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험한 세상, 난 소설로 헤쳐 나간다. 











  낡은 종탑이 있다. 지어진지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종탑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로웠다. 일단은 종탑이라서 그런지 낡았어도 거대한 종이 탑의 끝자락에 붙어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없어보였는데, 종을 치기위해 올라가는 도중 막말로 재수가 없으면 그대로 썩은 나무판을 밟고서 그대로 땅과 영원히 눈을 마주쳐야하는 상황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종탑은 오래되었으며 수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밖에서 종탑의 2층 이상을 올려다본다면 혀를 내두르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굉장하다거나 아름답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입김만 후 불어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롭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2층 이상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다르게 종탑의 내부 즉, 1층은 상당히 건재했다. 얼마나 건재했냐면, 무너진 돌 더미와 나무판자를 모아 작은 모닥불을 만들고 불을 쬘 정도로 건재했다. 물론 밖에서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종탑의 위엄에 식은땀을 적당하게 흘려줘야 한다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종탑의 안쪽에는 모닥불이 지펴져있었다. 모닥불은 밝은 빛을 내며 종탑의 내부를 비추고 있었고 나무에서 숯으로 변한 물질이 많은 것으로 보아 주기적으로 태울 것을 누군가가 공급해 준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일단 종탑 내부에 아무도 없었다면 이러한 모닥불조차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기에 누군가가 공급해 주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나무를 공급한 것은 확실하게도 모닥불을 지핀 당사자일 것이고, 그런 그를 ‘누군가’로 치부해버리면 그는 속이 많이 상할 것이다.
  모닥불은 오랫동안 타올랐다. 공급된 나무를 모두 다 먹어치운 후에도 모닥불은 한동안 꺼지지 않았다. 나무의 공급이 한 시간쯤 중단되었을 때, 모닥불은 쓸쓸해보였다. 
  낡은 종탑의 내부에는 거미줄과 부서진 목재, 석재뿐이 없었다. 먹고 마시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종탑 안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 낡은 종탑이라고 불렸는지 알 수 없는 이 종탑은 조용히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만들어진 뒤부터 지금까지 이 종탑은 단 한 번도 아래를 올려다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일까. 땅은 세상의 어느 때라도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낮은 이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는 늘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닥불이 거의 꺼져갈 즈음 종탑의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럽게 문은 열렸고 곧이어 발소리가 종탑의 내부로 울려 퍼졌다. 발소리는 매우 규칙적이어서 계속해서 듣고 있으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 느낌을 주었다.
  발소리를 내는 장본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발을 움직였다. 알 수 없는 무거움을 가진 그 발걸음은 태울 수 있는 건 다 태워버려 이제는 탁탁 소리만을 내고 있는 모닥불 앞에 멈춰 섰다. 이 발걸음의 주체가 바로 모닥불을 지핀 장본인일 것이며 그는 꺼져가는 모닥불을 살리기 위해 모닥불의 먹을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손에 종이 뭉치를 몇 장 움켜쥐고 있었다. 죽어가는 모닥불을 위해 친절하게도 땔감을 가져온 것이다. 모닥불은 이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모닥불은 아주 작은 불씨만 살아남아 있었다. 발걸음의 주체는 움켜쥐고 있던 몇 장의 종이 뭉치를 모닥불을 향해 내려놓았다. 불씨는 좋아라하며 종이에 불씨를 옮겨가기 시작했고 그 뒤로 사내가 올려놓은 나무판자에 옮겨 붙는데 까지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다시 모닥불이 살아나자 어두웠던 종탑의 내부는 그나마 환하게 변해 주변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빛이 종탑 내부를 밝히자 종이를 움켜쥐고 있던 자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얼마나 어두운 색인지 주변의 어둠 속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는 자가 모닥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로브의 후드를 머리 전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눌러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본다던가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군살 하나 없이 각진 턱과 굳게 다물어진 입 그리고 접어올린 소매 사이로 보이는 역시나 군살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손. 이것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뚱뚱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여자의 손목이라고 보기에는 두껍고, 역시 여자의 손이라고 보기에는 좀 더 투박한 손가락들과 손톱은 그가 남자일 가능성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것들의 도움이 없이도 그의 성별을 판단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어깨였다. 입고 있는 것이 로브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두껍겠냐마는,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그의 어깨는 일반적인 성인 남성이 가지는 어깨의 손가락 한마디 반쯤 더 넓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곧게 펴진 허리, 윤곽으로 미루어 보아 무식하게 두껍지 않고 운동으로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내의 성별이 남자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다. 그가 남자라는 사실을 세상에 공표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유력한 후보자. 그것은 바로 수염 이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검은 수염은 남성미를 느끼게 해 준 다기 보다는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지간히도 외모에 관심이 없는 남자인지 그는 수염을 한 몇 년 쳐다보지도 않은 듯했다. 수염은 그만큼 지저분하게 자라있었다. 여자들이 본다면 절대 좋아하지 못할 모습인 것임에는 두말 할 것도 없었다. 
  남자는 손에 쥐고 있는 종이 한 장만을 제외한 채 모두 모닥불 속에 집어넣었는데, 그가 모닥불을 향해 던져놓지 않은 한 장의 종이에는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띄어쓰기 한 글자 없이 계속 이어진 문자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절대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라 한들 그런 글을 읽으면 짜증을 느끼기 마련인데 남자는 묵묵히 그것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그 종이마저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모닥불은 먹이를 받아먹는 강아지 마냥 맛있게 종이를 태워먹었다.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가 잘 타는지 확인한 뒤에 그는 등을 돌렸다. 그리곤 곧바로 종탑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한참을 걷던 남자는 문득 종이가 다 타버렸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곧 그런 생각을 접어버렸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고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연락을 취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고개를 한번 까닥이고는 다시 걸었다. 이번에야말로 남자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모닥불은 남자가 떠난 뒤에도 한참을 불탔다. 남자가 느낀 충동대로 종이는 다 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종이는 거의 다 타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남은 종이를 누가 종이라 부르겠는가? 이미 쓰레기라 불러도 좋을 물건이다. 타지 않고 남은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종이에는 딱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중 뒤의 두 글자는 검게 그을려있었기 때문에 알아 볼 수 없었다. 
  ‘네베……’
  종이는 이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았다. 
  모닥불이 화려하게 타들어갔다. 모닥불의 불길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떠한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모닥불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물건을 집어삼키기 까지 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끝났을 때 불은 사라졌다. 









