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게시판 성격에 맞게 글을 쓰고 있다.




  는 사실 과제하다 멘붕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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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은 다가오는 바람이 내미는 손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얼굴을 향해 빗물이 쏟아지자 회색 로브의 사내는 다급하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반응이 느렸던 탓에 얼굴이 다 젖었다. 로브가 다 젖어 어차피 축축했는데 거기서 얼굴이 좀 젖어봤자 뭐가 달라질 거냐고 묻는다면, 회색 로브의 사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겉은 방수처리가 안 되어있을 뿐이라고. 

  겉은 축축하지만 안은 뽀송뽀송하다는 게 회색 로브의 사내가 가진 한 가지의 위안거리였다. 헌데 구멍 뚫린 얼굴 쪽으로 빗물이 타고 안쪽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그리고 지금 회색 로브의 사내는 자신의 셔츠를 적시고 있는 빗물 때문에 얼굴이 구겨져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검은 로브의 사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검은 로브의 사내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자신이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저 용병이 벤샤르트를 꺾지는 못해도 다리 두 개 이상은 잘라놓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고, 벤샤르트가 휘두른 앞발에 맞은 용병은 종을 지탱하던 세 개의 벽면 중 하나를 무너뜨렸다. 종이 곧 떨어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나 아직 떨어지기는 싫었는지 악을 쓰며 제자리에 멈췄다. 벤샤르트가 이미 죽인 여자의 몸뚱이를 난자하기 시작했다. 

  한쪽 앞발을 잃어버린 것이 그렇게 화가 났던지, 벤샤르트는 이미 곤죽이 된 고기조각을 향해 다시 한번 무차별적으로 앞발을 내리찍었다. 

  “이대로 지켜만 볼 텐가?”

  회색 로브의 사내는 종탑에서의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검은 로브의 사내를 보며 말했다. 무녀가 걱정돼서 그러는 것이리라. 검은 로브의 사내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원한다면.”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만지작거리며 검은 로브의 사내는 로브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오른손을 꺼냈다. 그의 오른손은 평범했다. 오랫동안 병장기를 다루어 투박해진 용병이나 기사들의 손과는 달리 투박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굳은살만 박혀있을 뿐이었다. 

  굳은살이 박혀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의 손에서 병장기를 다룬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그의 손은 수십 년이란 세월을 전장에서 보내며 살아온 자들과 마찬가지고 두껍고, 투박했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았고, 그 무기로 사람을 죽였다. 날카로운 무기를 쥐고 목을 잘라버릴 때도 있었고, 뭉툭한 무기를 쥐고 쉬지 않고 휘둘러 다진 고기조각을 만들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맨손으로 골통을 부수고 심장을 뜯어내던 일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손에서 무기를 놓고 뒹굴뒹굴 굴러다니다보니 평범한 성인 남자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사내는 그런 오른손의 손목을 빙글빙글 돌렸다. 손목에서는 뚜두둑 거리는 뼈 소리가 스산하게 주변 환경을 울렸다. 그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긴장되어 있던 근육을 풀어준 뒤 오른손의 손바닥을 곧게 세운 뒤 얼굴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자세를 유지한 채 종탑과의 거리를 재보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사내는 곧 들고 펼치고 있던 손바닥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그가 주먹을 쥔 손에서 새까만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회색 로브의 사내는 검은 로브의 사내가 손을 들어 올렸을 때 벤샤르트의 머리와 몸통 위로 새까만 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주먹을 쥐었을 때 새까맣게 피어오르던 것들은 형체를 가지고 거미의 머리와 몸통 위로 떨어졌다. 

  ‘감각’도 ‘눈’에서도 검은 로브의 사내보다 앞서는 회색 로브의 사내였기에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새까맣게 피어오르던 것은 자연의 마나도, 인위의 마나도 아니었다. 물론 살(殺), 투(鬪), 패(敗)의 힘 또한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 그렇게밖에 칭할 수 없는 힘이 살상을 목적으로 구체화되어 한참 난도질을 가하고 있던 벤샤르트의 머리와 몸통에 틀어박혔다.

  몸통에 기다란 창대 같은 것이 꽂히고, 동시에 머리에 칼 같이 생긴 것이 두 개나 틀어박힐 동안 벤샤르트는 난도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로브의 사내는 거미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무녀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종탑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돌린 채 땅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회색 로브의 사내를 안쓰럽다는 눈길로 슬쩍 곁눈질한 뒤 종탑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회색 로브의 사내를 지나치며 한마디 했다. 

  “저건 네 손에서 알아서 처리 좀 하라고. 난 거미는 쳐다보기도 싫으니까.”

  회색 로브의 사내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검은 로브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자 검은 로브의 사내는 콧방귀를 끼며 미소를 지었다. 

  종탑에서 발걸음을 옮기던 검은 로브의 사내는 문득 뒤통수가 간지럽다고 느꼈다. 쓰고 있던 후드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시원하게 긁었다. 그런 뒤 느닷없이 뒤통수가 간지러우면 칼침 안 맞게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던 사람의 조언에 따라 아까까지 자신이 서 있던 장소로 급히 되돌아갔다.

  이제 왔느냐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회색 로브의 사내를 향해 검은 로브의 사내는 미간을 한 번 찌푸려준 뒤 시선을 옮겨 종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혀를 찼다. 거미가 날뛰고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분명히 죽였을 터인 거미가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회색 로브의 사내를 향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그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이상했다는 사실이 한 발 먼저 떠올라 말을 가로챘다. 그가 말했다.

  “내가 방금 온 건가?”

  회색 로브의 사내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답했다.

  “벤샤르트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뭐하고 있었나?”

  “끝내주는군.”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닥치고 있어.”

  검은 로브의 사내는 화를 내는 회색 로브의 사내의 콧등을 주먹으로 쳐 내려앉힌 뒤 곧바로 팔을 크게 휘둘러 턱을 부숴놓았다. 이어서 쓰러지려는 그의 턱을 아래에서 올려쳐 완전히 박살내버렸다. 세 대나 얻어맞은 사내는 동공이 풀린 채 나가떨어졌다. 

  주먹을 세 번이나 휘두르면서도 검은 로브의 사내는 종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오른손을 땅을 향해 펼치며 말했다. 

  “아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속에서 붉은색 장검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튀어나온 장검을 검은 로브의 사내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붙잡았다. 칼을 붙잡은 순간 사내는 앞으로 한 발 내민 왼발에 체중을 실었다. 그러고 나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붉은색 장검을 던졌다. 

  집어던진 붉은색 장검은 종탑 위의 거대한 거미를 향해 소리보다도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있는 힘껏 던진 건 아니었지만 종탑 위의 거미를 종탑과 함께 폭사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은 담겨 있었다. 

  이변(異變)은 검은 로브의 사내가 집어던진 검이 벤샤르트에게 날아가 몸을 반으로 잘라버리고 종탑 전체를 날려버렸을 때 발생했다. 

  로브의 사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고 자신이 일으킨 폭발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그가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자신이 던진 칼이 폭발해 날려버렸을 종탑 그리고 거미가 폭발과 함께 없었던 일이었다는 듯이 되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부정시공(不定時空)의 힘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본 순간 그것을 의심해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란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랬다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는 않았을 테니까.

  회색 로브의 사내는 검은 로브의 옆에 서서 날뛰고 있는 벤샤르트의 모습을 보며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회색 로브의 사내는 반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이대로 지켜만 볼 텐가?”

  그의 물음에 검은 로브의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회색 로브의 사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고 팔짱을 낄 즈음 검은 로브의 사내가 말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네.”

  검은 로브의 사내가 공기를 폐 가득 채웠다가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폐에 차가운 공기를 가득 채워 넣고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의 몸에서는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개의 눈동자가 떨어지다가 만 빗방울과, 흔들리다가 만 나뭇잎 등을 쳐다보며 자리를 옮겼다. 다 젖은 회색 로브가 나부끼다가 만 모습도 보였고, 발리스타 주위를 둘러싸고 무어라 말하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종탑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용병의 모습도 보였다. 

  마침내 두 개의 눈동자가 한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뛰었다. 











  *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는 너무나 밝고 아름다웠다. 

  옥상의 나무판자 위에 쌓이다시피 사뿐히 내려앉은 새하얗게 빛나는 순백의 옷자락은 어떠한 존재도 닿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순백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종탑을, 세상을 감싸 안았다. 

  그녀가 눈을 떴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던 고결한 빛이 현재를,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눈이 스르륵 감겼다. 미소를 지은 모습 그대로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앞으로 내민 순간 바닥에 닿아있던 순백의 빛나는 머리카락이 소리 없이 쓸려왔다. 모래가, 먼지가, 그 외 모든 것들이 그녀가 움직이는 자리에서 비켜섰다. 그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닿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시다. 모두 비켜서라.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 이는 벤샤르트라는 이름의 거대한 흰 거미뿐이었다. 

  벤샤르트는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절대 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닿아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벤샤르트는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고혹적인, 누구라도 홀리지 않곤 버틸 수 없는 목소리가 세상을 메웠다.

  “이리 오렴.”

  벤샤르트는 움직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결(高潔)했다. 그리고 고귀(高貴)했으며 고상(高相)했고 순결(純潔)했다.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고혹(蠱惑)을 담고 있었다. 벤샤르트는 거부할 수 없었고 그녀의 말에 순종했다. 벤샤르트는 하나 남은 앞발과 뒷다리를 이용하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하얗다고도 할 수 있고 살구 빛 같다고도 할 수 있는 피부를 가진 손이 움직였다. 손길이 벤샤르트의 얼굴에 닿았을 때, 벤샤르트는 박살나 가벼워졌던 반대쪽 앞발이 다시 무거워 졌다는 것을 느꼈다. 벤샤르트는 의아해 했고 그녀는 말해주었다.

  “움직여볼래?”

  다시 몸을 움직였을 때 벤샤르트는 오른쪽과 왼쪽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이용해 움직일 수 있었다. 그의 수많은 눈동자들이 의아함을 표시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의아해했다. 찌그러져 세계를 바라볼 수 없었던 두 개의 눈동자가 지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두려워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벤샤르트는 두려웠다. 이 고결한 존재에게 자신이 한 짓이 저주스러웠다. 뇌리 깊숙이 박혀있던 사념은 그녀를 바라보았던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짓들이 모든 이에게 증오 받아 마땅한 짓임이 분명해졌다. 

  그는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의로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벤샤르트는 자살을 시도할 수 없었다. 강압적으로 정신을 세뇌해 자살을 막은 것이 아니다. 그 간절한 눈망울에 벤샤르트는 자신이 너무나도 저주스러웠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다시 감겼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











  “안 돼!”

  한 소녀는 절규했다. 











  *











  “안 돼! 제발, 제발!”

  한 사내는 통곡했다.










  

  *











  누군가가 종탑 위에서 지금 이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면 충분히 끔찍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티이의 눈에 한참 날뛰던 벤샤르트는 어느샌가 갑자기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 있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한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멈춰 있는 벤샤르트를 바라보던 티이는 천둥이 치는 것만 같은 소리에 고개를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티이는 경악했다.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던 망루가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망루의 끝자락에 붙어있던 벤샤르트의 몸체보다 두 배는 더 큰 거대한 종이 떨어졌다. 

  “안 돼!”

  벤샤르트는 거대한 종이 자신을 찍어 누르기 위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는 종의 존재를 알고 있었더라면 시선을 절대 아래로 내려 무녀를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미는 자신의 몸보다 두 배는 더 거대한 종이 몸을 찍어 누르는 순간에도 시선을 절대 옮기지 않았다. 온 몸의 껍질이 잘리고 터져 체액이 흘러나오고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눈알이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그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추위에 떨고 있는 무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다면 몸을 일으켜 추위를 가시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의 몸은 기괴하게 비틀리는 정도의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벤샤르트의 몸체를 종이 찍어 눌렀을 때 티이는 벤샤르트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괴로운 듯이 몸을 비트는 벤샤르트의 모습만 보였다. 그녀의 눈에 벤샤르트와 싸우던 용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벤샤르트는 볼 수 있었다. 

  티이가 벤샤르트의 곁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모든 체액을 바깥으로 쏟아낸 직후였고 머리는 반쯤 잘려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거미는 살아있었다. 하지만 죽고 있었다. 티이는 그를 죽이고 있는 종 때문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이내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자 입술을 깨물고 벤샤르트의 몸을 누르고 있는 종을 있는 힘껏 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종은 성인 남성 수십, 수백 명이 동원 되어야 들어 올릴 수 있는 크기와 무게였다. 당연한 말로 남자보다 평균적이 힘이 약한 여자 혼자로서 그 종을 들어 올릴 수는 없었다. 불가능했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종을 밀어보려는 것이었다. 종이 밀려나 벤샤르트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을 부정해 보면서.

  “아프지? 조금만 참아. 내가 빼내줄게.”

  티이는 애써 평온한 얼굴을 조장해 보였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정을 하기 싫었을 뿐) 벤샤르트는 모든 눈알이 빠져버렸거나 짓눌려 터져버렸다. 그렇기에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제발…….”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흐르는 눈물을 그녀는 애써 닦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티이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서럽게까지 느껴지는 흐느낌에 주위의 것들이 반응을 보였다. 티이의 몸을 때리던 빗방울이 날아오는 바람을 타고 주춤주춤 그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종을 미는 것은 포기했다. 티이는 벤샤르트의 반쯤 잘려나간 얼굴을 향해 걸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는 벤샤르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까지 약간이나마 움직임이 있던 벤샤르트는 그녀의 흐느낌이 다시 이어졌을 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젠 다시 영원히 움직이질 못할 벤샤르트와 티이의 머리 위로 수십 대의 발리스타에서 쏘아진 투창이 쏟아졌다. 투창은 정확하게 벤샤르트와 티이를 겨냥했다.  

 발리스타의 투창은 잿빛 하늘이 쏟아 붇는 빗줄기와 하나가 되어 떨어졌다.











  *











  눈을 뜨자 따스한 햇살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그런 햇살과는 반대로 온 몸은 아팠다.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았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 하자 고통이 느껴졌고 그 고통은 그대로 심장을 향해 직격했다. 숨이 턱 막혔다.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뒤에 그녀는 두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건 아프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고통이 상당했다. 왜 이렇게 몸이 아픈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그녀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결과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금발을 가진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아, 일어나셨어요?”

  금발의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입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미소가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하던 차에 이렇게 쳐다보고만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금발의 여자에게 마주 미소 지어 주었다. 

  자고 있는 얼굴도 아름다웠던 여자가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미소를 짓자 금발의 여자는 가슴이 설레는 걸 느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가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대답을 하기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대답을 해주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통을 감수하고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기로 했다. 그러자 금발의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금발의 여자는 무어라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귀가 멍해져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다시 물어볼까 생각해 보았으나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기분 나쁜 현실을 재차 깨닫고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금발의 여자는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치료를 맡았던 사내가 들려줬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치료하신 분께서 말씀하시길, 많이 다치신 상태라 며칠은 목소리가 안 나올 거라고 하셨어요. 몸을 움직이는 것도요.”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심하게 다쳐서 아픈 거라는 걸 깨달은 여자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두 눈을 감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다쳤으니, 단편적으로 기억이 홀라당 날아가는 것 정도는 예삿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시원하게 넘어갔다. 

  “그 분 덕분에 무사히 종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종탑’이라는 단어를 듣자 뭔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보다도 말을 하던 도중 금발의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왜 얼굴을 붉힌 것일까? 느긋하게 고민해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이 포기했다. 

  금발의 여자가 말한 ‘그 분’이라는 이가 신경 쓰였으나, 종탑이라는 단어와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조합해보자 무슨 일이었는지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무너지는 종탑에서 그자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단 것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많이 친하셨나 봐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한 손으로 가리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뭐라고 불러드려야 될지 모르겠네요. 성함을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해줄 수도 없으니 답답했다. 결국 그녀는 금발의 여자가 입모양을 읽어주길 생각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세…….’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밝은 붉은색이었다.

  ‘피오나.’

