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MSC를 준비하고 있던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지난 ‘울프’의 은퇴 인터뷰를 잘 보았다며 친근한 인사를 건네는 이는 다름아닌 ‘프로즌’ 김태일 선수. IM, 롱주 게이밍 시절 ‘심장갓’으로 불리며 용산 경기장에 존재감(그리고 덩치)을 뽐냈던 때도 어느덧 수 년 전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천천히 눈에 익던 선수가 머나먼 타지로 가게 된다면 감정이 묘해지곤 한다. 게다가 북미나 유럽, 중국 등 소식이 잦은 곳도 아닌 와일드카드 지역이라면 우려가 더해지는 것은 당연. 와일드카드 지역에서 끝내 활약상을 보이지 못하고 조용히 자신의 커리어를 마무리짓는 선수들을 못 본 터가 아니라, 동종 업계의 전우로서도 걱정이 앞서곤 한다. 하물며 당사자, 그리고 팬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터키로 이식된 심장은 다행히 팔팔하게 뛰었다. 우승도 하고, 최고의 미드라이너로 꼽히기도 했다. 파랗고 노란 그 유니폼이 점점 제 색 같아 보였다. 멀리서나마 좋은 소식들이 들려와 남은 팬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빛은 멀리서도 보이지만,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멀리선 볼 수 없었다. 프로즌은 꽤나 많은 것을 오랫동안 속으로 감당해 온 듯 했다.

그가 대부분의 삶을 살았던 남양주의 한 번화가. 과거부터 현재, 인생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다 보니 상황 상 술 한 잔 기울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6년이 넘게 쉼 없이 뛰어 온 심장, 그리고 다시 뛸 심장... 프로즌이 감당해 온 고민들과 중대한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찬찬히 들어보도록 하자.

(해당 인터뷰는 5월 25일에 진행되었습니다)




반가워요. 오랜만에 조개구이라도 먹으며 인터뷰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먼저 오랜만에 인사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프로게이머…?(웃음) ‘프로즌' 김태일입니다.


최근에는 WAF라는 팀의 코치로 팬들에게 안부를 알렸죠. WAF 코치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멕시코에서 팀 계약을 종료하고, 한국으로 넘어왔을 때였어요. 제가 정말 심리적으로 힘들 때였어요. 프로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시기였죠.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어요. 그래도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지만 이대로라면 제 자신이 망가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팀과 말해서 계약을 종료하고, 한국에서 좀 쉬고 있었죠.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크래시' 이동우에게 연락이 왔어요. ‘3부에서 2부 가는 팀에 도전하고 있는데, 미드 라이너로 합류해줄 수 있냐'는 거였죠. 고민을 좀 해보겠다고 했어요. 그 때는 사실 선수로 뛰고 싶은 생각은 10%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던 때였어요.

어차피 저는 막 한국에 와 자가 격리 중이었고, 연습도 온라인으로 하는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자' 생각하고 같이 스크림을 했죠. 그런데 팀원들이 정말 잘 해주더라고요. 이대로 가면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그런데 개인 연습을 하다보니, 정말 게임을 이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판 한 판이 고통스러웠어요. 승패에 관계없이 말이죠. 다시 연습을 목적으로 게임을 하다보니 큰 스트레스가 되었어요. 혼란스러웠어요. 멕시코에서부터 조금씩 있던 증상인데, 한국에서 터져버린 것이지요.

저는 저로 인해 외적이든 게임 내에서든 저 때문에 팀원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정말 싫어해요. 하지만 이대로면 팀에 피해를 주게 될 상황이었죠. 성적이 어떻든 저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불편하게 있었을 거에요. 그래서 사흘 정도 연습을 하다가 팀원들에게 ‘미안하다, 나 정말 못 하겠다' 하고 말했어요.

사실 개인 연습이 아닌 스크림만 해도 됐겠지만, 저는 기왕 할 거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로 랭크가 없이 스크림만 하는 연습은 성적이 나오더라도 안 좋은 연습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선수는 이제 안 하는 것이 맞겠다고 결론을 내렸죠.

하지만 이대로 팀을 떠나기엔 팀원들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저 말고도 미드 라이너는 있었으니, 어차피 저도 코치쪽으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팀에 코치직을 제안했어요. 그렇게 시작되었죠. 팀원들은 많이 좋아해줬어요.