*










  검은색 로브를 후드까지 깊게 뒤집어 쓴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고개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깊게 뒤집어 쓴 후드 사이에서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왔다. 턱을 기준으로 아래로 16센티미터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남자가 상당한 장발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목적인 듯 바람을 맞아 부드럽게 흩날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 하늘은 어두웠다. 구름은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바람은 금방이라도 뒤편의 낡은 종탑을 무너뜨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모습의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남자는 턱밑이 간지러운 것을 느꼈다. 그래서 턱 밑을 손가락을 이용해 몇 번 긁었다. 시원함도 잠시, 곧 지저분하게 자라있는 수염이 그의 손에 잡혔다. 남자는 손에 잡힌 수염을 잡았다 놓았다 반복하다가 뭔가를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밀어야겠군.”
  남자의 목소리는 갈라져있었다. 얼굴 근육을 사용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만큼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혼자 있던 시간이 대략 2년이 좀 더 되는 듯했다. 스물세 살에 콜헨이라는 마을에 들어가서 약 반년간 그 마을에서 생활했다. 그러고 나서 2년간 활동을 접었다. 익숙하지 않았던 것의 조정을 위해서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완벽하게 조정하는 것엔 성공하지 못했다. 숫자로 표현하자면 최대 60퍼센트는 될 것이다. 그 이상의 힘은 제어할 수 없다. 아니, 40퍼센트의 확률로 불발이 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일은 이제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근 2년간 한 번도 말을 해 본적이 없었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남자는 콜헨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원래 목적은 3년 이상의 시간을 조정에 소비하는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작자가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틀림없다. ‘망할 놈.’
  종탑을 지나왔으니 앞으로 몇 시간만 더 걷는다면 콜헨 마을에 도착한다. 종탑에서 뭉그적거리지만 않았어도 한두 시간은 더 일찍 도착했을 터이다. 어찌되었든 돌아가는 것도 일종의 여행이다. 그리고 여행은 최대한 즐기면서 해야 하는 것이지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조금 늦는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후드를 건들자 머리가 아파왔다. 머리카락이 제대로 눌린 듯 했다. 아침에 호수에서 머리도 대충 감았는데 후드를 세 시간 쓰고 있자니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감지 않고 그냥 출발하는 것인데, 누구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부터 감는 것과 세수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어서 그러진 못했다. 이대로 후드를 뒤로 넘겨버릴까 고민하다가 곧 비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냥 두기로 결정했다. 
  남자는 후드 위로 툭 소리 나는 것이 떨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물방울이 그의 입가를 향해 떨어졌다. 얼굴 근육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왜인지 남자의 마음을 자극한다. 그 자신도 왜 그러는지 한동안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비가 내리던 날 남자는 ‘그들’과 만났다. ‘그들’은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남자처럼 의아한 눈길로.
  눈앞에 웬 여성이 쓰러져 있었다. 남자는 그 여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후드 위로 커다란 물음표 하나를 띄운 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자는 쓰러져있는 여성에게 다가갔고 그 여성의 얼굴로 추정되는 곳으로 자리를 잡은 뒤 무릎을 구부렸다. 
  남자는 순간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아름답다’는 단 한마디로 표현될만한 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아니, 그 외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주 좋은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런 향기였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여성의 머리카락이 아주 하얗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순백색은 아니었다. 굳이 말해보자면 아주 밝은 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다시 보니 순백색이랑 별로 다른 것도 없었다. 남자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물론 자신의 심장이었다. 그냥 가버릴까 생각하던 남자는 잠시 후 그녀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이런 자신을 발견하고서 충격을 받은 듯 남자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멍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어차피 저지른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콜헨까지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키에 비해 상당히 가벼운걸.’
  그녀를 두 팔로 안자 키가 상당히 크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적어도 170센티미터는 넘었지만 175센티미터 까지는 아닌 듯했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거의 반사적으로 안고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돌린 그는 문득 그녀의 상태가 뇌진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자신도 왜 그런 진단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의학 쪽을 공부해본 적은 있지만 심도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시키니까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했을 뿐이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길을 걷던 남자는 뒤늦게야 자신의 몸이 그녀를 꽉 붙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저 우연찮게 길가에 쓰러져 있던 ‘아름답다’는 단 한 단어로 정의될만한 미모를 가진 여자를 안고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팔에서 힘을 빼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두 팔은 접착제로 붙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상황은 남자를 제법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 상황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다. 
  엿 같은 기억. 남자는 그때의 자신의 오만함과 만용에 치를 떨었다. 
  ‘병신 같은 새끼. 무슨 생각으로……!’ 
  제자리에 서서 과거의 자신에 대한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을 때 남자는 말이 젖은 땅을 박차는 소리를 들었다. 말이 달리는 소리를 듣자 이번에는 다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런 기억은 없어지라고 애원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남자는 그때의 상황이 재발하지 않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남자가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 눈을 한 번 깜박 할 새에 저 멀리 멀어지고 있었고 뒤에서 오는 마차가 그와 만나려면 최소 한 시간은 필요했다. 마차로 한 시간 거리. 걷는다면 얼마나 걸려야 정상일 거리일까? 그런데 그 거리에서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를 듣는다니?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있었으나 남자는 그런 건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듯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키에 비해 상당히 가벼운 여성을 안고서. 
  좋은 향기가 났다. 그리고 남자는 콜헨에 닿았다.






                                            


*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약 오후 6시경 이였다. 이제 곧 겨울이 오는 10월이라 시계가 오후 6시를 넘기기만 해도 세상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그런데 거기다 비까지 오기 시작했으니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현 시각은 아홉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 뒤로 세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한 시간을 지나가자 빗줄기를 가진 채 내려오기 시작했고, 두 시간 째에는 이제야 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물줄기를 퍼 붇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세 시간이 지난 지금은 빗줄기에 맞으면 아팠다. 
  “비가 많이 오네요. 퍼거스 아저씨 괜찮으실까요? 재료 때문에 로체스트에 다녀온다고 하시던데…….”
  연한 금색의 머리카락과 순수하게 보이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의 바로 옆에서 접시를 빛이 나도록 닦고 있던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 말했다.
  “허허, 걱정하지 말거라 얘야. 무사히 돌아오실 거야.”
  노인은 밝게 미소 지으며 닦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았다. 노인의 얼굴에선 피곤함을 제외하곤 읽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 노인의 얼굴을 보던 금발의 여성이 말했다.
  “에른와스 아저씨, 이제 좀 쉬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에른와스라 불린 노인은 허허 웃으며 답했다. 
  “그래주겠니? 미안하구나, 요새 이상하게 힘이 부치는구나…….”
  “아니에요. 제가 아침에 졸았던 것 때문에 아저씨가 힘든 일을 다 하셨으니까요.”
  에른와스는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몇 마디를 더 건넸다. 그런 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차에 쿵쿵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곧바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네 갑니다.”
  에른와스가 문을 열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










  “잘 들어라. 흉악범이 로체스트 내부에 잠입해있다. 너희들의 임무는 그 흉악범을 잡는 것이다.”
  황금 갑주의 사내의 목소리는 낮게 울렸다. 목소리가 낮으니 위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가득했고,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황금 갑주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흉악범은 성 한 채의 현상금이 걸려있다. 잡는 자에게는 그만큼의 포상이 내려진다. 알겠으면 빨리 출발하도록.”
  갑주의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외침이 들렸다. 외침은 우렁찼다. 같은 군인이 본다면 군기가 장난 아니라고 판단할 그 모습은, 자고 있던 로체스트의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한 소음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멋진 모습이라도 자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면 멋질 모습도 멋져 보이지 않는 게 사람의 심리다. 아니, 잠은 만물의 불행의 근원인 행복이기 때문에 잠을 잘 때만은 될 수 있는 데로 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황금 갑주의 사내가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전혀 느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았다. 그는 무게 있고 힘 있는 눈길로 병사들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이번에도 기합이 들어간 외침을 들을 것 이라 기대했던 주민들의 희망은 아쉽게도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다. 병사들은 어느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성 한 채의 현상금이 걸린 흉악범을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었기 때문일까? 그들은 빗물이 눈동자를 때리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20여 년 전의 포벨로 평원에 나선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










