전부 내 해외 담당 부서장

 

괴벨스의 가족들은 히틀러와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막다와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그녀는 매우 사랑스럽고 상냥하다. 난 그녀를 매우 사랑한다. 온전히 한 사람에게 속한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좋을 수가 - 1938년 괴벨스가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 한 말

 

저녁에도 막다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유일하게 치욕을 안겨준 여인이다. 난 그녀를 결코 잊을수 없을것이다. 그녀는 강인하고 잔인하다. - 괴벨스, 1939년

 

괴벨스에게는 모든 여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수가 없을 정도이다. - 바바라 폰 칼크로이드, 여성 조각가. 괴벨스 가족의 친구

 

괴벨스는 170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와 냉혹하고 음산하며 어두운 인상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피아노연주를 상당히 잘했으며 예술적인 취향과 심미안이 뛰어났고, 화술과 매너도 훌륭했다.

패션감각도 있어서 옷차림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아마도 나치스의 주요 인사들 중에서 여러 여인들과 가장 많이 동침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히틀러를 아주 존경하며 짝사랑했던 막다는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단종법을 만들기 위해 정신 병원에서 찍은 필름 하나를 살펴 본적이 있다. 끔찍스런 소재이다. 하지만 아주 촬영이 잘 되었다. 보기만 해도 피가 얼어붙는 것 같다. 단종은 하나의 축복이다. - 괴벨스, 1936년... 괴벨스는 자신이 어린시절 골수염을 앓아 한쪽다리를 심하게 저는 장애인이었으면서도 장애인들의 단종 수술과 학살에 찬성했다.

우리는 분명 새로운 르네상스인들이다 - 괴벨스, 1936년

 

괴벨스는 베를린필의 상임지휘자 푸르트벵글러를 높이 평가했고 그를 독일의 자랑이라고 불렀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정권에서 최고의 문화인사로 존중되었다.

나치 치하에서 12음 기법을 고안한 쉰베르크나 한스 아이슬러, 힌데미트 등은 유대인이거나 좌파적 성향, 현대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아 망명길을 떠나야 했다.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운명의 힘을 과시하고 이성보다 가슴과 감정에 더 호소하는 독일음악에 해가 되기”(괴벨스) 때문이었다. 같은 죄목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재즈작곡가 슐호프는 독일내 소련 포로수용소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갔으며, 빅토르 울만과 기디언 클라인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

나치 정부는 당시 독일에서 사랑받고 있던 많은 예술가들 가운데 유태인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인물을 끄집어내 그들의 작품을 없애버렸는데, 이에 앞장섰던 이도 바로 괴벨스이다.

나치의 핵심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던 그는 수많은 작가·화가·작곡가의 작품들을 ‘퇴폐예술’이라는 딱지를 붙여 파괴해 버렸다.

 

괴벨스는 1933년 11월, <제국문화협회 창립문>에서 "독일 음악"은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운명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영적 투쟁에서 투쟁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생존해 있던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이미 무덤에 묻힌 예술가들의 작품 역시 해당 예술가들이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을 타고났다고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독일 정신’이 결핍돼 있다는 이유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했다. 작곡가 멘델스존과 말러의 악보들도 이들이 유태인의 자손이었다는 이유로 같은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음악은 나치의 박해 대상에서 제외됐다. 뿐만 아니라 나치는 스트라우스 왈츠를 독일 정신의 상징처럼 추켜세웠다. 스트라우스가 생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왈츠를 독일과 오스트리아인의 춤으로 세계에 인식시킨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지만, 괴벨스 자신이 워낙 댄스와 무도회를 좋아했던 것도 이유가 됐다.

그런데 1938년, 난처한 일이 생겼다. 스트라우스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그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던 학자들이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스트라우스 조부(祖父)의 혼인성사 기록을 들춰본 결과 그 부부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태인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 일이 밝혀진 시점이 나치가 인종정책을 더욱 강화해 가던 때였기 때문에 괴벨스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라우스가 유태계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에게만 예외 규정을 적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스트라우스 왈츠에 ‘퇴폐적’ 혹은 ‘비독일적’이라는 낙인을 찍자니 이제까지 스트라우스를 ‘국민음악가’로 찬양했던 일이 우스꽝스러워지고….  

괴벨스는 수많은 정치집회에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선전선동의 도구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스트라우스 왈츠의 기품과 낭만성을 개인적으로도 사랑했다. 게다가 스트라우스는 원래 오스트리아인이면서 독일 국적을 취득한 작곡가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이미지 제고에 더욱 이용가치가 높았다. 