갑작스러운 결정이었겠지만, 작은 팀을 다시 성장시키는 느낌이 색다를 것 같아요. 여러 경험을 가진 선수들과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도 들 것 같고요.

맞아요. 저희 팀에 롤드컵 무대를 밟아 본 선수가 저 말고도 꽤 있어요. 그런데도 지금은 3부에서부터 아마추어들과 싸우며 다시 시작해보는 중이죠.

팀원들은 절실했어요. 다들 롤드컵도 다녀왔고, 어떻게 잘만 하면 팀도 구할 수 있을 팀원들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은 팀원들이기에, 다시 챌린져스 코리아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더라고요. 그런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꼈어요.

▲ 롱주 게이밍 시절의 프로즌, 크래시 

여러 나라에서 떠돌다 온 선수들이 많다고 했는데요, 본인도 그렇죠. 팀원들과의 그런 공통된 특성에서 오는 특유의 공감대 같은 것이 있을까요?

좀 많죠. 어떻게 보면 저와 팀원들이 그렇게 해외에서 돌아다녔던 이유는, 한국에서 뛰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해서였던 경우가 많아요. 그 당시엔 실력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죠.

그런 부진을 스스로 인정하여 해외로 나갔고, 다시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두 뭉친 거에요. 그런 마음을 같이 갖고 있다보니 플레이 하나 하나에도 그런 진심이 느껴져요. 지금은 그저 같이 게임하는 것이 너무나 좋아요.

관객분들도 이미 이름을 알고 계실 선수들도 있긴 하지만, 저희는 저희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알리고 싶어요. 더 좋은 모습으로요.


전반적으로 코치가 적성에 좀 맞는 것 같나요?

저는 선수를 할 때에도 제가 코칭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지금도 사실 보면 또 코치를 하고 있다고 하기도 애매해요. 연습을 온라인으로만 하고 있고, 스스로도 아직 코치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제 생각대로 하고 있을 뿐이죠.

그렇지만 지금이 정말 좋아요. 물론 앞으로 더 해보고, 더 힘든 상황에 맞닥뜨려봐야 잘 알겠죠. 하지만 지금으로선 제가 좋다면 코치를 계속 할 거에요.


사실 이렇게 인터뷰를 시작한 큰 이유가 있을텐데요, 은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결정에 대해 편히 말해주세요.

제가 원래 솔로 랭크를 엄청 좋아했어요. 쉬는 날에도 솔로 랭크를 하는 게 저에겐 휴식일 정도였어요. 그런데 올해 2월부터 솔로 랭크를 하는 것이 싫어지고, 게임에 대해 권태기 비슷한 것이 왔어요. 그 때 ‘이제 그만 해야겠다'는 마음과 ‘아니다, 지금 지쳐서 이러는 것 뿐이다'는 마음이 같이 들었어요.

하지만 솔로 랭크를 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지금까지 점점 더 커졌어요. 권태기임에도 억지로 잡는 느낌이죠. 그러다보니 이제 이런 것은 그만 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물론 즐겁게 게임을 하는 것은 괜찮은데, 점수를 올리거나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면 마우스를 잡기 싫어질 정도가 되었어요.

이게 어느 정도냐면, 만일 제가 프로게이머로서 성적에 상관 없이 매달 오백만 원, 아니 천만 원을 받는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렇다 해도 돈 안 받고 게임도 안 하는 게 더 좋을 정도에요. 그 정도에요. 뭘 해도 병원비가 더 나올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도 아쉽지 않아요.


은퇴를 고민할 때,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이 무엇이었나요?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리죠. 제가 은퇴를 하면 코치를 하더라도 선수 시절과는 사정이 많이 달라질 거니까요. 결국 커리어가 지나면 돈이라는 것도 꽤 중요하게 남는 것 중 하나인데, 그것도 포기할만큼 게임을 (연습 목적으로)하지 않을 때 행복해요. 지금도 돈 같은 거 하나도 안 받고, 목표 하나만 보고 코칭을 하고 있어요.


함께 해왔던 오래된 동료들과는 연락했나요? 반응은 좀 어땠나요?

지금 kt에 계신 강동훈 감독님, 전 담원의 김목경 감독님께도 조언을 많이 구했어요. 프로게이머라는게 할 수 있을 때 바짝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시간이 지나고나서 하긴 힘든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들었어요. 설득도 당할 뻔 했죠.