  옅은 금발의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후후, 좋은 이름이네요. 무언가 숨겨진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짓는 여자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죄송해서 어쩌죠? 이제 겨우 일어나셨는데…… 오후에 제례가 있어서 제가 지금 나가봐야 하거든요 그 후엔 용병단과 신전에도 가야하고…… 마을 분들도 안심시켜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어제 일로 많이 놀라셨을 태니까 저라도 힘이 되어드려야죠. 그래야 그 아이도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수호신이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가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금발의 여자는 고개를 들었고 억지로 웃음지어 보였다.

  “피오나 씨는 조금 더 쉬세요. 부담은 갖지 마시구요. 아, 참. 마렉이 당신을 찾는다고 들었어요. 마렉은 칼브람 용병단의 용병이에요. 아마 어제 일 때문인 것 같은데 몸이 괜찮아지시면 한번 찾아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지금 이 시간대라면 용병단 사무실에서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백에 가까운 은발을 가진 여성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고맙습니다.”

  은발의 여성은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간 뒤에 곧바로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몸이 나른했고 졸렸다.

  태양은 뜨거웠다. 가을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 번 왕창 태양빛을 쏟아 붇고 겨울로 넘어가려는 구실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열을 내는 일은 태양에겐 콧방귀를 뀌는 일 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가끔 심심하면 방귀도 뀌어주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하품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하는 일이라곤 빛을 내리쬐는 것뿐이니 어찌 보면 태양은 세상에서 달과 함께 가장 한가한 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한 남자는 자신이 그런 태양과 달보다도 한가하고 심심하다고 느꼈다. 덤으로 미칠 듯한 더위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래서 남자는 돈을 받기 위해 왕국기사단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거구의 사내를 마중 나온 자는 신장이 2미터를 넘는 거구의 사내였다.

  “돈 못 주겠다. 방금 이렇게 말한 거냐?”

  거구의 사내는 로체스트 왕국기사단 집무실에 몸집이 너무 거대해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밖에서 자신보다 더 거대한 사내에게 말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다른 이들보다 신장이 20센티미터는 더 컸다. 어깨도 웬만한 성인 남자의 어깨에 한 뼘을 더 이어붙인 것만큼 넓었다.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사내는 거인이라 불렸고 힘도 단연 최고였다. 그 왕국 기사단장인 카단을 팔씨름으로 이겼으며, 부기사단장인 루더렉 또한 그에게 졌다. 그의 근력만은 제1왕국 기사단에서 최강이었다. 칼브람 용병단 이라는 게판슈 성지에 참가한 5개의 용병단 중 하나에서 한 용병이 찾아오기 전 까지는 그랬다.

  “손가락 잡고 해. 네가 무슨 아마추어야?”

  손가락 한 개. 그는 졌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를 팔목에 가져다 대고서 말이다. 이 사내가 로체스트에 올라온 뒤로 그는 최강의 힘의 칭호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최강의 힘의 칭호를 빼앗긴 뒤로 그는 발을 뻗고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날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힘만 세다고 싸움을 잘하는 게 아니다’고 생각했다. 유일한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깨졌다. 

  거구의 사내와 함께 전장에 투입 된 건 우연이었다. 거구의 사내는 전장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가 받은 의뢰내용은 적의 후방 부대를 교란 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부기사단장이 제안한 양동작전이었다. 게판슈 성지의 전투에서 얻은 우연한 영광을 뒤에 업은 시골 용병단의 한낱 일개 용병 따위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긴다는 것 자체에 그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차피 곧 죽을 것이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여겼고, 그는 눈앞의 적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패했다. 포위되었고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사내는 온 몸에 전류를 휘감은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떨어졌다. 

  “자, 나의 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때의 상황은 그의 모습을 보았던 모든 이가 입을 모아 말한다. ‘춤을 추는 자의 향연’이라고. 사내는 웬만한 오거보다도 거대했다. 신장이 4미터에 달하며 체중은 힘차게 땅을 내리찍었을 때 적어도 50미터는 떨어져 있던 그가 2초간 울리는 걸 느꼈을 정도다. 거기다가 원래부터 까무잡잡했던 피부가 태양빛에 짙게 그을려 완성된 구릿빛 피부와 붉게 타오르는 듯한, 마치 광폭해보이기 까지 하는 붉은 눈과 검은 머리는 아군에게는 안도감을, 적에게는 두려울 정도의 압박감을 심어주었다. 

  그의 이름은 카록 디페리온. 칼브람 용병단의 특수용병이었다.

  “으하핫! 요론 개새끼들! 성 하나를 박살내야 정신을 차리려고 이러는 겨?”

  카록은 호탕하게 웃었다. 돈을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은 그에겐 별 문제되지 않았다. ‘서부 대륙 북부 지방의 강대국인 디 펜타누스 제국 제3군 붉은 갑주 군단장’의 척살 의뢰를 받고 갔다가 죽이기는커녕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되돌아 온 뒤부터 돈을 받지 않는 일에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돈을 못 받는 게 기분 좋다는 건 아니다. 

  열심히 일 하고 돈을 못 받으면 누구라도 화가 난다. 물론 자신이 일을 망쳤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그냥 대놓고 안 준다고 해버리면 성인군자(聖人君子)라 해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돈을 못 받는단 말이지?”

  카록은 거칠게 돋아난 턱수염을 긁었다. 

  “흠. 요놈아들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게 분명한데. 허허, 이봐 너. 가서 책임자 불러와. 나한테 돈 결제하기로 했던 놈, 루더렉 맞지? 불러와.”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집무실로 휘청거리는 몸뚱이를 이끌고 들어가는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록은 문득 붉은 갑주 군단장에게 당했던 것이 생각났는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황금성관(黃金盛觀)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피베론 영감 정도는 되려나.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쯧.”

  그는 혀를 찼다.  











  *











  “흥. 어디서 용병 놈이 누굴 오라 가라 명령하는 것이냐. 웃기지도 않은 놈이군. 당장 꺼지라 전해라.”

  루더렉은 자신을 찾아 온 사내에게 명령했다. 사내는 바로 뒤돌아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루더렉은 카록이라는 남자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가 포벨로 평원에서 보여주었던 강함과 일의 완벽한 처리에 있어서는 실력을 인정할만하다. 홀연 단신으로 적 후방 부대를 교란시키는 걸로도 족하건만 아주 박살을 내놓았고.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부대를 구출했다. 그 결과 카록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병사는 모두 사지 멀쩡히 다 붙지는 않은 채로 귀환이 가능했다. 전투를 하다가 팔 다리를 잃고 죽지 않은 채 끼어 있던 병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루더렉은 그에게 가서 구출해오란 명령 같은 것을 내리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부대가 그들을 구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웬 시골 용병 놈 하나가 멋대로 움직이고 다 박살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강한 자가 시골에, 그것도 하찮은 용병일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더렉의 심기가 한참 틀어졌을 즈음 카록은 자신에게 오라는 루더렉의 말을 전한 사내를 자신의 붉은 눈동자로 노려보며 주먹으로 담벼락을 후려쳤다. 사실 후려쳤다고 보인 것은 거구의 사내의 두 눈뿐이었다. 카록은 그저 담벼락을 살짝 건든 정도에 불과했으나 담벼락이 약했다. 그는 “헉! 이걸 어떻게 해?”라며 안절부절 못했다. 

  거구의 사내는 기사였다.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지는 못 했어도 일단 기사는 기사였다. 일반적으로 기사가 되는 자라면 인위의 마나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경지의 실력자들이다. 그의 마나의 위력은 사관학교를 마친 동기 기사 중에서는 단연 최고였다. 덕분에 자신의 힘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의 기백은 강했고 힘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자신이 강하다고 우쭐한 것도 잠시였다. 그는 마족들과의 첫 전투에서 자신이 가진 힘이 무척이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들에게서 압도적인 강함을 처음 느끼고, 보았다. 활의 시위에 먹이고 날린 화살이 인위의 마나를 이용해 보호되던 합금 방패를 뚫고 방패 뒤에 감추고 있던 얼굴에 구멍을 냈다. 처음에는 장교 급의 자들이 날린 화살인 줄 알았다. 그랬다면 힘의 차이가 나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인간은 기사 정도가 되야 인위의 마나를 사용할 줄 안다. 물론 일반 병사들 중에서도 사용하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소수다. 하지만 마족은 다르다. 마족은 지휘관은 물론 일반 병사들마저 인위의 마나를 사용한다. 병사의 질에서 밀리니 믿을 건 지휘관들의 역량 뿐.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휘관 쪽의 역량도 마족이 한 수 위다. 

  마족 제8공격부대가 대륙 각지에 흩어져 병력이 분산되어있고, 로체스트를 비롯한 테트크라드 왕국의 북동쪽을 공략하는 건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인재들의 수는 저쪽이 훨씬 많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마족은 흩어졌거나 잠적하고 있던 자들도 불러 모아 단 하나의 목적 아래 집결하고 있지만,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향해 칼을 뽑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칸젤과 칼리쉬. 그들은 첩보부대이면서 맞닥뜨리는 족족 모든 부대를 괴멸시켰다. 가끔 수백 명을 인질로 잡아 로체스트 성 앞에서 목을 긋고 몸을 쪼개며 도발도 했지만 보통은 괴멸시켰다. 

  거구의 사내는 칼리쉬의 정보부대와 만난 적이 있었다. 기사는 모두 6백 명이었으며 병사는 5천 명이 넘는 부대에 속해 있을 때였다. 칼리쉬의 부대는 기껏해야 고블린 1천과 백여 마리의 오거가 뒤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5천대 1천. 결과는 기사단이 승리할 것이 자명해보였다. 

  사내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돌격했고, 전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5천 명이 5배나 적은 병력 수에 밀리다니? 아니, 전멸하다니……. 처음 돌격한 자들은 오거 백 마리였다. 그들의 몸에는 화살이 박히지 않았고, 마나가 들어간 검에야 겨우 상처를 입는 정도였다. 물론 그들도 마나를 사용할 줄 안다. 

  화살은 맞는 족족 튕겨 나왔으며 인위의 마나가 들어간 검은 똑같이 마나로 몸을 두른 그들의 몸에 닿자 부러지거나 휘었으며 쇠를 긁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오거가 휘두르는 해머에 맞으면 수십 명씩 머리통이 깨져나갔고 뒤에서 고블린들이 던지는 투창에 맞아 세 명씩 꼬챙이 꽂히는 모습을 보자 거구의 사내는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에겐 전쟁이란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첫 전투였다. 그 전투에서 고블린과 오거들은 그나마 양호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칼리쉬였다. 그는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 손에 쥐고 있는 둥근 칼은 등에 매단 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달렸다. 

  몸에 부딪치는 것들은 일반 병사고 기사고 할 것 없이 다들 사지가 찢겨나갔고 상체가 억지로 잡아 뜯겨지듯 튕겨져 나왔다. 칼리쉬가 인간을 ‘도륙’ 하던 그 모습은 세상에 내린 재앙 그 자체로 보였다.

  “얘야. 비켜봐라.”

  카록은 씩 웃으며 주먹으로 지면을 내려쳤다.

  “이렇게 내가 왔으니 어서 나오시게!”











  *











  루더렉은 자신의 검으로 찢지 못하는 피부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그는 속으로 저 단단한 몸체에 경의를 표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카록은 루더렉의 엄지손가락에 힘줄이 돋아나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평소에는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두 눈도 그 순간만큼은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큰 게 오는군.’

  그는 곧바로 예상했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굴렸다. 

  루더렉은 혀를 찼다. 한방에 끝장을 보려고 했건만 저 동물 같은 놈은 알아채고 피해버렸다. 한 번 떠나간 힘을 다시 되잡기란 불가능하니 그는 그대로 방출된 힘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민가 쪽으로 날아가진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카록은 뜨악하며 말했다.

  “얌마! 정신화를 쓰면 어쩌잔 거야! 나도 무력화 써버린다?”

  루더렉은 자신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제지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기에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단순히 응결체였나? 저런 괴물 같은 놈…….’

  루더렉이 방출한 직경 102미터의 둥근 마나의 덩어리는 그가 서있는 자리에서 정확하게 102미터 앞으로 전진했다. 

  카록은 지면을 휩쓸고 지나간 마나의 덩어리에 주눅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루더렉에게 왜 그런 위험한 힘을 이런 민가가 가득한 곳에서 방출하냐고 핀잔까지 주었다. 그리곤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힘을 사용한다며 협박까지 했다. 루더렉은 피식 웃었다. 저자의 성격은 ‘칼 젠트’를 닮았다. 그 사내의 성격과 비슷한 남자. 실력은 둘 다 막상막하. 하지만 저쪽은 아직 무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괜히 ‘번개와 바람을 등에 업은 자’라는 이명이 붙은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무기를 꺼내 보인 적이 없다는 것도 칼과 같군.’

  피식 웃는 루더렉의 모습에 카록 또한 덩달아 미소 지었다.

  “하하하! 이봐 부기사단장. 자리를 옮길까? 당신도 많이 지쳐있는 모양이야, 휴식에!”

  루더렉은 다시 정색하고선 말했다.

  “흥. 좋을 대로 해라.”

  그러나 그의 말엔 웃음기가 있었다. 카록이 말했다.

  “역시 너도 사람은 사람이네. 웃으며 다녀. 그게 최고거든.”

  “지위 때문에 그렇게 하기는 힘들군.”

  “히히힛, 그럼 나중에 그 지위를 버리고 술 한 잔 걸치자! 거품 맥주 진짜 맛있더라고.”

  루더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네놈이 살아있기를 소망해보마. 촌뜨기.”

  “내 걱정 말고 술이나 살 준비해. 아, 자리 옮긴다.”

  카록은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카딜. 우릴 저기 경치 좋은 구름 위로 옮겨 줘.”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











  “인생은 즐겁소!”

  카록은 왼쪽 쇄골의 좌측 끝에서 오른쪽 골반 끝까지 이르는 길이에 새로 생겨난 상처를 만지작거리며 소리쳤다. 상처는 그렇게 깊은 편은 아니었다. 피도 흐르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는 돈 보따리가 가죽 끈으로 단단하게 매여 있었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주점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카록의 몸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꽤 놀랐을 것이다. 아물더라도 흉터는 남을만한 큰 창상이었건만, 그의 몸뚱이가 주점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상처는 흉터도 없이 아물어버렸다. 

  키룽가는 전에 술통을 전멸시킨 전과가 있어 한동안은 술 저장고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첫 몇 날은 잘 참아내었다. 그리고 그 첫 몇 날이 지난 후에는 그도 어쩌지 못하는 금단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 뭐 하냐 너?” 

  카록은 몸을 꽈배기처럼 배배 꼬고 있는 신장 3미터 97센티의 오거를 보며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꿈이 아니었다. 아마도 불행일 것이다. 카록이 당혹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키룽가가 말했다.

  “린간. 왔나.”

  “너 왜 그러냐…….”

  “술. 며칠 못 마셨더니 갑자기 이런다. 린간. 치료약 좀 부탁해도 되나? 포벨로 평원에……”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그거에 치료약은 없어 멍청아.”

  카록은 갑자기 눈앞의 오거가 무서워졌다.

  “루, 루더렉님…….”

  거구의 사내는 갑자기 나타난 루더렉의 모습에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루더렉은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망치로 몇 대 얻어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덤으로 도끼로 베인 자국까지 섬뜩하게 그의 상체에 남아있었다. 루더렉은 퀭한 눈으로 나자빠진 거구의 사내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칼보다 좀 더 강한가.”

  루더렉은 어깨를 잡고 목을 좌우로 꺾고 한 바퀴 빙 돌렸다. 망치로 얻어맞은 부위가 욱신거렸고, 도끼로 베인 자리가 화끈거렸다. 서로 적당히 즐길 정도로 부딪쳐본 것이라 이정도 선에서 끝난 것이다. 

  계속했다면 지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한 루더렉은 응어리를 내뱉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잘라도, 잘라도 계속해서 재생하는 육체를 상대하는 건 언제나 고달프다. 재생력의 극이라 일컬어지는 식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거기다 지치지도 않으니…… 어떻게 이길 도리가 없다. 기사단 내에 그를 이길 자가 있다면, ‘광렬의 수호자’나 ‘중력의 검’, ‘마왕’ 정도일까. 문득 루더렉의 뇌리에 ‘망각의 검’이란 이명을 가진 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는 모른척하기로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즐겁긴 했다. 