고심 끝에 괴벨스는 결단을 내렸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이름 위에 엑스(×) 자를 긋는다면 국가적으로 망신스러울 뿐 아니라 손해가 너무 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날조하는 편을 택했다.  

 

제국호적청에 의뢰해 스트라우스가(家)의 호적에서 ‘유태인’이라는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게 했던 것이다. 당국은 대성당의 혼인성사 기록을 압수한 다음 필요한 부분을 수정했다. 그런 뒤에 스트라우스가는 41년 2월20일에 베를린시에서 발급한 새 호적을 얻었다.  

그런데 자료조사에 참여했던 몇몇 학자들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당국은 그들을 불러들여 은밀히 협박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괴벨스는 각종 영화의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젊은 시절의 레니 리펜슈탈

베르타 헬레네 아말리에 "레니" 리펜슈탈(Berta Helene Amalie "Leni" Riefenstahl, 1902. 8. 22 ~ 2003. 9. 8)은 독일의 배우, 감독, 영화제작자이다.

故손기정 옹과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죽기 직전 그녀는 "히틀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레니 리펜슈탈이 괴벨스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다.

 

괴벨스는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이자 영화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세운 천재 여류감독 레니 리펜슈탈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전후 리펜슈탈은 자신은 전혀 대학살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며 나치인사들과 개인적 친분도 두텁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반증하는 괴벨스의 일기 내용이 발견되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두뇌 요제프 괴벨스 - 히틀러는 지식인들을 싫어했지만 괴벨스는 총애하였다. 그러나 성격적인 차이로 인해서 두사람의 개인적인 친분은 한계가 있었다.

 

히틀러와 슈페어의 관계와는 달리 히틀러와 괴벨스의 관계에는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개입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매우 감탄했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친구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없었다. 히틀러는 괴벨스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여배우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가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은 히틀러의 천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 트라우들 융에, 히틀러의 비서

 

내가 출연한 영화 <창공의 목소리>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선전부의 부름을 받았다. 괴벨스는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 나를 산책에 초대했다. 산책에 초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럼으로써 내게 접근하려 하였다. 나는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그가 포기하게 되었다. 집으로 가기 전,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런식으로 성공할 수 있겠어!" 얼마 뒤에 우리는 영화 촬영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아넬리제 울리히, 영화배우

 

 

괴벨스의 냉혹한 성격은 이 사진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것 같다.

 

괴벨스의 내심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 때문에 우리는 도대체 약삭빠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자신이 한 말과 최후에는 승리한다는 믿음을 정말로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한 말에 대가를 치른 것이다. - 디트리히 에버스, 국방부 선전부의 영상 검사관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괴벨스의 영향력은 1938-41년 사이에 다소 약화되었는데 이 시기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책임자가 할 일이 별로 없었던 탓도 있지만 대전 초기 무적 독일군의 신화의 상당 부분은 괴벨스의 선전필름에 의한 것이 많았다.실전에서 독일군의 기계화 진척도는 당시 알려진 만큼 상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괴벨스에 의해 널리 유포된 선전 필름에 의해서 독일군의 전격전은 신격화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여 전세가 역전되면서 괴벨스는 비로소 패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선전의 대가로서 진면목을 보일 수 있었다.

괴벨스는 직접 돌아다니면서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선전활동에 주력했고 그것은 대중의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유력한 나치 인사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버린 한참 뒤에도 괴벨스는 대중 앞에 끊임없이 다가서는 용기를 보였다. 이때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그때까지 극히 부정적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시켰다. 괴벨스의 활동은 특히 후방의 전력을 강화하는데 효과적이었으며 바야흐로 총력전의 주창자가 되었다.)

 

 

결코 지치지 않는 달변의 연설가 - 괴벨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중을 선동했다.

 

러시아인들은 원시적인 민족이고 더럽고 문화도 없는 나라라는 선전에 우리는 세뇌되었다. 1945년에 참전했을때, 나는 러시아인들을 그들이 우리를 먼저 죽이기 전에 우리가 그들을 먼저 죽여 없애야 하는 짐승처럼 여겼다. - 칼 하인츠 비알디가

 

괴벨스는 종전 몇 달 전 부터 이 전쟁은 승산이 없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히틀러는 서방 강대국들과 소련 사이의 동맹 관계가 오래 지속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승리를 생각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수용할 만한 강화 조건은 얻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반프리트 폰 오펜, 괴벨스의 개인보좌관

 

히틀러의 생일날이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괴벨스의 연설을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여기서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이 연설을 말도 안되는 황당한 얘기를 늘어놓은 것인가. 단순히 기만책에 불과한 연설인가. 그는 냉정하게 1인 2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 독일의 절반 이상이 점령당하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밀리게 되자 당의 주요 인물들은 자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승리가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 우르줄라 폰 카르도르프의 일기, 1945년 4월 20일