  “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옅은 회색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칫, 골 때리게 됐군. 나는 먼저 돌아가겠다. 조심해라 형제.”
  짙은 검은 로브의 사내가 회색 로브의 사내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날이 어두워서 자신의 몸짓을 보지 못했을까 염려하여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걱정마라. 저런 놈들에게 잡힐 정도는 아니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곧바로 사라졌다. 마치 먼지처럼 사라진 로브의 사내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며 옅은 회색 로브를 후드까지 푹 눌러쓰고 있는 사내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깊게 들이쉰 숨을 내 뱉은 후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두 자루의 칼을 만지작거렸다. 각각 검은색과 붉은색의 칼이었다. 특별한 장식 같은 것은 없었고 날이 시퍼렇게 서있는 것을 보아 장식용 칼은 아니었다. 그런다고 음식을 자르거나 하는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두 칼은 각기 칼의 힐트(hilt)가 30센티미터는 족히 넘었고, 칼날 부분은 1미터를 가볍게 웃도는 길이였다. 이 두 자루의 칼은 인간과 그 외의 것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병기’였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허리를 곧게 폈다. 우두둑 소리가 허리 부근에서 들렸다. 사내는 마사지를 받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곧 실소를 머금었다. 생각해보니 요즘엔 꽤 나태하게 지냈다.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하늘은 여전히 많은 양의 빗물을 쏟아내고 있었고 이 상황은 회색로브의 사내에게는 전혀 나쁜 상황만은 아니었다. 좋고 나쁨의 수치를 놓고 본다면 이 날씨는 그에겐 너무나도 안성맞춤인 날. 그렇다면 전혀 나쁜 상황만은 아니란 말이 무슨 뜻일까? 답은 간단하다. 사내는 비 내리는 날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비 내리는 날을 싫어하는 이 사내는 지금 비가 내리는 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자신을 쫓아올 왕국 기사단의 똘마니들에게는 아주 개똥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단 한명을 제외하고서.
  로브의 사내는 로체스트의 가장 높은 성벽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땅과의 거리는 족히 20미터는 되었다. 낮은 높이는 전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낮이라도 성벽 위에서 순찰을 도는 병사들에게는 성벽 아래를 전혀 내려다보고 싶지 않게 만드는 높이였다.
  다른 성들의 벽보다 더 높은 축에 속하는 로체스트의 성벽은 친히 적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마족이든 같은 인간이든 로체스트를 공격하려는 이들은 모두 이 성벽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 그나마 이곳은 낫다. 오르텔 성과 그 외 기사단장들이 거주하는 국경지대에 위치한 성에 비하면 말이다. 이런 높이의 성벽의 끝자락에서 로브의 사내는 왕국 기사단의 움직임을 꿰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벽 뒤의 병력까지 알아맞히는 것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동안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인기척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자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사내의 키는 로브의 사내보다 훨씬 더 컸다. 그가 186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고개를 약간 처 들어야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적어도 196센티미터는 넘는다는 말이 된다. 사내는 이 어두운 날에도 밝게 빛나는 황금색 갑주를 입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제1왕국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루더렉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황금 갑주.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듯 빛이 나는 그 갑옷은 쳐다보고 있는 회색 로브의 사내로 하여금 눈이 아프게 만들었다. 빗물에 맞아 금빛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던 루더렉이 말했다. 
  “쥐새끼마냥 잘 도망쳐 다니더니 이런 곳에서 꼬리를 잡히나? 우리 기사단을 여러 번 물 먹인 네놈 같지 않군. 아니면, 그때 같은 환영인가?”
  황금 갑주의 사내, 루더렉이 매서운 눈길로 회색 로브의 사내를 쏘아보았다. 사내는 로브의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채 루더렉을 마주보았다. 루더렉은 대답이 없는 사내를 보며 허리춤에서 왕국 기사들이 사용하는 보편적인 장검을 꺼내들었다. 색이 다른 자들과는 다르게 옅은 금색 이라는 것을 뺀다면 보편적이다. 검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야수와 같은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인 모양이군.”
  사내는 여전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두 손을 꼼지락 거렸다. 루더렉은 뽑아든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괴한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이 옅은 금색의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회색 로브의 사내는 주머니 속에서 두 손을 꺼내 루더렉에게 무언가를 날린 뒤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여러 번 당해본 전적이 있었던 루더렉은 로브의 사내가 날린 것들을 무시한 채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뛰어내리자마자 성벽 위에서는 커다란 폭발음이 로체스트 성벽 내부에 울려 퍼졌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떨어지는 도중 위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혀를 찼다. ‘따라오다니. 역시 질긴 놈이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저 루더렉이라는 부기사단장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본 순간 그의 몸은 거의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들이 휘두른 칼 사이에선 거대한 충격파가 일었다. 그리고 그 충격파에 의해 로브의 사내는 지면에 두 다리가 닿았을 때 몸의 중심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저 높은 성벽에서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몸에 무리가 가기 마련인데 덤으로 제1왕국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 휘두르는 칼을 막아내고 가속도가 붙은 상태로 땅에 착지하게 되었으니 몸이 받는 부담이 훨씬 더 가중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 높은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띵해야 정상이다. 하물며 그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언어도단. 명백한 자살행위다. 하지만 지금 성벽에서 뛰어내린 두 남자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사실적인 오류가 많았다. 얼굴을 제외한 몸 전체를 황금 갑주로 무장하고 1미터 30센티미터 길이의 장검을 뽑아들고 있는 사내나 옅은 회색 로브의 사내는 그들 스스로를 평범한 인간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일단 검에서 무언가를 발산하지 않는다. 그들의 첫 격돌은 성벽에서 떨어지는 도중이었고, 거리는 아무리 가까워도 최소 3미터 이상은 차이가 났다. 똑같은 길이의 검이 맞붙기에는 너무 먼 거리가 아닐까? 그런데 그들은 격돌했다. 그것도 그들 자신에게서 약 3미터가량 떨어진 허공에서.
  “이상하군.”
  진흙탕이 된 바닥을 밟으며 루더렉이 말했다.
  “왜 그 검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지? 네놈은 늘 그렇더군. 절대 그 두 자루의 검을 깨우는 일이 없지.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인가?”
  루더렉은 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보였다. 그리고 할 일이 없는 왼손의 손가락을 펴 로브의 사내를 가리켰다. 로브의 사내는 자신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에 어깨를 작게 으쓱여 보였다.
  “이들은 내 것이 아니다. 아는 이의 부탁으로 맡아두고 있는 것뿐. 소유권은 전적으로 그 에게 있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루더렉이 휘두른 검을 향해 맨손을 휘둘렀다. 검과 맨손이 부딪친 순간 루더렉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건……, ‘무력화(武力化)’로군. ‘다크나이트’는 ‘자연의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들의 집합이 아니었나?’ 
  루더렉이 의문을 갖고 있는 동안 회색 로브의 사내는 움직임이 자유로운 왼팔을 이용해 로브의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왔을 때 섬광이 그들의 주변을 메웠다. 그 빛은 너무나 눈부셔서 루더렉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게 만들었고 회색 로브의 사내가 도망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섬광이 사라진 직후 루더렉은 장검을 칼집에 도로 꽃아 넣고 등을 돌렸다. 이미 사라진 범죄자를 쫓아본들 부슨 득이 있을 텐가? 이쯤에서 조용히 병력을 물리는 것이 상책이다. 
  루더렉은 사라진 회색 로브의 사내를 떠올려 보았다. 신장 약 186센티미터. 체중은 잘 모르겠고 ‘자연의 마나’만을 다루는 마법사인 줄로만 알았더니 ‘인위의 마나’를 다루기도 하는 고수. 응결체에 이어 무력화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들 모두가 그런 강자라 보아도 무방하다.  
  ‘역시 성 한 채 값은 한다는 건가.’
  조용히 로체스트의 성벽을 응시하고 있던 루더렉은 회색 로브의 사내가 가지고 있던 두 자루의 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두 개의 칼 각자가 가진 힘은 일반적인 강철로 만들어낸 무기와 진배없었다. 하지만 겨우 그런 싸구려 무기였다면 회색 로브의 사내가 맡아둘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참 상념 속에 잠겨 있던 루더렉을 끄집어 올린 것은 로체스트 내부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던 제1기사단의 프라임나이트였다. 
  “루더렉님. 그 자는 어디에?”
  프라임나이트, 위쳐 루드가 말했다. 그의 말에 루더렉은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철수한다.”
  “예?”
  “못 들었나? 철수다.”
  위쳐는 더 이상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뒤따라오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철수한다! 장비 챙겨서 병영으로 돌아가라!”
  루더렉은 하늘을 응시했다. 빗물이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싶군.”










  *










  “흐억……토할 것 같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시래? 딸기주는 술 아니냐? 딸기로 만들긴 해도 술은 술이라고?”
  “젠장……, 어?”
  “왜?”
  “누가 오는데? 마차 타고 나간 사람이 몇이나 되지?.”
  “열 명 안 될 거야. 누군지 보이냐?”
  “안 보인다. 쇳소리 들리는 걸 보면 퍼거스 씨 같기도 한데.”
  “……아, 그러냐. 딱히 마중 같은 거 나갈 필요는 없지?”
  “뭐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 무기 만들어주는 사람이잖아.”
  “그럴까……? 야, 우산 챙겨라. 잠깐, 오면서 횃불도 챙겨.”
  두 사내는 횃불과 우산을 싸들고 부랴부랴 마차를 향해서 뛰어갔다. 마차는 때마침 그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차가 그 두 사람 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 두 사람이 비 때문에 옷이 모두 젖은 뒤였다. 짜증이 날 법도 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은 우산을 마부에게 내밀며 말했다.
  “퍼거스 씨.”
  마부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용병이 내민 우산을 받아들었다.
  “마중 나올 거란 기대는 안 했는데, 의외로군. 아, 고맙네.”
  용병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무기 잘 좀 만들어 달라는 애교입니다.” 
  두 용병과 퍼거스는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는 마차를 끌고서 마을 안을 향해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로브의 사내가 터벅터벅 길을 따라 걸어왔다. 그는 로체스트와 콜헨을 이어주는 입구이자 출구에 망을 보고 감시를 해야 할 보초가 없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겼다. 용병 전원이 비번일 수도 없는 노릇인데……. 허나 많은 것을 따져보기 전에 그가 처한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회색로브의 사내는 보초 없는 콜헨의 방벽을 순조롭게 넘어섰다.