하지만 제가 확실하게 표현했어요. 지금 스트레스를 너무나 받고 있고, 이 결정에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요.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 그렇다면 놓아주는 것이 맞다고 해 주셨어요. 스트레스라는게 게이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시는 것인지 아시니까요. 그 외에 여러 곳에 제 은퇴를 알리진 않았어요. 그랬다간 생각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았죠.


스트레스를 그렇게 많이 받았을 줄 미처 몰랐어요. 프로게이머에게 스트레스란 이토록 큰 은퇴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군요.

저와 같이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프로게이머들을 정말 많이 봐 왔어요. 같은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눈에 보여요. ‘아, 이 친구가 게임이 질렸구나. 게임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하지만 바로 구분하긴 어려워요. 단순히 게을러져서 그런 것인지, 은퇴 생각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지를 말이죠. 하지만 열정이 식어가는 것은 겉에서 봐도 보여요.

솔직히 저는 서른 살까지 프로게이머로 활동할 줄 알았어요(웃음). 제가 스무 살에 시작을 했는데, 이제 스물 일곱이네요. 은퇴 생각은 그간 많이 했었지만, 그 때가 힘들어서 순간 생각했던 정도였어요. 이번엔 진짜에요.


건강은 좀 어떤가요? 우울증도 겪었다고 들었어요.

스트레스가 없어지니까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전엔 정말 우울했거든요. 우울증 판단도 받았고, 입원 제의도 받았지만 이겨내보겠다고 했죠. 힘든 상황에서 힘든 일이 또 겹친 적도 많았지만,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제 멘탈이 꽤 좋은 것 같아요.


그간 참 다양한 길을 걸어왔죠. LCK 팀에서 시작을 했고, 터키에서도 한 획을 그었고, 짧지만 멕시코도 다녀왔고요. 돌아보면 어떤 기분이 좀 드나요?

제게 있어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선택들이에요. 정말 훅 지나간 것 같아요. 아직도 어제 같은 일들이에요.

제 인생의 최종 목표 중 하나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 조용하게 사는 것이었어요. 한국에선 너무 힘들었어요. 슬럼프도 왔고, 경쟁도 치열했고, 경쟁을 이기기엔 제 실력은 부족했어요. 은퇴 생각의 시작도 한국에서였어요. 그리고 은퇴에 대해 결정을 내리려 했을 때 터키에서 연락이 왔었죠.

그 땐 이런 마음이었어요.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 뱀의 머리가 되자는 마음’. 그런 생각으로 (당시 와일드카드 지역이었던) 터키로 가게 되었어요. 그 곳에서 든 생각은 ‘롤드컵에 못 가면 은퇴를 하자' 였어요. 못 가면 더 이상 변명할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대신, 그 때까진 죽도록 해보자는 거였죠.


▲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 때 배운 것이 많아요. 팀 게임이라는 것의 의미를 터키에서 배웠어요. 한국에서도 코칭 스태프들이 훌륭한 조언을 해 주셨지만, 제가 어려서 그랬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 땐 미처 몰랐죠.

터키에서는 제게 뭔가를 알려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제가 스스로 알아야 했고, 공부해야 했고, 심지어 제가 팀원들에게 알려줘야 했어요. 어떻게 보면 플레잉 코치 같은 역할이었죠. 그런데 그러다보니 제 실력이 같이 늘더라고요.

한국에 비교해 아랫 단계의 리그라고 하지만, 저는 이기다보니 자신감이 많이 붙었어요. 그 때 그렇게 성장을 많이 했고, 그 중 가장 성장한 부분이 ‘팀'에 대한 마인드였던 것이죠. 한국에선 솔로 랭크를 하루에 열 게임 이상을 했을텐데, 터키에서는 일곱 판 정도를 했고 나머지 시간은 팀원들에게 투자했어요.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는 프로 게이머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고 역량을 다져왔다면, 터키에서는 코치로서의 역량을 쌓기 시작했던 거네요.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죠.

