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성장한다. 단순히 나이를 먹으면서 저절로 행해지는 성장을 말하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 아니 모든 생명체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통해 배우며 이를 바탕으로 한층 성숙해진다. 기쁨을 만끽했던 경험 뿐만 아니라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했던 경험에서도 성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렇게 경험을 통해 쌓인 배움과 성장은 때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엄티' 엄성현이 정들었던 진에어 그린윙스에서 나왔다. 프로게이머 데뷔를 진에어 그린윙스에서 했으니까 친정팀과의 이별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프로게이머 생활의 시작을 알렸던 친정팀에서 보낸 3년. '엄티'에게는 그 어떤 기억보다 오래도록 남을 경험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3년 동안 경험했던 것들을 토대로 한층 성장했고, 그 성장을 통해 새로운 도전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매번 e스포츠 경기장에서만 보던 '엄티'를 밖에서 처음 마주했다. 진에어 그린윙스의 유니폼이 아닌, 사복 차림으로 등장한 '엄티'는 그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청소년이었다. 딱 그 나이 때 남자 청소년들이 그렇듯 평범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엄티' 특유의 달변을 자랑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한 단계 성숙해졌음을 알려주는 속깊은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진에어 그린윙스의 막내가 아닌, 어른 '엄티'가 되어 있었다.


Q. 팀을 나온 이유를 다들 궁금해한다.

팀에서 나가겠다고 생각했던 건 꽤 오래 됐다. 지난 섬머 스플릿 1라운드 때부터 그랬다. 그때 정말 힘들었고 팀과도 잘 맞지 않았다. 스플릿이 종료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고, 얼마 후에 팀 과장님이 오셔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년에 진에어 그린윙스가 바라볼 방향과 내가 바라보고 싶은 방향이 많이 다르더라. 내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빨리 팀을 나와서 뭔가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Q.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단을 내린 것 같다.

팬들이나 많은 사람이 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알고 있다. 실력이 많이 떨어졌고 기복이 심하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스크림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는 딱히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최근까지 스크림을 했었고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항상 있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비웃으실지도 모르겠다(웃음).

진에어 그린윙스에게는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팀에서 배운 것이 정말 많다. 그래도 내가 이야기도 많이 나눠보고 생각도 해보면서 느낀 건 '내년에도 이 팀에 있으면 내가 더 발전할 수 없을 것 같다' 였다. 그래서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 같다.


Q. 지난 인터뷰 당시, 가장 아쉬웠던 부분으로 '팀원들에게 신뢰를 많이 주지 못했다'는 걸 꼽았다. 지금도 그런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팀원들에게 신뢰를 많이 줬다고 생각하고, 팀원들도 나를 많이 믿어줬다. 섬머 스플릿에 특히 그랬다.


Q. 진에어 그린윙스 때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팀 소속으로 승격강등전도 겪어봤고 포스트 시즌 직전까지 가보기도 했다. 두 시기 중에 언제 더 발전했다고 느꼈나?

둘 다 정말 큰 경험이라 하나를 꼽진 못하겠다. 모두 나에겐 알찬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날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승강전을 경험했을 땐 내가 못했던 플레이를 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할 지에 대해 큰 바탕부터 다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만약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 애초에 배경이 잘못된 경우다. 그걸 바로잡는 방법을 빠르게 습득했던 시기였다. 당시에 '엄티' 말고 엄성현의 입장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사람이 성격을 죽일 줄 알게 되는 거나 주위 분위기를 읽게 되는 능력도 갖췄다. 사실 눈치를 많이 봤다. 내가 팀 전력 약화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많이 미안했다. 팀원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포스트 시즌 직전에는 좀 달랐다. 그땐 실력적으로 발전한 것도 있지만, 발전을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다. 거기서 더 발전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 그런 생각 때문에 지금 더 발전한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땐 좀 자만했다.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



Q. 객원 해설도 경험했고 메타 분석 기사에 멘트를 담기도 했다. 게임 이해도가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본인이 남들보다 게임 이해도가 높다고 느끼는지?

그런 게 조금 있긴 하다. 내가 자신이 있다기 보단 '왜 다른 사람들은 이걸 공부를 안하지?' 이런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 실력이 뛰어나고 게임에 관심이 있을텐데 먼저 찾아내지 않는지 궁금하다.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 아닌가.