  *










  닭이 운다. 요새 저 닭은 새벽부터 울어재껴 몇몇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늘 잠이 부족한 브린이라거나 늘 리엘에게 괴롭힘 당하는 브린이라거나 한참 연구 중인 브린의 정신을 흩으려 놓는다거나 여러 사람에게 정신적인 민폐를 끼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닭의 울음은 이 콜헨이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오래 생활을 하다보면 충분히 익숙해지고도 남을 일 이였다. 문제는 바로 요즘에 새로 생긴 새로운 심기의 불편함의 결정체였다.
“브린! 브린! 브링! 브린! 브리잉! 오오오! 브린!”
  그것은 바로 이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알 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존재였다. 신장 184센티미터, 체중 73킬로그램의 칼브람 용병단 소속 용병. 태양빛에 반사되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이계의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터에서 광기 가득한 칼부림을 보여준다 하여 광전사라 불리기까지 하는 미처르 이디테르다. 미친 것처럼 몸에 피를 묻히며 짐승의 울부짖음을 내뱉던 사내가 왜 브린을 이리도 애타게 부르는 것 일까? 그것은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자신을 이상 성벽이 있는 인간으로 치부한다면 좋아할 인간이 과연 어디 있을까? 그런 취급을 좋아한다면 그는 확실한 변태가 분명하다. 웬만하면 그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미처르는 이상 성벽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의 주장으로는 절대적으로 이상 성벽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브린의 무뚝뚝한 멋에 반한 것이라고 한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 한다는 것은 경멸 받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곤란한 것이 사실이다. 
  “하아…….”
  언제부터일까 저 인간이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이. 아마도 4, 5년 전이라 추측된다. 그저 지쳐 보이는 저 남자에게 새로 만들어본 피로회복제를 가져다 준 것뿐인데 그 이후로 이런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다. 밖에 오랜 시간 나갈 수만 있다면 당장 가서 머리털을 다 불로 익혀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브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자에게 몇 번 일을 부탁한 뒤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도저히 못 참을 정도가 되자 치료약의 개발에 매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진척은 없었다. 이전에는 닭 울음소리가 그렇게 싫었었는데, 그때 이렇게 소원을 빌어보았다. ‘누구든지 좋으니 저 울음소리를 사람이 대신하게 해줬으면 참 좋겠군요.’ 물론,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왜 이런 소원만 들어주는 것입니까 여신이여. 닭 울음소리가 너무도 그리워지는 시기가 올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거기다 닭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도 갖게 되었다. ‘내가 좀 더 너에게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건만…….’
  “또 미처르인가. 정말 지치지도 않는군그래.”
  회색 로브의 사내는 피식 웃었다. 웃지 않으려고 해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브린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이대로 아름다운 꽃이 그려진 찻잔의 내용물과 함께 저 회색 로브의 망할 식객에게 던져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브린은 애써 그런 충동을 참아내며 차의 향기를 맡았다. 갈수록 타는 실력이 늘어만 가는 것이 좋은 현상인지는 애써 궁금해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브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색 로브의 사내는 입가에 띠우고 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브린은 또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는 오는 건가?”
  브린은 회색 로브의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내는 곧바로 답했다.
  “글쎄.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지. 아니, 오지 못할 확률이 높아. 5개 대륙 방방곳곳에 서신을 뿌려놓긴 했어도 그 친구가 틀어박혀 있는 곳은 나도 모르니까 말이야.”
  브린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찻잔의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자신의 찻잔이 다 비워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린은 그때까지도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로브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브린. 미안하지만 저 검들은 놓고 가겠다. 내 소유의 물건이 아니라 행동에 지장이 생기게 되는군.”
  “마음대로 해라.”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뒷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브린은 다시 찻잔에게 시선을 주었고, 텅 빈 찻잔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필연적인 이유였는데 방금 나간 회색 로브의 사내와 대화하던 도중 나머지 내용물을 모두 마셔버렸기 때문이다.
  찻잔을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브린이 다시 찻잔에 차를 담고 제자리로 되돌아왔을 때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브릴라빈 씨인가…….’
  찾아오는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은 터라 이젠 문을 두드리는 버릇만을 가지고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요즘 같은 암울한 시기엔 그나마 위안이 되는 현상이었다. 제길, 이딴 게 위안거리라니. 암울한 생각도 잠시. 여성을 밖에 세워두는 것은 사내 된 자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는 머릿속에서 잡념을 털어버렸다. 어째 밖이 조용했다.
  “들어오시죠.”
  문이 열렸다. 그리고 금발의 여성이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의 안쪽을, 그러니까 브린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칼브람 용병단에서 지급하는 평범한 용병복을 입고 있었다. 원채 투박한 모습의 용병 옷은 여자가 입으면 말로 표현 못할 흉물이 되는 게 정상이다. 대표적인 예로 케아라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는 그런 투박한 옷을 입고 있어도 어딘가로 가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에이브릴 라빈씨. 반지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 고마워요. 밖에 있는 멍청이는 이제 조용할 거 에요.”
  브린의 얼굴은 미소를 볼 수 없는 최고의 철면피 1위 당첨 이라는 영광을 안고 있다. 당연히 본인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 다들 할 짓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니냐며 고래고래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이미 정해진 것은 정해진 것이다. 그런 영광에 당첨된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도 기뻤던 모양이다. 에이브릴 라빈이라 불린 여성은 웃으며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녹색 보석이 박혀있고 테두리가 금인 반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크기는 딱 여성의 손에 맞을 정도에도 모자라 그녀의 손가락에 안성맞춤이었다. 
  에이브릴 라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성은 콜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신 투표대회(남자들이 모여서 누가 최고의 미모인가를 가리는, 일종의 시간을 낭비하는 할 짓 없는 자들의 모임)에서 당당하게 세르실리아와 일레스트라 등 쟁쟁한 경쟁상대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을 때의 눈웃음이 여신과도 견줄 만 하다는 의미로 미소의 여신이라고도 불린다. 당연히 칼브람 용병단 소속이며 남녀 가리지 않고 용병단 내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한 손으로 검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은 허리에 얹은 자세로 덤벼드는 용병단 내의 모든 자들을 순수한 검술 하나만으로 박살을 내버린 이후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사실 그녀의 실력을 의심한 건 12중대 소속의 중대장인 마렉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부대의 소대장까지 규합하여 그녀의 실력을 확인해주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라빈은 반지를 집어 들고 말했다. 
  “브린, 딱딱하게 에이브릴 라빈이라고 부르지 말고 ‘에리’나 ‘라빈’으로 불러줘요. 아, 반지 고맙게 받을게요.”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에이브릴 라빈 씨.”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투로 미소 지어 보이고는 브린의 집을 나섰다. 그녀가 떠나자 브린의 집은 다시 너무나도 조용해졌다. 브린의 찻잔은 텅 비어있었다.
  ‘언제 마셨지.’ 
  브린은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묵혀두었던 ‘에르그에 관해서’라는 책을 읽어볼까 생각하던 도중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자를 향해 말했다.
  “다음부터 노크하고 들어오지 않는다면 불덩이로 그을려주겠습니다. 라임 큐르디레.”
  “……딱딱하게 그러지 말라고.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니고, ‘왕 멋진 개발자님’이라고 불러. 아니면 귤도 좋고 라임도 좋음.”
  “흥.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
  “안 봐도 훤하군요. 심심해서 온 거면 당장 나가십시오.”
  “아냐, 기다려봐 생각이 안 날 뿐이야.”
  “5초 이내로 기억 못하면 엉덩이에 불덩이를 날려버리겠습니다. 5.”
  “기, 기다려봐!”
  “2.”
  “어, 자, 잠깐만. 너 방금 뭐 빼 먹은 거 같지 않아?”
  “1.”
  “4와 3을 어디다 둔거야!”
  “끝났습니다. 각오하시죠.”
  “아, 진짜 잠깐만!”
  “뭡니까?”
  “깨어났데.”
  “뭐가요.”
  “어제 그 여자. 일어나면 알려달라며.”
  브린은 그딴 걸 말하려고 이렇게 소란을 피운 겁니까?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라임 큐르디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브린의 얼굴 표정이 정말 진귀해서인데, 정말 현실에서의 브린의 얼굴인지 꿈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얼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콜헨의 모든 주민, 용병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브린은 지금 입을 떡 벌린 채 동공이 풀려 있었다.
  “왜 그래?”
  브린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가다듬었다.
  “흐, 흠. 라임. 지금 바로 스…… 아니, 잡화점에 가서 영감탱이를 불러와 주었으면 좋겠군요.”
  “나 비싼 남잔데?”
  “차 내드리겠습니다. 별로 내키질 않는다면 당신이 좋아하는 ‘탄수화물 사탕’도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주시면 고맙겠군요.”
  “……금방 갔다 오지.”
  보통 때라면 필요 없다고 답했을 터인 브린이 아끼는 차를 내주면서까지 귤라임의 장난 같은 말을 받아준다. 예삿일은 분명히 아니라 단정 지을 수 있다.
  라임이 잡화점으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브린은 이마를 짚었다. 
  ‘불가능해…….’