  *











  “아, 일어나셨나요?”

  티이는 밝게 미소 지었다. 순백에 가까운 은발을 가지고 있던 여자 즉, 피오나는 그녀에게 미소로 답해 주었다. 

  피오나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흰 반팔 위에 회색 후드티를 걸친 뒤, 청색의 긴 면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티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그녀의 맨얼굴을 봤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얼핏 보아서는 몸매 또한 좋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몸매를 직접 보게 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허리는 물론이고 상체 전체에(가슴을 제외하고)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윗옷을 갈아입을 때 보였던 11자로 발달된 복근은 같은 여자인 그녀가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다. 

  피오나는 흰색과 검은색이 적절하게 섞인 운동화를 신고서 방한복을 몸에 둘렀다. 방한복은 상당히 길어서 그녀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티이는 그녀가 용병단의 칼집에 들어가 있는 롱소드를 쥐어드는 것을 보고 그녀의 몸매에 감탄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마렉이라면 퍼거스 아저씨와 함께 있을 거예요.”

  “고마워.”

  피오나는 밝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티이는 그 미소에 덩달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티이는 피오나가 자신을 지나칠 때 그녀의 신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그녀의 신장은 170센티미터가 넘었다. 

  혼자 남게 된 티이는 멍한 얼굴로 피오나가 열고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빨래를 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관을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피부는 춥다고 경련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시원하다고 느꼈다. 오늘은 어제에 비하면 그렇게 추운 편은 아니었다. 그녀와 같은 남부 대륙의 여자라면 이정도 추위는 시원하다고 느낄만했다. 

  종탑에서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벤샤르트라 불리던 그 거미에게 맞은 뒤 눈을 떠보니 여관에 있었다. 어떻게 종탑을 빠져나왔는지 그 거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든 게 기억나지 않았다. 

  피오나는 가슴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어깨너머로 쓸어 넘겼다. 묶어보려다 마땅히 마음에 드는 색의 끈이 없어서 내버려 두었더니 옆머리가 얼굴을 간질이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꽤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였기 때문에 뒤로 묶어 올려도 날갯죽지 아래까지 내려왔다. 옆머리의 일부는 뒤로 돌려 묶었고, 그러자 옆머리는 목선까지 내려오는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 보았다. 그러다가 검은 털의 개와 흰 털의 개가 누워있는 우편함 앞을 보게 되었다. 검은 털의 개는 심심한 듯 바닥에서 뒹굴뒹굴 구르고 있었고, 흰 털의 개는 그런 검은 털의 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였다. 

  “안녕?”

  검은 털의 개는 뒹굴다 말고 드러누운 채 자신에게 말을 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뒤 코를 킁킁거리던 검은 털의 개는 이내 은발의 여자의 뒤편에서 들리는 익숙한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발소리는 규칙적이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피오나의 귀에도 들릴 정도가 되자 검은 개는 시선을 옮겼다. 칙칙한 검은색의 로브를 몸에 걸친 채 후드까지 푹 눌러 쓴 사내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눈빛으로 말했다. 

  ‘오랜만이다.’

  시선을 받은 로브의 사내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답했다. 

  ‘너 애정결핍이냐?’

  사내의 답을 받은 검은 털의 개는 사나운 눈을 해보이며 으르렁거렸다. 

  ‘너 죽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옮겼다. 한쪽은 하던 짓을 마저 했다. 그러니까 검은 개는 다시 바닥에 뒹굴기 시작했다. 로브의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은발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즈음 검은 개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던 여자 또한 사내를 마주보았다.  

  사내의 모습은 시골에서 보기 어려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곤 평범했다. 왼쪽 눈의 한가운데를 이마 끝에서부터 턱 바로 아래까지 깨끗하게 베여있는 상처는 용병들에게선 흔히 볼 수 있는 상처였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과 탁한 붉은색 눈동자, 정리한지 하루, 이틀 되어 보이는 수염과 칙칙한 검은색의 로브. 방금 전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위험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용병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내가 고개를 꾸벅여 인사한 뒤 말했다.

  “종탑에서의 일은 들었습니다. 무녀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특이했다. 걸걸하다거나 갈라져있다거나 해서 특이하다는 말이 아니고 이런 시골에서 사내와 같은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특이하게 다가왔다. 비가 오는 날 듣는다면 많은 이의 주목을 받을 정도로 듣기 좋았다. 사내는 무기가 없었다. 그는 인사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친 뒤 묵묵하게 걸어갔다. 피오나는 속으로 어리둥절해 하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디서 봤던가?’

  그러나 그녀는 모른다. 그녀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사내를 잘 아는 자가 들었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로 위화감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잘 아는 자라면 한마디 던졌을 것이다.

  “너 목소리가 떨린다?”

  멀어져가는 사내의 등은 누군가의 등과 많이 닮아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오나는 격하게 뛰는 심장의 행동에 영문을 몰라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안정을 찾은 심장과 함께 대장간으로 몸을 옮겼다.

  “…….”

  대장간에는 아까 그 사내가 재미도 없는 모습으로 혼자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피오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또 뵙는군요.”

  “아, 네…….”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였다. 사내는 조용히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퍼거스 씨는 안 계십니다. 덤으로 마렉도 보이질 않습니다. 마렉을 찾으시러 오셨다면 안타깝지만 여기엔 없습니다.”

  사내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가 일어났다. 그 또한 대장간에 누군가를 찾으러 온 모양이지만 그가 찾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용병들이 대장간을 찾는다면 대장장이를 만나기 위함이다. 사내가 찾는 사람은 대장장이인 퍼거스일 것이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피오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뒤 집게손가락을 펴 대장간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렉은 뒷산에 중대원과 함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만…….”

  “저기…….”

  그는 대장간을 나가려다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

  피오나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입 밖에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저는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편하게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러다가 불쑥 말을 이었다.

  “나는 리시타. 올해로 스물다섯. 몇 달 뒤면 스물여섯. 칼브람 용병단의 용병. 비번이었는데 불려왔다. ……반말하는 건 익숙지가 않아서. 어쨌든 이정도면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소개 해달라는 말은 안했는데…….’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피오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고마워요. 저는 피오나라고 합니다. 당신과 나이가 같군요.”

  리시타는 고개를 꾸벅이곤 대장간을 나섰다. 그녀 또한 그를 따라 곧바로 문을 나섰다. 리시타는 뒤따라 나오는 여자를 흘끗 쳐다본 뒤 빠른 걸음으로 마구간을 향했다. 

  그녀에게서 멀어지자 심장이 점차 평소상태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된 리시타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물을 뜯고 있는 여러 마리의 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숫기 없는 게 죄지.”

  그러자 여물을 뜯고 있던 7마리의 말 중 전체적으로 새까맣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검은 털과 붉은색과 파란색이 섞인 눈동자를 가지고 있던 말이 입가를 비틀었다. 슬쩍 보기만 해도 화가 뻗칠 정도로 짜증나는 모습이었다. 

  “수컷이 되가지고 암컷한테 말도 못 붙이면, 우리 사회에서는 병신취급 받는다. 검은 의지.”

  리시타는 오른손을 추어올리며 가운데손가락을 폈다.

  “집사라……말한테 쫓겨나서 여기서 여물이나 뜯고 있는 주제에 말이 많다. 페탈로투스.”

  한참을 입 안 가득 여물을 물고 우물거리던 페탈로투스라 불린 붉은색 파란색이 섞인 눈을 가진 흑마는 물고 있던 여물을 퉤 뱉으며 다시 한 번 입술을 비틀었다. 덤으로 얼굴도 비틀었다. 

  “암컷한테 말도 못 붙이는 병신보다는 낫지.”

  리시타는 아무것도 모르는 지나가던 사람이 봐도 열불이 뻗칠 정도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흑마를 향해 돌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자식이 진짜!”

  

  









  *











  한 사내는 오늘로 로체스트에 도착한지 사흘째다. 

  그는 밀려오는 지루함에 못 이겨 방금 전 가게에서 산 탄산음료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빨대를 타고 올라온 탁한 액체는 입을 지나 식도로 들어갔다. 탁 쏘는 느낌에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의 이름은 라임 큐르디레. 칼브람 용병단 소속이며 이전에는 평범한 직장을 가진 평범한 사내였다. 그 직장이라는 곳에서 하던 일이 용병단에 와서 하던 일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라임을 우울하게 만들진 않는다.  

  빨대를 쪽쪽 빨고 있던 라임은 점차 주위가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강렬한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태양이 뜨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인데 이렇게 빨리 태양이 떠올랐다는 사실에 불만족을 드러내며 라임이 고개를 떨궜다. 

  라임은 사람을 찾기 위해 왔다. 이전부터 찾아다니던 자인데 도통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삼에게 부탁해서 그쪽 중대원 몇 명을 동원해 대륙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이건 도대체가 땅굴을 파고 숨은 것인지 발견할 수 없었다. 찾지 못했으니 어쩔 도리가 있나. 선금으로 받은 금액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구경도 못해본 채 손가락만 빨아댈 수밖에. 

  그러나 일주일 전 하삼이 아이단을 통해 보낸 서신에서 단서를 찾았다. 일도 실패한 겸 해서 좀 쉬려고 했더니 가만 놔두질 않는다. 단서를 찾았다니 안 움직일 수도 없잖은가. 라임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딱히 내색하지는 않은 채 그대로 출발했다. 어찌되었던 라임은 찾던 자의 흔적을 찾았고, 거금을 주는 일을 끝마치기 전에 여행비나 벌어보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생각 없이 나무재질의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소리가 문 안쪽으로 퍼져나갔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곧이어 누군가가 말로 회답했다.

  “누구세요?”

  목소리를 미의 기준으로 삼는 세상이 있다면 아마 이 목소리의 주인은 아주 뛰어난 미인일 것이다. 라임은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 목소리를 감상했다. 그는 문이 열린 뒤에는 20대 초중반의 미인이 나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얼굴은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그리고 그는 다신 목소리 가지고 억측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아직도 굳게 닫혀있는 문을 바라보던 라임은 하품을 하고 다시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집 주인이 아실 실피드레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맞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턱 밑을 벅벅 긁던 라임은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보고 턱을 긁던 손을 잠시 멈춰 세웠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쪽에선 아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50대 초반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확인 사살을 당하기 위해 물었다.

  “아실 실피드레, 맞아?”

  그 여인이 답했다. 동시에 라임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수습한 뒤 헛기침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전데요. 누구시죠?”

  귤라임은 쓰게 웃었다. ‘젠장, 정확하군.’ 그는 회색 방한복 속에서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의 행동에 아실 실피드레는 흠칫 놀라며 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라임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위험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녀가 문을 열기 시작할 즈음 입꼬리를 스륵 말아올린 라임이 말했다. 

  “아, 당신 남편이 찾아. 당신이 거처를 자주 옮겨서 찾느라 애 좀 먹었네.”

  아실은 기겁하며 문을 잡아 닫으려 했다. 힘이 어찌나 셌던지 문이 한 번 닫혔다 열린 뒤 문틈에 발을 끼워 넣고 있던 라임은 발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아실은 문틈에 끼어있는 라임의 발을 치워내기 위해 진땀을 뺐지만 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라임은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기겁하며 도망치려던 여인은 문짝을 뚫고 들어온 팔에 자신의 손목을 붙잡혀 어쩔 수 없이 봉투를 받아들게 되었다. 라임은 아실이 봉인되지 않은 봉투를 열어보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내용물을 확인하는 걸 보자마자 라임은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는 곱게 접힌 서신 한 장과 돈뭉치가 들어있었다. 

  라임은 한숨을 내쉬며 분수대 앞에 누워있었다. 분수대에서 물이 튀어 올라 얼굴이 차가웠다. “젠장, 이제 겨울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래.” 이제 겨울이 다 되었건만 이놈의 분수대는 지칠 줄 모르고 물을 뿜어댄다. 장난 아니게 추웠다. 이런 라임의 모습을 노숙자나 다름없는 옷차림을 하고 벤치에 앉아 있던 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하세요?”

  “꿈속에서 멋진 언니들과 한바탕 허리를 흔드는 춤을 추고 있었다고 하면 믿어 줄래? 기분 끝내줬는데……. 망할 분수대에서 튄 물방울만 아니었어도 절정을 찍을 수 있었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우쿨렐레로 라임의 얼굴을 내려찍을 뻔했다. 강철 같은 자제력으로 자신을 추스른 뒤에야 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여자들 앞에서는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심히 기분이 나쁘군요.”

  라임은 허름한 옷차림의 여자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허름한 옷차림의 여성은 푹 눌러쓰고 있던 다 찢어지고 때 묻은 넓은 챙 모자를 두 손으로 붙잡고 더 깊게 눌러썼다. 라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 너 여자였어? 몸을 보면 완전 남잔데. 굴곡이 없잖아. 어? 저, 자, 잠깐만!”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아끼던 우쿨렐레를 지저분한 위치에 틀어박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다. 그렇지만 그 남자의 헛소리만은 도저히 들어주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우쿨렐레로 그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확 짜증이 밀려왔다. 아까운 악기가 부서질 것을 생각하자 이 눈앞에서 거지처럼 누워있는 사내가 너무나 싫었다. 우쿨렐레는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귤라임에게 낙하했다. 그의 머리와 우쿨렐레가 만나기 직전, 하늘의 도움인지 그녀의 우쿨렐레는 허공에 멈춰 서게 되었다. 

  라임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받아 쥐고 있었다. 그는 씩 웃었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순간 너무 섬뜩했기에 그녀는 금색의 머리카락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나 너 찾느라고 한 달은 놀지도 못했거든. 근데 이젠 그것도 끝이다. 네 아빠가 보자고 한다. 에아렌딜 디 엘 페무르.”

  그녀는 라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쥐고 있는 손목을 강제로 잡아 뺐다. 라임이 혀를 찼다. 힘을 가볍게 쥐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손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라임이 누워있는 반대 방향으로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에아렌딜의 등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라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손에는 우쿨렐레가 들려있었다. 그는 한 번 현을 튕겨보았다. 평소에는 듣기 힘든 좋은 소리가 났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꼴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악기는 관리를 오랫동안 잘 해온 모양이다. 귤라임은 우쿨렐레의 뒷면을 만지작거렸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수작이었다. 

  ‘옛날엔 이런 것도 만들었었지.’

  꽤나 오래전 그가 ‘세계의 잡일꾼’을 자처하며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노인이 의뢰를 해왔다. 악기를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는 의뢰였다. 보수는 쥐꼬리만 했고 노동은 이건 무슨 하루 종일을 작업장에서 썩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삼 년 동안. 

  라임은 주머니에서 맛난 것을 꺼내주며 ‘옜다 엿이나 처먹어라 이놈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하루를 나기에 필요한 돈조차 없었다. 그래서 했다. 삼 년간 장인의 밑에서 악기를 만들었다. 알려주는 대로, 하라는 대로 악기를 만들었고 기간이 지났을 무렵 라임이 만든 악기는 불티나게 팔렸다. 값싸고 성능이 좋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악기를 만든 뒤에 시험 삼아서 현을 당겨보던 것이 발전해 취미가 되었다. 2년, 3년 치다보니 어느 정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라임은 이전 공사판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흥얼거리며 우쿨렐레를 치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오래된 기억이라 꺼내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찾아낸 기억에게 잘도 기억 저편의 화석이 되지 않았다고 칭찬을 해주며 그는 우쿨렐레의 4현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빠르게 치기 시작했다.

  오래된, 시간으로 다져진 그럭저럭 들어줄 만한 연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우쿨렐레는 하늘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나의 가슴속에 묻힌 그 날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을까

  그 날이 가슴속에서 사라지는 때를 말야.

  그대는 어딘가에서 이런 나를 보고 있나요?

  나는 당신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네요.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언제나 나의 살은 당신과 함께하고,

  나의 마음은 영원히 그 날을 기억하겠죠.

  나의 가슴속에 묻힌 그 날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고

  어디에서나 당신의 생각에 잠겨

  나는 이 새벽녘을 걷습니다.

  조금 짧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거라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다. 예전에 어떤 한 시인이 부르는 것을 보며 좋다고 생각했고 몇 번 따라 부르기도 했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뭐 상관없다. 

  우쿨렐레를 등에 맸다. 