그렇죠.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수확이었죠. 밴픽도 관여했고, 상대 팀의 성격을 파악했고, 분석까지 했어요. 심지어는 팀원 상담까지 했어요. 안 좋은 일이 있어 보이면 밥도 사주고, 가정사도 논할 정도로 팀원들과의 유대가 깊었어요. 이러다보니 하루 하루 시간이 부족하게 살아 왔어요. 저는 또 터키 가서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이제 선수들이 아니라 친구들이죠. 다들 밥 사준대요.

그 시절에 강동훈 감독님께 문자를 보내드린 적이 있어요. ‘이제야 감독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고요. 제가 그 곳에서 여러가지를 하다보니 감독님의 말씀이 떠오르더라고요.


터키에서는 수차례 최고의 미드라이너로 꼽히곤 했어요. 조용히 살고 싶었다지만, 큰 용기를 얻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많은 팬들에게 응원을 받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어요. 제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던 많은 것들을 받은 기분이에요.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전에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서 ‘한국에서 계속 했다면 자신이 더 잘했을 지’에 대해 자문하기도 했어요. 어땠을지 결론이 좀 났나요?

결론은 아직도 못 내렸어요. 생각은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한국에서 제가 계속 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요. 그 글을 올린 계기가 있어요. 제가 팀원들과 피드백을 나눌 때 제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한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죠.

저는 타지의 한국 용병은 무조건 돈 값을 해야 하고,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용병들이 잘 해야 그 다음 용병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될 것이고요. 그렇게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마련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던 것이니까요. 해외에서 준수하게 활약을 해온 많은 한국 선수들이 이 시장을 이렇게 성장하게 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정말 그 상상처럼 만일 한국에서 프로즌 김태일이 계속 활동했다면 어떤 시나리오가 나왔을까요?

(웃음)음… 네, 모르는 거니까. 행복한 쪽으로 생각을 해보면요… 강동훈 감독님을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래도 다른 팀들에도 가보고 싶었을 거에요. 하위팀과 상위팀 관계 없이, 저를 필요로 하는 팀에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을 거에요.


신인 시절의 자신을 생각했을 때, 고쳐야 했다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고집이 너무 셌어요. 특히 픽에 대해서요. 그걸로 많이 혼나기도 했죠.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로 고집을 부리곤 했어요. 그리고 이제 생각해보면 단순히 게임만 많이 하는 게 좋은 연습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연습량만 생각할 게 아니라,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하면서 연습을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쉴 땐 쉬고요.

그렇다보니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감독님께 죄송하기도 하죠. 감독님도 이런 말씀을 하세요. ‘그 때 우리(코치진)의 능력이 부족했었다. 더 좋은 것들을 네게 알려줄 수 있었을텐데’ 라고요.


그 동안의 LoL 프로게이머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첫 번째론 데뷔전이요. 처참하게 진 게 기억나네요. 정확히 기억나는데, 첫 데뷔전 상대가 ‘페이커’ 이상혁이었거든요. 제가 열심히 두드려 맞고, 그 장면을 바탕화면 이미지로 설정해 놨어요. 그 것만 보며 일 년, 이 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연습했어요. 하루에 세 시간씩 잤어요.

솔로 랭크를 하다가 잠든 적도 있어요. 그 당시엔 한 판 하고 세수하고 오고, 한 판 하고 세수하고 오는 식으로 연습을 했어요. 그 때 마인드는 ‘가장 늦게 자고, 가장 일찍 일어나자’ 였어요. 몸이 피곤해야 성공한다는 거였죠.

두 번째는 터키에서 리그 첫 우승을 했을 때였어요. 그 당시의 경기장,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그 느낌…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그 시즌에 한 번도 못 이겨 본 팀을 3:0으로 이겼어요. 성취감이 엄청났죠. 1년 동안 받은 모든 스트레스가 한 번에 날아갔고, 마냥 행복했어요.


페이커와의 승부를 오래 바탕화면으로 설정했을만큼 페이커에게 오래 승부욕도 갖고 있었을텐데요. 은퇴를 발표한 지금으로선 다시 승부를 낼 수 없겠네요.

전 기분 좋아요. 진짜로요. 페이커에 대한 질투심은 가져본 적이 없어요. 존경심 뿐이었고, 잘 됐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어요. 제가 걱정할 것도 없었죠. 항상 응원했어요.