  *










  남자는 이제 곧 겨울이란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차가운 바람을 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곤 힘차게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남자는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길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넘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손을 들어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만져보았다. 어째 머리털보다 더 복슬복슬 자라있는 것 같은 수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가 좋았지. 정기적으로 턱 밑에 날붙이를 대지 않아도 됐으니까.’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헛웃음에 그는 피식 소리를 내며 미소 지었다.
  “수염 밀어라. 안 좋은 것만 닮으면 안 된다고 내 누누이 말 했잖아.”
  남자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남자를 대하는 태도로 보아 남자를 아주 잘 아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뒤로 돌린 곳에 붉은 머리의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남자는 붉은 머리의 사내가 웃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마주 웃었다.
  “별로 닮고 싶어서 닮는 건 아닙니다. 레드 형.”
  “그러냐. 상태가 많이 좋아 보인다? 어때, 제어할 수 있게 되니깐 신세계더냐?”
  “글쎄요. 아직 완벽한 게 아니라서 신세계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죠.”
  “뭐, 걱정할건 없다. 아직 마수들의 출현도 먼 것 같고……. 너 시간 벌었네?”
  “그런 말씀 마시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시간 벌었다뇨, 인간아. 당신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요놈이 어디서 반말이야?”
  “죄송합니다. 속으로 푸념한다는 게 그만…….”
  “이 자식, 능청이 늘었네. 갈수록 싱글이 닮아가네?”
  “싱글 형님한테 많이 배웠죠.”
  붉은 머리의 사내는 “요놈아, 넌 부정이란 말을 모르냐?”고 말하며 남자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살짝 건든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남자는 상당한 고통을 느끼며 신음했다.
  “끄응…….”
  “사내놈이 뭘 그런 것 가지고 끙끙대? 그리고 너 사람 주웠다며?”
  남자는 후드의 뒤쪽을 긁으며 답했다.
  “예, 뭐…….”
  붉은 머리의 사내는 남자를 씩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뭡니까 그 눈은?”
  사내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남자에게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언제나 보았던 붉은 머리 사내의 등. 어릴 적에도 넓고 강인하게 보였던 그 등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도 넓고, 강인하게 보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욱 넓고 강인하게 보인다. 자라면서 얻은 경험일까? 강함을 가지게 되면 될수록 그의 등은 더욱 넓고 강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붉은 머리의 사내가 말했다.
  “힘내라 동생아. 나중에 심심하면 형, 누나들 찾으러 오고! 아, 테일이 그러던데 너 연애 잘하래. 이 언니가 지켜보고 있다나 뭐래나. 수고해!”
  남자는 쓰게 웃었다. 물론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무척 추운 날이었는데, 붉은 머리의 사내가 존재했던 것만으로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세상의 모든 불을 모아 놓은 느낌이랄까? 공기뿐만 아니라 대지,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그가 지나는 자리에서 벌겋게 익어버렸다. 거대한 열기에 노출되어도 멀쩡한 것은 지금의 남자뿐이었다.










  *


 








  “글쎄다. 그 안쪽에 들어있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평범한 게 아니란 건 확실하다. 그건 그렇고 친구야, 히히. 뭐 재밌는 건 없어? 히히, 나 심심해 친구야!”
  리엘은 막대사탕을 핥으며 브린에게 다가갔다. 브린은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작게 중얼거렸다.
  “궁금해. 도대체 뭐가 있는 걸까……, 뭐하십니까?”
  브린은 코앞에 있는 막대사탕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리엘은 브린의 코앞으로 막대사탕을 들이밀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노망난 영감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집게손가락을 펴 브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고민하지 마라. 알려고도 하지 마. 알아서도 안 되는 거다 브린아.”
  브린은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이미 전과가 있기 때문인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만을 누를 뿐 이였다.  
  리엘은 브린의 모습을 한번 훑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십니까…….”
  “그래. 딸기주가 마시고 싶어서 말이다. 아직 떠들춰 보면 몇 개 남은 게 있긴 하겠지. 근데 저 집 앞의 친구는 뭐하는 거냐? 계속 널 부르는데? 브린, 브린, 브링, 브린이라고 말야. 저 친구 혹시 미친 거냐?”
  브린은 신음을 흘렸다.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던 엄지손가락이 삐끗해 뼈 부러지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그는 미간을 더욱 좁혔다. 브린의 얼굴은 이제 구겨진 휴지조각 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에브릴라빈이 그를 반쯤 죽여 놓은 지가 겨우 3분 전인데 저 인간은 그런 상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흙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무슨 놈의 회복력이 저리도 대단한 것인지 감탄하기 보다는 짜증이 밀려왔다. 인간이 바퀴벌레처럼 질기다는 것이 저런 의미일까?
  리엘은 즐겁게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잠시 후 브린을 외치는 소리가 두 배가 되었다.
  ‘저 망할 영감탱이…….’
  이 마을에 티이만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이를 가는 브린의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부르는 소리가 두 배가 되자 그의 머릿속은 가열된 가마솥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지금 당장 있는 마나 없는 마나를 모두 끌어 모아 싹 다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멋진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브린에게는 전혀 멋지지 않은 민폐였다. 
  저 망할 놈들.
  브린이 한참동안 집 안에서 뇌수가 달아오를 즈음 리엘은 밖에서 브린을 애타게 부르는 붉은 실크로 만들어진 치마를 입고, 푸른 립스틱을 어떻게 바르는지 몰라 입가 주위를 둥글게 칠해버린 남자와 함께 있었다. 브린을 부르기 시작한지 약 10분이 지났을 때 리엘은 즐겁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히히히, 친구야 친구야! 왜 그렇게 브링을 부르는 거야? 히히, 친구는 브링을 좋아해?”
  “브린! 브리……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남자는 별 것을 다 묻는 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브린은 나의 운명이거든.”
  리엘은 또 다시 즐겁게 웃으며 물었다.
  “히히히, 친구야! 그러면 친구는 나중에 콜헨이 불탈 때도 브링 집 앞에서 이러고 있을 거야?”
  남자는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하지. 콜헨이 불타건 재가 되어 사라지건 브린만은 내 손으로 지키겠다고 맹세했지. 후후후.”
  당당하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리엘은 씩 웃었다.
  “히히, 친구야. 친구가 없을 때 불타면 어떻게 할 거야? 히히. 친구가 아주 멀리 가 있다면 말이야.”
  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리엘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조용히 기다렸다. 뒤에 돌아올 말을 기다리며 그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리엘. 그 시기가 된다면 아마도 난 이곳에 있지 않을 거다. 적어도 알베이에 들어가 있겠지.”
  금발의 남자는 태양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 동작이 너무나 강렬해서 남자의 등 뒤에는 거대한 날개가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황금빛의 날개. 리엘은 이 사내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강렬한 풍채와 위엄을 몸으로 느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 시기는 곧 너와 나, 그리고 그 외의 존재에게 다가올 거고. 그 때가 된다면 나는 너희라는 존재들에게 모두 심판을 내릴 거다. 너도 잘 알고 있잖나? 대마법사.”
  “……그래, 그렇겠지. ……이래나 저래나, 당신은 역시 심판자십니다.”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나는 독수리와 늑대와는 다르게 중도(中道)를 걷지 않는다. 가끔 걷기도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지.”
  “그래. ……그건 그렇고, 친구야. 마저 해야지 히히히.”
  남자는 퍼뜩 정신이 든 얼굴로 맞장구쳤다. 
  “음? 아! 좋아! 자, 날 따라하시오! 브린! 브린! 브링! 오오오! 브으링!”
  “히히, 브린! 브린! 브링! 히히히, 브으링!”
  “아하하하하! 바로 그거지! 브린! 브린! 브링! 오오오! 브으링!”
   리엘은 즐겁게 웃었다. 미처르는 행복하게 외쳤다. 그리고 브린은 화냈다.
  “시끄러워!”