  ‘오, 감촉이 좋군.’

  라임은 손가락을 혀에 찍어보았다. 그리곤 그 손가락을 들어 올려 금발의 여성이 사라진 곳을 가리켰다.

  “인마. 거기 서.”

  그녀의 이름은 에아렌딜 디 엘 페무르. 페무르 가의 영애다. 귀족이라는 생활에 실증을 느껴서 집을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라임 큐르디레의 일은 그녀를 페무르 가에 데려가는 것이었다. 상당한 액수를 준다고 계약했기 때문에 승낙은 했으나 한 달간 감감무소식이었다. 포기하고 선금만 받은 걸로 퉁 치려고 했었는데 딱 좋게 하삼이 그녀의 위치를 알려줬다. 

  라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자신의 특별한 능력은 바로 시간을 잘 맞춘다는 것이다.

  에아렌딜은 라임이 가벼운 걸음으로 뒤따라오자 기겁을 하며 상당히 빠른 속도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라임이 봐도 그녀의 달리기는 빠른 편이었다. 집을 나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익혀야했던 필수불가결한 ‘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불이 퍼지는 것보다 빠를까?











  *











  라임은 에아렌딜이 열심히 도망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리기는 확실히 빨랐다. 50미터 전력질주를 하면 7초 쯤 나올 수 있을 듯한 속도로 도망치는 에아렌딜의 뒤를 허허 웃으며 쫓았다. 

  한참을 달리던 도중 빨랫줄에 걸려 넘어진 뒤에야 깨달았다. 앞은 막다른 길이었고 뒤에서는 회색 방한복를 뒤집어 쓴 지친기색은커녕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 쫓아왔다. 그녀는 막다른길에 이르게 되자 당황했고 라임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스라쳤다. 그녀는 두 눈을 꽉 감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서 단검을 하나 빼어들며 그에게 외쳤다.

  “오지 마! 난, 다시는 그런 곳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귤라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녀의 동작은 엉성했다. 단검을 쥐고 있는 손은 꽤 떨어진 거리에서도 불안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기를 쥐어본 적은 태어나서 몇 번 없었다는 것을 그녀의 몸이 말하고 있었다. 라임은 피식 웃었다. 그는 그녀에게 한발자국씩 다가갔다. 그가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녀는 얼떨결에 단검을 그의 복부에 쑤셔 넣었다. 라임은 복부에 파고드는 단검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가씨. 이거 정당방위니까 법적으로 해결 하면 내가 승소하는 거 맞지?”

  라임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에아렌딜은 라임의 빛 한 점 없는 검정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복부에 들어간 단검에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아주 묘했다. 뜨거운 젤리 속에 막대기를 쑤셔 넣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라임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라임은 그녀의 시선을 마주보고 있었기에 그녀가 뭘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라임은 그녀가 자신의 복부에 꽂은 칼날 부분이 녹아내린 단검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신경를 좀 더 넓게 펼쳤고 곧 그녀가 보고 있는 자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총 스무 명이었다. 다들 무기를 쥐고 있었으며 얼굴들이 하나같이 매섭게 화를 내는 레큐런스의 얼굴을 보는 듯 험악한 인상들이었다. 라임은 지금 이 상황을 무보수로 파악할 수 있는 자신이 대견했다. 그는 자신이 추리한 결정체를 입을 통해 내뱉었다.

  “너 사채 썼냐?”

  그의 추리의 결정체는 확실히 결정체다운 역할을 해주었다. 에아렌딜은 굳어버렸고 뒤에서 무기를 만지작거리던 사내들은 히죽 웃었다. 라임은 집 나온 귀족들은 대개 금전 감각이 굳어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뇌를 발견하고 입술을 비틀었다. 

  부유한 집에서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자신의 추리의 결말에 자신이 답을 써 넣은 라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에아렌딜을 홱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바닥에서 기어봐야 됩니다.”

  당연히 그가 하는 말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없던 에아렌딜은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듯한 표정으로 라임을 쳐다보았다. 라임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준 뒤 사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