정밀에서 '강인함' 룬이 있다. 그 룬을 세주아니 메타 때 아무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스크림이나 대회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니 다들 그 룬만 들었다. 내가 처음 활용했었다는 걸 알게 되고 놀랐다. (왜 다들 새로운 걸 찾지 않을까?) 그걸 나도 모르겠다. 분명 다른 선수들도 게임을 그렇게 많이 할텐데. 랭크게임이나 스크림에서 내가 쓰는 걸 봤으면 분명 상대도 내가 뭔가 이상한 걸 하고 있다는 걸 감지했을 거다. 그런데 왜...?(웃음)

어찌 보면 내가 손해보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선구자 역할만 하고 남들에게 그걸 뺏기는 거니까. 일찍 시도하건 늦게 따라하건 성공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럼 내가 멍청한 건지도 모르겠다(웃음).


Q. 새로운 시도가 끝내 대회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도 있을 것 같다.

트리스타나 정글이 생각난다. 그리고 아트록스 정글도 그렇다. 리워크 이후에 아트록스가 정글로도 좋아보였다. 팀원들에게 얘기했었는데 나를 무시하더라. '소환' (김)준영이 형과 '그레이스' (이)찬주가 "아트록스는 그냥 다른 라인이 더 좋아" 라고만 했다. 지금 랭크게임에서 아트록스 정글이 주요 메타다. 조금 아쉽다.

트리스타나 정글은 '스피릿' 이다윤 선수가 우리 팀과의 스크림에서 한 번 꺼냈던 걸로 기억한다. 상황에 따라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룬은 '집중공격'을 들더라. 아프리카 프릭스 선수들이 진에어 그린윙스 뿐만 아니라 여러 팀과의 스크림에서 다양한 테스트 픽을 시도해봤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 프릭스가 그만큼 메타를 선도하고 잘하지 않았을까.


Q. 초반 정글 동선 싸움을 잘 구상한다고 느꼈다. 위에서 말했던 본인의 게임 이해도가 발현된 것인가? 아니면 팀의 요구였는지?

팀에서 요구를 하진 않았다. 그냥 내가 그랬다. 난 초반에 나오는 사소한 동선 싸움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거 없으면 나는 게임을 못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래도 초반에 정글러가 잘 풀리면 라이너들도 쉽게 게임을 풀어갈 수 있으니까. 작년 스프링 스플릿에 부진했을 때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내 기억으로 당시 정글 메타였다. 초반에 칼날부리 하나만 빼앗기거나 바위게 하나만 빼앗겨도 게임 승패가 갈릴 정도였다. 그걸 보면서 초반에 절대 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Q. 이번 LoL 월드 챔피언십이 정글러 주도 하에 이어지는 상체 라인 메타였다. 만약 초반 정글 동선 싸움을 중시하는 '엄티'가 출전했다면 잘했을 것 같나?

아쉽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현실에 바로 순응했다. '테디' (박)진성이 형과 대회를 보면서 "내가 저 사람보다는 잘할 자신 있다"는 말을 서로 많이 했다. 그 말을 하면서 항상 마지막에 했던 말은 "우리는 10위 팀 정글러랑 원거리 딜러"였다(웃음). 어떻게 보면 둘 다 그런 말을 하면서 분노 게이지를 쌓는거다. 다음에 더 잘하기 위한 준비 같은 느낌이다.


Q. 팀을 열심히 찾고 있을 시기다. 한국에 남는 걸 선호하나?

LCK에 남고 싶은 마음이 크긴 하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해외에서 조건이 좋게 들어오면 해외 진출도 당연히 가능하다. 아무래도 LCK에서는 나를 '남는 선수' 취급을 할 거다. 반면, 해외에서는 나를 1순위로 해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조건들에 따라서 결정을 할 것 같다.


Q. 영어를 잘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영어권 팀으로 이적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별개인 것 같다. 한국인끼리도 서로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서 마음이 맞는 건 아니다. 내가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도 마음이 통하리란 법은 없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혜택이 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Q. 조금 색다른 걸 준비했다. '브래인 맵'을 가져왔는데 이걸 채워줬으면 한다. 다 채우면 그걸 보면서 하나씩 설명도 해줘야 한다.

아, 이거 뭔지 안다. 다른 기사에서도 몇 번 봤다(웃음).