  *










  “……뭐가 저렇게 시끄러워?”
  마렉은 베테랑 레이먼트의 헬름을 손가락으로 통통 소리가 나게 치며 여관 뒤쪽에서 들리는 소란에 주목했다. 얼핏 보아하니 브린의 손에서 불덩이가 날아가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정신이 반쯤 나가있던 상태여서 그것을 가지고 진실 공방을 벌이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미철 게이가 한바탕 했나본데? 새벽부터 일어나더니만 결국 일 냈네. 어휴 저 게이. 킁킁. 킁킁, 어휴, 게이 냄새.”
  “……형도 만만치는 않다.”
  짧은 은색 머리와 푸른 눈의 사내는 “내가 뭘?”이라고 말하며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입고 있는 살색 삼각팬티가 부담스럽게 강조되었다. 이 사내의 이름은 레큐런스. 레큐런스 이실다르. 칼브람 용벙단 소속의 특수용병이다. 레큐런스를 모르는 인간은 용병단에 속해있는 용병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유인 즉, 그가 늘 입고 있는 살색의 팬티 때문인데, 그는 아무리 추운 날씨라 하더라도 절대 그 이외의 옷을 걸치지 않는다. 심지어 얼음 계곡으로 얼음을 찾으러 갔을 때도 그는 달랑 속옷 한 장만을 입고 있었다. 상당히 오래 전, 토벌 임무로써 잠시 용병단을 떠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속옷만을 입고 떠났다가 속옷만을 입고 돌아왔다. 어떤 이들은 그가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주장은 그가 들고 온 금화 주머니에 의해서 묵살되었다. 이 일화는 벌써 20여 년 전의 이야기임으로 용병단에 들어온 지 20년이 되지 않는 마렉이 알 리는 없는 이야기였다. 20여 년 전의 이야기라 해서 지금 레큐런스의 모습이 40대 혹은 50대 초반으로 보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딜 봐도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외모였다. 그래서 의문이 많다. 20여 년 전에도 레큐런스 라는 이름의 용병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살색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이 남자가 동안일 뿐인지 말이다. 20여 년 전 용병단을 만든 아이단이 아무런 대답도 내어 주지 않기 때문에 신입 용병들에겐 그저 전설과 헛소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마렉은 혀를 찼다. 남자가 볼 때 부담스럽게 강조되는 그의 살색 속옷은 너무나도 속을 메스껍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즈음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마렉과 레큐런스의 옆을 지나쳤다. 방한복으로 몸을 충분히 가리고 있었음에도 레큐런스는 그 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봐 마렉. 방금 쟤 누군지 아냐?”
  마렉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누군데?”
  그러자 레큐런스는 입고리가 귀까지 걸려야 직성이 풀릴 미소를 보여주며 답했다.
  “방금 방한복의 엉덩이 부분이 약간 높낮이가 다르게 흔들렸다. 짝궁댕이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야. 거기다 오른쪽 어깨가 살짝 아래로 쳐진걸 봐선, 저거 쉬커드가 분명해.”
  마렉은 할 말을 잃었다. 꽤 멀리 일을 나가 있던 쉬커드 중대장이 오늘 돌아온다는 것은 서신을 받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어떻게 엉덩이의 흔들림과 어깨의 높낮이의 미묘한 차이로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진 레큐런스에게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너무 할 말이 없어서 이대로 시간을 보내도 좋은 것인지 의문도 들었다. 그는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헛구역질 소리를 들은 것은 아마도 마렉과 가장 가까이 있던 레큐런스 뿐일 것이다. 
  고통과 자신이 쌓아온 성(性)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마렉을 뒤로하고 레큐런스가 말했다. 그는 마렉이 자신을 불러냈을 때부터 느꼈던 귀찮음을 이제야 말로 표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부른 거야? 난 오늘 비번이란 말이야. 오랜만에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 이봐 거기 청년! 이야, 엉덩이가 매우 찰진데? 음? 어이! 잠깐만! 칫…….”
  레큐런스는 “저런 엉덩이의 소유자는 놓치면 안 되는데……, 큭!”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미간을 좁혔다. 그 덕에 마렉은 자신이 쌓아온 성에 대한 정체성을 홀라당 머리 밖으로 흘려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렉은 지금 당장 헬름을 벗어서 땅바닥을 향해 집어 던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그 충동을 억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그때까지도 레큐런스는 이 남자 저 남자를 먹이를 노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큐런스는 보통 용병단 내부에서도 상당한 변태 혹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살색 속옷만을 입고 돌아다니며 남자를 보면 엉덩이가 찰지네 어쩐다 하는 소리를 늘어놓는 자를 정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런 변태 혹은 미치광이 소리를 듣는 자는 아니었다. 이런 레큐런스에게는 두 가지 가설이 따라다닌다. 처음에는 평범하고 지금처럼 멋진 외모의 남자였거나, 처음부터 이런 변태에 미치광이거나. 두 가지 설이다. 최초엔 후자 쪽에 의견이 많이 쏠렸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전자의 가설에 무게를 실어주기 시작했다. 가설의 내용은 이렇다. 그는 원래 평범한 남자였다. 여자를 좋아하고 남자가 남자끼리 이어져서 여성의 비율이 한 명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순수한 남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여자라곤 볼 수 없는 웬 감방 비슷한 곳에서 썩었었고 여자를 갈망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는 내용이다.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른 마렉은 레큐런스를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아, 후. 아이단 대장님이 가져다 달라던데? 형 말고도 7명한테 보내는 건데…… 읽어볼래?”
  레큐런스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마렉이 건네자 레큐런스는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는 편지의 밑자락을 뜯었다. 애써 편지를 봉인한 사람이 봤다면 상당히 씁쓸한 기분을 느꼈을 법한 모습이었다. 
  한참 시선을 편지의 내용에 주목 하고 있던 레큐런스가 갑자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행동에 마렉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 이상한 거라도 써 있어?”
  마렉의 물음에도 한동안 레큐런스는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그가 답했다.
  “먼젓번에 아이단 대장에게 부탁했던 내용의 일이다. 오랜만에 돈 좀 만져봐야지. 근데 다른 애들은 누군데?”
  마렉은 잠시 서신을 받을 자들의 이름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곤 실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다들 한가하게 여관에서 잠이나 자고 있던 누나들이나 형들.” 
  레큐런스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잠이나 자고 있던 여자들이나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신을 받을 7명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이득이라는 걸 깨달은 레큐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네. 그럼 나는 서신이나 돌리러 가야지.”
  레큐런스는 떠나려는 마렉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나머지 놈들한테는 내가 돌림.”
  마렉은 의아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차에 레큐런스가 시간을 가장 잡아먹는 서신 돌리기를 대신 해준다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
  “뭐, 그럼 나야 고맙지. 수고해.”
  레큐런스는 서신을 받아든 순간 딱 봐도 ‘아,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 짐작 가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순간 마렉은 오한이 도는 것을 느꼈다.
  “왜, 왜 그래?”
  “응? 아니야.”
  레큐런스가 물었다.
  “마렉, 이스트반까지 며칠 걸리지?”
  마렉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어, 걸어서 가면 한, 한 달 걸리겠지. 마차 타고 간다면 또 다를 거고. 됐어?”
  레큐런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일곱 장의 서신을 속옷에 끼워 넣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는 커스티의 모험가 상점을 지나쳐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지금 마렉이 있는 위치에서는 그 외의 행동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브린을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는 꽤 오랫동안 들리지 않게 되었다. 










  *









 

  “저기, 라임…… 특수용병님.”
  케아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투로 그를 불렀다. 그는 왜 그러냐는 듯 짐을 싸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올려보았다. 케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그 서신에 말이에요……. 뭐라고 적혀있던 건가요?”
  라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궁금해?”
  “아, 아니……, 뭐 그렇게 궁금한 건 아닌데……, 그, 신경 쓰이잖아요!”
  “왜 화를 내?”
  “화 안냈어요.”
  라임은 여자란 존재를 오랜 시간 봐 왔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며 말했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흠. 서신에 쓰여 있는 건 내가 이런 의뢰가 들어오면 알려달라고 한 내용인데. 사람 찾는 일이야. 돈은 별로 안 주고. 재수 좋으면 로체스트까지 가서 일이 끝날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정보에 따라서 수도로 내려갈 수도 있고, 타 대륙으로 넘어가야할 수도 있어. 짧으면 한 달, 길면 몇 개월이 걸리겠지. 됐어?”
  케아라는 왠지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는 그녀 자신도 강해져서 라임과 같은 일을 한 번 받아보고 싶었다. 늘 소망하고 있었다. 강해지면 자유로워 질 것 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는 아주 자유롭고 자신의 강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용병단에 들어와서 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강함과 그렇지 않음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종이 한 장이 강하고, 강하지 않고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종이 한 장은 너무나 두꺼운 ‘세계’라는 것도 말이다.
  라임은 짐을 바리바리 싼 뒤에 그것을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주춤.
  “아, 먹을 거 더 넣어야겠다.”
  케아라의 기억으로는 약 30분 동안 그는 배낭에 음식만을 집어넣었다. 방금 마지막에 집어넣은 것도 음식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탄수화물 사탕’이라 불리는 브린이 특수 제조한 사탕이다. 마실 것 중독이었던 라임을 벗어나게 해준 장본인이자 상당한 맛까지 겸비하고 있다는 ‘탄수화물 사탕.’ 하나를 먹을 때 깨먹지 않는 다는 조건 하에 두 시간이 걸리는 정말 힘찬 사탕이었다. 라임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먹을 것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마실 것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에 배낭은 150킬로그램의 무게를 가볍게 웃돌게 되어서야 안으로 유입되는 먹을 것들에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부피야 말할 것도 없었다. 










