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차이즈 스타라는 말이 있다. 특정 지역을 연고로 하는 스포츠 구단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뛰어난 활약을 보인 스타를 일컫는 말이다. 프렌차이즈 스타는 팀을 대표하는 얼굴이자 상징이다. 오늘 만나게 될 '라일락' 전호진은 IM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라교수'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유명한 1세대 프로게이머이자 IM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전호진을 만난다니 설렜던 것이 사실이다.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추운 겨울. 인터뷰를 위해 지하철역으로 마중 나온 그를 볼 수 있었다. 182cm의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매, 차갑게 튀어나온 광대까지. 화면에서 보았던 어리고 앳된 프로게이머의 모습이 아닌 다 큰 성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의 인터뷰라며 살짝 긴장한 듯한 모습과 함께 커피숍으로 향하고 있는 전호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질문이 떠올랐다.


"말만 프리시즌이지 상금도 서킷 포인트도 없는데 모든 선수가 열심히 하던데요. 감독님들 인터뷰에서는 저희 강동훈 감독님만 열심히 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웃음)." 최근 마무리된 프리시즌에 대한 물음에 전호진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1무 3패의 아쉬운 성적으로 프리시즌을 마친 IM. 인터뷰 시작부터 너무 무거운 질문을 던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연애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여자친구요?" 오랜만의 인터뷰에 긴장했던 전호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삼 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가 있어요. 제가 만약 여자라면 프로게이머는 절대 만나지 않을 것 같아요. 평일에는 절대 못 만나고 주말에도 경기가 있는 날에는 여자친구를 만날 수 없어요.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도 프로게이머가 되기 전부터 만났어요. 제가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좋아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제 옆에 함께 있죠(웃음)"

여자 친구를 자랑하는 전호진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선수가 되기 전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놀 다가 여자친구의 전화를 무성의하게 받아 혼이 났다는 이야기, 게임 중 전화를 받다가 경기에 패배해 친구들에게 질타를 받은 이야기 등을 들으니 많은 공감이 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연애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프로게이머 '라일락'보다 사람 전호진이 눈에 들어왔다.

▲ IM에서 함께했던 그리운 얼굴들

전호진을 만나면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바로 포지션에 관한 것이었다. 교육 영상을 통해 만난 전호진은 모든 라인을 잘했던 만능선수였다. 그는 충분히 팀의 중심인 미드 라이너나 원거리 딜러로 데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탑 라이너로 데뷔했던 것일까?

"한국에서 열린 대회에서부터 탑 라이너로 경기를 치렀어요. 지금은 탑이 팀을 위해 희생하고 고통받는 라인으로 인식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니달리, 케넨, 럼블 등 딜링에 중점을 둔 챔피언이 많았고 '샤이' 박상면, '막눈' 윤하운 등 유명한 탑 라이너가 많았어요. 흔히 유럽은 미드 라이너, 중국은 원거리 딜러, 한국은 탑 라이너의 고향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탑 라인도 분명 팀의 중심이었어요."

포지션 변경에 대한 질문도 빠질 수 없었다. 탑, 정글, 서포터 등 프로게이머 중 가장 많은 포지션 변경을 경험한 선수가 바로 전호진이다. 전호진은 잦은 포지션 변경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포지션 변경이 잦은 부분에 대해 처음엔 별로 상관없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어느 라인에 가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팀도 저를 전적으로 믿어줬거든요. 연습 때 승률도 정말 높았어요. 그런데 실제 경기에서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죠. 감독님은 제가 어느 라인을 가든지 제 몫을 해줄 거란 믿음을 가지고 계셨는데 제가 그 믿음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해요."


최근 높은 인지도를 가진 여러 선수가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리고 이들은 변경된 포지션에서 의미 있는 성적을 거뒀다. 포지션 변경에 아쉬운 경험이 있는 전호진이 이들에 활약을 바라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했다.

"프리시즌 동안 '스코어' 고동빈, '앰비션' 강찬용 등 여러 선수가 포지션을 변경했어요. 결과도 모두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포지션을 변경하기 위한 준비기간이 정말 짧았어요. 두 선수는 모두 팀 내에서 전략적으로 오랫동안 준비해서 포지션을 변경했다고 알고 있어요. 반면, 저는 팀의 누군가가 탈퇴를 한다거나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급하게 포지션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정말 아쉬워요"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전호진. 어린 나이에 많은 상처가 되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LoL 프로게이머 중엔 가장 많은 경험을 쌓은 1세대 프로게이머이기에 선수 중엔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회 초년생 나이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은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어요. 탑 라이너들의 순위를 1위부터 8위까지 매긴다고 생각했을 때, 저는 분명히 1, 2, 3위 안에 손꼽는 선수가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프로로서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강동훈 감독님은 그때마다 저와 깊은 대화를 하면서 끝까지 저를 믿어주셨어요. 그 믿음이 정말 고마웠죠. 감독님이 저와 계속 함께하고 싶어하신다면 끝까지 프로게이머 생활을 이어나갈 거에요"


전호진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프로게이머를 시작했을 때는 막연하게 우승이 목표였어요. 프로에게는 커리어가 정말 중요하고, 또 그것이 그 선수를 판단할 때 가장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지표인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지금 저에게 궁극적인 목표는 우승만이 아니에요. 제가 프로 선수로서 어떤 일을 성취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프로 생활에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전호진을 바라보니 느껴지는 바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의 모습, 자신을 믿는 감독에게 실력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 자신 또한 선수로서 밝히지 않은 목표를 가지고 이루려는 의지 등. 아직 사회 초년생으로 여러 가지 꿈을 꾸며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나이 혹은 학생신분으로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나이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됐다.


즐거웠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가 작별인사를 할 때 아직 듣지 못한 대답이 떠올라 불쑥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아까 말했던 것 중에 대답 안 하셨던 게 있어요. 프로 선수로 어떤 일을 해낸다면 선수 생활에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작별인사 중 뜬금없이 터져 나온 질문에 전호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제가 무엇을 해내고 싶은지 정확하게 몰라요. 그렇지만 제가 선수로 무언가를 해냈다면 저 자신도 깨닫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