  용병단 사무실의 내부는 전쟁이라도 난 듯이 소란스러웠다. 두 남녀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소리쳐대고 있었는데, 대포를 쏘아대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시끄러웠다. 피오나는 사무실에 들르자마자 이게 무슨 난장판이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용병들 여럿과 이런 소란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늘어져 있는 용병 몇을 볼 수 있었다. 
  내부를 훑어보니 은색의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 여러 명과 용병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용병단의 인원은 총 10명 내외, 기사들은 밖에서 무기를 움켜쥐고 기다리고 있던 자들을 포함하여 스무 명가량 되었다. 사무실 안쪽에 있는 기사들의 수는 모두 열 명이었다. 그리고 그 열 명의 용병들 중 색채가 고운 금발을 단정하게 자른 여자와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하고 있는 레이먼트 헬름을 쓰고 있는 자가 특히나 눈에 띄었다. 이 요란한 상황 속에서도 ‘술통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있는 한 남자와 시가를 물고 허무한 눈망울로 창문을 내다보는 남자를 제외한다면’이라는 조건 하에서 그러했다.
  “이미 두 번이나 말했다. 이번 사건은 왕국 기사단이 조사할 것이다, 병사.”
  은색의 플레이트를 입은 금발을 단정하게 자른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자답지 않게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군요.” 
  그녀의 말에 레이먼트 헬름의 사내는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 그러자 금발의 여기사는 눈에 띠지 않을 만큼 미묘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녀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눈치 챈 자는 거의 없었다. 그녀가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강한 힘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던 레이먼트 헬름을 뒤집어 쓴 사내는 팔짱을 끼고 허리를 뒤로 살짝 눕혔다. 거만하게까지 보이는 자세를 취해보인 그는 금발의 여기사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미소를 지어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회심의 미소는 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흥, 우리가 로체스트에 지원 요청을 했을 때는 코웃음만 치더니……. 우리가 종탑에서 싸울 때, 당신들은 뭘 했습니까?”
  헬름의 사내는 말하는 도중 짜증이 치솟았는지 팔짱을 풀고 탁자를 쾅 소리 나게 내려쳤다. 기사들은 그의 행동에 칼집에 들어가 있던 칼을 슬쩍 풀어놓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금발의 여기사가 그들을 제지했고 그들은 풀어놓았던 칼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헬름의 사내가 숨을 골랐다. 이내 그의 헬름이 덜컥거렸다. 
  “로체스트 성벽 안에 틀어박힌 채로, 남 일인 척 팔짱끼고 구경밖에 더 했습니까? 그런데 이제야 슬그머니 나타나 조사권을 요구하다니, 어이가 없군요.”
  헬름의 사내와 은색 플레이트를 걸친 금발의 여기사는 생각 외로 어울리는 하모니를 만들어내며 용병단 사무실 내부를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 아주 가관이었다. 피오나가 소음 속에서 한숨을 내쉴 때 레이먼트 헬름의 사내 뒤편에 멀찌감치 서 있었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그녀를 발견했다. 붉은 머리의 여자는 총총 걸음으로 걸어와 피오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을 걸어왔다. 
  “너, 그 때 종탑에 올라갔던 신입, 맞지?”
  피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 피오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붉은 머리의 여자는 그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같은 여자가 봐도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 정도였으니 남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자세히 쳐다보니 화장도 안 한 것 같은데…….’ 자신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느끼던 여자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진짜 키가 크구나…….” 붉은 머리의 여성은 하하 웃었다. 그녀의 멋쩍은 웃음을 보며 마주 미소 지어준 피오나는(그녀가 미소를 짓자 붉은 머리의 여성은 입술을 두 손으로 틀어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사와 레이먼트 헬름의 용병이 서로 주먹을 치고받을 기세의 거친 억양으로 서로에게 대화 아닌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궁금하다는 듯이 입술 위에 집게손가락을 올려놓은 뒤 말했다.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네요.”
  붉은 머리의 여성은 피오나와 똑같은 자세를 취해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달랐다. 
  “쉿, 조용히 해. 지금 끼어들었다간 난리가 난다구.”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레이먼트 헬름의 사내가 다시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탁자는 레이먼트 헬름의 사내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방금 그가 내려친 순간 탁자는 사내에게 온갖 들어주지 못할 욕들을 퍼부었다. 허나 몸이 박살나는 것은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법도를 지킵니다! 왕국 기사단이면, 우리가 넙죽 엎드리기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사내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고함쳤다. 그러자 금발의 여기사 또한 그에 상응하는 큰 목소리로 대응했다. 
  “말이 거칠군, 병사!”
  그들을 번갈아 보고 있던 붉은 머리의 여성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고 피오나를 돌아보았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미모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상념을 털어낸 붉은 머리의 여성은 문득 떠올랐다는 투로 말했다.
  “으음……, 신입 교육은 해야겠는데……. 안되겠다. 잠깐 이리 와봐. 이쪽이야, 이쪽.”
  그녀는 피오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피오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피오나는 붉은 머리의 여성을 따라갔고 곧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게 되었다. 먼저 올라가는 그녀를 따라 피오나도 천천히 계단을 밟았다. 
  그녀들은 계단을 올라가 2층에 도착했다. 
  2층은 1층과 많이 달랐다. 1층이 지저분하고 벌레와 먼지가 모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라면 2층은 여관 못지않은 방수를 가지고 있었다. 피오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2층이 너무 컸다. 1층에 비해 압도적으로. 하지만 밖에서 봤을 때 2층의 크기는 1층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붉은 머리의 여성은 피오나가 느끼고 있는 의문을 해소해주기로 했다.
  “혹시 ‘부정시공(不定時空)’이라는 거 알아?”
  피오나는 부정시공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은 있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싱긋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용병단에 부정시공을 사용할 수 있는 분이 계셔. 직급은 특수용병이시고, 이름은 시엔딜 에일테르. 이명은 왜곡의 조율자! 근데 레큐런스 님이나 다른 분들은 그냥 ‘시꼬’라고 부르시더라구.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불러. 여긴 그분의 작품이야. 멀리 여관까지 가기 귀찮다고 개조했다고 해.”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피오나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붉은 머리의 여성이 한 말이 이해했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설명이 만족스러웠는지 가슴을 퉁 치며 20개가 넘는 방 중 하나를 가리켰다. 문짝에 큰 글씨로 ‘2층에다 낙서하는 엄마 없는 새끼는 다 죽여버리겠소. 내 장담하는데 이건 진짜 실현 될 것이오. - 시꼬’라고 써진 방이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은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경첩 부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도 않았고, 문을 여는 순간 껄끄러운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문은 문고리를 잡아끌자 부드럽게 열렸다. 
  “자아, 여긴 좀 낫지?”
  문 안쪽의 방은 전체적으로 서고와 비슷하게 생겼다. 곳곳에 책이 가득 들어찬 책장이 보였고 중앙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는 ‘심심하면 차라도 마셔. 이거 내가 만든 거니까 닥치고 마셔라. - 간지 요리장님의 선물’이라고 적혀 있는 쪽지와 물, 찻잔 그리고 찻잎이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정리정돈도 보기 좋게 잘 되어있어 좋은 느낌이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피오나에게 손짓했다. 들어오라는 뜻이 명확했기에 그녀는 붉은 머리의 여성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여성이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를 마주보고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단 둘이서 한 방에, 그것도 마주보고 앉아 있자 기분이 묘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화제를 꺼냈다. 
  “흠흠. 놀랬어? 아래층 분위기가 많이 살벌하지? 마렉이 왕국 기사단을 좀 싫어해서 그래.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 전에 왕국 기사단이 정말 너무한 거야! 그때 일 때문에 우리 쪽 용병이 네 명이나 죽고, 아이단 대장님은 지금도 빈사. 마렉도 반죽음까지 갔었는데…….”
  그녀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피오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사이(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아래층의 물건이 몇 개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머리의 여성과 피오나는 흠칫 손을 떨었다. 이어서 레이먼트 헬름을 뒤집어 쓰고 있던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거꾸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 그래 좋아! 다 덤벼라! 셀 형, 이딜 형! 여기 난장판 될 거 같으니까 빨리 자리 좀 피해줘!”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고 덤비려던 기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뭉개버린 마렉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사방에서 반응이 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멍청아! 이자식이, 집을 다 때려 부술라고 작정했냐?”
  “아 젠장! 놔! 놓으라고!”
  “야, 이 미련한 자식아. 좀 닥치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봐라. 네놈이 거꾸러뜨린 저 기사 놈들이 이를 가는 거 안보이냐?”
  “뭐? 지들이 이를 갈면 얼마나 간다고 그래? 이거 놔, 어서!”
  “이놈아가 진짜 미쳤나? ……응? 킁킁. 야, 너 약 먹었냐?”
  “아 진짜, 다들 왜 그래? 셀 형, 이딜 형. 형들 힘으로 싹 쓸어버리면 되잖아? 마침 마을에 메일님도 계시겠다, 한번 전쟁 일으켜 보자고! 뭐? 왕국기사라고? 기사단장? 웃기지 말라 그래. 다 좆 까라 그러라고! 어차피 그것들은 다 씹어 먹히는데 생각이 없는 거야? 저 얼간이새끼들은 지들 기사 단장은 기인(氣人)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완전히 간과하고 있잖아! 패왕의 패기만 가지고 있으면 다냐? 모순의 검을 가지고 있으면 다냐! 이 개새끼들아! 나도 기인이야! 나도 투기 가지고 있다고! 모순의 검 따위에 꿇리지 않을 만큼 강한 하마이엘의 계약자라고!”
  “야, 이 병신아! 기다려!”
  “저 병신새끼 대체 뭔 짓거리야!”
  “야! 니들은 왜 멀뚱멀뚱 꼬라보기만 하는 거냐? 빨리 가서 저새끼가 일 내기 전에 잡아!”
  아래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상상이 될 정도로 생생한 느낌이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고, 피오나는 그 아름다운 얼굴의 입술을 살짝 내밀며 찻잎에 시선을 주었다.
  분위기가 서먹해졌다는 걸 깨달은 붉은 머리의 여성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흠흠. 자, 만나서 반가워! 밑의 소란은 신경 쓰지 마. 어쨌든, 갑자기 끌고 와서 놀랬지? 종탑의 영웅! 참, 난 ‘케아라’라고 해. 요즘은 신입 교육을 맡고 있어. 흐흠, 나도 종탑에 있었지만 아마 못 봤을 거야. 헬름을 쓰고 후방에서 발리스타를 맡고 있었거든.”
  “정말 대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케아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온 한 사내가 외치다시피 말했다. 그리고 그는 들어오자마자 피오나를 보고 굳어버렸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한 그는 들어오는 순간에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지만 피오나를 마주본 순간 얼굴 근육이 풀려버렸다. 케아라는 피오나를 보고 굳은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이쪽은 앨리. 기사단을 따라왔데.”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그녀의 설명에 뜨악한 얼굴로 말했다. 거의 외침이었고 피오나는 귀가 울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케아라 또한 귀를 손으로 틀어막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 이름은 앨리라는 이름이 아닙니다! 앨리스입니다! 그리고 왕국 기사단을 따라온 게 아니라 기사학교 사관생도장으로서 학교를 대표해 온 겁니다!”
  “따라 온 거 맞잖아. 그리고 앨리는 애칭이랍니다.”
  “……취, 취급이 영 좋지 않네요.”
  케아라는 밝게 웃었다. 앨리스의 시선이 다시 피오나를 향했다. 케아라 역시 피오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아직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물어볼 기회는 지금 뿐이라 생각했기에 실천하기로 했다. 
  “……어, 미안한데 이름이?”
  “피오나.”
  “아, 미안! 피오나. 아무리 종탑의 영웅이라곤 해도 신입이니까 교육은 받아야 돼.”
  피오나는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끄덕인 뒤 탁자 위에 올라와 있던 찻잔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싱글벙글 웃음기를 띠고 있던 케아라가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부딪치며 말했다. 
  “달여 먹을 필요는 없어. 찻잎에다 물만 부으면 돼. 아, 적당히 넣어야해. 물 말고 찻잎!”
  케아라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피오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피오나는 케아라의 말대로 찻잔에 새끼손가락만한 찻잎을 몇 개 떨어뜨리고 물을 부었다. 이 날씨에 이렇게 밖에 나와 있다면 차가운 물이 분명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물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뜨거울 정도였기에 지체하지 않고 물을 부을 수 있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뜨거운 물에 닿은 찻잎이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렸다. 피오나는 이런 건 처음 본다는 얼굴을 하고 선홍빛으로 물든 찻잔의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놀란 건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앨리스는 케아라에게 어떤 원리로 찻잎이 녹아내린 것이냐고 캐묻기 시작했다. 그 시끄러운 와중에서 피오나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귀족 가문의 영애 같은 모습으로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케아라는 차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슬픈 사람 같다고 느꼈다. 
  앨리스는 피오나의 허리가 비딱하고 투박한 의자에 앉아 있었음에도 곧게 펴져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외모는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모습이었고, 피부색도 우윳빛에 가까웠다. 앨리스는 한참동안 피오나를 뜯어보았다. 정말 신기했다. 이런 용모에,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왜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와 용병이 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런 사념에 손길이 미친것도 잠시, 그는 곧 정신을 차리기 위해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찻잔에 찻잎을 타고 물을 부었던 케아라는 그것을 입가에 가져갔다. 피오나에게서 느껴졌던 기품은 없었다. 그녀는 용병답게 딱딱했다.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케아라가 말했다. 
  “음, 하지만…… 아래 상황이 저렇다 보니”
  그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아래층에서 욕설이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야 이 병신새끼야! 장난하지 말고 진짜 입 좀 닥치고 있어라?”
  “아, 형!”
  “마렉, 너 전쟁이 우습냐? 너 축구 혼자 해?”
  “…….”
  “알았으면 잠깐만 닥치고 있어봐. 너한테 맞아서 침 질질 흘리고 있는 애들이랑 협상 좀 해야겠다.”
  “뭐? 협상? 아니아니아니! 그건 아니야. 이봐요 형들. 우린 기사가 아니잖아! 저런 똥 같은 새끼들은 내버려 두자고!”
  졸지에 똥 취급을 받게 된 기사들 중 두 명은 기절해 있었기에 마렉이 자신들을 똥 취급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드윈이 사무실을 나간 뒤에 남아 있던 세 명의 기사들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껴야 했다. 허나 마렉에게 섣불리 칼을 들이댈 수도 없었다. 저자는 순식간에 무장하고 있던 두 명의 기사를 맨손으로 제압했다. 그들이 방심하고 있었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주먹 한 방에 뻗을 자들은 아니었다. 
  웃긴 철뚜껑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내가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기사단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지만, 그런다고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말하며 나간 상관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기고 덤벼들었다가 거품을 문 채 바닥에 뻗어 있는 두 명의 기사가 있지 않은가. 
  케아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피오나는 그녀가 안쓰럽다고 느꼈다. 마찬가지로 앨리스 또한 아래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상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내려갔다간 마렉이라는 사내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질 것 같았다. 케아라는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아하하……. 정식으로 하긴 힘들 것 같아.”
  피오나와 앨리스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케아라는 헛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거, 걱정 마. 이럴 때를 위해 용병단 훈련장이 있는 거니까. 너 같은 신입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곳이야!”
  용병단 훈련장? 뭐 하는 곳인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지만 그 훈련장이라는 곳이 어디 있는 지는 궁금했다. 용병단에 막 입단했을 때 마을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지만, 훈련장으로 보이는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궁금해 하고 있을 때 케아라가 말을 이었다.
  “용병단 훈련장은 북쪽 폐허라고 불리는 곳에 있어. 마을에는 자리가 없어서 말이야. 아, 북쪽 폐허는 선창작으로 나간 뒤에 왼쪽으로 쭈우욱 가면 돼! 흐음…….”
  케아라는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오나는 콜헨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며칠을 회복에 전념하며 보냈다. 오늘에서야 용병단에 얼굴을 비춘 그녀에게 북쪽 폐허의 위치를 아무리 간단하게 설명한다 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 지는 부지기수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또 다시 문이 열렸다. 앨리스가 열고 들어왔을 때처럼 벌컥 열리지 않았다. 그저 아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음?”
  케아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문득 종탑에서 사망한 용병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신입을 모집한다고 했던 마렉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아래층에 있던 용병들 중 하나가 신입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신입이 케아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입은 문을 열고 들어온 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케아라와 앨리스, 피오나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서재를 뒤적이고 다녔다. 케아라는 신입이 자신을 무시하며 이곳을 제 맘대로 휘젓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도끼눈을 뜬 채 신입을 향해 말했다.
  “야! 신입!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신입은 그녀의 호통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케아라는 자신을 무시한 채 휴게실을 휘젓고 다니는 신입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한 신입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서재를 뒤적였다. 잠시 후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케아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 대 쥐어박을 기세로 신입을 향해 다가가는 케아라를 보며 앨리스는 신입이 맞을 것을 걱정했고, 피오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왼쪽 얼굴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난 검은 머리의 사내는 아침에 본 기억이 있다. 자신을 리시타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분명 ‘비번이었는데 불려왔다’고도 했었다. 그런데 케아라는 저 남자를 신입 취급하고 있었다. 
  ‘흐응.’
  그녀는 의문을 가진 채 케아라의 손바닥이 리시타의 등판을(노린 건 뒤통수였으나 리시타의 키가 너무 컸다. 리시타는 신고 있던 신발 때문에 190센티미터를 넘었고, 케아라는 16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으니) 후려갈기는 모습을 보았다.  
  등판을 후려갈긴 뒤 나는 청명한 효과음이 앨리스와 피오나 그리고 리시타와 케아라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앨리스는 등판을 얻어맞은 용병이 펄쩍 날뛸 것이라 예상했다. 그만큼 등판을 후려쳐 난 소리는 컸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던 눈을 살포시 떴다. 그리고 용병의 등을 후려갈긴 케아라가 휘두른 손을 붙잡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리시타는 서재 근처를 한동안 돌아다닌 뒤에야 원하던 책을 찾았다. 사실 아래층에도 있는 책이었지만 마렉이 난동을 부리는 덕에 책장이 엎어지고, 여하튼 난리도 아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2층에 있는 휴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귀찮은 걸음을 해서 원하던 책을 찾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빨간 머리의 여자가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빽 내지르는 모습을 보고 이런 상황이라면 휴게실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려는 생각은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탄도륨 다이아몬드’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찾아내고 꺼내는 순간 누군가가 등판을 세게 후려갈겼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검은 로브를 세탁하느라 벗어두고 온 덕분에 충격이 고스란히 신경을 타고 뇌까지 전달되었다. 그는 아파하는 대신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케아라는 신입의 등판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딱딱한 돌덩이를 때리는 느낌에 주춤했고, 이내 손으로 전달된 고통에 기겁했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단단할 수 있냐는 생각을 하며 케아라는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리시타의 시선도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뭐하십니까.” 
  찌푸린 얼굴로 케아라를 바라보고 있던 리시타는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입 주제에 배짱도 좋아.”
  케아라는 벌겋게 달아오른 손을 만지작거린 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신입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가 네 윗사람이야!’ 
  리시타는 용병단에 들어온 지 오늘로 2년 반이 넘는다. 물론 입단만 하고 활동은 반년밖에 안 하고 오지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가 2년 하고도 반년 전에 활동하던 시기에는 지금 눈앞의 빨간 머리의 여자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중대장, 특수용병들의 얼굴은 지금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고, 150명이 넘는 소대장들의 얼굴도 대부분 기억한다. 하지만 개중에 빨간 머리를 가진 여자는 두 명 밖에 없었다. 6중대 소속 1소대장 아이라스와 8중대 소속 1소대장 아이레스 자매였다. 리시타는 상황이 난처하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빨간 머리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활동을 접은 뒤에 들어온 건 확실하다. 하지만 자신을 신입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여자에게 ‘내가 당신보다 먼저 들어온 선배요.’라고 말해도 믿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래층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는 마렉이나 그를 막고 있는 셀피드, 이딜을 증인으로 내세우면 증명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지금 아래층의 소란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신입인 척하는 게 속편하다. 리시타의 고개가 살짝 움직여 휴게실 내부를 훑어보았다. 
  테트크라드 왕국의 생도 옷차림을 하고 있는 청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생도의 옷과 다를 바 없었으나, 그의 베레모 위에는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생도장’을 의미하는 배지가 있었다. 거기다 몸에 잔잔히 흐르고 있는 인위의 마나의 흐름을 보건데 최소한 인위의 3단계를 구사할 줄 아는 고수다. 어리바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은 착실히 쌓아 온 모양이다. 리시타는 피식 웃었다. 그의 시선이 피오나의 눈길과 맞닿았다. 그녀는 리시타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미소 지어 주었다. 또 만나서 반갑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리시타는 케아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혼자 돌아다니던 일에 익숙해져서.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피오나는 그가 내뱉은 말에 흥미롭다는 듯이 손바닥 위에 턱을 얹어 놓은 채 리시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앨리스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이럴 수가. 난 사랑에 빠졌어.’ 
  케아라는 자신을 무시하던 신입이 정신을 차렸는지 깍듯이 대하자 제대로 된 상급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말했다.
  “흠흠. 12중대 1소대장 케아라 레노어야. 같은 용병주제에 상급자 운운하는 건 우스운 말 같긴 하겠지만, 단(團)에 소속된 이상 그럴 수밖에. 잘 알았어?”
  리시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까 생각하다가 지금 케아라가 느끼고 있을 만족스러운 기분에 최대한 맞춰주기로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리시타의 고개가 제자리를 찾아 되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케아라의 질문이 시작됐다. 
  “그런데 뭘 찾고 있던 거야?”
  “아래층에 있던 분에게 ‘탄도륨 다이아몬드’라는 책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누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래층에 있는 용병이라고는 대부분이 자신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들이었기에 케아라는 멋쩍게 헛기침을 한 뒤 알았다고 답했다. 리시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들고 있던 책을 가지고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때 생각났다는 듯이 케아라가 리시타를 불러 세웠다. 리시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그녀가 말하길 기다렸다. 
  “너도 신입이니까 용병단 훈련장에 갔다 와야 돼.”
  케아라의 말을 듣고 멍하니 서 있던 리시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 거기? 아직도 있었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위치는 대강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갔다 오겠습니다.”
  “잠깐!”
  처음부터 설명해야하는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케아라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신참이 용병단 훈련장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니! 그녀는 속으로 귀찮은 일을 안 해도 된다는 쾌재를 울렸다. 하지만 리시타처럼 완벽하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휴게실 내부에 있던 자들 중 잘 가리긴 했지만 케아라의 얼굴에 떠오르는 즐거움을 놓친 자는 없었다. 피오나와 리시타는 속으로 웃었고, 앨리스는 얼굴 전반에 웃음기를 띠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리시타를 붙잡은 케아라는 손으로 피오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도 너랑 같은 신입이야. 하지만 같은 취급은 하지 마. 실력으로 치면 너보다 위일 테니까. 어쨌든 길을 알고 있다니 잘 됐네. 둘이 같이 갔다 와.”
  리시타는 알겠다고 답하고는 피오나를 돌아보았다. 그 즈음 피오나도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리시타가 말을 꺼내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지금 출발할까요?”
  “그러죠.”
  케아라는 휴게실을 빠져나간 두 신입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혼자서도 잘하는 신입이 이렇게 편할 줄이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차를 마시던 케아라는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신입 아니죠?”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작스러운 피오나의 물음에 리시타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까 그 사람한테 하대 받을 짬밥은 아닙니다.”
  그러자 피오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구?”
  “‘내가 당신 상급자다!’라고 말하면 안 들어줄 거 같아서요. 뭐, 상황을 보아하니 요 몇 년은 신입도 안 들어온 것 같은데, 상급자 기분 느끼게 해주려고 그랬죠.”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다 알고 있으면서 제지하지 않은 당신도 그렇습니다.”
  “재밌잖아요?”
  “인정.”
  피오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근엄한 얼굴을 한 채 약간 들 뜬 목소리로 “인정”이라고 말하는 리시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리고 그녀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웃음소리는 난장판이 되어 있던 용병단 사무실의 1층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던 사내들의 행동을 일시정지 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너무나도 기분 좋게 웃는 소리가 사무실 가득 울려 퍼지자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함께 웃기 시작했다. 이딜과 셀피드의 환상적인 연계와 강력한 무력 앞에 힘없이 땅바닥에 배를 대게 된 마렉은 물론이고, 종일 마렉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던 기사들도 예외는 없었다. 
   









  *










  “하아, 하아. 움직이지 마!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 년의 모가질 따버리겠어!”
  라임은 뒷머리를 긁었다. 난처했다. 그는 약 열아홉 명의 사내들을 주위에 널린 돌멩이로 제압했다. 돌멩이는 상당히 단단했었던지 귤라임이 돌멩이를 집어 던지면 맞는 족족 사내들은 “억!”소리를 내며 거품을 물고 고꾸라졌다. 
  열여덟 명이 돌멩이에 맞아 고꾸라졌을 때가 되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 챈 중년의 사내는 라임이 아직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마지막 사내에게 돌멩이를 집어던지는 틈을 타 다급하게 에아렌딜이 서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을 거세게 움켜쥐고 단검으로 그녀를 위협했다. 
  에아렌딜의 가녀린 목에 붙어 있는 단검은 칼날은 목을 최소한 1센티미터는 파고들었다. 에아렌딜의 목에서 피가 힘찬 기세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임은 그 단검이 조금만 더 파고든다면 경동맥을 건드릴 거란 걸 깨달았다. 의뢰인이 데려오라고 한 사람이 죽으면 돈은 못 받는다. 그러기는커녕 살인자 누명을 쓰고 목에 현상금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라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발의 위치를 옮겼다. 그러자 사내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아렌딜의 몸이 경련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단검이 목을 누르고 있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라임은 그녀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다가 말했다.
  “이봐, 아저씨. 다 큰 어른이 애기 인질로 잡고 뭐하는 짓인 거여. 그만 두고 나랑 이야기 합시다. 아, 물론 그 아가씨가 진 빚은 나랑 전혀 관계가 없으므로 갚을 의리는 없다는 거 알지?”
  능청맞은 얼굴을 한 채 라임은 앞으로 다시 한 발 나갔다. 그러자 단검을 쥔 사내는 움찔하며 칼날을 목 깊숙이 집어넣을 준비를 마쳤다. 라임은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 죄송.”
  에아렌딜은 저 망할 남자를 쳐버리고 싶었다. 아니, 사람이 하마터면 죽을 뻔 했는데 고작 “어, 죄송”이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단검을 쥔 중년의 사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분이 나빴다. 목에 놓여 위협하는 단검이 목을 파고들고 있어 절단면으로부터 피가 새어나오는 것보다도 저 사내 때문에 분노가 치밀었다. ‘남자가 어쩌면 저리도 재수가 없지?’ 분노가 치민다는 것이 참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지금 위협을 받고 있었고 단검이 목에 흠집을 내어 피가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두려움보다도 지금 저 사내에게 느껴지는 분노 이외의 감정이 없었다. 한편으론 신기했고 또 다른 한편으론 매우 화가 났다. 
  라임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 결과,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문득 이 일을 그냥 포기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지 않아도 된다. 물론 돈은 못 받게 되겠지만, 이미 선금으로 받은 게 있으니 상관없다. 용병이란 그런 족속들이니까. 
  “오, 좋은 생각이야!”
  사내는 흠칫 놀라며 에아렌딜의 목에 가져다 대었던 단검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목으로 단검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을 파고드는 칼날에 놀라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그때까지도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라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탄성을 내지르며 말했다.
  “아! 그렇군, 내가 방금 혼자 중얼거린 말에 놀랐던 거야!”
  ‘퍽이나 일찍 깨닫네! 저 병신.’
  에아렌딜은 속으로 회색 방한복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내를 욕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에아렌딜은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임이 피식 웃었다. 
  “그 여자, 데리고 가.”
  라임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중년의 사내와 에아렌딜은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라임은 미소 지었다. 
  “뭐?”
  ‘하?’
  중년의 사내와 에아렌딜은 동시에 입을 열어 의아함을 표현했다. 물론 한쪽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벙끗거렸을 뿐이다. 중년의 사내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해며 라임에게 물었다.
  “이봐 당신. 이 여자에게 고용된 것 아닌가?”
  라임이 세상에 더 없을 근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라임을 흘끗 쳐다보고선 붙잡고 있는 금색 머리의 여성, 에아렌딜 디 엘 페무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누런 이를 씩 드러내며 말했다. 
  “데리고 가면, 아무 짓도 안 할 거냐?”
  “어. 안 해. 데리고 가. 보수는, 뭐 없는 셈 치지. 어, 수고했어. 아가씨한텐 미안한 말인데 난 먹튀가 좋더라고. 용병은 다 이런 놈들뿐이거든요.” “아하, 용병인가?” “그렇지! 게다가 너 찾는다고 선금은 대충 받아놨으니까 이걸로 술이나 사가지고 가야지. 헉, 맞다. 요즘 귤 나오지?”
  라임은 품속에서 샛노란 껍질을 가지고 태어난 과일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는 곧장 뒤로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중년의 사내는 잠시 동안 멍하니 라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에아렌딜은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아니 외치고 싶었다. 
  ‘야 이 개자식아!’
  라임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던 외침을 들었는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흔들어 보이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중년의 사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재수가 없는 것인지 에아렌딜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저 인간을 볼 때마다 너무나 화가 났다. 지금까지 살아온 23년의 세월 동안 화를 낸 적은, 화가 치민 경험은 처음이었다. 저 남자를 만나고 난 뒤부터 그녀는 ‘분노’를 알게 되었다.