Q. 취직 생각을 가장 가운데 적었다.

사실 걱정이 많다. 아까 말했지만 나는 10위 팀 정글러다. 과연 내가 팀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사람들이 나를 테스트는 볼 수 있게 해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실제로 내가 한 팀에 테스트를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 '나는 테스트를 볼 수도 없는 선수인가' 하는 생각 때문에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다.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은 생각에 테스트를 요청했었다. 그게 핵심이었는데 거절당했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 일 이후로 해외 팀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기도 했었다. 한국에서는 날 원하는 팀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Q. 그래서 뇌 안에 게임에 대한 단어들만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그랬다. 3년 동안 저 단어들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항상 자기 전에 LoL 영상을 본다. 다른 지역 선수들은 어떤 걸 쓰는지, 다른 선수들은 '즐겜'이더라도 뭘 해보는지 궁금하다. 사이트도 매일 찾아본다. 한국 랭크게임에서 어떤 사람이 정글을 잘 하는가 궁금하기도 하고. 관전도 다 해본다. 그걸 보면서 '이 친구를 만나면 이런 식으로 동선을 짜서 카운터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Q. '새로운 게임을 해볼까' 는 뭔가?

그런 갈등이 있었다. 쉬는 기간에 내가 새로운 게임을 해보려고 했다. 사실 예전에는 힘들 때 잠시 다른 게임을 하면서 힘든 걸 잊는 방법도 자주 썼다. 뭔가 급박했을까. 그런 생각이 점점 잊혀지더라. 오히려 랭크게임 점수를 많이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Q. 그럼 아예 종목 변경을 생각해본 적은 있나?

있었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이랑 오버워치다. 결론부터 말하면, 변경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LoL이 정말 마음에 든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은 알파 버전부터 최상위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1등급 유지하다가 그랜드마스터를 유지했다. 아이디를 잃어버린 뒤에 접었다(웃음). 사실 그때 하면서 느꼈던 건 '나한테는 LoL보다 이 게임이 재미없다'는 거였다. 점수를 올리기 위해 기계적으로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

오버워치도 계속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랜드마스터 티어를 계속 유지했다. 그때 같이 게임을 했던 '비도신' (최)승태 형은 지금 오버워치 리그 런던 스핏파이어 팀에서 프로게이머를 하고 있다. 나에게는 오버워치도 뭔가 재미 면에서 부족했다. 만약, 내가 고민 끝에 오버워치 씬으로 옮겼다면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 같다.

LoL은 꾸준히 새롭다. 색다른 걸 계속 찾아낼 수 있다. 오버워치는 패턴이 항상 비슷하더라. 난전 구도라는 점이 오히려 패턴을 단조롭게 만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LoL은 스크림을 하다 보면 와드 하나 잘못 설치해서 게임에서 패배하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신기하고 새롭고 어렵다.


Q. 이 작은 공간에는 '생각없음'을 적었는데?

요즘 생각하는 게 큰 공간에 적은 것들이 전부다. 다른 건 없다. 그래서 저렇게 적었다.


Q. 어린 나이에 프로게이머가 되어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많이 소홀했을 것 같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많이 미안하다. 실명을 공개하긴 좀 그렇고... 이 씨라고 하자(웃음). 예전에는 이 씨랑 항상 같이 만나고 놀았다. 그런데 내가 프로게이머가 된 이후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 친구도 프로게이머 지망생인데, 최근 그 꿈을 조금씩 접고 있다더라. 아무래도 항상 같이 놀다가 내가 갑자기 그 친구 옆에서 휙 하고 사라진 느낌이라 항상 미안하다.

그리고 가족들은 사실... 자주 만난다(웃음). 어머니가 나를 많이 챙겨주신다. 1주일에 한 번씩 날 찾아오신다. 그러면서도 항상 나에게 부담되진 않냐고 물어보신다. 팀원들이 부담스러워 할까봐 일부러 같이 보진 않으시더라.



Q.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다 못한 말이 있다면 자유롭게 해달라.

2년 전에 날 뽑아주신 한상용 감독님과 진에어 그린윙스 사무국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매번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분들이다. 그때 날 뽑아주시지 않았다면 난 아마 망했을거다.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팬들에게도 정말 감사하다. 지금까지 받았던 팬래터를 모두 보관하고 있다. 요즘 하나씩 다 다시 읽어보고 있다. 힘들 때마다 큰 힘을 얻는다. 내년에 LCK에 있건 해외로 나가건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둬 좋은 걸 많이 사서 돌아오겠다(웃음).


Q. 본인을 선택해줄 미래의 팀에게도 한 마디 해달라.

날 뽑아가시면 절대 후회할 일 없게(웃음) 해드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