  *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하늘은 다시 비를 퍼부었다. 비의 기세는 어제보다야 덜 했지만 여전히 강세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한풀 꺾인 기세로도 로체스트의 빈민가를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했다. 빈민가의 주민들은 정말 피눈물을 쏟아내며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퍼 날랐다. 하지만 그렇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하도 물을 밖으로 퍼내도 되지 않자 결국 하늘을 향해 욕을 퍼붓는 것도 모자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퍼내기를 아주 포기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자들과는 다르게 한 남자는 비 내리는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 편안했다. 그는 비가 내리는 현재와 완전히 격리된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덩치가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 얼마나 거대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오거를 본적이 있냐고 물어볼 것이다. 평균 신장 3미터를 넘는 그 거대한 거인들은 로체스트 주민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며, 그 남자를 그 거대한 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말한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긍정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절대 잊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그의 몸집은 옆에서 술통을 바닥내고 있는 오거와 똑같다시피 했는데.
  “린간. 비 오는 날 좋나?”
  남자는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물방울과 흙의 향연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오거에게서 건네받은 술통을 한 번에 비워버리곤 말했다.
  “하하하! 어, 물론. 넌 안 좋아하냐? 키룽가.”
  키룽가라는 이름의 오거는 “흠. 싫어하진 않는다.”라며 거품맥주 통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린 뒤 입 속으로 과자 털어 넣듯 액체를 쏟아 부었다. 한 통을 다 비울 즈음이 돼서야 키룽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린간. 포벨로 평원에서 정보장교를 패퇴 시켰다는 게 진짠가?” 
  남자는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물론. 칼리쉬의 부대였나? 잘 기억이 나질 않네.”
  키룽가는 순수하게 감탄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린간, 린간 정말로 린간인가?”
  그의 물음에 남자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니아니, 인간 아니게 된지 오래 됐어.”
  남자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키룽가는 허허 웃으며 거품맥주를 통째 쭉 들이켰다. 이제 보니 키룽가와 남자의 주위에는 텅 빈 술통이 낭자했고, 돈으로 환산하자면 꽤나 골머리 썩을 정도의 양임에는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다는 듯이 술통을 비워나갔다.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술통이 쌓였을 때 키룽가가 남자를 향해 말했다.
  “린간. 집에는 안가나?”
  남자가 답했다.
  “아직 돈 못 받았어. 며칠 뒤엔 돈 받으니 그거 받으면 돌아갈 거야. 흠. 돌아가면 한동안은 안 올 테니 맥주나 좀 사가야겠다.”
  “린간. 돈 받으면 한 턱 쏴라.”
  키룽가는 씩 미소 지으며 그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들에게 술잔은 술통 자체였으나 키룽가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통을 들어올렸다. 
  술통 하나의 무게는 기본적으로 50킬로그램이 넘었다. 원래는 이렇게 크고 무겁진 않았는데 워낙 들르는 사람이 많고 하다 보니 많은 양을 저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통을 크게 제작하고 많이 넣고 숙성시켰더니 통 하나에 50킬로그램이 넘는 액체가 들어갈 만큼 큰 괴물이 탄생했다. 통은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더 컸기 때문에 들고 마시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남자와 키룽가는 그 한 통에 50킬로그램이 넘는 술통을 한 손으로 잡아들고선 건배랍시고 들고 마시는 것이 아닌가? 힘을 자랑삼아 보여주는 자들이 봤다면 넙죽 엎드려서 절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남자와 키룽가는 술통을 부딪친 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술통 대 여섯 통을 비워버렸다. 암만 봐도 이 두 사내가 먹어치우는 양은 보통이 아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데려가면 다들 고생을 면치 못 할 것이다. 식비 때문에. 남자가 말했다.
  “물론.”
  다음 날 아침, 주점의 주인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녀가 원해서 일찍 일어난 것은 절대 아니었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등골이 서늘한 것에 불안함을 느끼고 술 창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텅 비어있는 술 창고를 보며 망치로 뒤통수에 정(釘)을 받아 넣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났고 바로 주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발견한 것이라곤 술통 수십, 수백 개가 원래 있던 내용물은 어디다 버려버리고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 근처에선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짙은 구릿빛 피부의 남자는 눈을 뜨자마자 식칼과 프라이팬을 들고 쫓아오는 한 여성을 피하기 위해 아침부터 전력질주를 감행했다. 숙취 때문에 제대로 앞이 보이질 않아서 벽이란 벽은 모조리 다 들이 받았으며, 그 들이 받힌 벽들은 4미터 크기의 거대한 사람 모양의 구멍을 만들며 신음했다.
  남자는 식칼과 프라이팬을 들고 쫓아오는 여성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돈 나오면 다 값 치를 거임!” 
  그녀는 그대로 남자를 놓쳤고, 텅 빈 술 창고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그를 현상수배 했다고 한다. 키룽가는 소란 때문에 깨자마자 카릴의 잔소리를 두 시간동안 질리도록 들었다. 어째 귀에 파리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왔나.”
  회색 로브의 사내는 규칙적인 발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소리의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회색 로브의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기에는 의자 자체가 너무 푹신했다. 그는 검은색 로브로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후드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남자가 말했다.
  “왜 불렀는지 말 해봐.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듣기로 하지.”
  검은색 로브의 사내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후드를 고쳐 쓴 뒤 말했다.
  “이쪽도 시간이 많지만, 그리 길게 설명할 이야기는 아니다. 벤샤르트의 모습이 이상하다.”
  회색 로브의 사내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검은색 로브의 사내는 순간적으로 눈썹이 꿈틀했다. 회색 로브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너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무녀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너 하나라도 충분하지 않나? 그 먼 길까지 귀찮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벤샤르트가 강하다곤 해도 무력화나 정신화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건 아니지 않나. 가볍게 쓱 썰어버리면 될 것을…….”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또 감.”
  회색 로브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 감에 의지해서 이 남자를 불러낸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거대로 미안했다. 안 그래도 상당히 기분 나쁠 시기다. 이 남자에게는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가 손을 들어 방 안의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남자는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곧 두 자루의 검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칠흑같이 검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 피로 물들인 듯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자네 검은 저기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니 한 번 휘둘러보는 것이 어떤가?”
  검은 로브의 사내는 농담 말라는 듯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생각해보니 그도 그렇다. 여기서 이 남자가 저 검을 휘둘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붉은 칼과 검은 칼이 번뜩였다. 로브의 사내는 그 검들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는 눈치 채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이어져 있었다. 남자는 회색 로브의 사내를 향해 말했다.
  “알았다. 잠시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지.”
  회색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이듯 한 마디 했다.
  “자네가 찾던 그 책의 소재를 알아냈다. 서북부 아주 깊숙한 곳에 있더군.”
 검은 로브의 사내는 턱 밑을 긁적였다. 밀지 않은 수염 때문에 개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대로 밀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은데. 
  남자는 두 자루의 검에게 시선을 한 번 옮긴 후 다시 회색 로브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져있었다.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 쓴 결과다. 그것은 검은 로브의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은 미소 지었다. 
  불을 키지 않아 주변은 매우 어두웠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집 주인은 잠을 자고 있었다. 집 주인이 자고 있으니 멋대로 불을 켜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보통 사람은 어두워서 눈앞의 사물도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남자는 서로를 잘 볼 수 있었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눈’으로 보고 있었고, 눈이 좋지 못한 검은 로브의 남자는 감각으로 보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 감각으로 보는 것. 과연 이 둘에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물어봐야할 문제다. 회색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이름을 그대로 쓸 텐가?”
  그러자 검은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명 치곤 꽤 좋은 이름이잖아. 리시타 모르트레트.”
  “은회색 정.”
  두 사내는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 간다. 수고들.”
 라임은 손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칼브람 용병단원들은 밝게 웃고 있었다. 그들이 웃고 있는 이유는 라임이 떠나서 기분이 너무 좋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신입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에 들떠있었다. 
  라임은 서신을 받은 여덟 명 중 가장 마지막까지 마을에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먹을 것 때문이었는데, 그는 배낭이 150킬로그램이 넘을 때까지 음식을 집어넣은 것도 모자라 또 다른 배낭 하나를 장만했다. 용병단의 대식가답게 그는 용병단 사무실의 음식 창고를 모조리 털어갔다. 그 때문에 라임이 떠난 후 마렉은 “어? 내 과자 어디 갔어!”라며 용병단 내부를 모조리 뒤집어 놓았다. 