  *










  “여기가 북쪽 폐허로군요.”
  피오나는 무너진 건축물의 잔해를 보며 말했다. 웅장한 건물의 장식 혹은 그 건물의 일부였을 돌덩이들은 볼품없게 부서진 채 땅 어디에서나 뒹굴고 있었다. 피오나는 눈에 띄는 돌 하나를 집어보았다. 돌은 그녀의 주먹보다 좀 작았다. 그녀는 그 돌을 바라보자 옛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그 시절에는 많은 이들과 함께 이런 폐허를 찾아다녔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반대했지만 따라가겠다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 그 중 딱 한 명만은 예외 없이 그녀의 고집을 처참하게 박살내곤 했다. 
  리시타는 폐허를 쳐다보며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던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내 그는 꼼지락거리던 손을 뺐다. 그의 손에는 땅콩 네 개가 들려 있었다. 땅콩의 크기는 그의 새끼손가락과 똑같았다. 리시타는 땅콩을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눈앞의 여성이 식사는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땅콩을 줄 생각으로 말을 걸었다.
  “배 안고프십니까?”
  그가 말을 걸 때까지 돌을 보며 미소 짓고 있던 피오나는 그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잠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붉은빛이었다. 
  리시타의 눈동자는 어두운 붉은색이었다. 그의 눈동자를 사물에 비유하자면 방금 흘러나온 피와 같은 색깔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똑같은 붉은색의 눈동자이지만 피오나의 눈동자는 그의 눈동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밝은 색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배고프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리시타는 손에 들고 있던 땅콩 네 개를 내밀며 말했다.
  “작아 보이고 맛도 없을 것 같지만, 허기를 채우는 데에는 효과적입니다. 단, 지금처럼 배가 고플 때 드십시오. 또는 몸이 추울 때와 더울 때 드셔도 됩니다. 물론 아플 때 드셔도 됩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평소에는 안 드시는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리시타는 그렇게 말하며 피오나에게 새끼손가락만한 땅콩 네 개와 손바닥정도 크기의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땅콩을 그 주머니에 넣고 아껴 먹으라는 세심한 배려인 듯 했다. 피오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받아들었고 그가 말한 대로 배가 고픈 지금 땅콩을 하나 입에 넣어 보았다. 나머지는 작은 주머니에 넣고 외투의 안쪽에 집어넣었다. 땅콩은 입 안에서 녹았다. 비유 같은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녹아버린 것이다. 땅콩은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녹아버렸고 리시타의 말대로 맛은 없었다. 작은 허무함에 그녀는 웃어버렸다.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리시타가 말했다.
  “훈련장은 오른쪽입니다. 왼쪽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피오나는 웃는 모습 그대로 리시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는지 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당신이 편하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흠?”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리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고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하늘은 구름이 좀 많은 파란 하늘이 보이는 맑은 날이었다.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늘에 옮겼던 시선을 다시 땅 아래로 되돌렸을 때 왼쪽 길로 가고 있는 피오나를 보게 되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오른쪽입니다.”
  피오나는 얼굴이 갑자기 오른쪽을 향해 돌게 되자 미간을 좁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리시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촉감이 좋았던 것인지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그녀가 말을 할 때까지도 주물럭거렸다.
  “뭐하시는 거죠?”
  “당신의 마음을 제 쪽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고백인가요?”
  “그렇다고 해두죠.”
  리시타는 꿇고 있던 무릎을 폈다. 하지만 그녀의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은 한참 뒤에야 떨어졌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돌바닥 때문에 무릎이 꽤나 아팠다. 골다공증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무리 빠르게 다가온다고 한들 벌써부터 시작될 리가 없다. 적어도 며칠 뒤부터 시작이 될 게 분명했다. 
  리시타는 땅에서 발을 뗐다. 피오나를 지나쳐가기 위함이 분명했다. 땅을 떠난 다리가 다시 땅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오른쪽 팔목은 하늘에 붕 떴다.
  “뭐하십니까?”
  “당신의 몸을 제 것으로 만드려구요.”
  “남색입니까?”
  “아니라고 해두죠.”
  평소보다 훨씬 낮아진 목소리로 답한 피오나는 리시타가 씩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발견하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는 길을 잘 몰라서요.”
  리시타는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꼈던 피오나는 이어진 그의 말에 자신이 느꼈던 불안함이 실현된 것을, 그리고 황당함을 느꼈다.
  “왼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더니 왼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죠. 길치죠?”
  “……네?”
  어이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피오나를 보며 리시타는 그녀가 길치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두 눈썹을 쓱 올리고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부딪쳤다. 이어서 골몰히 집중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집게손가락을 펴 피오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방향치인가요?”
  “아니거든요!”
  의외로 거친 항변이었기에 리시타는 더욱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애처로움이 묻어나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길치나 방향치는 중부 대륙에서는 같은 말이랍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할만한 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결점은 있는 법이니까요. 예를 들어 셀피드……”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안 물어 봤거든요!”
  친절하게 셀피드의 담화를 하려던 리시타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본 피오나는 자신의 실수 한 번을 가지고 더 놀려먹으려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덤으로 얼굴이 빨개지고 있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내색하기는 싫었기에 양쪽 뺨 가득 공기를 불어넣었다. 마치 이것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거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해명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본 리시타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웃고 있던 리시타는 사례가 들린 것을 기점으로 해서 웃음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눈가를 비벼 맺혀 있던 눈물방울을 털어버린 뒤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피오나를 보며 말했다. 
  “재밌네요.”
  “재미없거든요.” 
  리시타는 뚱한 반응을 보이는 피오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을 본 피오나는 가슴이 쿵쾅이는 것 같다고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가슴 위에 손을 얹어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자의 미소라는 것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잡아끄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뿐이었다. 
  여심을 흔들 정도로 잘생기긴 했지만 단지 ‘그런 외모를 가진 남자가 웃고 있어서’라는 간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 남자만큼, 혹은 더 뛰어난 외모를 가진 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짓는 미소도 봐왔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심장을 뛰게 만들지는 못했다. 
  “훈련장은 폐허 안쪽에 있습니다. 슬슬 출발할까요?”
  멍하니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던 피오나는 화들짝 놀라며 질문했다.
  “아, 네?”
  못 들었다는 걸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기에 리시타는 씩 웃고 다시 말했다.
  “훈련장은 폐허 안쪽에 있습니다. 슬슬 갈까요?”
  피오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위아래로 여러 번 흔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 길치 아니거든요. 혼자서도 갈 수 있으니 그만 돌아가셔도 되는데요.”
  가시 돋친 목소리였다. 서늘하게 들릴 수도 있는 목소리였지만, 리시타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저 안쪽에 저도 볼일이 있거든요. 가는 김에 같이 가는 걸로 하죠. 어때요?”
  리시타는 혼자 걸어가고 있는 피오나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같이 가도 되는 것 같았다. 이런 말도 있잖은가. 무언은 긍정이라고.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피오나의 곁에 서서 말없이 걷고 있던 리시타는 갑자기 씩 웃더니 피오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길치는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으아아아악! 진짜!”
  리시타는 키득키득 웃으며 도망쳤다. 그리고 그 뒤를 피오나가 쫓았다. 
  
  
   







  *










  “왜 왔어요?”
  “너 구경하려고.”
  에아렌딜은 라임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당연하게도 라임은 그녀의 주먹을 피했다. 그는 히죽 웃었고 그 웃음이 에아렌딜을 더욱 화나게 했다. 
  ‘버렸으면 끝까지 버리던지. 왜 이제야 쫓아 와서는 실실 웃고 있는 거야?’
  그녀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사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 같다) 라임은 히죽히죽 웃으며 에아렌딜을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에아렌딜은 속옷만을 입고 있었다. 원래 입고 있던 펑퍼짐한 누더기 옷들은 이미 다 찢어져 사방팔방 흩뿌려져있었다. 라임은 자신하다시피 시간을 잘 맞춘다. 그는 그녀가 겁탈당하기 직전에 나타났다. 그리고 구멍이란 구멍에선 모두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는 사내들 사이로 그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와 에아렌딜에게 닿았다. 
  라임은 “이 추운 날 빤스만 입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네.”라고 말하며 입고 있던 회색 방한복를 벗었다. 벗어낸 방한복 아래에서는 짙은 흑색 머리카락에 뒤덮인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검정 와이셔츠와 같은 색깔의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벗은 방한복을 에아렌딜에게 주며 말했다.
  “어서 입게! 나는 곧 미칠지도 모른다네!”
  이상한 말투를 쓰기 시작한 라임을 보며 에아렌딜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하던 내가 뭔 상관이야. 옷은 주니까 입겠지만……. 방한복을 받아든 에아렌딜이 뭉그적거리자 라임은 다급하게 외쳤다. 
  “어이쿠! 시간이 없네!”
  에아렌딜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라임은 자신의 얼굴 근육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곤 에아렌딜에게 다시 한 번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받아든 방한복을 몸에 걸쳤다. 
  “이러면 됐죠? 시간이 없기는 개뿔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라임이 그녀의 뒷목에 손바닥을 가져다대며 뭐라고 중얼거리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라임은 온 몸이 불타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했다. 
  입을 벌렸다. 내부에 가득 차있던 숨을 내뱉었다. 시꺼먼 불꽃이 그의 목에서 뱀처럼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시꺼먼 불꽃은 그가 숨을 내뱉는 것을 중지했을 때 더 이상 기어 나오지 않았다. 
  관자놀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라임은 뾰루지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 뾰루지 같은 돌기는 점차 자라기 시작했다. 라임은 침을 바닥을 향해 뱉었다. 아직까진 침까지 검게 타오르진 않았다.
  “역시, 이 모습은 불완전해서 분노가 가득하구려.”
  관자놀이 부근에서 자라기 시작한 뾰루지는 앞으로 길게 뻗는가 싶더니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라임은 자신의 머리가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다고 꺾어버릴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지금까지 고생해왔던 것들이 모두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스스로 잘난 개발자, 과학자 등으로 부르는(물론 다른 이들은 개발자라는 말은 인정해도 과학자라는 말은 인정 안 한다.) 라임 큐르디레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힘겹게 채운 족쇄를 끊기는 싫었다. 
  ‘어떻게 채운 건데 쉽게 풀 생각을 할 수가 있겠소?’
  한 번 코웃음 쳐준 뒤 불완전한 몸을 추스르며 곤히 자고 있는 에아렌딜의 몸을 두 팔로 안아들었다.  










  *










  로체스트에 주둔중인 왕국 기사단이 신고를 받고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기사단원들은 아침에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내며 바닥에 구르기 시작했다.
  기드론 페칼의 밀매 루트를 찾아다니기 시작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무렵, 오늘에서야 기드론의 밀매 루트를 찾아내었다. 아침, 한 음유시인이 노래를 했었다. 회색 방한복을 뒤집어 쓴 사내였다. 
  그의 주위로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왕래를 했었고 그들 중 한 명은 왕국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방한복의 음유시인을 쫓았다. 금발의 음유시인과 티격태격 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그는 열아홉 명의 사내들과 싸우던(방한복의 사내가 일방적으로 압도했기에 싸웠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방한복의 사내를 보았고, 중년의 사내가 그녀를 인질로 잡는 것도 보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한복의 사내는 조용히 중년의 사내와 금발의 여성에게서 멀어졌다. 중년의 사내는 금발의 여성을 끌고 사라졌다. 기사단원은 조용히 그 중년의 사내의 뒤를 밟았다. 그는 지하로 향했고, 험난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지하수로를 여행한 끝에 그곳에서 기드론 페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지하수로에서 도망치다 그는 팔 하나를 날려먹었다. 팔 하나를 날려먹는 것으로 그는 지하수로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팔 하나가 날아갔음에도 그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야 여동생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마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퍽이나 멋지게 고기를 만들어 놨군.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걸…….”
  한 남자가 보고 있는 사체는 웬만한 사람을 구토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아쉽게도 그는 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장에 오랫동안 서 있던 남자였다. 그의 눈은 이런 사체의 모습을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아왔다. 물론 이런 잔인한 짓을 일삼는 부대는 마족보다는 인간 쪽이 더 많았다. 그리고 지금 이 사체를 만들어낸 자는 또 인간이었다.
  ‘살아있는 자를 상대로 얼굴 가죽을 뜯어냈군. 비명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나보구먼. 흠. 그 뒤론 천천…… 아니군, 재빠르게 목과 가슴의 가죽을 벗겨내고 근육을 빼내기 시작했나. 허, 거참. 이놈들은 의사라도 되고 싶었나? 그 뒤로 이목구비를 하나씩 잘라내고, 배를 열어 내장으로 손과 손을 연결한 뒤에 나무판자에 손과 다리를 검으로 찔러 고정시켰나. 앞에 거울도 가져다 놓은 것을 보니, 이 죽은 놈은 죽기 전에 한 번 자신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볼 수 있었겠어.’
  그는 허허 웃었다. 마족과 인간 중에 누가 더 비인도적인지 시합을 벌인다면 인간이 절대 질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캡틴! 바락스님!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바락스는 병사가 다급히 외치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거의 다 살아있었다. 아니, 기드론의 패거리가 고기로 만들어 버린 자들을 제외하곤 모두 살아있었다. 과다출혈로 이제 슬슬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납치당했던 여성들은 안전하게 구출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입을 모아 거대한 뿔이 나있는 인간을 보았다고 했다. 뿔은 엄청 길어 2미터는 족히 넘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녀들의 증언에 바락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는데…….”
  “예?”
  “음? 아, 아닐세.”
  “이쪽입니다.”
  바락스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깊숙이 들어갔다. 목발이 이번만큼 거추장스러운 적도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바락스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런…….”
  “바락스님?”
  바락스는 병사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건들며 말했다.
  “철수한다. 기드론 페칼의 신병은 인수한다. 물론 쓰러진 놈들 또한 모조리 끌고 간다.”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동료들을 향하여 외쳤다. 바락스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피식 웃었다.
  “소멸한 건 위장이었군. 칼시페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직경 4미터가 넘는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천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햇빛 때문에 검게 타오르고 있는 불꽃도 볼 수 있었다.
  