한 때 저를 압도했던 선수가 이후에 폼이 하락해서 전과 같은 입지를 잃는다면, 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제가 ‘크라운’ 이민호와 페이커를 많이 응원했는데, 종종 커뮤니티에서 욕을 먹곤 할 때 오지랖이긴 하지만 대신 화가 나기도 해요. 힘들 때가 와도 잘 버텼으면 좋겠어요. 물론 잘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좋고요.


반면 가장 슬펐던 순간도 있나요?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데, IM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저 혼자 장롱 앞에 쭈그려 앉아 혼자 엄청나게 울었어요. 다들 숙소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저 혼자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울었어요. ‘왜 난 못 이기지? 왜 우린 못 이기지? 재능이 없나?’ 이런 생각을 하며 울었던 순간이 기억나네요.

저는 게임에만 승부욕이 있어요. 다른 건 다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데 말이죠. 게임에 대해선 승부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런 승부욕이 지금의 코칭 스타일에 점차 영향을 줄 수 있겠네요.

그렇겠죠(웃음)? 저 나중엔 회초리 들고 있을 수도 있어요.


'심장갓'이라고 불리웠는데, 은퇴라고 해도 기사에 ‘심장이 멈췄다’는 표현을 쓰긴 싫네요. 본인이 생각했을 때 대체할만한 표현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많은 별명들을 다 환영했어요. 별별 별명들이 다 있었죠. 심장 외에도 ‘판독기’, ‘승강전의 페이커’... 다 추억이죠. 지금 있는 WAF에서도 팀원들에게 ‘얘들아, 내가 승강전에선 페이커다. 날 믿어라’ 라고 농담하기도 해요.

사실 심장이 멈췄다고 해도 맞는 말이지만 굳이 붙이자면… ‘이제 프로게이머로서의 심장은 멈췄지만, 코치로서의 심장은 다시 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길긴 해도 말은 되지요?


프로즌의, 그리고 김태일 개인의 소원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네요.

프로로선… 한국 팬 많이 생기는 거…?(웃음) 팬들이 몇 분 계시긴 하는데, 이제는 시간이 오래 되니 팬보단 친구가 된 느낌이에요. 나이도 같이 먹어왔고, 형 동생 하는 분들도 있고요. 제가 한국을 떠난 지 오래 되었으니까, 다시 팬분들과 한국말로 소통을 하고 싶어요. 제가 좀 주책인가요?

개인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래 살지 않는 게 꿈이에요. 제가 외로운 것을 못 참지만 그럼에도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살아보는 게 ‘로망’이에요. 학교에서도 시끄러웠고, 숙소에서도 시끌시끌 단체 생활을 했고 하다보니 살면서 개인 공간이 많이 없었어요. 여행을 좀 넓게 다녀보고 싶어요. 그리고 최종 목적지에서 편안하게 쉬는 거죠. 정착을 하든 잠깐이든… 하지만 이런 목표는 또 언제 바뀔 지 모르죠.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듣고 싶어요.

제가 맡은 일에서 최고가 되자는 것이 목표에요. 코치를 정말 계속 할 수도 있고, 아카데미나 학원 강사를 할 수도 있는 거고, 방송이나 아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어딜 가든 최고가 될 때까진 즐겁게 계속 나아갈 예정이에요.

군대는 생각 중이에요. 올해까지는 코치를 해보고, 적성에 맞다면 계속 하고 아니면 입대를 할까 해요. 혹은 나라에서 부름이 있을 때까지 코치를 계속 하고요. 그 이후는 다음에 생각하려 해요. 그 동안 저는 너무 먼 앞날을 계획하며 살아왔어요. 지금은 눈 앞의 계획들을 보며 살아보고 싶어요.


지금 감사한 사람들이 생각난다면 누가 있을까요?

일단은 여기까지 버텨준 저 스스로에게 가장 감사해요. 잘 버텨줬어요. 그리고 강동훈 감독님, 최승민 코치님, 그리고 김목경 감독님. 그리고 주변에서 도와주신 선수분들, 기자분들, 그리고 부모님, 동생, 친구들에게 항상 고마워요.


이제 '프로게이머'로서는 인사드리지 않게 될,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참 어렵네요. 안녕하세요, 코치 ‘프로즌’ 김태일입니다. 긴 인터뷰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한국에서 긴 인터뷰를 오랜만에 한 거 같네요. 경기장에서든 어디서든, 머지않아 볼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죠?

저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