  레큐런스와 미처르가 서로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장식했고, 에이브릴 라빈과 일레스트라, 세르델리아는 셋이서 같이 길을 떠났다. 앞의 두 남자가 서로의 다리를 믿은 것에 반해(사실은 마차를 생각할 뇌세포의 공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들은 마차를 타고 한적한 여행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처럼 혀를 내놓고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미처르와 레큐런스는 눈앞에 마차가 지나가자 “헉! 마차!”를 외쳤다. 그녀들 다음으로 시엔딜 에일테르는 귤라임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배낭에 음료를 가득 채워 넣은 뒤 떠났고, 피레아는 시엔딜이 떠난 뒤 가벼운 옷가지를 챙긴 후에 떠났다. 그녀의 모습은 가까운 장소로 소풍을 떠나는 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총 7명이 떠났다. 그리고 지금 라임의 출발으로 칼브람 용병단의 특수 용병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칼브람 용병단에는 거인이 있다. 오거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키와 거대한 덩치를 소유한 자. 카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 그가 언제부터 이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었는지는 아이단과 몇몇 단원을 제외하고선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눈치가 좋은 자들은 그가 20여 년 전부터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다. 
  거인, 카록은 상당히 오랫동안 칼브람 용병단을 떠나있었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용병단내 무기가 없는 순수한 육체의 대결에서 카록이라는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검술로는 최고라는 에이브릴 라빈 또한 무기가 없으면 카록의 몸에 흠집도 낼 수 없다. 
  “이제 다들 갔나?”
  마렉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넓게 펴진 어깨와 잘 발달된 근육, 오랫동안 전투를 일삼아온 자의 눈과 특유의 짙은 갈색 머리가 보였다. 마렉은 용병단장 아이단을 바라본 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답했다.
  “예. 대장님.”
  아이단은 마렉에게 눈짓했다. 마렉은 용병단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현재 중대 대부분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마을에는 백 명이 채 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수의 용병들만이 남아 있었다. 아이단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떠단 단원들에게는 미안하나 어쩔 수 없다. 미리 알고 있던 자들도 있겠다만, 오늘 우리 용병단에 새로운 단원이 들어왔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병단원 중 한 명이 외쳤다.
  “대장님! 여잡니까?”
  그러자 그의 뒤에 서있던 자가 말했다.
  “남자들만 있는 곳에 아름다운 꽃이 필요합니다! 언니들이 다 떠나고 이 더러운 남자새끼들 밖에 없는 이 용병단에 말이죠!”
  “내가 있잖아!”
  나열해있던 용병들 모두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여럿 자신에게 고정되자 그녀는 밝게 상기된 볼을 감추기 위해 목을 움츠렸다. 그러자 바로……
  “여자였냐?”
  “뭣……!”
  붉은 머리의 여성 케아라는, 칼브람 용병단에서 지급하는 롱소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내에게 휘둘렀다. 롱소드가 바람을 가르자 붕 붕 소리를 내었다. 롱소드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것을 목격한 사내는 “자, 잠깐! 장난이야! 우리 케아라쨩, 우쮸쭙!”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사내를 롱소드를 들고 쫓아가던 케아라는 섬뜩하게 외쳤다. 
  “도망가지마 쉬커드!” “중대장한테 그 말버릇은 뭔가!” “시끄러워! 그 입방정을 떨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인 네놈의 ……를 잘라버리겠어!”
  아이단을 제외한 모든 남자 단원들이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달려있는 것을 곁눈질한 것에는 신의 힘이 작용한 것 일까? 
 소란스러운 청중들을 향하여 아이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조용. 마렉. 가서 큰일 나기 전에 저 둘을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마렉은 바로 케아라의 뒤를 쫓았다. 
  “쉬커드 형! 튀지 말고 빨랑 와!”
  아이단은 “이제 나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의 한마디에 남아있는 단원 모두가 기대에 찬 얼굴로 아이단의 뒤편을 보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용병단 내부에 여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서른 명 정도는 된다. 하지만 그들은 남자 용병들과는 달리 여관에서 지낸다. 거기다 웬만해서는 그녀들에게 말을 걸 수조차 없다. 대부분이 중대장 아니면 소대장의 직급이니 평범한 용병들은 손가락 빨며 그녀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단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평범한 칼브람 용병단 옷차림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한 남자는 태양을 정말 싫어한다. 태양 자체가 싫기 때문에 그는 가급적 낮에는 활동하기 꺼려한다. 그렇다고 그가 태양빛을 쬐면 살갗이 타버리거나 하는 병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이지만, 태양을 너무 싫어할 뿐이다.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싫어한다. 마음 같아서는 여름과 함께 봄, 가을을 빼버리고 겨울만 있는 1계를 1년 365일 지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여름이 끼어있는 4계를 인정했고 태양을 자신의 손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기 때문에 낮에는 가급적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런 남자에게 비가 온 뒤의 태양이란 정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면 쪼개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산산이 부숴버린 후에 발로 짓밟고 침을 퉤하고 뱉어줄 정도의 증오를 남자로부터 나오게 한다. 증오치고는 밋밋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태양을 싫어한다는 사실만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태양을 증오하는 남자가 유일하게 태양을 무시할 때가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떤 행위를 하고 있을 때인데, 그 행위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 행위는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 해도 없앨 수 없는 낙원으로의 길이다. 
  남자는 ‘카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불리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카이는 작은 나룻배 위에 앉아있다. 그리고 낚싯대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나룻배 위에는 그 말고도 또 다른 남자가 있었는데, 새하얀 백색의 머리카락과 새하얀 눈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눈에 띄었다. 태양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남자의 하얀 머리카락은 태양처럼 강렬해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더 심했다. 빛이 들어오는 순간, 눈동자는 순백색의 안광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카이와 순백색 머리의 남자는 이그나흐 강가에 나룻배를 타고 둥둥 떠 있었다. 두 남자는 낚싯대를 쥐고 있었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죽은 듯 나룻배 위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이 두 남자는 모두 모든 것을 준다 해도 없앨 수 없는 낙원으로의 길이라 정의내릴 수 있는 행위를 취미삼고 있었다. 이 행위를 정의 내린 내용이 완벽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오래지 않아 사이가 두터워졌다. 
  백발의 사내는 이 행위의 전문가였다. 그가 낚싯대를 이용하여 지렁이를 만어(萬魚)의 먹이로 내주는 순간 너 물고기 나 물고기 할 것 없이 그들은 지렁이를 문다. 무는 놈들은 모두 먹음직스러운 녀석들뿐이다. 
  카이는 이전에는 낚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을 낚긴 개뿔이나 낚겠습니다. 시간만 버리는 짓이 아닌가요?”
  같은 말을 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커스티의 제안으로 낚싯배를 타고 바다까지 나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배의 선장이 “낚시는 이렇게 하는 거라네!”라며 찌를 던졌을 때 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물고기가 튀어 올라왔던 그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물론 그 물고기는 낚싯대에 달린 지렁이 따위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백발, 백안의 남자는 조용히 나룻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때의 남자의 옷은 간단했다. 흰 티와 흰 바지를 입고서 가만히 낚싯대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그와 만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만 돌아갈까요?”
  카이가 물었다.
  “그러죠.”
  사내가 답했다. 그들은 노를 저었고 잠시 후 그들은 뭍에 서 있었다. 
  “오늘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겠군요.”
  백발의 사내는 씩 웃었다. 카이 또한 마주 웃어 보이고는 낚싯대를 내려놓은 뒤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내 또한 낚싯대를 내려놓고 걸어갔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은 강 한 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 같은 육지였다. 이곳은 백발의 사내가 터를 잡고 있는 곳이라 말할 수 있었다. 낚시를 하기위해 찾아 놓은 땅일 뿐이라 당연히 집은 없었다. 물고기를 손질할 도구와 불을 지필 수 있는 도구들, 180센티가 넘는 장궁과 80센티는 족히 넘을 철 화살을 포함한 쓸모없는 잡것들의 집합체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문득 카이의 눈에 묘한 것이 들어왔다. 어림잡아도 12미터는 넘을 듯한 길이의 나무 막대기였다. 말이 좋아 나무 막대기지 두께가 6센티미터가 넘는, 나무라고 말해도 믿을 만한 모습이었다. 양끝의 4미터 정도는 짙은 회색 헝겊으로 둘둘 말아 놓은 모습이 특히 눈에 더 띄었다. 두께 6센티미터의 나무 막대기는 반쯤 물에 잠겨있었다. 카이가 물었다.
  “방금 알았는데요, 저건 뭔가요?”
  백발의 사내는 카이가 가리키는 반쯤 물에 잠겨있는 두께 6센티미터의 나무 막대기를 보며 피식 웃었다.
  “글쎄요. 뭘까요 과연.”
  사내는 허허허 웃으며 잡아온 물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카이가 시선을 두께 6센티미터의 나무 막대기로 옮겼다. 그는 그것이 뭔지 정말 궁금했기 때문에 그것에 다가갔다. 멀리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눈이 좋은 편의 카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멀리서 볼 수는 없었던 것이 보였다. 그것은 두께 6센티미터의 나무 막대기가 아니었다. 나무의 껍질을 둘둘 말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그 모습에 카이의 호기심은 더 이상 자제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나무껍질에 닿게 되었을 때, 카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카이 씨. 와서 고기 손질 좀 도와주시면 고맙겠는데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카이는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사내는 2미터가 넘는 길이의 타티크를 손질하는데 애먹고 있었다. 카이는 그 막대를 보았다. 그리고 사내를 다시 보았다. 그의 눈은 감겨있었고 손가락은 입술 위로 올라가 있었다. 카이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카이의 눈에 더 이상 나무 막대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타티크 손질은 자신 있죠. 금방 갑니다.”
  오늘로 카이라는 남자가 머문 지 열흘째가 되는 날이다. 한 달 휴가의 3분의 1을 사용했다. 오오 통제라. 스무날 뒤엔 다시 용병단으로 돌아가야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