  *










  “그건 어떻게 한 거예요?”
  라임은 고개를 들어 에아렌딜을 쳐다봤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라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 라임은 입 속에 넣으려던 빵 조각을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세웠다. 그가 말했다.
  “뭐를?”
  회색의 방한복이 펄럭였다.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에아렌딜이 말했다.
  “피 흘리면서 쓰러지게 한 거요. 어떻게 한 거죠?”
  라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빵 조각을 입 속에 집어넣고선 우물거렸다. 한동안 라임은 말없이 빵을 입 안에 집어넣기만 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에아렌딜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오렌지 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가 벌컥벌컥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모습을 보자 라임의 마음은 심란했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귤과 오렌지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며 주식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다. 
  에아렌딜은 라임과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라임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무리 의뢰를 받아 몸 성히 데려가야만 한다는 조건이지만, 오렌지 주스를 마구 마셔대도 좋다는 조건은 내건 적이 없었다. 에아렌딜은 피식 웃더니 주스 통을 입에서 땠다. 그녀는 라임의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한 건지 알려주면 다 안 마실게요.”
  라임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귤과 오렌지는 각별했다.
  “하아. 살(殺)의 파괴형인 유혈이야.”
  “네?”
  에아렌딜은 이해하지 못했다. 라임은 이제 말 해줬으니 그거 달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안쓰러워서 에아렌딜은 더 이상 음료를 가지고 장난치는 짓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라임에게 주스를 넘겨주었고 그는 표정을 활짝 피며 히죽 웃었다. 그의 입 속으로 오렌지를 갈아 만든 주스가 거의 흡수되다시피 빨려 들어갔다. 에아렌딜은 라임을 보며 어지간히도 오렌지를 좋아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주스 통을 비운 라임은 침울해진 표정으로 통을 한 참 바라보았다. 그 즈음 에아렌딜은 그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쩝. 세상에는 흐름이라는 게 존재해. 그 흐름을 보통 기, 마나, 오라, 아우라 등등 여러 가지로 불러. 겉은 비슷한데 뚜껑을 열어보면 속이 많이 다른 녀석들이지. 이 중 ‘기(氣)’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니깐 말해줄게. 네가 정말 이 세상에서 너 자신의 몸을 지키고 싶다면 배워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힘 중 하나지. 기는 위압이나 기백, 중압 등 안 보이는데 무형 혹은 유형의 힘을 가지고 있는 놈들을 말하지. 기를 위쪽으로 단련, 강화하다보면 세 가지 길이 뚫려. 이 세 가지 길은 임의로 정해지는데, 자기 자신의 본질과 가장 잘 맞고 실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게 선택되지. 내 의지는 필요 없고 심층의 본질에 의해 선택 된다는 게 좀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뭐 어쩌겠어? 여하튼, 그 길은 패(覇)와 투(鬪), 살(殺)로 나뉘지. 패의 힘은 일정 범위 내에 있는 적 혹은 아군을 파괴 또는 치료 하는 힘을 가진 중압계의 패(敗)와, 강력하게 한 방을 날려 보내는 칼날형의 패(敗)로 나뉘지. 아, 칼날형은 자가 버프도 되더라. 그리고 또 투(鬪)의 힘은, 간단하게 말하면 자신의 능력을 진화시켜주는 육체형의 투(鬪)와 파훼법을 알지 못하면 절대 육체를 깨트릴 수 없는 강화계의 투(鬪)로 나뉘어. 살은…… 글쎄. 아직도 이건 잘 모르겠어. 파괴형과 폭주계로 나뉘는데 파괴형은 설명하기가 일단 애매해. 메일과 하삼의 경우에는 파괴형의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있는 좋은 예지. 나도 뭐 별로 다르진 않은 것 같은데…… 좀 애매하잖아? 9개 혹은 10개의 구멍에서 피를 질질 흘리게 만든 다는 건 이상하고 잡것 처리용이지. 차라리 메일처럼 간단하게 ‘먹는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면 또 모르겠어. 뭐 다른 것들도 그렇지만 이 힘들은 ‘이름’이 모든 것을 결정해. 예를 들어 볼까? 어, 뭐가 좋을라나. 좋아. 레큐런스의 ‘참격의 패기’를 예로 들어보자. 녀석의 패기는 칼날형이야. 현존하는 그 어떠한 방패로도 레큐런스의 참격의 패기를 막아낼 수 없지. 아, 유일하게 그게 가능한 녀석이 있긴 한데…… 걔는 넘어갈게. 걔까지 설명하려면 너무 길어져서 말이야. 응?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아, 그래. 녀석의 패기는 참격의 패기지. 모든 날카로운 공격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어. 이 녀석의 칼날형 패기에는 무력화도, 정신화도, 그 위에 단계의 힘들도 베여나가지. 짧게 말하면 무식하게 날이 잘 드는 칼을 휘두르게 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해두자. 레큐런스는 대충 이렇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오락가락 하네. 이 참격의 패기는 레큐런스만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인도자(引導者)또한 이 힘을 가지고 있지. 이름과 형(形)이 같다면 능력도 똑같아. 그런다고 이런 힘이 늘 겹치는 건 아니야. 레큐런스와 인도자의 경우에는 특이한 경우거든. 멜리아와 셀피드 같은 경우에는 본질이 똑같을 뿐이고. 그네들은 죽이 잘 맞고 말이야. ……어 미안. 폭주계 살기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상한 곳으로 새버렸네. 자, 폭주계 살기는 가장 간단해. 계속해서 쌓인 원한과 절망, 집념, 증오, 살의, 적의, 저주 같은 엄청 안 좋은 감정이 한 번에 터져버리는 걸 말해. 근데 이 폭주계 살기는 가장 강력한 힘을 내는 주제에 한 번 발동되면 시전자를 훅 가게 만들어. 소위 말하는 빡쳐서 이성끈 놓게 만드는 힘이랄까? 문제는 한 번 이성끈을 놓으면 그대로 죽음 직행이란 거지. 제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원할 때 튀어나오지도 않아. 짜증나는 힘이지. 그런데 말야, 이 폭주계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모든 것의 위에 서겠지. 근데 난 그걸 본 적이 없어. 원래 있던 곳에서도 그런 애들을 본 적이 없거든. 어? 아니네. 내가 4층의 주민인데 4층의 영주는 폭주계 살기를 사용하지? 어, 그러고 보니 그 작자도 폭주계네? ……여하튼 이쪽도 크게 다르지는 않더라고. 흠. 말이 길어졌는데, 요는 내가 패, 투, 살의 힘 중 하나인 살의 힘을 사용한다는 거지. 내 것의 이름은 ‘파괴형 유혈의 살기’ 내 목소리를 듣는 ‘적의’를 가진 자들을 모조리 피칠갑 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이지. 아군도, 적군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파괴의 힘이야. 어때? 이 정도면 이해가 됐어?”
  에아렌딜은 멍하니 라임을 바라보았다. 라임은 그녀의 표정을 보곤 단박에 깨달았다. 돈오(頓悟)한 것이다. 에아렌딜은 라임의 말을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평범하디 평범한 일반인에게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라임은 시선을 위로 옮겼다. 하늘은 맑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밧줄에 꽁꽁 묶여있는(사실은 살짝 둘러 매여 있는 정도) 금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특유의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로 라임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해도 못할 말을 주저리 늘어놔놓았으니 이만 밧줄 풀어주고 보내달라는 눈치였다.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도 태양은 그들의 머리 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라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너. 열여덟이라고 했었나? 아직 앞날이 훤한데 집에 돌아가는 게 좋잖아? 엘 페무르 귀족 가문의 자제라면 상당히 호화스럽게 놀고먹을 수 있잖아. 내가 집을 나온 선배로서 충고해 주는데, 집 나오면 고생만 죽어라 한다? 아까도 봤잖아. 혼자 있다 보면 그런 일 자주 있고 뭐 그런 거야. 원래 이 세상이란 놈이 혼자서는 위험한 거야. 특히 아가씨처럼 예쁘면 말 다했고.”
  “그럼 나랑 같이 있어주면 되잖아요. 그리고 난 스물세 살 이에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뚱했다. 귤라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이 아가씨는 자의식이 없구먼. 너 나이 열여덟” “스물셋이라고요.” “그래, 스물셋.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많은데 편하게 젊을 때를 보내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그런 때가 없어서 그래.”
  라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다. 물어보고 싶었으나 라임이 가는 것을 재촉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한 10여 분을 걷다가 라임이 멈춰 섰다. 그는 물을 떠 올 거니 그녀보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녀는 도망갈까 생각해 보았으나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또 다시 놀라기는 싫었다. 잠시 후 라임이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채로 돌아왔다. 이런 숲 속에서 물이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참으로 신기했다. 
  숲 속이라 햇빛이 많지 않았다. 계절도 계절이라 날도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딱 꼬집어 춥다고 말할 수 있는 날씨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라임이 곁에 있을 때에는 난로를 켜 놓은 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기에 쌀쌀한 것도 잠시 뿐이었다. 
  라임이 물통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가 내민 물통은 나뭇잎으로 싸여있었다. 에아렌딜은 그 나뭇잎에 싸인 그 물통을 받아들고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쳐들었다. 물통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물통을 감싸고 있는 나뭇잎 또한 그러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물통을 입가에 가져갔다. 
  “마셔요. 계속 걷기만 했잖아요.”
  물을 마신 뒤 그녀가 물통을 건네며 말했다. 라임은 손을 들어 휘휘 내저으며 답했다.
  “난 됐어. 너 마셔. 거기다 물은 내 몸을 식히진 못하거든. 그러니까 필요 없어.”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라임은 싱긋 웃어보였다.
  “애들은 몰라도 돼.”
  그의 미소는 매우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라임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라임은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아, 아! 아파!”
  라임은 다시 싱긋 웃은 뒤 말했다.
  “꼬마야, 뽀뽀는 아직 천 년은 이르단다. 그리고 한순간의 충동에 몸을 맡겨서는 안 돼. 그런 건 못된 애들이나 하는 거야.”
  라임의 나이는 겉보기엔 에아렌딜과 두세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아 보였다. 라임의 나이는 그의 얼굴로 보았을 때 스물셋에서 스물다섯 살이었고, 에아렌딜의 나이는 스물세 살이었다. 
  “얼마 나이차도 안 나잖아요? 암만 봐도 나랑 나이 비슷해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라임은 꼬집었던 그녀의 볼을 놔주었다. 그녀는 빨갛게 물든 볼을 문지르며 뚱한 얼굴로 라임을 바라보았다. 라임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폈다가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을 이용해 숫자를 세고 있는 라임 큐르디레란 남자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히 어린아이를 연상하게 만드는 것에 부족함이 없었다. 에아렌딜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라임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에아렌딜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가 왜 천 년을 언급했는지 그녀는 알게 되었다. 얼굴이 젊어 보인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궁금해졌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라임이 언급한 천 년이라는 시간이었다. 
  인간이 80년을 살면 장수한다고 말한다. 100년을 대단하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더 살면 신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몇 천 년 이상을 살면 어떻게 될까?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괴물이다.