 

(괴벨스는 전쟁 말기 사린, 소만, 타분 등 독일이 비축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신경 독가스를 연합군에게 사용할것을 히틀러에게 건의하였다. 당시 방독면과 방호복의 보급과 수준으로 보아 피부로도 침투하는 신경가스가 전장에서 사용되었다면 연합군의 전사자는 몇백만 이상 증가했을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히틀러는 전쟁 초기부터 독가스를 전장에서 사용하는것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1차대전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독가스의 전술적 유용성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었을까? 그 이유는 오로지 추측만 할수 있을 뿐이다. 독일이 비축하고 있던 신경 독가스들은 전후에 비밀 장소에서 전량 매장되었다.)

 

<엑스페리먼트>를 만든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의 2004년작 영화 <몰락>에서 괴벨스 역을 맡은 베를린 출신 독일 배우 Ulrich Matthes... 비슷한 인상이긴 하지만 괴벨스보다는 키가 많이 크다.

히틀러의 유언을 치고 있을때, 갑자기 괴벨스가 뛰어들어왔다. 그의 모습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게 말했다. "융에 부인, 총통께서는 내가 베를린을 떠나 장차 다시 구성될 정부에서 그가 맡고 있던 직책을 내가 이어받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나는 아직 베를린 대관구의 지도자인 걸요. 나의 자리는 총통의 옆입니다. 나는 그를 떠날 수 없어요."
- 트라우들 융에, 히틀러의 비서

 

 

 

영화 <몰락>에 나오는 자살을 앞둔 괴벨스 가족의 마지막 모습..가운데는 막다 괴벨스역의 독일 여배우 Corinna Harforch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여자는 영화의 원작 회고록을 쓴 히틀러의 개인비서 트라우들 융에 역의 배우 Alexandra Maria Lara

 

 

"아이들은 여기 남아라"는 말이 나왔을때, 총통 벙커에서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자들, 주방 요원들과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 아이들 주위에 무릎을 꿇고 있던 괴벨스 부인 막다에게 애원했다. 여성 조종사 한나 라이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베를린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피신시키려고 하였다. 괴벨스 부인은 거절했다. 그리고 막다는 내 방에서 아이들과 죽음을 준비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하얀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어 주었다. 그리고는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괴벨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슈툼페커 박사가 그들에게로 갔다. 나우만 박사가 내게 말하기를, "그들은 자신들이 마실 설탕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슈툼페커 박사가 아이들에게 건네준것은 독약이었다.
- 로쿠스 미쉬.. 총통벙커의 무전병

 

영화 <몰락> 에서 묘사된 6명의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얼마후 아이들이 잠들자 청산 앰플을 하나씩 아이들의 입에서 깨뜨려 살해하는 마그다 괴벨스.

 

 

영화 <몰락>에 묘사된 괴벨스 부부의 자살 장면...괴벨스 부부는 아이들을 독살한뒤 벙커 밖에서 마주본 상태로 괴벨스가 부인을 먼저 쏘고 그다음엔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괴벨스는 히믈러와 괴링이 달아난 후에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히틀러에게 충성하였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아직 어렸던 자신의 네명의 아이들과 아내 막다와 함께 일가족이 모두 자살한 유일한 인물이였다. 최근 러시아가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괴벨스와 그의 가족들의 유해는 히틀러와 같은 장소에 매장되었다가 나중에 화장되었으며 가루가 된 유해는 히틀러와 같은 비밀장소에 뿌려졌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죽은뒤에도 영원히 히틀러와 함께하게된 유일한 인물일것이다.

 

모든것이 끝났다. 노래는.......

 

- 괴벨스의 가족  (가장 아래 있는 얼굴에 독살당하기 전 저항의 흔적이 있는 아이가 맏딸.)

 


- 권총 자살한뒤 반쯤 불탄 괴벨스의 시체, 1945년
 
 

"너희들은 자본 투자라고 말하지. 그러나 그런 그럴 듯한 말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짐승 같은 허기만이 있을 뿐이다. '짐승 같은' 이라고 말했지만 이 표현은 짐승에 대한 모욕이다. 왜냐하면 짐승은 배가 부르면 먹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 괴벨스, 1923년. (괴벨스의 일기 中)
 
 
http://gall.dcinside.com/list.php?id=worldwar2&no=2941&page=686

 

이들의 어린시절.

 

 

좌측부터 하인리히 히믈러, 아돌프 히틀러, 헤르만 괴링, 사진에서 우측 요제프 괴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