  *










  “돌아가시죠. 아무것도 내드리지 않겠습니다.”
  마렉은 눈동자 속에 언제라도 미어터져 나올 불길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가 언제 돌발 상황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상태였기에 셀피드 이셀하임과 이딜 셀은 그의 뒤에서 반쯤 죽어있는 눈과 나머지 절반이 졸림 때문에 다시 죽어있는 시선으로 마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이 자식은 사람은 좋은데 똘끼가 있단 말이야.’
  피오나는 멍하니 마렉과 왕국 기사단, 셀피드와 이딜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같이 용병단 사무실에 들어온 리시타 또한 다른 이들과 많이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공허 하면서도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리시타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그는 피오나를 보며 말을 꺼내려 했다. 그때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케아라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아, 왔구나!”
  피오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리시타는 그가 피오나를 향해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 까먹게 되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막 떠오른 말을 하기로 했다.
  “귤 없죠?”
  “얼레? 무슨 귤?”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시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놈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있을 거란 생각도 안 했다. 역마살이 낀 놈이니 돌아다니지 않고는 못 배길 테지.
  그는 오른손을 천천히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을 피오나의 순백에 가까운 은발의 머리 위에 살며시 얹으며 말했다. 리시타와 피오나의 신장 차이는 웬만한 사람의 머리 길이와 비슷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서 있는 모습은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용병단 사무실 내에서도 조화를 이루었다.
  “용병 생활은 힘이 들 겁니다. 그렇지만 귀찮은 모든 걸 잠시 가슴 속에 묻어두고 현재 생활을 즐기기에는 용병 생활만한 것도 없습니다. 힘내십시오. 피오나. 그리고 저 친구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많은 날 저러거든요. 내가 처음 들어 왔을 때도 저러고 있었고요. ……그러고 보니 마을에 메일이 온 것 같더군요. 한 번 만나보시면 괜찮으실 겁니다.”
  피오나는 밝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알겠어요.”
  이어서 리시타의 심술궂음이 발동했다.
  “길치……”
  “진짜!”
  발끈하는 피오나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은 뒤 리시타는 도망갔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오나는 얼굴을 붉혔다. 
  케아라는 피오나를 보며 씩 웃었다. 피오나는 마침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멋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케아라는 그런 피오나의 모습을 보고 입 안에서만 맴돌고 있던 내용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케아라가 말하려 했을 때 마렉과 왕국 기사단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케아라는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피오나와 함께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야 되려나? 여전히 싸우고 있네. 아하하…….”
  케아라의 표정은 이제 그만 해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겹지도 않은지 마렉은 셀피드와 이딜에게 신나게 얻어터진 뒤에도 왕국 기사단과 대립하고 있었다. 저 금발의 여기사 또한 잠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팔팔한 모습으로 마렉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금발의 여성이 노기 가득한 표정으로 마렉을 쏘아보았다. 마렉은 그렇게 쏘아보면 뭐 어쩔 거냐 라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너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군. 칼브람 용병단장을 모셔와라.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다.”
  마렉은 어이없다는 얼굴은 한 채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여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님과는 이야기를 나누실 수 없습니다.”
  그녀가 마렉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건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용병단장은 어디에 있는가?”
  등 뒤의 셀피드와 이딜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마렉은 조용히, 그러나 강한 어투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말 그대로, 나누실 수 없다는 겁니다. 지금 대장님은 상처가 깊어 거동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마렉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헬름 때문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피오나는 그의 눈을,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정이 어떠한 지 잘 알 수 있었다. 마렉이 입을 열었다.
  “전투도 우리 힘으로 해냈습니다. 그러니 조사도 우리 힘으로 해낼 겁니다.”
  “…….”
  드윈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군. 단장이 회복되면 그 때 다시 오겠다. 자, 가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병단 내부의 은색 플레이트를 걸친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제일 먼저 쓰러져서 거품을 물고 있는 기사들을 둘러메었고 그들의 물품을 대충 챙겨 넣은 뒤 밖을 향해 걸어갔다. 마렉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기사 네 명이 달라붙어도 그를 거꾸러뜨릴 수 없었다. 이딜 셀이란 남자가 마렉을 거꾸러뜨리지 않았다면 아마 용병단 사무실 내부의 기사들은 지금쯤 모두 바닥에서 거품을 물고 있었을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드윈은 문득 눈에 익숙한 생도가 들어오자 그에게 냉큼 호통을 치며 말했다.
  “앨리스 생도! 거기서 뭘 하나? 어서 철수하도록!”
  “앗, 넵! 죄송합니다.”
  앨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드윈을 따라 용병단 사무실을 나갔다. 그는 나가던 도중 마주친 피오나를 보고 고개를 꾸벅였다. 피오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의 미소에 앨리스는 환하게 웃었다. 
  왕국 기사단이 철수하자 용병단 내부는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소란의 계기는 마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소란의 끈을 잡은 것은 여러 명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소란이 크게 번지는 데 일조했다.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렉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진짜 저 개새끼들을 그냥!”
  그는 검을 챙겨들고 용병단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셀피드의 주먹이 마렉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에라 똥 멍청이 자식아. 칼 들고 어딜 갈라는 거야?”
  마렉은 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향해 얼굴부터 곤두박질쳤다. 
  “억!”
  이딜은 하품을 하며 쓰러진 마렉을 바라보았다. 마렉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셀피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기랄! 왜 때려!”
  “네가 하려는 바보 같은 짓을 말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중 하나였으며, 난 그 중 가장 박력이 넘치고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다. 불만 있나?”
  마렉은 셀피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마렉은 긁히지 않는 뒷머리를 긁기 위해 이상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뒷머리는 긁히지 않았다. 마렉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긁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다 문득 케아라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녀가 손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 오. 나. 가. 기. 다. 리. 고. 있. 어.’
  무슨 말인지 마렉은 한참을 고민했다.
  “응?”
  “아이잇!”
  케아라는 마렉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으며 말했다.
  “마렉! 피오나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구!”
  고통에 주춤한 것도 잠시, 마렉은 케아라의 뒤에 서 있던 여자를 발견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자신의 심장을 진정시킨 마렉이 말했다.  
  “아! 아, 아하하. 와, 왔구나!”
  마렉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셀피드는 “뭐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이 다 있지?”라고 말한 뒤 다시 술통에 머리를 처박았고 이딜은 “냅둬. 냅둬.” 부서진 탁자를 침대삼아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모래가 좋다는 둥의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셀피드는 머리를 술통에 처박은 뒤 메일의 술창고를 털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마렉이 말을 이었다.
  “드,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군요.” 케아라는 버벅거리고 있는 마렉을 보며 코웃음 쳤다. “분? 허.” 확실히 예쁜 건 인정하지만. “아, 아니. 아름답군요! 아……, 아름, 아름다우……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 아니. 만나서 반가워? ……제기랄!”
  셀피드와 이딜은 그런 마렉을 향해 비열하고 비릿한 미소와 함께(셀피드는 술통에 얼굴을 처박고 있어서 그 비열한 미소를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딜은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마렉을 가리키며 비릿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거칠게 웃어젖힘으로써 마렉의 인내심이라는 이름의 둑이 무너지기를 기대했다. 
  자신을 비웃는 두 형들을 무시하며(하지만 앓는 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피오나에게 신경 쓰기 위해 집중했다. 그의 노력을 차분히 쳐다보던 피오나는 그를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기사들에 대해 물어본 것이다. 그녀의 물음에 마렉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저 왕국 기사단 놈들은 신경 쓰지 마. 아니지, 애초에 상대도 해주지 마! 아주 질이 안 좋은” “너보단 좋지 않냐? 킥킥.” “저 똥 멍청이는 아직도 저딴 소리 하고 있냐. 그만 포기해라. 넌 그 신참도 못 이길걸? 히히히.” “이봐 거기 술통에 머리 처박고 있는 놈이랑 탁자를 이불로 쓰는 놈들 조용히 해. 아니지, 부탁이니깐 제발 여기서 꺼져주” “싫어.” “네가 가. 히힛.” “아오! 저 인간 또 취했어!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게 사람이야? 평소엔 수백 통을 비워도 멀쩡하던 인간이 왜 저래?” “우리 마레기 화나ㅤ쪄요? 우쮸쮸뿌우!” “그만 둬!” “우쭈쮸뿌우!” “아 진짜!” 
  마렉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소리가 향하는 두 사내는 반쯤 미친 듯한 모습으로 그의 말을 우습게 받아쳤다.
  “히히히, 게이! 게이!”
  “그만 해! 미쳤어? 젠장!”
  마렉은 허리춤에서 칼집을 집어 들고 내동댕이쳤다. 마음 같아서는 저 두 인간들을 잘게 썰어서 14중대의 식사로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런 짓을 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잘게 썰려 식사로 내걸릴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모래 귀신이며 한 명은 학살하는 빛의 참격이다.
  마렉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피오나를 바라보며(똑바로 보진 못했다.) 말했다. 
  “……아, 제 소개가 아직이었……? 끄응. 어, 전 마렉이라고 합…… 마레…… 마렉입니다.”
  자신의 반응에 당황해하던 마렉은 헬름 아래에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뒤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셀피드와 이딜을 제외한 사무실 내부의 나머지 사람들(피오나와 케아라를 포함한 6명)이 저러다가 뼈까지 꼬이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걱정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마렉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12중대의 중대장입니다.” 이로써 마렉의 몸 비틀기는 존댓말과 반말 중 어떤 것을 사용할지 몰라 고민하던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저기 술통에 머리통 처박고 있는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는 1중대의 중대장 셀피드 이셀하임이라고 합니다. 부서진 탁자를 이불이랍시고 뒤집어쓰고 있는 뇌 용량이 부족한 멍청이는 2중대 중대장 이딜 셀이고요. 그리고 어, 하삼 형 어디 갔어?”
  “몰라.”
  “원래 무형(無形)이 좀 사기야.”
  “……뭐,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 구석에 앉아 있던 두건 쓴 남자는 7중대 중대장 하삼 케인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까 기사 놈들이 나갈 때 따라 나간 남자가 10중대 중대장 멜피스 아달함. 그리고 지금 이 시간대면 선착장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을 노란색 로브 또는 방한복의 사내가 14중대 중대장 트리비아 메일님입니다. 그건 그렇고 대장님이 현재 부재중이시기 때문에 제가 용병단장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원래는 저 인간쓰레기가 해야 하는데 하기 싫다고 나한테 주더라고. 동생 부려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지.”
  마렉은 가운데 손가락을 펴 셀피드를 가리켰고 셀피드는 감자나 먹으라는 듯 손짓했다. 케아라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마렉이 피오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종탑에서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고들 하더군요. 용병단 전체가 내게 큰 빚을 진 셈입니다. 그리고 티이를……, 무녀님을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만약 무녀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었다면……, 생각하기도 싫군. ……자, 종탑의 일은 종탑의 일이고.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해야겠죠? 피오나. ……님?” 
  피오나는 싱긋 웃으며 불편해할 것 없이 편한 대로 부르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마렉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게 첫 정식 임무를 주도록 할게. 그때, 종탑에서 대장님이 이상한 물건을 발견하셨어. 기억하려나?”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개 머리뼈 비슷한 것을 꺼내 피오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뒤 머리뼈 중앙에 붉게 빛나는 문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붉게 빛나는 것이 마족의 문양이야. 그리고 이걸 발견한 직후 우리는 놀 종족에게 공격을 받았고. 재미있는 건 놀 종족은 마족이 아니라는 거야. 자, 이제 뭔가 이상한 냄새가 풀풀 나지? 이게 진짜 마족의 징표인지는 몰라. 하지만, 기사 놈들이 난리 치는 것을 보면 뭔가 있긴 있겠지. 대장님께 여쭤보면 좋겠지만…… 아, 저 놈들은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쓰레기들이거든.”
  “어이, 쓰레기는 좀 너무하다. 안 그래?” 
  “네. 안 그럽니다. 그러니 쓰레기는 입 좀 닥쳐주세요.”
  “흐흐흑…… 이 아빠는 널 그렇게 키우” “누가 우리 아빠야? 죽을래?”
  이딜은 킥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셀피드도 이딜을 따라 소리 없이 웃었다. 마렉은 그들을 노려보며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피오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인명 피해가 없으려면 이런 일은 우리가 해치워야겠지만, 내가 저 두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말이야. 널 믿는다. 놀은 북쪽 폐허에 몇 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살고 있어. 그곳에 가서 이상한 것이 없는지 확인을 해줬으면 한다. 물론 교전은 하지 마. 한다고 해도 도망치는데 주력해. 누가 뭐래도 지상 최강의 전투종족이니까.”










  *










  “놀 종족의 조사라…….”
  피오나는 북쪽 폐허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리시타와 함께 한 번 와 보았던 길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다시 북쪽 폐허를 도착할 수 있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잊어버린다면, 솔직히 그건 붕어 수준의 기억력 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허나 총체적으로 붕어보다는 낫다는 결론은 단정 지을 수 있다. 듣는 이는 이를 갈겠지만.
  그녀는 폐허를 따라 나오는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물론 정해진 길이 있지는 않았다. 도로로 보이는 곳은 완전히 박살나 끊긴 곳이 대부분이었고, 건물이 무너져 길을 막고 있는 곳도 있었기에 능력껏 길을 찾아내야했다. 간혹 폐허를 조사하다가 조금 커다란 지렁이(돌바닥을 뚫고 튀어 나온 것도 있었지만, 그녀가 시선을 돌리는 데 한 몫 한 건 폐허 위에서 2미터가 넘는 지렁이처럼 생긴 것이 꿈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던 놈이었다) 같은 것들을 보긴 했지만 워낙 그런 종류는 싫어하는지라 무시하고 길을 걸었다. 그런 종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길이가 2미터에 달하는 지렁이가 바위를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기겁하게 될 만 했다. 지렁이인지도 의심스러웠지만. 
  폐허를 상당히 걸어왔지만 종탑에서 보았던 개와 늑대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이족보행을 하는 종의 모습을 가진 강아지들은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걷던 피오나는 잠시 멈춰 다리를 주무르기로 했다. 벌써 두 시간이 넘게 걸었다. 그리 오래 걷지는 않았지만 거의 이틀을 꼬박 누워 있었더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기지개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 본 그녀는 청명한 하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폐허를 한 번 훑어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태양이 멋지게 떠 있었다. 태양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 뒤를 가리켰다. 
  배 속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신호가 왔다. 아침에 리시타가 준 땅콩을 제외하고는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허기가 빨리 왔다. 그녀는 매고 있던 배낭을 풀어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도시락을 꺼내 든 그녀는 문득 의구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틀은 굶었는데 그렇게까지 허기가 진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의구심도 잠시 뿐, 그녀는 배낭 속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도시락의 내용물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그녀는 물로 목을 축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지 말기로 했다. 마렉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놀 종족은 호전적이기 때문에 섣불리 그들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몸 성히 돌아오긴 힘들다고 덧붙이면서 신장이 2미터 이상이 되는 놀들과는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말라는 당부까지 했다. 그들은 대체로 지휘관 급 놀이며 그들이 가진 힘은 잣대로 잴 수준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지 못하는 그녀지만 마렉의 말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로페르담 정도 되는 것일까?’
  가볍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이름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피오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해보니 로페르담과 레이길레스, 하질은 살아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잊었다. 
  “자, 돌아가자.”
  그녀는 배낭을 들어 올린 뒤 등에 매었다.  
  “…….”
  폐허를 30분 정도 더 돌아다녔을 때 피오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칼로 흠집을 내 표시한 바위가 똑같은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피오나는 뚫어져라 바위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표시한 흠집이 맞았다. 그런데 왜 이 흠집이 나있는 바위가 두 개나 있는 것일까. 분명히 그녀는 단 하나의 바위에만 이런 흠집을 낸 것이 확실했는데 말이다. 
  ‘에이, 설마.’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다는 속담이 있다. 그녀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실이다. 피오나는 길을 잃었다.
  문득, 피오나는 발자국을 따라 돌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자신의 멍청한 생각에 비난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녀가 지나온 길은 모두 돌바닥이었고 고맙게도 돌바닥은 발자국이 남지 않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허탈하게 웃고 있던 그녀는 어릴 때도 이처럼 길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바위 위에 엉덩이를 살짝 올려놓은 채 상체를 앞으로 숙여 무릎 바로 윗부분으로 팔꿈치를 받치고, 그 위에 턱을 올려놓은 자세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반쯤 눈을 감은 모습이 어떤 누가 보더라도 요염하다고 생각할 만 했다. 순백색에 가까운 은발이 폐허에 부는 바람을 맞아 나부꼈다. 
  집에서 길을 잃는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녀는 집에서 길을 잃었었다.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부모님을 찾으며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가슴팍과 복근이 훤히 드러나는 붉은 도복을 입은 사람이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더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얼굴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가 그와 만났을 때는 아직 10살도 넘기지 못한 어린 나이였다. 그의 얼굴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특유의 새빨간 머리카락은 기억이 났다.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태양의 홍염보다도 더욱 빨간 머리카락. 지금 생각해봐도 그 머리카락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없었다. 아, 오늘 하나 더 생겼다. 어떤 사내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피오나는 미소 지었다. 그 때 그 사람은 다 큰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봤던 그 남자의 얼굴도 계속 기억에 남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은인이라면 로페르담이나 레이도 은인이려나?’
  하질은 늘 도도했다. 그래서 로페르담이 그를 많이 혼냈다. 
  한참을 추억 속에 잠겨 있다가 이내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길을 잃었으니 일단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세를 고치지 않고 고민하기 시작한지 10여 분이 지났을 때 그녀는 결정했다. 그 결정 내용은 참으로 단순한 것이었다. 무작정 걷다보면 출구가 나올 것이다. 라는 엄청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보통 이런 결정을 내리진 않는다. 깊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고 토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길을 잃었을 때만은 ‘그’의 한 마디라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이 비유적일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복잡한 미궁에 빠졌을 때는 간단하게 생각해라.’
  그가 떠나기 전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그가 남기고 간 이 말 때문에 꽤나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언제나 현명할 수는 없다. 신이란 존재도 그렇게는 하지 못해. 그러니, 가끔은 바보가 되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영웅과 천치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들 하잖아.’ 
  그 사내는 그녀에게 이런 말도 해주었다. 그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넓던 그의 등이 생각났다. 정말 넓었던 그 등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포근한 침대 같은 등이었다. 그녀는 눈을 살포시 감고서 하늘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페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눈 또한 감겨있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제가 당신과 만나기 전의 일이 아닙니까? 아르겐 님에게 물어보심이 어떠신가요?”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 그러나 작게 울렸다. 피오나가 말했다.
  “아……. 그때는 아르겐과 제가 만나기 전이었어요. ‘천공의 순찰자’인 당신이라면 봤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물어본 거예요.”
  목소리가 답했다.
  “하늘 아래 제가 보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만, 하늘 아래 보이지 않는 장소도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그 때 그 곳은 강력한 침식으로 인해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눈을 돌렸을 때에는 당신 홀로 울고 계셨습니다.”
  “……그런 거 까지 봤어요?”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돌아가실 건가요?”
  “아뇨. 잠시 구경하다 가야겠어요. 이 폐허가 마음에 드는걸요. 미안해요 펠더렌. 일이 많을 텐데 불러서요.”
  “아닙니다.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페디. 아니, 펠더렌.”
  피오나는 천천히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오, 정말이냐?”
  누군가가 말했다. 
  “예.”
  그리고 누군가가 답했다. 누군가의 대답에 누군가는 자신의 거대한 몸체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콧김을 내뿜었다. 코에서 새어나온 것은 바람이 아니라 불[火]이었다. 
  “흐흠. 성역의 필두가 말이지? 폐허의 필두도 움직인다고?”
  “예.”
  콧김으로 불을 내뿜은 자의 곁에서 반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누군가가 답했고, 바람 대신 불을 내뿜은 누군가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한 채 새벽녘에 떠오르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간이면 성역 쪽은 해가 졌겠군. 그가 미소 지었다. 
  “낄낄. 재미있겠는데 한 번 끼어볼까?”
  미소 지으며 말하는 누군가를 향해 반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누군가가 허리를 굽히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만 내려주시지요.”
  미소 짓고 있던 누군가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한마디를 던졌다. 
  “가자. 애들한테 모이라고 해. 성역 애들은 단체전은 안 좋아라 할 테니…… 폐허 쪽에 많이들 모일 거 같은데. 어디로 갈까?”
  “아무 곳이라도 좋습니다. 현재 이끌고 있는 세대는 그들이고 필두께서는 유희를 목적으로 가시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그래. 잠깐의 유흥이기 때문에 너희 전부를 다 데리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거기다 우린 평원 쪽이고 말야. 어떻게 할까?”
  “저희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모든 결정은, 필두. 당신께.”
  “만날 그러네. 좋아. 한 5만 명만 뽑자. 잠깐 동안의 여흥이니 많이 데리고 갈 필요는 없겠어. 저 어린 애들이 얼마나 멋진 일을 벌일지 궁금하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필두.”
  “자, 향기를 맡으로 가 볼까?”
  “‘강등당한 불’도 향기는 맡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칵! 강등당한은 빼라. 누군 좋아서 어스랑 붙어서 이 모양 이 꼴 난 줄 아냐 짜샤? 그리고 나도 걔 팔 짤라먹었거든? 흥흥흥흥. 전투력 반감은 둘 다 마찬가지란 말이지. ……거기다가 그토록 투쟁 본능이 원하는 전쟁의 향기건만, 이 내가 맡지 못할 리가 있겠냐.”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소집하겠습니다.”
  “아, 천천히 해도 돼. 우린 소풍 가는 거잖아.”
  “알겠습니다.”
  “아, 노파심에 말하는데, 테미한테 말하면 다 죽는다고 전해.”
  “사모님의 귀에 들어가면, 우리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너희나 나나 두들겨 맞겠지. 끙…….”
  “하지만 필두께서 사모님께 코 꿰이신 덕분에 아직 살아 계신 겁니다.”
  “부끄러운 얘기는 하지 마라줘요잉.”
  “앙탈은 사모님께.”
  “……거 참.”